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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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하여 점령한 군사 작전이다.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가짜 전쟁 기간 동안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스웨덴산 철광석을 독일로 운송하는 주요 항구인 나르비크가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독일은 노르웨이 항구를 통해 대서양으로 접근하고, 유보트와 군함 기지를 건설하여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으려 했다.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노르웨이 지원을 위해 군대를 파병했지만, 독일군의 공세에 밀려 철수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망명하고 저항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40년 6월 10일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해군력 손실을 입었지만, 노르웨이를 점령하여 북해와 대서양에서의 전략적 이점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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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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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 정보 | |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베저위붕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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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40년 4월 8일 - 1940년 6월 10일 |
장소 | 노르웨이 |
결과 | 독일의 승리 |
교전 세력 1 | 나치 독일 |
교전 세력 2 | 노르웨이 |
지휘관 | |
독일 |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
연합군 | 크리스티안 로케 (4월 9일-10일) |
병력 규모 | |
독일 | 100,000명 |
연합군 | 노르웨이: 52,000명, 6개 사단 |
피해 규모 | |
독일 | 공식 독일 수치: 5,296명 (육상에서 1,317명 사망, 해상에서 2,375명 사망, 1,604명 부상) |
연합군 | 총합: 6,602명 |
민간인 피해 | 노르웨이 민간인 사상자: 535명 사망 |
관련 정보 |
2. 배경
1940년no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베저 작전을 발동하여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했다. 덴마크는 당일에 항복했지만,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오슬로를 떠나 영국,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며 항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양측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독일은 스웨덴산 철광석을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수입했기 때문에 노르웨이가 중요했다. 겨울철 발트해가 얼면 나르비크 항구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130] 영국 해군이 베르겐, 나르비크, 트론헤임 등지에 기지를 건설하면 북해가 봉쇄되고 독일 전쟁해군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대서양 전투에서도 노르웨이 항구는 독일이 봉쇄를 뚫고 대서양으로 나가는 데 중요했다.[132] 노르웨이 항구를 통해 독일 해군은 연합군에 대항해 세력을 넓힐 수 있었고,[133] 노르웨이 항공 기지를 통해 독일은 북대서양에서 정찰기를 운용하고, 유보트와 군함은 영국 해군의 봉쇄선을 넘어 영국의 보급로를 공격할 수 있었다.[127][134]
1939년 소련의 핀란드 침공으로 겨울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은 핀란드 지원을 명분으로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와 스웨덴의 철광산을 장악하려 했다.[127]
알트마르크호 사건 이후,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구체화했다.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장군이 침공 계획 책임자로 임명되었고,[132][142][143]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3월 1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및 점령 계획을 승인했다.[132][142][143]
2. 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이틀 만에 폴란드와의 군사 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양국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 않아 수개월 간 뚜렷한 분쟁이 없었고, 이 시기를 가짜 전쟁이라 부른다. 윈스턴 처칠은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달리 적극적인 참전을 주장했다.[127]이 시기 양측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독일 전선에서 벌어졌던 참호전을 피하고자 제2전선을 열려고 했다.[12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정부는 노르웨이 육군과 전함 2척뿐이었던 노르웨이 해군에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노르웨이 육군항공대와 노르웨이 해군항공대도 주변국의 중립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노르웨이 영해에서 일어난 최초의 충돌은 독일 U보트가 영국 군함을 격침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양 교전국의 항공기들이 지속적으로 노르웨이의 중립을 침해했다.[128]
전쟁 발발 직후, 영국은 노르웨이 정부에 해운에 필요한 노르웨이 상선해군단 선박을 지원해달라고 압박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협상 끝에 1939년 9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탱크십 150척을 포함한 총 450,000GT에 달하는 선박을 대여 형식으로 주기로 하였다. 자국 해운선에 대한 노르웨이 정부의 염려가 협상 동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29]
2. 2. 노르웨이의 중요성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중립국이었던 노르웨이는 양측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이 의존하던 스웨덴산 철광석이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 발트해가 얼어붙으면 나르비크 항구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130] 영국은 발트해 장악 계획인 카트린 작전이 좌절되면서 나르비크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131] 독일 대제독 에리히 레더는 영국 해군이 베르겐, 나르비크, 트론헤임 등지에 기지를 건설하면 북해가 봉쇄되고 독일 전쟁해군이 발트해에서조차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대서양 전투에서도 노르웨이 항구 점령은 독일의 봉쇄를 뚫고 대서양으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2] 노르웨이 항구를 통해 독일 해군은 연합군에 대항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133] 또한, 노르웨이 항공 기지를 통해 독일은 북대서양에서 정찰기를 운용하고, 유보트와 군함은 영국 해군의 봉쇄선을 넘어 영국의 보급로를 공격할 수 있었다.[127][134]
2. 3. 겨울 전쟁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면서 겨울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은 핀란드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핀란드 지원군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27] 연합군은 핀란드 지원을 명분으로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와 스웨덴의 철광산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철광석 공급원이었다.[127] 연합군의 계획은 독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 4. 비드쿤 크비슬링과 독일의 초기 조사
알트마르크호 사건 이후, 독일은 노르웨이의 중립성에 의문을 품고 침공 계획을 가속화했다. 1940년 2월 21일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장군이 침공 계획 책임자로 임명되어 육상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132][142][143]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3월 1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및 점령 계획을 공식 승인했다.[132][142][143]2. 5. 알트마르크호 사건
베저 작전이 발동되기 이전인 1940년 2월 16일, 영국 해군 구축함 HMS 코사크(Cossack)함이 노르웨이 중립 수역에서 독일 유조선 알트마르크호를 나포하여 영국인 포로들을 구출한 사건이 발생했다.[1] 이를 알트마르크호 사건이라고 한다.[1] 이 사건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노르웨이 침공을 결정하게 되었다.[1]3. 초기 계획
겨울 전쟁 이후, 연합군은 노르웨이나 스웨덴 점령이 중립국들을 독일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프랑스 신임 총리 폴 레노는 이전 총리보다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며 독일에 대항하여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7] 윈스턴 처칠 또한 스웨덴을 독일 편에서 떼어놓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영국 편으로 만들기 위해 스칸디나비아에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계획은 1939년 해군으로 발트 해를 침투하는 것이었으나, 곧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부설하여 나르비크에서의 철광석 선적을 막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공격하게 만들어 영국 해군이 독일을 패배시킨다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144]
처칠의 해군 기뢰 부설 계획인 윌프레드 작전은 기뢰수역으로 만들어 수송선을 국제수역으로 다니게 해 영국 해군이 통상파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윌프레드 작전에 독일이 반발할 경우 R4 작전을 통해 연합군이 나르비크, 트론헤임, 베르겐, 스타방에르를 점령하기로 했다. 이 작전은 노르웨이가 연합군에 무력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계획되었다.[145]
라인강에 기뢰를 부설하는 로얄 마린 작전에 대해서는 연합국 간 의견이 분분했다. 영국은 이 작전을 지지했으나, 프랑스는 독일의 보복 및 라인강 의존성 때문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윌프레드 작전은 4월 5일에서 4월 8일로 연기되었고, 영국군은 노르웨이에서 별도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137]
3. 1. 연합군의 계획
겨울 전쟁 이후, 연합군은 노르웨이나 스웨덴을 점령하는 것이 오히려 중립국들을 독일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신임 총리 폴 레노는 전임자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독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주장했다.[137] 윈스턴 처칠 역시 스웨덴을 독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영국 편으로 만들기 위해 스칸디나비아에서의 군사 행동을 지지했다. 초기에는 1939년 해군을 발트해로 진입시키는 계획이 있었으나, 이는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부설하여 나르비크로부터의 철광석 수송을 방해하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공격하도록 유도하여 영국 해군이 개입하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144]처칠이 제안한 해상 기뢰 부설 계획인 윌프레드 작전은 기뢰를 통해 선박들을 공해로 유도하여 영국 해군이 통상 파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R4 작전은 윌프레드 작전에 대한 독일의 반발이 있을 경우 연합군이 나르비크, 트론헤임, 베르겐, 스타방에르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R4 작전은 노르웨이가 연합군에 무력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계획되었다.[145]
라인강에 기뢰를 부설하는 로얄 마린 작전에 대해서는 연합국 간 의견 차이가 있었다. 영국은 이 작전을 지지했으나, 프랑스는 독일의 보복과 라인강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윌프레드 작전은 원래 계획된 4월 5일에서 4월 8일로 연기되었고, 영국군은 노르웨이에서 별도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137]
3. 2. 독일군의 계획
몇 달 동안 낮은 우선순위로 계획되던 베저위붕 작전(Weserübungde)은 알트마르크 사건 이후 긴박성을 띄게 되었다.[6] 이 작전의 목표는 나르비크 항구와 광석 수송로를 확보하고, 연합국과의 협력을 막기 위해 노르웨이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이를 노르웨이의 중립을 무장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독일 전략가들은 덴마크 점령 여부를 두고 논쟁했다. 덴마크는 이 지역에 대한 공중 및 해상 통제를 용이하게 할 수 있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일부는 덴마크에 압력을 가해 동의를 얻어내려 했지만, 결국 덴마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작전 수행에 더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전 계획 수정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문제는 저지대 국가와 북부 프랑스 침공 계획인 황색 작전(Fall Gelb)이었다. 두 작전 모두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베저위붕 작전은 황색 작전과 동시에 진행될 수 없었다. 해군력 엄호에 필수적인 밤이 짧아지는 봄이 다가오면서, 작전은 더 빨리 진행되어야 했다. 결국 1940년 4월 2일, 독일군은 침공일을 4월 9일(베저탁, Wesertag), 상륙 시간을 노르웨이 시간으로 04:15 (베저차이트, Weserzeit)로 결정했다.[16]
노르웨이에서 독일군의 계획은 수륙양용전 상륙을 통해 오슬로, 크리스티안산, 에게르순, 베르겐, 트론헤임, 나르비크 등 6개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강하병 부대는 포르네부와 솔라 등 다른 주요 지역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노르웨이 방어군을 신속하게 압도하고,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기 전에 주요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병력이 조직되었다.
