키예프 전투 (1941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키예프 전투 (1941년)는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거둔 대규모 포위 섬멸전이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소련군을 압박했고, 스탈린의 키예프 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8월 말부터 9월에 걸쳐 소련군을 포위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손실을 입었으며, 독일군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지만, 모스크바 공략 작전의 지연을 초래했다. 키예프 전투는 스탈린의 잦은 개입과 지휘부의 판단 착오로 인해 논란이 있으며, 이후 독일군의 대도시 점령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1년 우크라이나 - 오데사 포위전 (1941년)
오데사 포위전은 1941년 8월부터 10월까지 루마니아군과 소련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루마니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오데사를 포위했으나 흑해 함대의 지원으로 완전한 포위에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후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 1941년 우크라이나 - 브로디 전투 (1941년)
브로디 전투(1941년)는 독소 전쟁 초기에 독일 남부 집단군과 소련 남서부 전선군이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벌인 대규모 기갑전으로, 소련군의 반격 시도가 실패하며 소련 기갑 전력 운용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 키이우의 역사 -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
1237년부터 1240년까지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이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여 주요 공국들을 파괴하고 멸망시켜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두었으며, 이는 루스 사회, 경제,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키이우의 역사 - 유로마이단
유로마이단은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 운동으로, 친EU 정책 철회, 러시아 압력, 사회 문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발생하여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과 친유럽 통합을 요구하며 격화되었고, 우크라이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포위전 - 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소련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기 위해 감행한 공세 작전으로, 격렬한 시가전 끝에 베를린 함락과 독일의 항복을 이끌어내며 유럽 전선 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포위전 - 팔레즈 포위전
팔레즈 포위전은 1944년 8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 연합군이 프랑스 팔레즈에서 독일 B 집단군을 포위 섬멸한 전투로, 코브라 작전과 뤼티히 작전의 결과로 발생하여 독일군의 패배와 파리 해방에 기여했다.
키예프 전투 (1941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키예프 전투 (1941년) |
관련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 |
날짜 | 1941년 7월 7일 – 1941년 9월 26일 |
장소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 동부 및 남부 |
결과 | 독일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발터 폰 라이헤나우 하인츠 구데리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
지휘관 2 | 세묜 부됸니 세묜 티모셴코 미하일 키르포노스 미하일 부르미스텐코 |
병력 규모 | |
병력 1 | 500,000명 |
병력 2 | 627,000명 ~ 800,000명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128,670명 이상 26,856명 사망 96,796명 부상 5,008명 실종 |
사상자 2 | 700,544명 이상 616,304명 사망 또는 포로 84,240명 부상 |
추가 정보 | |
독일군 사상자 세부 정보 | 26,856명 사망 96,796명 부상 5,018명 실종 |
소련군 사상자 세부 정보 | 616,304명 사망 또는 실종, 480,000명 포로 포함 84,240명 부상 및 질병 411대 전차 및 자주포 파괴 343대 항공기 파괴 28,419문 포와 박격포 손실 |
관련 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이미지 | |
![]() | |
![]() |
2. 배경
독일 중앙 집단군은 동부 전선 중앙 지역에서 1941년 6월-7월 동안 민스크 포위를 하였고, 남부 집단군은 브로디-두브노 포위를 하는 등 초반에 거대한 포위전을 진행했다. 남서부 전선군 대부분 병력은 우크라이나-루마니아 돌출부에 자리잡고 있었다.[26][27] 낮은 이동성으로 인해 우만 전투에서 높은 기갑 병력 손실이 있었지만,[27] 독일군의 전진에 큰 위협이 되었고, 동부 전선에서 단일 병력 중 가장 높은 밀도의 병력이 우크라이나에 모여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1] 소련군은 강력한 방어와 즉각적인 반격으로 맞섰으나, 연료와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 제1 기갑군은 리브네를 거쳐 키예프로 진격하려 했고, 소련군은 2,000대가 넘는 전차를 동원한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1941년 8월 3일,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남쪽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격을 위해 모스크바 진격을 중지했다.[28] 그러나, 8월 12일 34 총통 지시령에서 프란츠 할더, 페도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 등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하자는 주장과 모스크바 진격을 시작하기 전 중부 집단군을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의견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8월 18일,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히틀러에게 동부 전선 작전에 대한 전략적 보고서(Denkschrift)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도움 없이 목표 달성이 가능하기에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결정적인 작전을 시작하기까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30][31]
8월 20일, 히틀러는 독일을 위해 산업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자신의 우선순위를 굽히지 않았다.[31] 8월 21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은 히틀러의 지시 사항을 요약한 보고서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크림반도 및 돈강의 석탄 산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강조했다.
