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탬퍼드브리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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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탬퍼드브리지 전투는 1066년 9월 25일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와 토스티 고드윈손이 이끄는 노르웨이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하랄 3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 참여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해럴드 2세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하랄 3세와 토스티가 전사하고 노르웨이 군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 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이며, 3일 뒤 노르만인의 침공으로 이어진 헤이스팅스 전투의 배경이 되었다. 전투 후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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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위치 | 스탬퍼드브리지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주), 잉글랜드 |
| 날짜 | 1066년 9월 25일 (월요일) |
| 결과 | 잉글랜드의 승리 |
| 관련 전투 |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 노르만 정복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잉글랜드 왕국 |
| 교전국 2 | 노르웨이 왕국 (872–1397) 오크니 백국 잉글랜드 반군 스코틀랜드 용병 플랑드르 용병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잉글랜드 왕국 | 해럴드 고드윈슨 노섬브리아 백작 몰카르 머시아 백작 에드윈 |
| 노르웨이 왕국 | 하랄 3세 토스티그 고드윈슨 에이스테인 오레 폴 토르핀손 올라프 하랄손 |
| 병력 규모 | |
| 잉글랜드 왕국 | 보병: 10,500–15,000명 기병: 2,000명 |
| 노르웨이 왕국 | 9,000–11,000명 (3,000명은 전투 후반에 참여) 수송선 300척 |
| 피해 규모 | |
| 잉글랜드 왕국 | 5,000명 |
| 노르웨이 왕국 | 6,000–8,000명 이상 사망 또는 실종 |
2. 배경
1066년 1월,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이 경쟁자들에는 노르웨이 왕 하랄 3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D 원고(197쪽)에 따르면[3] 노르웨이인들은 3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략하려 했다. 하랄 3세의 사가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하랄 왕은 보급선과 소형 선박을 제외하고 200척이 넘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4] 오크니 제도에서 증원군과 합류한 노르웨이 군대는 7,000명에서 9,000명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9월에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한 하랄 3세는 플랑드르 백국과 스코틀랜드에서 토스티 고드윈손에 의해 모집된 병력과 합류했다.[5] 토스티는 형이자 에드워드의 죽음으로 위테네게모트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 해럴드 2세와 불화했다. 1065년에 노섬브리아 백작 자리에서 쫓겨나 추방된 토스티는 1066년 봄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일련의 실패한 공격을 감행했다.[6]
1066년 늦여름, 침략자들은 우즈 강을 거슬러 올라가 요크로 진격했다. 9월 20일, 그들은 요크 외곽 풀포드 전투에서 머시아 백작 에드윈과 그의 형제인 노섬브리아 백작 모카르가 이끄는 잉글랜드 북부 군대를 격파하고 요크의 항복을 받았다. 그들은 잠시 도시를 점령하고 도시에서 인질과 물자를 빼앗은 후 리칼로 향하는 배로 돌아갔다. 그들은 하르드라다의 왕위 찬탈을 지지하는 대가로 노섬브리아인들에게 평화를 제안하고 요크셔 전체에서 추가 인질을 요구했다.[7]
이때 해럴드 왕은 잉글랜드 남부에 있었고, 잉글랜드 왕위의 또 다른 경쟁자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프랑스로부터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노르웨이의 침략 소식을 듣고 그의 하우스칼과 그가 모을 수 있는 만큼의 테인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이동하며 엄청난 속도로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런던에서 요크셔까지 약 약 297.73km의 거리를 단 4일 만에 이동하여 노르웨이인들을 완전히 기습할 수 있었다. 해럴드는 노섬브리아인들이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노르웨이인들에게 추가 인질과 물자를 보낼 것을 명령받았다는 것을 알고 9월 25일 이 회합 장소에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요크를 통과하여 서둘러 갔다.[8] 잉글랜드 군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침략자들은 주변 어디에도 적대적인 군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9]
2. 1.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
1066년 1월,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한 인물은 여러 명 있었는데, 그중에는 노르웨이 왕 하랄 3세도 있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D 원고(197쪽)에 따르면[3], 하랄 3세는 잉글랜드를 침략하기 위해 300척의 함대를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기 저자들은 군함과 보급선을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하랄 3세의 사가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하랄 왕은 보급선과 소형 선박을 제외하고 200척이 넘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4] 오크니 제도에서 합류한 증원군과 합쳐 노르웨이 군대는 7,000명에서 9,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9월에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한 하랄 3세는 플랑드르 백국과 스코틀랜드에서 토스티 고드윈손에 의해 모집된 병력과 합류했다.[5] 토스티는 형이자 에드워드의 죽음으로 위테네게모트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 해럴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065년에 노섬브리아 백작 자리에서 쫓겨나 추방된 토스티는 1066년 봄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일련의 실패한 공격을 감행했다.[6]