집단 | 목표 | 구성 |
---|---|---|
제1집단 | 나르비크[21] | 구축함 10척, 산악병 2,000명 (에두아르트 디틀 장군 지휘) |
제2집단 | 트론헤임 | 중순양함 , 구축함 4척 |
제3집단 | 베르겐 | 경순양함 , , 소형 지원 선박 |
제4집단 | 크리스티안산 | 경순양함 , 소형 지원 선박 |
제5집단 | 오슬로 | 중순양함 , , 경순양함 , 소형 지원 선박 |
제6집단 | 에게르순 | 기뢰 제거함 4척 |
전함 와 는 제1집단과 제2집단의 이동을 호위하고, 추가 병력, 연료 및 장비를 수송하는 수송선도 동행했다.
덴마크에 대해서는 두 개의 기계화 여단이 교량과 병력을 점령하고, 강하병이 북쪽의 올보르 공항을 점령하며, 루프트바페의 중(重)전투기가 덴마크 항공기를 파괴할 계획이었다. 이 침공을 위해 조직된 해상 임무 부대는 대형 선박을 포함하지 않았다. 수송선은 코펜하겐의 덴마크 최고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병사들을 수송할 예정이었다. 덴마크 침공에 사용된 독일 해군력은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
집단 | 목표 | 구성 |
---|---|---|
제7집단 | 코르쇠르, 뉘보르 | , 수송선 2척, 기뢰 제거함 2척, 트롤 어선 6척 |
제8집단 | 코펜하겐 | 기뢰 부설함 1척, 쇄빙선 1척, 순찰정 2척 |
제9집단 | 미델파르트, 프레데리시아 | 화물선 1척, 예인선 2척, 기뢰 제거함 7척 |
제10집단 | 에스비에르 | 호위 슬루프 1척, 기뢰 제거함 20척 (제170 보병 사단 소속 2개 중대) |
제11집단 | 티보론 | 기뢰 제거함 기지선 1척, 기뢰 제거함 14척 (제170 보병 사단 소속 1개 중대) |
독일군은 양국 주민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병사들에게는 사격을 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4. 병력 동원
독일군은 7개 사단, 팔시름예거 1개 대대, 판처, 포병을 포함하여 총 10만 명을 동원했다. 이 전역엔 독일 전쟁해군 주력함 대다수도 동원되었다.[147][148] 독일 공군 제10 항공군단 산하 수송기 500기, 하인켈 He 111 폭격기 186기를 포함하여 항공기 1,000기도 노르웨이로 발진하였다.[149][150]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 대장 지휘 하의 제21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었다.
- 제21군단 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 대장
- 제163보병사단
- 제69보병사단
- 제196보병사단
- 제181보병사단
- 제214보병사단
- 제3산악병사단
최초 침공 부대는 해군 함정으로 수송되었으며, 참가한 주요 함선은 다음과 같다.
집단 | 목적지 | 함선 종류 | 함선 이름 |
---|---|---|---|
제1집단 | 나르비크 | 구축함 | 빌헬름 하이드캄프(Wilhelm Heidkamp), 게오르크 틸레(Georg Thiele), 볼프강 젠커(Wolfgang Zenker), 베른트 폰 아르님(Bernd von Arnim), 에리히 기제(Erich Giese), 에리히 쾨르너(Erich Koellner), 디터 폰 레더(Dieter von Roeder), 한스 뤼데만(Hans Lody), 헤르만 퀴네(Hermann Künne), 안톤 슈미트(Anton Schmidt) |
지원 부대 | - | 순양전함 |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그나이제나우(Gneisenau) |
제2집단 | 트론헤임 | 중순양함 | 아드미랄 히퍼(Admiral Hipper) |
구축함 | 파울 야코비(Paul Jacobi), 테오도르 리델(Theodor Riedel), 브루노 하이네만(Bruno Heinemann), 프리드리히 에코르트(Friedrich Eckoldt) | ||
제3집단 | 베르겐 | 경순양함 | 쾰른(Köln),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
포술 연습함 | 브렘제(Bremse) | ||
어뢰정 | 레오파르트(Leopard), 볼프(Wolf) | ||
S보트 모함 | 칼 페터스(Carl Peters) | ||
S보트 | S18, S19, S20, S21, S22, S24 | ||
기타 함선 | 2척 | ||
제4집단 | 크리스티안산, 아렌달 | 경순양함 | 카를스루에(Karlsruhe) |
어뢰정 | 그라이프(Greif), 룩스(Lux), 제아들러(Seeadler) | ||
S보트 모함 | 친타우(Tsingtau) | ||
S보트 | S9, S14, S16, S30, S31, S32, S22 | ||
제5집단 | 오슬로 | 중순양함 | 블뤼허(Blücher)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 뤼초(Lützow) | ||
경순양함 | 엠덴(Emden) | ||
어뢰정 | 알바트로스(Albatross), 콘도르(Condor), 뫼베(Möwe) | ||
기뢰 제거정 (R보트) | R17, R18, R19, R20, R21, R22, R23, R24 | ||
기타 함선 | 2척 | ||
제6집단 | 에게르순 | 기뢰 제거정 (M보트) | M1, M2, M9, M13 |
노르웨이군은 6개 보병사단에 55,000명이 동원되었고, 연합군 파병군은 38,000명이었다.[147][151] 노르웨이군은 훈련된 병력 약 60,000명을 보유했지만, 독일군의 기습으로 인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52,000명에 불과했다.[22][26]
4. 1. 독일군
독일군은 7개 사단, 팔시름예거 1개 대대, 판처, 포병을 포함하여 총 10만 명을 동원했다. 이 전역엔 독일 전쟁해군 주력함 대다수도 동원되었다.[147][148] 독일 공군 제10 항공군단 산하 수송기 500기, 하인켈 He 111 폭격기 186기를 포함하여 항공기 1,000기도 노르웨이로 발진하였다.[149][150]노르웨이 전역 전투 서열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 대장 지휘 하의 제21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었다.
- 제21군단 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 대장
- 제163보병사단
- 제69보병사단
- 제196보병사단
- 제181보병사단
- 제214보병사단
- 제3산악병사단
최초 침공 부대는 해군 함정으로 수송되었다. 참가한 주요 함선은 다음과 같다.
집단 | 목적지 | 함선 종류 | 함선 이름 |
---|---|---|---|
제1집단 | 나르비크 | 구축함 | 빌헬름 하이드캄프(Wilhelm Heidkamp), 게오르크 틸레(Georg Thiele), 볼프강 젠커(Wolfgang Zenker), 베른트 폰 아르님(Bernd von Arnim), 에리히 기제(Erich Giese), 에리히 쾨르너(Erich Koellner), 디터 폰 레더(Dieter von Roeder), 한스 뤼데만(Hans Lody), 헤르만 퀴네(Hermann Künne), 안톤 슈미트(Anton Schmidt) |
지원 부대 | - | 순양전함 |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그나이제나우(Gneisenau) |
제2집단 | 트론헤임 | 중순양함 | 아드미랄 히퍼(Admiral Hipper) |
구축함 | 파울 야코비(Paul Jacobi), 테오도르 리델(Theodor Riedel), 브루노 하이네만(Bruno Heinemann), 프리드리히 에코르트(Friedrich Eckoldt) | ||
제3집단 | 베르겐 | 경순양함 | 쾰른(Köln),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
포술 연습함 | 브렘제(Bremse) | ||
어뢰정 | 레오파르트(Leopard), 볼프(Wolf) | ||
S보트 모함 | 칼 페터스(Carl Peters) | ||
S보트 | S18, S19, S20, S21, S22, S24 | ||
기타 함선 | 2척 | ||
제4집단 | 크리스티안산, 아렌달 | 경순양함 | 카를스루에(Karlsruhe) |
어뢰정 | 그라이프(Greif), 룩스(Lux), 제아들러(Seeadler) | ||
S보트 모함 | 친타우(Tsingtau) | ||
S보트 | S9, S14, S16, S30, S31, S32, S22 | ||
제5집단 | 오슬로 | 중순양함 | 블뤼허(Blücher)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 뤼초(Lützow) | ||
경순양함 | 엠덴(Emden) | ||
어뢰정 | 알바트로스(Albatross), 콘도르(Condor), 뫼베(Möwe) | ||
기뢰 제거정 (R보트) | R17, R18, R19, R20, R21, R22, R23, R24 | ||
기타 함선 | 2척 | ||
제6집단 | 에게르순 | 기뢰 제거정 (M보트) | M1, M2, M9, M13 |
4. 2. 노르웨이군 및 연합군
노르웨이군은 6개 보병사단에 55,000명이 동원되었고, 연합군 파병군은 38,000명이었다.[147][151] 노르웨이 국군은 6개 보병 사단에 배치된 19,000명을 포함하여 약 55,000명의 전투병을 투입했다. 노르웨이군은 훈련된 병력 약 60,000명을 보유했으며, 연대당 3,750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속도와 기습으로 인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52,000명에 불과했다.[22][26]5. 침공과 전개
독일군의 침공은 1940년 4월 3일, 본군 진격에 앞서 호송보급선이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142] 연합군은 다음 날 윌프레드 작전을 시행하기로 계획했으나, 이에 앞서 연합군 잠수함 16척이 스카게라크 해협 및 카테가트 해협으로 정찰을 나갔다. 다음날 윌리엄 위트워스 지휘 하의 HMS 리나운이 구축함 12척을 대동하여 스케파플로에서 베스트피오르덴으로 출항하여 독일군의 반응에 조기 대응하기로 하였다.