8월 23일, 프란츠 할더는 벨라루스의 보리소프에서 폰 보크와 구데리안 장군을 소집한 이후 동프러시아의 히틀러 본부로 다시 이동했다. 할더와 브라우히치가 없는 상태에서 히틀러와 구데리안 장군이 만났을 때,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항의를 들었지만, 이미 소련 서부의 북부와 남부를 확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 중요성은 모스크바의 문제를 대부분 없애며, 새로운 제안은 아니지만, 사실 난 분명하고 명백한 작전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히틀러는 이 돌출부의 소련군을 포위할 수 있는 기회는 "예기치 않은 기회이며, 과거의 실패로 인해 잡지 못한 소련군들을 다시 포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34] 그는 모스크바로의 공격은 시간적 손실이 있고 너무 늦게 수행될 경우나 기갑부대가 더 이상 기술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히틀러는 중앙집단군의 한 방면, 특히 남부 돌출부가 없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중에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재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공격은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명령했다.[35] 구데리안의 항의에도 히틀러가 꿈쩍도 하지 않자, 구데리안은 제2기갑집단에게 돌출부 포위를 마치기 위해 남부 진격을 시작했다.[34]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에 따르면, 폰 룬드슈테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 전략 지역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이 부대는 소련 국경 방어선을 돌파하고 소련 영토 내 650km까지 진입하여 우크라이나 서부 드네프르 강 서쪽에 있는 소련군의 주력 부대를 포위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소련 최고 사령부는 독일군의 침공 주력이 프리피야트 늪지대 북쪽에 집중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소련의 역점을 남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르포노스 장군이 지휘하는 우크라이나의 소련 남서부 전선은 소련 서부 국경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전선이었으며, 총 4개 야전군과 전선에 3개 기계화 군단, 예비에 1개 기계화 군단, 전략적 예비 위치에 2개 기계화 군단의 지원을 받았다.
7월 초, 스몰렌스크 전투가 끝난 후, 독일군 중부 집단군은 9월 초에 세 방향으로 모스크바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소련 제5군은 7월 중순까지 프리피야트 습지대의 이전 위치를 유지했고, 이로 인해 독일군 중부 및 남부 집단군의 남쪽과 북쪽 측면에 250km가 넘는 추가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스몰렌스크 주변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은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7월 중순부터 작전을 변경했다.