한편,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는 잉글랜드 남부에 있으면서, 잉글랜드 왕위의 또 다른 경쟁자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프랑스로부터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2. 2. 하랄 3세의 침공
1066년 1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참회왕이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투쟁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한 북유럽 제후는 여러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이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D 원고(197쪽)에 따르면[3], 하랄 3세가 이끄는 노르웨이군은 300척의 함대로 잉글랜드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기의 편자는 군함과 수송선의 구별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기록한 하랄 3세의 사가에는 하랄 왕이 200척의 군함과 기타 수송선·소형선을 이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하랄 왕이 이끄는 노르웨이 함대는 도중에 오크니 제도에서 증원 부대를 모아 그 시점에서 7,000명 ~ 9,000명의 군세가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상륙할 무렵에는 토스티 고드윈손이 이끄는 플랑드르인·스코틀랜드인의 군세가 노르웨이군에 합류했다. 당시 토스티는 그의 형이자 위테네게모트에 의해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된 해럴드 고드윈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1065년에 자신의 작위인 노섬브리아 백 자리를 몰수당하고 망명 생활을 했다.[6]1066년 늦여름, 하랄 3세와 토스티 고드윈손이 이끄는 침공군은 우즈 강을 거슬러 올라가, 머시아 백작 에드윈·노섬브리아 백작 모카르가 이끄는 5,000명 미만의 잉글랜드군을 요크 교외의 풀퍼드에서 격파했다. 풀퍼드에서의 노르웨이군의 승리로 요크는 하랄 왕에게 항복했다. 하랄 일행은 요크를 점령해 시내에서 인질과 보급 물자를 얻고 리칼에 군선을 돌려보냈다. 노르웨이군은 노섬브리아와 강화하고, 그 대가로 하랄 3세는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획득을 위한 지원을 현지인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요크셔 지방 전역으로부터 추가적인 인질을 요구했다.[7]
한편, 잉글랜드 왕 해럴드 고드윈슨 (토스티의 형)은 잉글랜드 남부에 머물며 프랑스에서 쳐들어올 노르망디 공 기욤 2세에 대한 격퇴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노르웨이군의 침공을 알게 된 해럴드는 맹렬한 기세로 북진을 시작해 그의 직속 군단과 도중에 징집한 테인들을 가능한 한 모아 밤낮으로 진군했다. 해럴드는 런던에서 요크셔까지 298km를 단 4일 만에 돌파하여 노르웨이군의 뒤통수를 치는 데 성공했다. 하랄이 이끄는 노르웨이군은 스탬퍼드 브리지에 집결하여 요크셔 각지에서 모은 인질과 보급 물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을 이해한 잉글랜드 왕 해럴드는 요크를 지나 스탬퍼드 브리지에 진을 치고 있는 노르웨이군에 공세를 가하려 서둘렀다.[8]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잉글랜드군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노르웨이군은 잉글랜드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9]
2. 3. 해럴드 2세의 대응
해럴드 왕은 잉글랜드 남부에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노르웨이의 침략 소식을 듣고 하우스칼과 모을 수 있는 테인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이동하며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런던에서 요크셔까지 약 약 297.73km 거리를 단 4일 만에 이동하여 노르웨이인들을 기습할 수 있었다. 해럴드는 노섬브리아인들이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노르웨이인들에게 추가 인질과 물자를 보낼 것을 명령받았다는 것을 알고, 9월 25일 이 회합 장소에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요크를 통과하여 서둘러 갔다.[8] 잉글랜드 군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침략자들은 주변에 적대적인 군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9]3. 전투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스탬퍼드브리지(Stamford Bridge)를 언급한다. 잉글랜드 군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노르웨이군을 기습했다.[16] 데인 도끼로 무장한 한 노르웨이 전사가 데르웬트 강 다리 위 좁은 길을 막아 잉글랜드 군대를 저지했다. 이 전사는 40명의 잉글랜드 병사를 베었으나, 잉글랜드 병사가 다리 아래로 헤엄쳐 창으로 찔러 쓰러뜨렸다.[17][18]
이 지연 덕분에 노르웨이 군대는 실드월을 형성해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잉글랜드군은 다리를 건너 노르웨이군과 대열을 이뤄 격돌했다. 전투는 몇 시간 동안 격렬했고,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노르웨이군은 불리했다. 하랄 3세와 토스티 고드윈손이 전사하면서 노르웨이군은 붕괴되었다.[19]
리컬에서 배를 지키던 에이스테인 오레가 이끄는 노르웨이 증원군이 도착해 잠시 잉글랜드군을 저지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노르웨이 군대는 패주했다.[20] 전투 후 50년이 지나도록 전장에는 뼈가 하얗게 널려 있었다고 전해진다.[21][22]