4월 7일, 북해 해역에 악천후가 시작되며 항해가 매우 힘들어졌다. 리나운 함대는 곧 거친 눈폭풍을 만났으며, 호위구축함 중 하나인 HMS 글로웜은 갑판에서 바다에 빠진 선원을 찾기 위해 함대에서 빠져 수색 중이었다. 이른 아침 제일 먼 거리를 항해해야 하는 1그룹과 2그룹이 출항했다.
영국 공군 정찰대가 린데스네스 남쪽 170km 해상에서 2개 독일군 그룹을 발견했으며, 순양함 1척과 구축함 6척이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후행 폭격기 분대가 독일 함대를 공격했으나 독일군의 피해는 없었고, 영국군은 독일 함선이 순양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의 대부대라고 상향 판단하였다.
독일군의 움직임을 분석한 영국 해군성은 독일군이 연합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대서양의 무역로를 교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함대의 총사령관인 제독 찰스 포브스는 독일 함대를 요격하기로 하였다. 양측은 상황의 규모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계획대로 진행했고, 다음 날 아침 의도치 않게 최초의 직접적 접촉이 일어났다.
4월 8일 아침,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가 노르웨이 남부 항구인 릴레산 해역에서 독일군 수송선 MS 리우데자네이루와 접촉하고 격침했다.[152]
뉘고르스볼 내각은 한밤중에 내각회의를 열고 노르웨이 육군 6개 사단 중 4개 사단을 동원하라는 동원령을 명령했다. 동원령은 우편으로 각 부대에 전달되었다. 당시 동원령은 외스트폴주의 2개 야전대대로 제한되었으며 추가적인 대규모 병력 파견도 지연되었다. 노르웨이 군부와 정부 부처 간 상호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독일 침공 초기에 노르웨이는 심각한 혼란상을 겪었다.[153][154][155]
5. 1. 해군의 이동

독일군의 침공은 1940년 4월 3일 본군 진격에 앞서 호송보급선이 출발하며 시작되었다.[142] 연합군은 다음 날 윌프레드 작전을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에 앞서 연합군 잠수함 16척이 스카게라크 및 카테가트 해협으로 정찰을 나갔다. 다음날 윌리엄 위트워스 지휘 하의 HMS 리나운이 구축함 12척을 대동하여 스케파플로에서 베스트피오르덴으로 출항하여 독일군의 반응에 조기 대응하기로 하였다.
4월 7일, 북해 해역에 짙은 안개가 끼고 바다가 거칠어지는 등 악천후가 시작되며 항해가 매우 힘들어졌다. 리나운 함대는 곧 거친 눈폭풍을 만났으며, 호위구축함 중 하나인 HMS 글로웜은 갑판에서 바다에 빠진 선원을 찾기 위해 함대에서 빠져 수색 중이었다. 날씨는 독일군에게 은폐를 제공했으며, 이른 아침 제일 먼 거리를 항해해야 하는 1그룹과 2그룹이 출항했다.
악천후로 정찰이 매우 어려워졌지만, 오전 8시경 영국 공군 정찰대가 린데스네스 남쪽 170km 해상에서 2개 독일군 그룹을 발견했으며, 순양함 1척과 구축함 6척이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독일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후행 폭격기 분대는 원래 지점에서 북쪽으로 125km 떨어진 지점에서 독일 함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독일군의 피해는 없었으나, 영국군은 독일 함선이 순양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의 대부대라고 상향 판단하였다. 강력한 라디오 침묵 규제로 폭격기 분대는 17시 30분이 되어서까지 보고가 불가능했다.
독일군의 움직임을 분석한 영국 해군성은 독일군이 연합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대서양의 무역로를 교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함대의 총사령관인 제독 찰스 포브스는 지휘부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받고 20시 15분 독일 함대를 요격하기로 하였다.
상황의 규모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양측은 계획대로 진행했다. '리나운'은 이날 밤늦게 베스트피오르덴으로 구축함이 지뢰 부설 임무를 하는 동안 길목 근처에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독일은 침공군 나머지 전부를 발진했다. 양측의 최초의 직접적 접촉은 다음 날 아침 의도치 않게 일어났다.
리나운과 합류하기 위해 항해하던 글로웜은 4월 8일 오전 8시경 짙은 안개 속에서 독일 구축함 Z11 베른드 폰 아르밈과 Z18 한스 뤼데만과 뒤에서 마주쳤다. 곧바로 전초전이 일어났고 독일 구축함은 도주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이 요청을 들은 아드미랄 히퍼는 곧바로 글로웜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 동안 글로웜이 아드미랄 히퍼에게 충각 공격을 가했다.[132] 충각 공격으로 아드미랄 히퍼의 우현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직후 글로웜은 일제사격으로 격침되었다. 전투 동안 글로웜은 라디오 침묵 규제를 깨고 해군에게 자신의 상황을 전파했다. 함선은 무선 전송을 다 할 수 없었고, 영국 해군성이 알고 있었던 정보는 글로웜이 대형 독일군 군함과 마주쳐 발포하였고 다시는 구축함 함대에 귀환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해군성은 리나운과 호위구축함 1척(다른 2척은 연료 보급을 위해 원항으로 귀환하였다)만 데리고 베스트피오르덴에서의 작전을 포기하고 글로웜의 마지막 보고 위치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10시 45분, 기뢰를 부설하던 남은 구축함 8척도 합류 명령을 받고 출발했다.
4월 8일 아침,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가 노르웨이 남부 항구인 릴레산 해역에서 독일군 수송선 MS 리우데자네이루와 접촉하고 격침했다.[152] 격침된 잔해에서 독일군 병사들과 여러 군용품 유해가 발견되었다. 잠수함 오제우는 해군성에 이 사건을 보고했으나, 해군성은 글로웜에 일어난 상황에만 신경을 써 독일군의 격침 상황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격침된 수송선의 독일군 대부분은 노르웨이 어선과 구축함 HNoMS 오딘에게 구출되었다. 노르웨이의 심문에서 생존자들은 베르겐을 연합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출병했다고 답했다. 이 정보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의회로 전해졌으나, 노르웨이 연안의 영국 해군 기뢰 부설 작전에 산만해진 노르웨이는 이 정보를 무시했다.[152]
오후 2시, 영국 해군성은 공중 정찰 결과 트론헤임 서북서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독일 함선대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를 듣고 해군성은 독일 해군이 실제로 대서양 돌파를 하고 있다는 추측을 합리화시켜 대함대가 방향을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바꿔 이를 막고자 했다. 또한 처칠 장관은 R4 계획의 발동을 취소시키고 병사와 보급품을 싣고 있던 순양함 4척에게 모든 화물을 내린 후 대함대로 편입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때 독일군의 그룹2는 지정된 시각에 트론헤임에 도착하기 위해 선회 시각을 살짝 늦춰 노르웨이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밤 노르웨이 남부에 수많은 선박이 있는 것을 전해들은 찰스 포브스는 대서양 탈출이라는 생각을 접고 대함대를 남쪽의 스카게라크 해협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순양전함 HMS 리펄스 및 순양함 수척, 구축함 수척을 동반한 함대에게 북쪽으로 향해 리나운 함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23시경 포브스가 잠수함 오제우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그 때, 독일군 그룹5가 오슬로피오르 입구에서 노르웨이 해군 순찰정 HNoMS 폴 3세와 마주쳤다. 순찰정은 즉시 레우외위섬(Rauøy) 연안포에게 경보를 울리고 순찰정이 가진 하나뿐인 포로 어뢰정 알바트로스에게 충돌 직전 사격하였다. 어뢰정 알바트로스 및 같이 다닌 함대 중 2척이 방공포로 대응 사격하여 순찰정의 함장이 사망하고 함정에 불이 붙었다. 그룹5는 계속 오슬로피오르 내로 진입하였고 별다른 사고 없이 외부 포대를 무력화했다. 독일 소형 선박 일부는 호르텐 연안을 따라 요새화된 곳을 우회하는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아 시행하던 도중 고장이 났다.