7월 23일, 스타브카(Stavka)는 심각하게 약화된 제13군과 제21군으로 구성된 중앙 전선을 구성하고, 쿠즈네초프 장군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전선은 독일 중앙 집단군 남쪽 방면의 고멜과 소주 강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군 참모총장 주코프 장군은 전선으로부터 보고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중앙 집단군의 동쪽으로의 진격이 멈추었고, 소련군에 가장 큰 전략적 위협은 중앙 전선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독일 기계화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면 소련 남서부 전선이 포위될 위험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코프는 7월 29일 스탈린에게 고멜 지역이 적군의 주요 전략적 약점이라고 말했다.[4]
8월 6일, 중앙집단군이 히틀러의 제34호 지령을 실행하기 시작하면서, 독일 제2군과 제2기갑군 제24기계화군단은 수즈 강을 건너 남쪽 고멜 방향으로 공격했다. 구데리안의 부대는 항공 지원을 받아 소련 중앙전선 제21군을 남쪽으로 밀어냈고, 키예프 주변의 소련 남부전선과 스몰렌스크 동쪽의 서부 및 예비전선 부대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8월 14일, 스타브카는 서부 및 예비전선과 약한 소련 중앙전선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안드레이 예료멘코 중장의 지휘하에 제3군, 제13군, 새로 편성된 제50군으로 구성된 브랸스크 전선을 편성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8월 21일, 히틀러는 독일 제2군과 제2 기갑군에게 우크라이나 심장부로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8월 23일, 남쪽과 모스크바를 향한 동시 공세를 계획하던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제2 기갑군을 분할하여 제48기계화군단을 스몰렌스크 지역에 기동 예비대로 남겨두도록 명령했다.
데스나 강은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구데리안 부대 앞에 있는 주요 자연 장애물이었다. 8월 25일, 제3 기갑사단은 강변의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에 도착했다. 제2 기갑군은 처음에 데스나 강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8월 26일 아침 제3 기갑사단에 의해 800미터짜리 다리가 온전히 점령되었다. 구데리안은 이 소식을 "놀랍고 가장 기쁜" 소식이라고 불렀다.
8월 30일, 독일 육군참모본부 작전부는 제2군이 데스나 강을 건넌 후 제2 기갑집단의 지휘하에 배속시켜 "남부군집단과의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중앙군집단에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독일 최고 사령부에서는 모스크바 동쪽으로의 진격을 계속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제2 기갑집단과 제2군은 소련 남서부 전선의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나긴-코노톱 철도에서 진격을 멈추고, 나머지 중앙군집단과 함께 동쪽으로 돌진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이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제1 기갑집단과 연결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의 신속한 공격은 전선 북부와 중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남부에는 여전히 소비에트 남방 전선군의 거대한 돌출부가 존재했다. 우마니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비에트 군을 격파했지만, 세묜 부됸니 사령관 휘하 부대는 키예프 안팎에 집중 배치되어 아직도 건재했다. 소비에트 남서부 전선군은 기갑 병력과 기동성이 부족했지만, 당시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큰 장벽이었다.
8월 말,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모스크바로 진격할 것인지, 아니면 남서부의 소비에트 군을 격파할 것인지 검토했는데, 이는 독일 남방군 집단이 소련군을 포위할 전력이 부족하고 중앙군 집단으로부터 부대 이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논의 결과 제2 기갑 집단의 대부분과 제2군을 중앙군 집단에서 분리하여 남방군 집단으로 이동시켜 키예프 포위 작전을 지원하도록 결정했다.
3. 전투
7월 초, 독일군은 스탈린 방어선을 돌파하고 지토미르를 점령하며 키예프로 가는 길을 열었다.[4] 소련군은 계속해서 반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BT, T-26, KV-1, T-34 등 다수의 전차를 잃었다.[5]
독일 최고사령부는 드니프로 강 서쪽 소련군 포위 및 섬멸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키예프 점령은 부차적인 목표로 간주했다.[6] 히틀러는 키예프 공격을 원하지 않았지만,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키예프 점령에 관심을 보였다.[7]
7월 29일, 주코프 장군은 스탈린에게 키예프를 포기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스탈린은 격노하며 키예프 사수를 명령했다.[8] 주코프는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고 샤포시니코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9]
8월 초, 독일군은 우만 전투에서 소련군을 포위했고, 소련 제5군은 코로스텐 함락 후 키예프 방향으로 후퇴해야 했다.[10] 독일 제6군은 키예프 외곽에 도달했지만, 소련 제37군의 저항에 부딪혔다.[11]
8월 21일, 히틀러는 독일 제2군과 제2 기갑군에게 우크라이나 심장부로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12] 제2 기갑군은 데스나 강을 건너 남하를 시작했고,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13]
9월 초, 부됸니는 스탈린에게 후퇴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티모셴코로 교체되었다.[14] 9월 16일, 제2 기갑군과 제1 기갑군이 로흐비차에서 만나면서 키예프 남동쪽에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15] 이로써 소련 제5군, 제21군, 제26군, 제37군, 제38군이 포위되었다.[16]
