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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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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톡홀름 피바다는 1520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의 독립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당시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스웨덴 민족주의 세력과 친덴마크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을 통치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시도했으나, 스웨덴의 저항에 부딪혔다. 1520년 11월, 크리스티안 2세는 스톡홀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 스웨덴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처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스웨덴에서는 스웨덴 해방 전쟁이 발발하고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스톡홀름 피바다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적대감을 심화시켰으며, 역사적 평가와 영향으로 인해 크리스티안 2세는 "크리스티안 폭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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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피바다
사건 개요
사건명스톡홀름 피바다
다른 이름스톡홀름 대학살
스웨덴어 명칭Stockholms blodbad
발생 시기1520년 11월
발생 장소스웨덴, 스톡홀름
교전 세력
주요 참가 세력칼마르 연합 (덴마크 왕국)
스웨덴 귀족
지휘관크리스티안 2세
구스타브 트롤레
피해 규모
사망자 수80명 이상 (주로 스웨덴 귀족과 성직자)
사건 결과
주요 결과칼마르 연합 붕괴 가속화
구스타브 1세의 반란 촉발 및 스웨덴 독립 전쟁 발발
관련 정보
관련 사건스트레바 전투

2. 배경

15세기 말, 스웨덴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동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스웨덴 내에서는 동맹을 지지하는 친(親)덴마크 세력과 스웨덴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1435년경부터 스웨덴 독립을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고, 덴마크는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했지만, 스웨덴인들은 섭정을 중심으로 덴마크의 지배에 저항했다.[21]

1518년 스웨덴 내 칼마르 동맹 유지파였던 웁살라 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독립파에게 패배하여 덴마크로 추방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에 진군했지만 스톡홀름 부근에서 스투레 군대에 패배했다.[21]

하지만 크리스티안 2세는 1520년에 다수의 프랑스인, 독일인, 스코틀랜드인 용병을 고용하여 다시 스웨덴을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스웨덴 릭스다그(국회)는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법에 따라 통치하고 반란 가담자들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스웨덴 국왕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21] 그러나 스투레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귈렌스티에르나는 스톡홀름에서 저항을 계속했고, 3월 19일 전투에서는 덴마크군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결국 9월 7일에 항복했다. 11월 1일에는 스웨덴 대표들이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 국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했다.[21]

2. 1. 스웨덴의 정치적 분열

칼마르 동맹의 지배를 받던 스웨덴에서는 자유 선거를 통해 섭정으로 임명된 스텐 스투레 덴 윙레가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과 웁살라 대주교 구스타브 트롤레가 이끄는 친(親)덴마크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4]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초기에는 실패하고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출신 용병들을 투입해야 했다.

2. 2. 크리스티안 2세의 군사 개입

칼마르 동맹의 지배를 받던 스웨덴에서는 스텐 스투레(연소자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 민족주의 진영과 웁살라 대주교 구스타브 트롤레가 이끄는 친(親)덴마크 진영이 대립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은 스웨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실패했고,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출신 용병들을 투입하게 된다.[10]

1520년 1월 19일, 보게순드 전투에서 덴마크 군대는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를 격파했고, 스텐 스투레는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1520년 3월 31일에 덴마크 추밀원과 체결한 협정을 통해 스웨덴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스웨덴을 통치한다는 조건을 보장받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10]

크리스티안 왕은 이전에 스태켓 요새에 포위되어 있던 트롤레 대주교를 돕기 위해 개입했으나, 베딜라 전투에서 스투레와 그의 농민 군대에게 패배하여 덴마크로 돌아갔다. 1518년에 스웨덴을 다시 장악하려는 두 번째 시도 또한 브뢰퀴르카 전투에서 스투레의 승리로 저지되었다. 결국, 1520년에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용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세 번째 시도를 감행하여 성공했다.[10]

덴마크 군대는 저항 없이 웁살라로 진군했고, 스웨덴 삼부회 의원들은 과거 행동에 대한 완전한 사면과 스웨덴 법과 관습에 따른 통치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크리스티안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3월 31일에 국왕과 덴마크 국왕 측근회의에 의해 확인되었다.[10]

한편, 스투레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여사는 중부 스웨덴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 스톡홀름에서 저항을 계속했고, 3월 19일 발룬드쇠스 전투에서 덴마크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군대는 웁살라에서 패배했다. (långfredagsslaget vid Uppsala|웁살라의 성 금요일 전투sv) - 부활절 금요일, 4월 6일이었다.[5]

5월, 크리스티안 왕이 이끄는 덴마크 함대가 도착했고, 스톡홀름은 육지와 바다에서 공격을 받았다. 크리스티나 여사는 4개월 동안 더 저항했고, 가을 초에는 크리스티나의 군대가 승리하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주민들은 많은 식량을 가지고 있었고 비교적 상황이 좋았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비축량이 줄어들고 있으며, 겨울 내내 포위 공격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군대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티아스 주교 등의 도움으로 크리스티안은 스웨덴인들에게 매우 유리한 철수 제안을 보냈고, 유르고르덴 밖 벡홀멘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열린 회의에서 크리스티안은 모든 행위가 잊혀질 것이라고 맹세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사면을 내렸다. 크리스티나 여사는 외르닝스홀름과 모든 뫼르큰을 봉토로 받았고, 핀란드의 타바스테후스도 약속받았다. 쇠데르말름에서 도시의 열쇠를 넘겨받은 크리스티안은 웅장하게 입성했고, 얼마 후 덴마크로 돌아가 10월에 즉위식을 위해 돌아왔다.[6]

3. 스톡홀름 피바다

1520년 11월 4일, 크리스티안 2세스톡홀름 대성당(Storkyrkan Cathedral)에서 구스타브 트롤레에 의해 스웨덴 국왕 즉위식을 치렀다. 그는 스웨덴 법률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3일 동안 연회를 열었다.[22] 11월 7일 스웨덴 측 귀족, 성직자, 도시의 자유 시민 유력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처음부터 독립파를 제거하고 스웨덴 독립 운동을 억압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된 손님들이 스톡홀름 왕궁에 입성하자 대문은 닫혔고, 모두 체포되었다.