이러한 교전 소식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소식이 오슬로에 닿을 때엔 뉘고르스볼 내각이 한밤중에 내각회의를 하고 있었다. 내각회의에서 노르웨이 육군 6개 사단 중 4개 사단을 동원하라는 동원령 명령이 떨어졌다. 내각 장관들은 내각이 명령한 부분 동원령은 이미 제정된 법에 따라 비밀리에 공개적 선언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각 부대는 우편으로 동원령을 하달받았다. 동원령 규정에 대해 유일하게 제대로 알고 있었던 노르웨이 국방장관 비르예르 리웅베르그는 다른 내각 장관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국방장관은 나중에 동원령에 불필요한 지체를 심각하게 일으킨 감시로 비판을 받게 된다. 리웅베르그 장관은 내각회의 중 참모총장 라스무스 하트레달의 즉각적인 총동원령을 내려달라는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했다. 이미 하트레달 참모총장은 4월 5일, 6일, 8일 여러 번 국방장관과 접견하여 내각에 총동원령을 내리라고 요구했었다. 총동원령 문제는 4월 8일 밤에 논의되었으나 노르웨이군 총사령관인 크리스티안 로케도 동원령을 요구한 후에도 결국 기각되었다. 당시 동원령은 외스트폴주의 2개 야전대대로 제한되었으며 추가적인 대규모 병력 파견도 지연되었다. 4월 9일 오전 3시 30분에서 4시 사이에야 로케의 동원 요청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총사령관은 국방장관을 비롯한 내각 구성원들이 부분적으로 조용히 동원령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군부와 정부 부처 간 상호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독일 침공 초기에 노르웨이는 심각한 혼란상을 겪었다.[153][154][155]
한편 이 무렵 더 북쪽에서는 리나운 함대가 글로웜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위치에 도착한 후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베스트피오르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다가 매우 거칠어 배 방향이 정상보다 더 북쪽을 향하고 있었고, 리나운은 함대의 구축함들과 떨어져 버려 그나이제나우와 샤른호르스트 전함과 만났을 땐 혼자서밖에 상대할 수 없었다. 리나운은 로포텐 제도 인근에서 전함 2척과 근접하였다. 이후 짧게 벌어진 해전에서 독일 함선에게 포 몇 방을 맞춰 독일군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리나운은 독일 함대를 추적하려 했으나 더 빠른 속도로 전함들이 멀어져 버려 더는 추적하지 못했다.[132]
5. 2. 베저위붕 작전

오포피오르를 통해 나르비크로 접근한 독일군 제1그룹 구축함 10척은 영국 해군의 방해 없이 항구에 진입했다. 당시 나르비크 항구에는 노르웨이군 해방전함 HNoMS 에이드스볼드와 HNoMS 노르게 2척이 있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군과 짧은 교섭 후, 에이드스볼드를 어뢰 3발로 격침시켰다. 노르게는 즉시 전투에 참여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독일군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독일 구축함의 어뢰에 침몰했다. 이후 나르비크 지휘관 콘라드 순로는 전투 없이 지상군 항복을 지시했다.[146]

트론헤임에서는 제2그룹 함대가 트론헤임피오르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은 후 상륙했다. 아드미랄 히퍼가 연안포와 교전하는 동안, 구축함들은 빠른 속도로 이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드미랄 히퍼의 포격은 연안 방어군의 서치라이트용 발전기를 파괴하여 방어를 무력화시켰다. 상륙 과정에서 구축함 단 한 척만 공격을 받았다.

베르겐에서는 제3그룹이 접근하자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와 브렘스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서치라이트 부족으로 포의 효율이 떨어져 상륙함들은 저항 없이 항구 접안에 성공했다. 이후 루프트바페가 도착하자 방어군이 항복했다.
크리스티안산의 요새는 순양함 카를스루헤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노르웨이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 선박에는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독일군이 호르텐에서 탈취한 노르웨이 코드를 사용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독일군은 오전 11시까지 마을을 장악했다.
제4그룹 대부분은 크리스티안산 전투에 동원되었으나, 고속정 그리프는 아렌달을 점령하고 영국으로 향하는 해저 케이블을 장악했다.[156]
제5그룹은 오슬로피오르 안쪽 드뢰바크에서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독일 순양함 블뤼허는 오스카르스보르크 요새 앞에서 포격을 받고, 40년 된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 순양함 뤼초프는 블뤼허가 기뢰밭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고 후퇴하여 손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로 인해 오슬로까지 침공하는 데 24시간이 걸렸으나, 블뤼허가 침몰한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포르네부 공항으로 들어온 병력으로 오슬로가 함락되었다.[157]

노르웨이군이 시간을 번 덕분에 노르웨이 왕가와 내각은 국고를 전부 들고 수도 오슬로에서 도피하여 항전을 선언했다.[132][157]
포르네부 공항은 원래 독일군 공수부대가 장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행장은 방어 병력이 없어 착륙한 독일군이 곧바로 공항을 점령했다. 포르네부 공항의 노르웨이 육군항공대 야예빈옌(Jagevingen) 병사들은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복엽기로 저항하였으나 탄약이 떨어지고, 지상요원에게 나눠줄 소화기 탄약을 분배할 생각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포르네부 공항이 저항을 멈췄을 때 독일군은 Ju 52 1기가 격추되는 피해만 입었다.[158] 노르웨이는 제대로 된 반격 시도를 하지 못했고, 오슬로는 무방비 도시를 선언하고 항복했다.
제6그룹은 에게르순과 스타방에르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도시를 함락시켰다.
5. 3. 연합군의 반응
독일군이 트론헤임, 베르겐, 스타방에르에 상륙하고 오슬로피오르를 급습한 직후, 영국군은 이 소식을 접했다. 영국 대함대는 독일 전함 2척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병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르겐 부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국 공군의 정찰 결과 독일군이 예상보다 강력하고 해안 방어선을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자, 영국 함대는 철수했다. 대신 항공모함 HMS 푸리어스를 통해 어뢰폭격기를 발진시켜 적 함선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 공격은 실행되지 않았다.[132]루프트바페가 영국 대함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공격으로 구축함 HMS 구르카가 침몰했고, 영국 대함대는 대공 능력의 취약함을 드러내며 북쪽으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독일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판단, 남부 지역은 잠수함과 영국 공군에 맡기고 수상함은 북쪽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132]
영국 해군성은 나르비크에 독일 구축함 1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버나드 워버튼리 함장이 지휘하는 제2구축함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워버튼리 함대는 4월 9일 16시, 나르비크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트라뇌위에서 현지인들로부터 독일군 구축함 4-6척과 잠수함 1척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워버튼리 함장은 다음날 새벽 밀물 때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이 결정은 해군성의 허가를 받았다.
당시 나르비크에는 독일군 구축함 10척이 있었으나, 일부가 이동하여 부두에는 5척만 남아 있었다.[163] 4월 10일 이른 아침, 워버튼리 함장은 주력함 HMS 하디와 구축함 4척을 이끌고 오포트피오르로 진입했다. 오전 4시 30분경, HMS 헌터, HMS 하버크와 함께 나르비크 항구에 도착, HMS 홋스퍼와 HMS 호스틸은 항구 입구를 지키며 해안포를 감시했다. 짙은 안개와 눈 덕분에 워버튼리 함대는 발각되지 않고 항구에 진입, 독일 구축함 5척을 발견하고 즉시 사격을 개시, 제1차 나르비크 해전이 시작되었다. 워버튼리 함대는 독일군 구축함 2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무력화했으며, 유조선 및 보급함 6척을 침몰시켰다. 독일 함대 지휘관 프리드리히 본테는 기함 독일 구축함 Z21 빌헬름 하이트캄프와 함께 전사했다.
그러나 워버튼리 함장은 독일 구축함을 마지막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하면서 실수를 범했다. 북쪽과 서쪽에 있던 독일 구축함들이 오전 6시경 영국군을 공격했다. 하디는 큰 피해를 입고 해변에 좌초, 워버튼리 함장이 사망했다. 헌터와 홋스퍼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홋스퍼는 침몰하는 헌터와 충돌했다. 호스틸과 하버크는 홋스퍼의 퇴각을 도왔으나, 독일 구축함들의 탄약과 연료가 거의 소진된 상태여서 가능했다.