9월 17일, 키르포노스는 독단적으로 동쪽으로 공격을 명령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17] 포위된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에게 각개격파 당했다.[18] 9월 19일, 키예프가 함락되었고,[19] 9월 26일,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소련군이 항복했다.[20] 키르포노스는 전투 중 사망했다.[21]
3. 1. 전투의 참상과 민간인 피해
키예프 전투는 격렬한 시가전과 포위전으로 인해 도시와 민간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0일 동안의 격전 끝에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소련군이 항복하면서, 독일군은 수많은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60만 명의 포로를 붙잡았다.[41]
전투 과정에서 독일 공군(Luftwaffe)은 제2 및 제5 항공군단을 투입하여 제공권을 장악하고, 포위된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9월 12일부터 21일까지 1,400회 이상의 출격을 통해 약 57만 킬로그램의 폭탄을 투하하여 수많은 차량과 항공기를 파괴했다.
키예프 함락 직전, 소련군은 철도를 파괴하고 중요한 물자들을 철수시켰다.[9] 그러나, 도시 곳곳에는 소련군 비밀경찰(NKVD)이 설치한 폭발물이 남아있었다. 9월 19일, 독일 제99 경사단은 폭발물 함정을 발견하여 제거하려 했으나, 9월 24일 중앙 우체국 옆에서 발생한 폭발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 중심부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10][11] 이 화재로 약 200명의 독일군이 사망하고, 1만 명에서 2만 5,000명의 민간인이 집을 잃었다.[12][13][14]
나치 당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바비 야르에서 3만 3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5] 또한, 독일 지도부는 키예프를 기아 상태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후방에서의 봉기 우려로 실행이 억제되었다.[16]
키예프는 1943년 독일군 철수 과정에서 다시 한번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강제 대피를 실시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했다.[17]
4. 여파
소련군은 키예프 전투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이는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이어졌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83개 사단, 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춘 사단은 25개에 불과했고, 전차, 차량, 항공기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42][43][44]
독일군은 키예프에서 승리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장비를 소모했다. 또한, 키예프 공략에 4주를 소모하면서 모스크바 공격이 지연되었고, 결국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었다.[42]
키예프 전투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작전 교리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소련군은 포위당하면 항복하거나 전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키예프 전투 이후에는 포위를 피하고, 역으로 독일군을 포위하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이후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독일은 터키를 추축국에 가담시키고, 핀란드의 참여를 확대하며, 남쪽의 이란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42]
키예프 전투는 소련에게 큰 피해를 안겨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모스크바 방어 시간을 벌어주었고, 독일군을 소모시켜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평가
키예프 전투는 독소전쟁 초기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독일군과 소련군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군사적, 정치적, 역사적 측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군사적 관점독일군은 키예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 남서부 전선을 붕괴시키고 다량의 장비를 노획하여 모스크바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8] 키예프 포위는 독일군 기갑부대가 소련에서 수행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성공적인 장거리 돌파였다.[9]
-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
- 소련군 남서부 전선 붕괴: 남부 집단군이 우크라이나 동부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10]
- 다량의 장비 노획: 보급 없이도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11]
- 중앙 집단군의 병력 회복 및 보급 개선: 모스크바 공세를 위한 준비 시간을 확보했다.[12]
그러나 이 승리는 전략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키예프 전투에 투입된 병력과 시간 소모는 결국 모스크바 공세(타이푼 작전)를 지연시켰고, 이는 독일군이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맞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 독일군의 전략적 문제점:
- 모스크바 공세 지연: 키예프 전투에 4주가 소요되면서 모스크바 공격이 지연되었다.[13]
- 병력 및 장비 소모: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의 전력 약화를 초래했다.