3. 1. 전투의 전개
스노리 스투를루손에 따르면, 전투 전에 한 남자가 혼자 하랄 3세와 토스티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토스티그에게 하랄 3세에 맞서면 백작위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토스티그는 그의 형 해럴드가 하랄 3세를 위해 얼마나 주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기수는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니, 잉글랜드 땅 7피트(약 2.1m)"라고 대답했다(하랄 3세와 그의 군대가 죽어서 잉글랜드 땅에 묻힐 것이라는 의미). 하랄 3세는 그 기수의 대담함에 감명을 받았고, 그가 누구인지 토스티그에게 물었다. 토스티그는 그 기수가 바로 해럴드 2세 자신이라고 대답했다.[14]잉글랜드 군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노르웨이인들을 놀라게 했다.[16] 잉글랜드군의 진격은 다리 자체가 제공하는 병목 현상 때문에 지연되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와 헨리 오브 헌팅던의 연대기에 따르면, 데인 도끼로 무장한 한 노르웨이인이 좁은 길을 막고 혼자서 잉글랜드 군대 전체를 저지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 바이킹은 혼자서 40명에 달하는 잉글랜드인들을 베어 넘겼으며, 잉글랜드 병사가 다리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 다리의 판자 사이로 창을 찔러 치명상을 입히고 나서야 패배했다.[17][18]
이 지연으로 인해 노르웨이 군대의 주력 부대는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맞서 실드월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해럴드의 군대는 다리를 건너와 노르웨이 군대 바로 앞에서 대열을 형성하고, 방패를 맞물린 다음 돌격했다. 전투는 다리 자체를 훨씬 넘어섰고,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노르웨이 군대가 갑옷을 두고 온 결정은 그들에게 뚜렷한 불리함을 안겨주었다. 결국, 노르웨이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군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실드월을 무너뜨렸다. 하랄 3세가 목에 화살을 맞아 죽고 토스티그가 살해되면서 완전히 포위된 노르웨이 군대는 붕괴되어 사실상 전멸했다.[19]
전투 후반, 리컬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서 배를 지키고 있던 부대(에이스테인 오레가 이끌었음)로부터 증원을 받았다. 그의 병사들 중 일부는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하여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나머지 병사들은 완전 무장했다. 노르웨이 전통에서 "오레의 폭풍"으로 묘사되는 그들의 반격은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진격을 멈추게 했지만, 곧 압도당했고 오레는 살해되었다. 노르웨이 군대는 패주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 군대의 추격을 받아 도망치는 노르웨이인 중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20]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서 죽어, 전투 후 50년이 지나도록 그 들판은 표백된 뼈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고 한다.[21][22]
3. 2. 전투의 결과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는 하랄드의 아들인 올라프와 오크니 백작인 폴 쏜핀슨, 에를렌 쏜핀슨을 포함한 살아남은 노르웨이인들과 휴전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다시 잉글랜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노르웨이인들이 입은 피해는 너무 심각하여, 300척 이상의 함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수송하는 데 24척의 배만 필요했다.[20] 그들은 오크니 제도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봄에 올라프는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왕국은 그와 하랄드가 부재 시 통치를 위해 남겨둔 그의 형제인 마그누스 사이에 분할되어 공유되었다.[23]해럴드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투 후 3일 뒤인 9월 28일, 노르만 침략군은 정복왕 윌리엄의 지휘하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인 페벤시, 서식스에 상륙했다. 해럴드는 즉시 군대를 돌려 노르만 군대를 요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강행군해야 했다.[24]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 군대와 대치했다. 그곳에서 그는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전사했으며, 윌리엄이 런던으로 진격하여 노르만 정복의 일환으로 잉글랜드 전체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25]
4. 전투의 영향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는 하랄드의 아들 올라프와 오크니 백작인 폴 쏜핀슨, 에를렌 쏜핀슨을 포함한 살아남은 노르웨이인들과 휴전을 맺었다. 이들은 다시 잉글랜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20] 노르웨이인들의 피해는 매우 커서, 300척 이상의 함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수송하는 데 24척의 배만 필요했다.[20] 이들은 오크니 제도로 물러나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봄에 올라프는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노르웨이는 그와 하랄드가 부재 시 통치를 위해 남겨둔 그의 형제인 마그누스 사이에 분할되어 공동 통치되었다.[23] 많은 자료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언급하며, 잉글랜드 출신 노르만 역사가 오데릭 비탈리스는 반세기 후에도 전투 지역이 "양쪽의 막대한 손실을 증언하는 뼈 무더기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라고 보고한다.