1차 나르비크 해전 직후, 영국군의 추가 공격으로 독일군 구축함 2척이 더 침몰했다. 4월 10일 새벽, 영국군 잠수함 HMS 트루안트는 독일군 경순양함 카를스루에를 어뢰로 격침시켰다. 같은 날, 영국 해군항공대는 오크니 제도에서 베르겐 항구를 폭격, 무력화된 독일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를 침몰시켰다. 이는 항공기에 의해 침몰된 최초의 주력함으로 기록되었다.[132]
4월 10일, 영국군 전함 푸리어스와 HMS 워스파이트가 대함대에 합류, 트론헤임에 정박한 아드미랄 히퍼를 격침하기 위한 추가 폭격이 이루어졌으나, 아드미랄 히퍼는 이미 항구를 벗어나 독일로 귀환 중이었다. 4월 11일, 영국군 잠수함 HMS 스피어피쉬는 독일 순양함 뤼초프에 어뢰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영국 대함대는 남은 독일 구축함을 격침시키기 위해 나르비크로 향했으나, 독일 폭격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해안선에서 멀어졌다. 4월 12일부터 나르비크에 대한 항공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이에 위트워스가 지휘하는 전함 워스파이트와 강력한 호송함대가 파견되었다.

4월 13일 아침, 위트워스 함장은 워스파이트의 정찰기를 통해 베스트피오르를 정찰, 독일군 구축함 2척을 발견하고 잠수함 1척을 격침시켰다. 워스파이트 함대의 구축함은 전함보다 5km 앞서 진격하다 독일군의 반격을 받아 제2차 나르비크 해전이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독일군 함선은 탄약 부족으로 항구 쪽으로 밀려났다. 오후 들어 대부분의 독일 구축함은 롬박스피오르로 후퇴했으나, 독일 구축함 Z19 헤르만 퀴네는 헤리앙스피오르로 후퇴 중 HMS 에스키모의 공격을 받고 손상되었다. 영국군 구축함 4척이 롬박스피오르로 추격했으나, HMS 에스키모는 독일 구축함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독일군은 연료와 탄약 부족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영국군 함선이 도착하자 독일군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자침했다. 오후 6시 30분경, 영국군은 독일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피오르에서 빠져나왔다.
6. 노르웨이의 상황
독일군의 동시다발적 공격과 노르웨이군의 무장 해제라는 침공 목표는 거의 다 이뤄졌다. 이는 노르웨이 정부가 부분 동원령만 발동하면서 군 병력이 매우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만 상황이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룹 5가 오슬로피오르에서 극심한 반격으로 후퇴해 번 시간으로 노르웨이 정부와 왕가는 오슬로에서 하마르로 피난을 갔다. 정부가 피난을 가버리자 비드쿤 크비슬링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여 쿠데타를 선포하였고 새 노르웨이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크비슬링의 쿠데타와 그의 새 내각 목록은 오후 7시 32분 발표되었다. 크비슬링 내각은 4월 15일 노르웨이 최고 법원이 점령 노르웨이 지역의 민간행정을 지휘할 행정위원회를 임명하고 크비슬링이 사임하면서 해체되었다.[142][164]
4월 9일 저녁, 노르웨이 정부는 하마르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엘베룸으로 다시 피난갔다. 독일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노르웨이 의원들이 엘베룸 수권법을 통과시켜 평시 상황에서 다음 의회를 수립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각에 광범위한 국가의사결정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내각 구성원들은 독일과 교섭을 이어가야 하는 데 동의하며 다음 날 예정된 독일과의 협상에 나가기로 했다. 노르웨이 보병 장군총감인 대령 오토 루게는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미츠코겐 지역에 바리케이드 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대사관 항공군사주재관 에베르하르트 슈필러가 이끄는 독일군 분견대가 호콘 7세를 생포하기 위해 노르웨이군을 공격했다. 수 시간의 교전 끝에 독일군 지휘관 슈필러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독일군은 후퇴하였다. 4월 10일에는 호콘 7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대표단이 크비슬링 내각을 노르웨이 새 정부로 인정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노르웨이와 독일 간 최후 협상이 결렬되었다.[142][165][166][167] 같은 날 독일군이 점령한 오슬로에서는 영국군 폭격기가 오슬로를 폭격 할 수도 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공황의 날" 당시 오슬로 시민 대부분은 외곽 시골로 피난가 도주했으며 같은 날 저녁에서 다음 날이 되어야 하나둘씩 돌아왔다. 에게르순과 같이 독일군이 점령한 해안 도시에서 비슷한 소문이 퍼지며 다들 공황에 빠졌다. 이 소문을 누가 처음 퍼뜨렸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168]
노르웨이-독일 간의 최종 협상이 결렬된 다음 날인 4월 11일, 독일 폭격기 19기가 엘베룸을 폭격했다. 2시간가량의 폭격으로 마을 중심지가 폐허가 되었고 41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엔 루프트바페 폭격기 11기가 노르웨이 대공과 내각을 섬멸할 목적으로 뉘베르순도 폭격하였다.[159][169][170][171]
노르웨이 내각은 오슬로를 떠나 피난 가기 직전 4월 10일 오토 루게를 소장으로 승진시키고 노르웨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도록 지시했다.[142] 루게는 65세의 노르웨이군 총사령관인 장군 크리스티안 로케의 후임으로 들어왔는데, 로케 장군은 독일 침공 초기 수동적으로 행동했다는 비판을 받고 경질되었다. 노르웨이 내각은 로케 장군이 패배주의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172] 루게 장군이 노르웨이군에게 독일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 노르웨이군의 입장이 확실해졌다.[154] 하지만 독일군이 노르웨이의 주요 대도시, 항구, 비행장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무기와 통신시설도 장악했기 때문에 독일군을 완전히 내쫓는 건 불가능했다. 루게는 마지막 찬스는 시간을 버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막아내기로 결정하였다.[173]
7. 지상 전역
독일의 침공 의도가 명확해지자 영국군은 반격을 준비했다. 영국군 내에서는 오토 루게와의 협의 후 중부 노르웨이의 트론헤임에 상륙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윈스턴 처칠은 나르비크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타협안으로 양쪽 모두에 군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코크 경 제독이 연합군의 작전을 총괄했다.[49]
독일 구축함 10척이 나르비크를 점령했지만, 항구에는 5척만 남아 있었고, 다른 3척은 북쪽, 2척은 서쪽으로 이동했다.[38] 다음 날 아침, 워버턴-리 제독은 기함 와 다른 구축함 4척(, , , )을 이끌고 오포트 피오르로 진입했다. 04시 30분, 나르비크 항구에 도착하여 및 과 함께 진입했고, 와 은 입구를 지키고 해안 포대를 감시하도록 했다. 안개와 눈 덕분에 워버턴-리 함대는 탐지되지 않고 접근, 항구에서 독일 구축함 5척을 발견하고 포격을 시작하여 제1차 나르비크 해전이 시작되었다. 워버턴-리 함선들은 적 함선을 세 번 공격했고, 첫 번째 공격 후 와 이 합류했으며, 구축함 2척을 격침시키고 다른 1척을 무력화시켰으며, 유조선과 보급선 6척을 격침시켰다. 독일 사령관 프리드리히 본테 제독은 기함 가 격침되면서 사망했다.
그러나 워버턴-리 함장은 마지막으로 독일 구축함을 공격하기로 결정하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영국 함대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북쪽과 서쪽에서 온 독일 구축함들이 06시에 영국 함대에 합류했다. 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좌초되었고, 워버턴-리 제독은 사망했다. 와 는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는 침몰하는 와 충돌했다. 한편 과 은 앞서 질주했지만 방향을 바꿔 의 퇴각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 독일 구축함들은 연료와 탄약이 부족했고, 과 은 돌아와 의 퇴각을 도울 수 있었다.