소련군은 키예프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을 한 달이나 지연시켜[14] 결국 붉은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치적, 이념적 관점키예프 전투의 승리는 독일에게 중요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터키를 추축국 측에 참전시키고 핀란드의 참여를 확대하려는 시도에 이용되었으며,[16] 영국과 소련이 점령한 이란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17]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의의키예프 전투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에게 포위되었을 경우의 작전 명령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오히려 독일군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5. 1. 논란
이 전투의 결과와 관련된 논란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스탈린의 책임론7월 29일, 적군 참모총장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키예프를 포기하고 병력을 드니프로 강 뒤로 후퇴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키예프를 사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주코프의 제안을 거부했다.[6] 스탈린은 키예프를 포기하면 독일군이 드니프로 강 동쪽에 쉽게 교두보를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했다.[6] 또한, 우만에서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이 포위된 사례를 언급하며, 키예프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6]
9월 11일, 부됸니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남서부 전선이 포위될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예비 병력 없이는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키르포노스에게 스타브카(Stavka)의 허가 없이 키예프를 포기하거나 다리를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했다.[6]
결국 스탈린은 9월 13일 주코프의 제안에 따라 부됸니를 해임하고 티모셴코를 남서부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후퇴는 승인하지 않았다.[6]
소련군 지휘관들의 역할과 한계주코프는 독일군의 주 공세 방향을 정확히 예측하고 키예프 포기를 제안했지만, 스탈린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4] 부됸니는 병력 부족과 포위 위협을 경고하며 후퇴를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묵살했다.[6] 티모셴코는 증원군을 기대하며 후퇴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지원된 병력은 매우 부족했다.[6]
참조
[1]
서적
Nhớ lại và suy nghĩ
[2]
웹사이트
1941
https://web.archive.[...]
2014-08-09
[3]
서적
Россия и СССР в войнах ХХ века
Москва
[4]
서적
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
Москва
[5]
서적
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사이트
F-10 OBJECT RADIO-CONTROLLED MINE
https://shvachko.net[...]
2022-11-30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간행물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https://archive.org/[...]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웹사이트
Human Losses in World War II
http://ww2stats.com/[...]
2012-10-25
[21]
서적
The Devil's Disciples: Hitler's Inner Circle
[22]
서적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боевых действиях и военных конфликтах: Стат. исслед.
Воениздат
[2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08-12-29
[24]
서적
The Road to Stalingrad
[25]
게임
Fire Brigade: The Battle for Kiev 1943
http://www.homeofthe[...]
Panther Games Pty.Ltd.
[26]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27]
서적
Barbarossa
William Morrow and Company
[28]
서적
Barbarossa
William Morrow and Company
[29]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0]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1]
서적
Танковые операции
http://militera.lib.[...]
Воениздат
[32]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3]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4]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5]
서적
Barbarossa Derailed: The battle for Smolensk, Volume 2
[36]
서적
От Дубно до Ростова
http://militera.lib.[...]
ООО «Издательство АСТ»: Издательство «Транзиткнига»
[37]
서적
Военный дневник. Ежедневные записи начальника Генерального штаба Сухопутных войск 1939—1942 гг.
http://militera.lib.[...]
Во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 СССР
2010-09-18
[38]
서적
Barbarossa
William Morrow and Company
[39]
서적
Barbarossa
William Morrow and Company
[40]
서적
Barbarossa
William Morrow and Company
[41]
서적
2차세계대전사
청아람미디어
[42]
논문
The Soviet-German War 1941-1945: Myths and Realities: A Survey Essay
[43]
서적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1941–1945), volume I:The Summer-Fall Campaign (22 June-4 December 1941)
Selfpublished
[44]
서적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1941–1945), volume II: The Winter Campaign (5 December 1941-April 1942)
Selfpublishe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