4. 1. 노르만 정복으로의 이어짐
해럴드 2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3일 후인 9월 28일,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 군대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 페벤시에 상륙했다. 해럴드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강행군하여 노르만 군대를 요격하려 했다.[24] 10월 14일, 5,000명에서 13,000명 사이의 군대를 이끈 해럴드 2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 군대와 맞붙었으나 패배하고 전사했다. 이로써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격하여 노르만 정복의 일환으로 잉글랜드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25]4. 2. 역사적 의의
스탬퍼드브리지 전투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 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노르만 정복 직전 잉글랜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전투 후, 잉글랜드 왕 해럴드는 노르웨이군의 잔존 부대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하랄 3세의 아들 올라프와 오크니 백작, 폴 토르핀손과 얼런드 토르핀손 형제는 소수의 노르웨이군 생존자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떠났다. 노르웨이군의 피해는 막대하여, 원정 시 300척의 배에 가득 채워 잉글랜드에 왔지만, 남은 전사를 데리고 돌아가는 데는 단 24척밖에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38] 노르웨이군은 오크니 제도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올라프는 봄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올라프는 노르웨이군의 잉글랜드 원정 동안 노르웨이에 남아 왕국을 통치했던 형제 마그누스 2세와 왕국을 분할하여 노르웨이 왕국을 두 형제가 공동 통치했다.[41]
한편, 해럴드 왕의 빛나는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3일 후인 9월 28일,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의 군대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페벤시 만에 상륙했다. 노르망디 군의 상륙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급히 군대를 모아 남진하여 노르망디 군과 대치했다.[42] 1066년 10월 14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가 벌어진 지 3주도 채 되지 않아 해럴드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기욤이 이끄는 노르망디 군에게 격파되었다[43] 해럴드 왕을 포함한 잉글랜드 군의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고, 기욤 2세의 노르만 정복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요인이 되었다. 1066년 크리스마스에 기욤 2세는 마침내 잉글랜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 왕으로서 '''윌리엄 1세'''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조의 시조가 되는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왕국을 건국했다.
5. 기념물

스탬퍼드 브리지 마을 안팎에 전투를 기리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26]
최초 기념비는 교회길 동쪽 메인 스트리트(A116)에 있다. 기념비에는 영어와 노르웨이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1066년 9월 25일
>이 인근에서 벌어지다.
>
>SLAGET VED STAMFORD BRU BLE UTKJEMPET I DISSE TRAKTER DEN 25. SEPTEMBER 1066
기념비에 부착된 대리석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잉글랜드 왕 해럴드
>그의 형제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르드라다를 이곳에서 격파하다.
>1066년 9월 25일
두 번째 기념비는 화이트로즈 드라이브(Whiterose Drive) 끝자락, 전투 현장에 있다. 여기에는 전투의 사건과 결과를 보여주는 기념석과 현판이 있다.[27]
참조
[1]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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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isto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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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While the initial invasion force required 300 longships to carry 10,000 troops (Jones, Charles (2011). ''Finding Fulford.'' London: WritersPrintShop. pp. 202–203), only 24 ships, or 8% of the fleet, were needed to carry back the survivors after Stamford Bridge ("Anglo-Saxon Chronicles", 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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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Anglo-Saxon Chronicles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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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lo-Saxon Chronicles, p. 198. "Then was there one of the Norwegians who withstood the English people, so that they might not pass over the bridge, nor obtain the victory. Then an Englishman aimed at him with a javelin, but it availed nothing ; and then came another under the bridge, and pierced him terribly inwards under the coat of mail."
[18]
문서
The chronicle of Henry of Huntingdon, p. 209. "Here a single Norwegian, whose name ought to have been preserved, took post on a bridge, and hewing down more than forty of the English with a battle-axe, his country's weapon, stayed the advance of the whole English army till the ninth hour. At last some one came under the bridge in a boat, and thrust a spear into him, through the chinks of the flooring."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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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lo-Saxon 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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