7. 1. 동부 노르웨이 전역
오토 루게 총사령관은 4월 10일 임명된 후, 독일군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트론헤임의 부대와 연결되는 것을 최대한 막고 지연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동부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군은 연합군이 트론헤임을 장악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오슬로의 독일 주력군에 대해 반격을 시도했다. 오슬로피오르 주변 지역 방어는 제1사단이, 동부 노르웨이 나머지 지역은 제2사단이 맡았다. 그러나 독일의 침공으로 질서정연한 동원이 불가능해지자, 노르웨이군 부대들은 즉흥적으로 독일군에 대항하였다.[151][175][176][177][178]
독일군은 4월 14일부터 오슬로 북쪽에 있는 구드브란스달렌과 외스테르알렌 계곡으로 공세를 시작, 회네포스를 점령한 후 북쪽에서 노르웨이군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4월 15일 헤우스뷔그에서 노르웨이 보병연대 제6부대가 독일군의 저항을 막았으나, 다음 날 독일군은 전차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뚫었다. 대전차 무기가 부족했던 노르웨이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151][175][176][177][178]

4월 13일과 14일, 노르웨이 제1사단 병력 3천 명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넘어가고, 콩스베르그에 있는 헤이스타모엔 육군기지의 제3보병연대 2개 대대가 항복하면서 노르웨이의 대전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4월 15일에는 세테스달에서 제3사단이 항복하여 약 2천 명의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 4월 20일 영국-프랑스 회담 결과 트론헤임 탈환 계획을 포기하면서 루게의 전략은 실현 불가능해졌다.[151][176][179]
온달스네스에 상륙했던 영국군은 동부 노르웨이 방면으로 후퇴했다. 4월 20일까지 영국군 반 개 대대 정도 되는 병력이 릴레함메르 인근의 포베르그에 도착했다. 당시 동부 노르웨이에 있던 영국군은 제148보병여단과 제15보병여단이었다.[180][206]
이후 독일군은 오슬로 북쪽으로 진격하여 구드브란스달렌 계곡을 향해 노르웨이군 및 영국군과 계속 전투했다. 트레텐, 포방, 빈스트라, 크밤 등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다른 쪽 독일군은 발레스와 외스테르알렌 계곡을 향해 진격했는데, 노르웨이의 초기 반격이 성공하여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181]

독일군은 융커스 Ju 87 급강하폭격기를 통해 노르웨이군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노르웨이군은 대공 무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항공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또한 노르웨이군은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한 대응책이 없었다.[159][178]
영국 왕립 공군 제263비행대가 레샤스코그스바트네트 호수 위에 기지를 세워 독일군의 제공권에 대항하려 했으나, 4월 25일 독일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비행기를 손실했다. 살아남은 글로스터 글레디에이터 4기는 4월 26일 세트네스모엔으로 피난갔으나, 4월 29일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기지가 황폐화되었다.[182][183]
7. 2. 남부 노르웨이 전선의 붕괴
크리스티안산을 점령한 독일군은 민간인들의 피난을 허용했지만, 크리스티안산 주변 지역 장악을 시도했다. 며칠 동안 노르웨이군은 혼란과 공황에 빠졌고, 결국 2천 명 규모의 남부 노르웨이 제3사단 병력은 전투 한번 없이 4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179][184][54][59] 이는 노르웨이군의 무능함과 지휘부의 리더십 부재를 보여주는 뼈아픈 사건이었다.7. 3. 서부 노르웨이 전역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은 서부 노르웨이의 주요 도시인 베르겐과 스타방에르를 점령했다. 약 2,000명의 독일군이 베르겐을 점령하고 노르웨이군 무기고를 탈취했다. 베르겐에 주둔하던 소규모 노르웨이군은 동쪽으로 퇴각하며 철교 2개와 도로 일부를 폭파했다.[179][185][186] 지역 사령관 빌리암 스테펜스 장군은 총동원령을 내렸고, 서부 노르웨이 방어를 담당하는 6,000명 규모의 제4사단이 호르달란주 보스 주변에 동원되었다. 제4사단은 노르웨이 북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완전 동원된 부대였다.[179][185][186] 이들은 베르겐 선 철로를 따라 진격하는 독일군을 격퇴했다.[187]
제5사단 병력이 온달스네스 영국군 상륙을 엄호하는 동안, 스테펜스는 베르겐 탈환을 계획했다.[179] 제4사단 병력 6,361명과 말 554마리가 동원되었으나,[186] 4월 16일 오토 루게 장군이 병력 대부분을 동부 노르웨이로 재배치하면서 계획은 취소되었다. 서부 노르웨이에 남은 병력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역할로 변경되었다.[188] 탱크-닐슨 제독이 지휘하는 노르웨이 해군은 하르당에르 피오르와 소그네 피오르를 방어했다. 독일군 점령 후 노르웨이 해군은 서부 노르웨이에 17~18척의 군함과 5~6대의 항공기를 배치했다.[189] 4월 23~25일 루프트바페의 보스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4월 26일 독일군이 보스를 점령했다.[190][191]
보스 함락 후, 스테펜스 장군은 5월 28일 남은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켰다(레르달 소규모 부대 제외).[192] 그는 푀르데에 본부를 설치하고 소그노피오라네주 방어를 준비했다.[193] 4월 30일, 오토 루게 장군으로부터 남부 노르웨이 연합군 및 노르웨이군 철수 소식을 들었다.[194] 지원이 끊기자 1940년 5월 1일, 스테펜스는 병력 해산을 명령했다.[194] 독일군은 노르웨이군과 합의하여 해를 끼치지 않았다.[195] 5월 1~2일 밤, 스테판스 장군은 해군 항공기 3대와 함께 트롬쇠로 떠났다. 호르달란주와 소그노피오라네주에는 연합군 지상군이 없었다.[196] 다른 항공기 2대는 영국으로 갔다. 노르웨이 해군 함선들은 영국이나 북부 노르웨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만 영국으로 갔다. 나머지는 탈영이나 지휘관의 판단으로 해산했다. 서부 노르웨이의 마지막 노르웨이군은 1940년 5월 18일 플로뢰에서 해산했다.[197]
7. 4. 중앙 노르웨이 전역

원래 중앙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은 노르웨이군이 남쪽에서 독일군을 포위하는 동안 연합군이 트론헤임을 세 방향에서 공격하는 햄머 작전을 펼칠 예정이었다.[173] 이 작전은 북쪽에서는 남소스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공격(남소스 방면군, Mauriceforce)하고, 남쪽에서는 온달스네스에서 공격(온달스네스 방면군, Sickleforce)하며, 트론헤임 주변에서 직접 공격(Hammerforce)하는 세 방향 공격 작전이었다. 그러나 트론헤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위험이 크다고 판단되어 북쪽과 남쪽에서만 공격하는 것으로 작전이 변경되었다.[132]
국방군최고사령부는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해 팔시름예거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구브란스달렌 계곡과 돔보스를 잇는 철도 교차점에 전투 강하를 지시했다. 이 부대는 4월 14일 상륙하여 4월 19일 노르웨이군에게 항복할 때까지 5일간 중앙 노르웨이의 철도 및 도로 중심지역을 차단하였다.[198]
4월 12일, 온달스네스에 영국군 선봉대가 도착했다. 4월 17일에는 소장 베너드 패겟이 지휘하는 영국 제148보병여단이 중심이 된 온달스네스 방면군이 상륙하였다.[200][199] 온달스네스 지역은 노르웨이군의 동원도 완료되어 영국군이 제대로 상륙할 수 있었다.[179]
한편 4월 14일 새벽, 소장 아드리안 카르톤 드 비아르가 지휘하는 영국 제146보병여단이 주력이 된 남소스 방면군이 노르웨이의 남소스에 첫 상륙을 시작하였다.[200][201][202] 남소스로 상륙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피오르의 좁은 해역을 덩치가 큰 수송선이 통과할 수 없어 병력들은 구축함으로 옮겨져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보급품과 여단 지휘관이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이동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남소스 방면군은 대공무기도 부족했고 항공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의 공습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4월 17일, 남소스에서 폴라포스와 스테인셰르 마을로 이동하였다.[201][202] 4월 19일에는 프랑스군도 남소스에 상륙했다. 4월 20일, 독일군이 남소스를 폭격하여 도심의 거주지가 거의 다 파괴되었고 연합군 병력을 위한 보급시설도 완전히 파괴되어 아드리안 장군은 기지를 떠났다.[202][2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 장군은 130km 내륙에 있는 스테인셰르로 이동하여 노르웨이 제5사단과 조우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항공 공격으로 공세를 펼칠 수 없었고 4월 21일에는 트론헤임에서 진격한 독일군 제181보병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아드리안 장군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후퇴했으며 스테인셰르는 비었다. 4월 21일, 22일 양일간 독일 공군은 스테인셰르를 폭격하여 시가지의 4/5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4월 24일, 독일군이 스테인셰르 및 인근 지역을 장악하였다.[204][205]

7. 5. 중앙 및 남부 노르웨이 장악

4월 28일, 독일군 2개 그룹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연합군 지도부는 남부와 중앙 노르웨이에서 모든 영국군 및 프랑스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42] 연합군은 퇴각할 때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비무장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르웨이군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했다.[167][182] 4월 30일, 독일군의 진격으로 오슬로와 트론헤임의 부대가 서로 만났다.[173]
같은 달 28일과 29일, 무방비 항구도시 크리스티안순과 근처 항구 몰데는 노르웨이 내각과 왕가의 본부가 있다는 이유로 독일 공군의 심한 폭격을 받았다.[170][206][207] 4월 30일에는 올레순 마을도 독일군의 심각한 폭격을 받았다.
온달스네스 방면군은 독일군 제196사단이 항구를 점령하기 수 시간 전인 5월 2일 오전 2시 온달스네스 항구에서 탈출했다.[142] 서부 노르웨이의 항구는 4월 23일에서 26일 사이 전부 강력한 폭격을 받았고 4월 27일까지 불타올랐다. 온달스네스 기차역 주변 지역과 벱룽스네스 지역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199] 독일군이 온달스네스를 점령했을 때엔 시가지의 80% 정도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208]짙은 안개로 호송대가 늦어진 남소스 방면군은 5월 2일 남소스에서 탈출했는데, 탈출함 2척인 프랑스 구축함 비송과 영국군 구축함 HMS 아프리디가 융커스 Ju 87 급강하폭격기의 공격으로 침몰하였다.[132][202]
중앙 및 남부 노르웨이 지역에서 노르웨이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5월 5일 쇠르트뢰넬라그주의 헤그라 요새 병력과 텔레마르크주의 비녜스빙엔 병력이 항복하면서 끝났다.[142]
중앙 노르웨이 전역의 처참한 패배는 영국 정계에 엄청난 압력을 가져왔고, 노르웨이 토론으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사임하고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었다.[132]
7. 6. 북부 노르웨이 전역
카를 구스타프 플라이셔 장군이 지휘하는 노르웨이 제6사단은 나르비크에서 독일 침략군과 대치했다. 독일의 침략 이후 플라이셔 장군은 노르웨이 북부의 모든 노르웨이군 사령관 직을 맡았다. 플라이셔가 북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동부 핀마르크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나르비크에서 독일군에 대한 노르웨이의 반격이 방해를 받았다.[9]
트론헤임을 목표로 하는 오운달스네스와 남소스에서의 연합군 상륙과 함께, 추가 병력이 노르웨이 북부에 배치되어 나르비크를 탈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남부에서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나르비크 원정 역시 수많은 난관에 직면했다.
연합군이 직면한 첫 번째 문제 중 하나는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심지어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지역의 해군은 가능한 한 빨리 독일군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함대 제독 윌리엄 보일이 지휘했다. 반면, 지상군 사령관인 피어스 조셉 매케시 소장은 독일군이 강력하게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병력을 상륙시키지 말고, 인구 밀집 지역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두 사람은 최선의 행동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4월 15일에 만났다. 코크 경은 즉시 나르비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매케시는 그러한 공격이 공격 병력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크는 결국 매케시의 견해에 동의했다.
매케시의 부대는 원래 "에이본포스"('Avonforce')라는 암호명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루퍼트포스"('Rupertforce')로 변경되었다.[85][86] 이 부대는 윌리엄 프레이저 준장이 이끄는 제24 근위 보병 여단과 앙투안 베투아르 준장이 이끄는 프랑스군 및 폴란드군 부대로 구성되었다.[75] 주력 부대는 4월 14일 힌뇌위 섬의 항구 도시인 하르스타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하르스타에 대한 첫 번째 독일 공습은 4월 16일에 시작되었지만, 대공 방어는 5월 20일에 유조선과 민가를 파괴한 공습과 5월 23일에 항구에 정박해 있던 연합군 선박을 타격한 공습 전까지 심각한 피해를 막았다.[87]
4월 15일, 연합군은 호송대 NP1을 호위하던 영국 해군 구축함 HMS 브래즌과 HMS 피어리스가 독일 U-보트 U-49를 보그스피오르덴에서 강제로 부상시켜 자침하게 만들면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침몰하는 U-보트 주변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노르웨이 작전 지역의 모든 U-보트의 배치, 암호 및 작전 명령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연합군은 노르웨이 북부 작전에 대한 병력 및 보급 호송 계획을 세울 때 효과적이고 귀중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88]
연합군이 노르웨이 중부에서 실패한 후, 북부 부대에 더 많은 준비가 이루어졌다. 바르두포스 공군 기지에서 운용되는 항공모함 수송 전투기 2개 비행대가 공중 엄호를 제공했으며, 재장비를 마친 제263 비행대대는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로, 제46 비행대대는 호커 허리케인으로 무장했다.[89]

노르웨이 북부에서 연합군의 반격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군은 5월 13일 비에르크비크에 상륙했다. 지원하는 연합군 군함의 함포 사격으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독일군이 비에르크비크에서 쫓겨나기 전에 민간인 14명이 사망했다.[16][21]
노르웨이군과 연합군이 나르비크에서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은 노르들란을 통해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포위된 디틀의 병력을 구원했다. 트론헤임 근처의 점령된 뵈르네스 공군 기지는 나르비크 지역을 지원하기 위한 공군 기지를 제공하기 위해 빠르게 확장되고 개선되었다.[98] 독일군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하트펠달 공항의 기본적인 시설도 확보하여 폭격 작전을 지원했다.[90]
4월 말, 10개의 독립 중대가 영국에서 콜린 거빈스 중령의 지휘 하에 편성되었다. 5월 2일, 이 중 4개 중대는 거빈스의 지휘 하에 "가위 부대"('Scissorsforce')로 편성되어 보되, 모 이 라나, 모쇼엔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비록 그들은 모쇼엔 남쪽에서 선두의 독일군 부대를 매복했지만, 독일 주력 부대에 비해 열세였고, 제24 근위 보병 여단이 방어하기로 한 보되로 철수했다.[91]
제24 근위 보병 여단이 보되로 이동함에 따라, 프레이저 준장을 태운 구축함 HMS 소말리가 폭격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빈스는 대령의 임시 계급으로 여단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5월 15일, 제1 아일랜드 근위대를 태운 수송선 MS 크로브리가 폭격을 받아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이틀 후 제2 사우스 웨일스 보더러스의 장비 대부분을 싣고 있던 중순양함 HMS 에핑험이 좌초되었다. 두 대대는 하르스타로 돌아와 재편성 및 재장비를 한 후 다시 보되로 출발했다.[92]

독일군이 모쇼엔의 철도 종착역에서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모 이 라나의 수비대(제1 스코츠 근위대를 기반으로 한 혼성 부대)는 5월 18일에 철수했는데, 이는 거빈스의 의견으로는 너무 성급했다. 스코츠 근위대 지휘관인 토마스 버넌드 트라페스-로맥스 중령은 잇따른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후퇴했으며, 여단의 나머지 부대가 늦게 도착하면서 거빈스는 스토르요르드에 방어 진지를 마련할 시간이 없었다. 여단은 5월 25일, 제1 아일랜드 근위대와 휴 스톡웰 중령 휘하의 몇몇 독립 중대의 후위 부대의 엄호 하에 셰르스타 피오르를 건너 심한 압박 속에서 철수했다.[93]
5월 27일 저녁, 보되는 루프트바페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았다. 폭격으로 최근에 건설된 임시 활주로, 라디오 방송국, 마을의 760개 건물 중 420개가 파괴되어 15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노숙자가 되었다.[94][95]
거빈스의 부대는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 보되에서 철수했다. 이 3일 동안, 낮은 구름으로 인해 루프트바페는 방해할 수 없었다.[96] 5월 27일 공습으로 파괴된 임시 활주로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 나르비크 전투에 훨씬 더 가까운 공군 기지를 제공하여 독일군의 계속된 북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98][95][97]
5월 28일, 프랑스군 2개 대대와 노르웨이군 1개 대대가 독일군으로부터 나르비크를 공격하여 탈환했다. 도시 남쪽에서는 폴란드군이 베이스피오르드를 따라 동쪽으로 진격했다. 다른 노르웨이군은 독일군을 비에르네피엘, 노르들란 근처의 스웨덴 국경 방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으로 전쟁의 전반적인 상황이 엄청나게 변화했고 노르웨이의 중요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5월 25일, 나르비크를 탈환하기 3일 전에 연합군 사령관들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도시 공격은 독일군에게 연합군의 노르웨이 철수 의도를 숨기기 위해 부분적으로 수행되었다.[6][21][48][98] 5월 28일 연합군이 나르비크를 탈환한 직후, 도시는 루프트바페의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괴되었다.[21]

8. 연합국의 철수와 노르웨이의 항복
알파벳 작전은 1940년 5월 24일에 승인되었다. 노르웨이에서의 연합군 철수는 윈스턴 처칠이 나중에 실수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반대가 있었던 결정이었다.[167] 노르웨이 정부는 6월 1일에야 연합군의 철수 통보를 받았다. 6월 7일 회담에서 해외에서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후, 호콘 7세, 올라프 왕세자 및 노르웨이 내각은 영국 순양함 HMS 데번셔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142][224] 연합군의 지원이 끊기면서 노르웨이군은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167]
국왕과 왕세자는 처음에는 노르웨이 본토에 남으려 했으나, 영국 외교관 세실 도머가 망명정부를 설득하였다.[166] 왕세자는 노르웨이 본토에 남아 점령 통치를 완화하기 위해 행정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국왕의 고령과 해외 사망 가능성을 고려하여 국왕과 왕세자 모두 망명하기로 결정했다.[225]
1940년 6월 8일, 연합군은 남아있는 모든 철도와 항구를 파괴한 후 철수하였다. 독일군은 주노 작전을 통해 나르비크의 수비군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연합군이 이미 철수 중임을 알고 작전을 변경하여 연합군 함대를 요격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구축함 2척과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가 침몰했지만, 영국 구축함 HMS 아카스타가 샤른호르스트에 어뢰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영국 잠수함 HMS 클라이드가 그나이제나우를 어뢰로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132]
노르웨이 본토에 남아있던 노르웨이군은 1940년 6월 10일 항복했다. 전선에서 싸우던 부대는 6월 8일 철수 명령을 받았고, 6월 9일 24시(6월 10일 자정)에 모든 전투 행위가 중단되었다. 6월 10일 오후 5시, 트론헤임 브리스톨 호텔에서 노르웨이 본토 부대에 대한 공식적인 항복 조약이 체결되었다. 노르웨이군 대표로는 중령 랑느발 로셸 닐센이, 독일군 대표로는 대령 에리히 부셴하겐이 서명했다.[142][226] 같은 날, 나르비크의 노르웨이군도 비에른폘에서 항복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노르웨이 내 마지막 노르웨이군 항복이었으며, 독일군 대표로는 에두아르트 디틀이, 노르웨이군 대표로는 하랄 브레데 홀름이 참여했다.[227] 노르웨이는 총 62일간 독일의 침공에 저항했으며, 이는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저항 기간이었다.[228]
9. 독일의 점령
1940년 6월, 노르웨이 본토의 정규군 부대들이 항복한 후에도 노르웨이의 저항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점령 후반기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독일 점령에 대한 저항 운동은 1940년 가을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지지를 얻고 조직화되었다.[229][230]
독일은 1940년 4월 24일 요제프 테르보펜을 국가판무관으로 하는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하여 민간 행정을 통제했다.[142] 독일군은 노르웨이 망명정부를 무력화하기 위해, 특히 국왕 호콘 7세를 폐위시키려 했다. 7월 3일, 호콘 7세는 폐위 요구를 거부하고 7월 8일 BBC 방송을 통해 연설했다. "짐은 아니라고 단언한다"(The King's No)로 알려진 이 연설은 점령 지역의 저항 운동을 고취하고 노르웨이 정부 지지를 호소했다.[142][231] 1940년 4월 15일, 노르웨이 대법원이 임명한 행정위원회는 9월 25일까지 점령지 행정을 총괄했다. 이후 독일은 크비슬링 정권을 앞세워 노르웨이를 통치했다.[164]
자유 노르웨이군은 영국에서 노르웨이 왕립 해군과 노르웨이 왕립 공군을 재건했다.[232] 이들은 북대서양 호송대 해전과 유럽 전역의 전투에 참여했다. 노르웨이 해군은 1940년 6월 15척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 58척으로 증가했고, 승무원은 총 7천 명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노르웨이 해군은 총 118척을 지휘했다.[151][232]
스코틀랜드에서는 약 4천 명 규모의 노르웨이 육군이 재건되었다. 이들은 1944-45년 겨울 핀마르크 해방 작전에 참여했다.[151][234]
중립국 스웨덴에서는 스웨덴 정부의 도움으로 경찰군단이 수립되어 활동했다. 이들은 사실상 군사 조직이었으며, 유럽 전구 종전까지 13,000명이 활동했다. 1945년에는 경찰군단 1,300명이 핀마르크 해방 작전에 참여했다.[235]
노르웨이 망명정부는 레지스탕스 조직 밀로르그(Milorg)를 정규군으로 선포했으며, 종전까지 4만 명이 활동했다.[151][229]
10. 사상자 및 물적 손실
노르웨이 전역에서 양측은 상당한 인명 및 물적 피해를 입었다.
구분 | 총계 | 사망 | 부상 및 실종 |
---|---|---|---|
독일군 | 5,296명 | 육상 1,317명 해상 2,375명[236][237] | 1,604명[236][237] |
노르웨이군 및 연합군 | 6,602명 | 노르웨이군 860명 영국군 해상 2,500명 기타 1,869명 프랑스 및 폴란드군 533명[236] | 해당사항 없음 |
독일 해군은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 유보트 6척 등이 격침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함 2척과 순양함 2척도 손상을 입었다.[240] 독일 측 공식 자료에 따르면 항공기 90대가 손실되었으며, 최대 240대까지 손실되었다는 추정도 있다.[239] 또한, 수송선과 상선 21척(111,700톤)을 잃었는데, 이는 당시 독일 상선의 약 10%에 해당한다.[241]
노르웨이 해군은 121척의 함선 중 나포한 독일군 트롤선을 포함한 15척만 영국으로 탈출하고, 나머지는 격침, 자침, 나포되어 사실상 전멸했다.[232][243]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잠수함 1척을 손실했으나, 큰 규모 덕분에 피해가 상쇄되었다.[132] 프랑스 해군은 구축함 비송과 잠수함 1척이 격침되고 순양함 1척이 대파되었으며, 망명 폴란드 해군은 구축함 ORP 그롬과 잠수함 ORP 오제우를 잃었다.[132][239]
연합군과 노르웨이군은 상선 및 수송선 70척 가량을 잃었다.[241] 영국군은 항공기 112기를 손실했고, 노르웨이군은 소수의 항공기를 제외한 대부분을 잃었다.[241]
전쟁 중 노르웨이 민간인 400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였다.[236] 독일군은 동부 노르웨이에서 민간인 60명을 학살하기도 했다.[242]
10. 1. 독일군
노르웨이 전역에서 독일군의 공식적인 사상자는 총 5,296명이었다. 이 중 육상에서 1,317명이 사망했고, 해상에서 2,375명이 사망했으며, 1,604명이 부상을 입었다.[236][237]독일 해군은 큰 피해를 보았는데, 중순양함 2척 중 1척, 경순양함 6척 중 2척, 구축함 20척 중 10척, 유보트 6척이 격침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수상함들이 심각한 피해를 보아, 전역 직후 독일의 가용 수상함대는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만 남았다.[132][238] 어뢰정 2척과 보조함 15척도 격침되었고,[239] 전함 2척과 순양함 2척도 손상을 입었다.[240]
독일 측 공식 자료에 따르면 노르웨이 전역에서 손실된 독일 항공기는 90대였으며, 역사학자 프랑수아 케르소디는 최대 240대까지 이른다고 추정한다.[239]
독일은 수송선과 상선 21척(111,700톤)을 잃었는데, 이는 당시 독일이 보유한 상선의 약 10%에 해당한다.[241]
10. 2. 노르웨이군 및 연합군
노르웨이 전역에서 노르웨이군과 연합군의 총 사상자는 6,602명이었다. 영국군은 지상전에서 1,869명이 사망, 부상, 실종되었고, 해상전에서 2,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프랑스군 및 폴란드군은 533명이 사망, 부상, 실종되었다. 노르웨이군의 총 사상자는 1,700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860명이었다. 전쟁 동안 노르웨이 민간인 400명도 사망했는데, 거의 대부분은 독일군의 기습폭격으로 인한 폭사였다.[236] 동부 노르웨이에서 독일군이 노르웨이 민간인 60명을 살해했는데, 이 중 대다수는 즉결처형이었다.[242]
노르웨이 해군은 독일 침공 당시 121척의 구식 선박을 운용했으나, 전역 기간 동안 사실상 전멸했다. 나포한 독일군 트롤선을 포함한 15척만 전투가 끝날 무렵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남은 노르웨이군 함선은 격침되거나 승무원이 자침시켰으며, 이 외에는 독일군에 나포되었다. 격침된 함선으로는 해방전함(연안감시선) 2척과 구축함 2척이 있다. 어뢰정 7척도 격침되거나 자침하였고, 나머지 10척은 독일군에 나포되었다. 노르웨이 잠수함 9척 중에서도 1척만이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나머지는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232][243] 독일 해군은 나포한 노르웨이군 함정 50척을 운용했다.[239]
영국군은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잠수함 1척을 손실하였으나, 독일보다 훨씬 큰 해군 규모 덕분에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132]
프랑스 해군은 전역 기간 동안 구축함 비송과 잠수함 1척이 격침되었으며, 순양함 1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망명 폴란드 해군은 구축함 ORP 그롬과 잠수함 ORP 오제우가 격침되는 피해가 있었다.[132][239]
영국군은 항공기 112기를 손실했으며,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영국으로 탈출하거나 중립국인 핀란드로 탈출한 소수의 항공기를 제외하면 모두 손실되었다.[241]
연합군 및 노르웨이군의 상선 및 수송선 70척 가량도 피해를 입었다.[241]
11. 분석
독일의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특히 덴마크에서는 기습 공격이 매우 효과적이었다.[238]
그러나 해상에서는 독일 해군이 큰 손실을 입었다.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을 잃어, 1941년 여름 영국 침공 계획 논의 시 해군력이 미약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132][238]
노르웨이 전역은 독일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값비싼 사업이었다. 노르웨이 점령을 위해 배치한 군사들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이 컸다.[132][244]
노르타십 프로젝트는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경제적 독립과 저항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1,028척의 함선을 가진 노르타십은 4월 22일 롬스달의 스투구플로텐 회담에서 시작되었으며, 전쟁 전 노르웨이 상선단의 85%를 차지했다. 노르타십 상선단의 승무원은 27,000명이었고, 노르웨이 전역 기간 동안 43척이 격침되고 29척이 중립국 스웨덴에 나포되었다.[142][245][246][247]
연합군은 나르비크 항구 시설을 파괴하여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항구는 6개월 후 재가동되었지만, 연합군은 1년 동안 중단될 것으로 예상했다.[132][248]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은 연합군에게 장기적인 부담을 주었다. 노르웨이 솔라 기지에서 스코틀랜드 래트래이 헤드까지의 폭격 거리가 짧아져 스코틀랜드 지역이 공격에 취약해졌다. 독일군은 노르웨이를 북대서양 진출 기지로 활용했고,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에는 연합군의 북극해 호송대 공격 기지로도 이용했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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