3. 1. 학살과 숙청

1520년 11월 7일 저녁,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 지도자들을 왕궁의 비밀 회의에 소환했다. 11월 8일 황혼 무렵, 덴마크 군인들이 왕궁에 들어와 여러 귀족들을 투옥했고, 그날 저녁 늦게 더 많은 왕의 손님들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전에 트롤레 대주교의 제명령서에 적혀 있던 인물들이었다.[10]

다음 날인 11월 9일, 트롤레 대주교가 이끄는 의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스투레 당의 주요 인물들이었고 덴마크 왕의 잠재적인 반대자들이었다. 정오에 반연합주의자 주교인 스카라와 스트랭네스 주교가 큰 광장으로 끌려나와 참수되었다. 그 후 14명의 귀족, 3명의 시장, 14명의 시의원, 그리고 스톡홀름의 약 20명의 일반 시민이 교수되거나 참수되었다.[10]

처형은 다음 날(11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10] 주요 처형 집행자인 예르겐 호무트(Jörgen Homuth)에 따르면 82명이 처형되었다.[8] 크리스티안 2세는 또한 스텐 스투레(Sten Sture)의 시체를 파내어 태우고 그의 아이의 시체도 태웠다고 주장되어 왔다.[10] 스투레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귈렌스티에르나(Christina Gyllenstierna) 여사와 다른 많은 귀족 여성들은 덴마크로 포로로 끌려갔다.[9]

4. 사건의 여파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 국민들에게 발표한 선언에서 교황의 파문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학살을 정당화했지만, 주교 참수에 대해서는 교황에게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군대가 무단으로 보복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10][11]

4. 1. 스웨덴 독립 전쟁 발발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스웨덴 독립 전쟁(1521년~1523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인들에게 죄를 용서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지만, 스웨덴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면서 스웨덴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10][11] 구스타브 바사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가 덴마크 군대를 물리치면서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하게 된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처형된 사람들 중 한 명인 에리크 요한손(Erik Johansson)의 아들이었다.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 북쪽 달라르나(Dalarna) 지방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봉기를 위한 지원을 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주민들은 그의 편에 섰다. 그들은 결국 스웨덴 독립 전쟁에서 크리스티안 2세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 학살은 스웨덴과 덴마크를 영원히 분리시킨 촉매제가 되었다.[12] 「스톡홀름 피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젊은 기사 '''구스타브 바사'''는 북부 스웨덴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반란군을 조직하고, 독립파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스웨덴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스웨덴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 젊은 기사가 바로 후일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이다.

4. 2. 칼마르 동맹 해체

1521년부터 1523년까지 구스타브 바사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가 스웨덴 해방 전쟁에서 덴마크 군대를 물리치면서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하게 된다.[10][11]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처형된 사람들 중 한 명인 에리크 요한손(Erik Johansson)의 아들이었다.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 북쪽 달라르나(Dalarna) 지방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봉기를 위한 지원을 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주민들은 그를 지지했다. 그들은 결국 스웨덴 독립 전쟁에서 크리스티안 2세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학살은 스웨덴과 덴마크를 영원히 분리시킨 촉매제가 되었다.[12]

5.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스톡홀름 피바다는 스웨덴과 덴마크 양국 관계와 각국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덴마크에 대한 오랜 적대감이 생겨났고, 이후 양국은 거의 300년 동안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 지역의 패권을 두고 끊임없이 대립했다.[13] 스웨덴인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했으며, 이는 1658년 로스킬레 조약으로 스코네를 정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13]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 "크리스티안 폭군"(Kristian Tyrann)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현재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14] 덴마크에서는 그에게 어떤 별명도 붙여진 적이 없지만,[16] 스웨덴에서는 그가 덴마크에서 "크리스티안 선왕"(Christian den Godeda)으로 불린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져 있기도 하다.[15]

이 사건은 여러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요하네스 V. 옌센의 소설 『왕의 몰락』(1901)[17]
  • 미카 발타리의 소설 『모험가』(1948)[18]
  • 존 가드너의 소설 『프레디의 책』(1980)[19]
  • 도릿 빌럼센의 소설 『Bruden fra Gent』(2005)
  • 미카엘 호프스트룀 감독의 영화 『스톡홀름 피바다』(2023)[20]

5. 1. 스웨덴-덴마크 관계 악화

스톡홀름 피바다는 스웨덴 내 덴마크인들에 대한 오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후 두 나라는 거의 끊임없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이 적대 행위는 거의 3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피바다에 대한 기억은 스웨덴인들이 자신들을 억울하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 묘사하고 (그리고 종종 실제로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이는 심지어 그들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주도권을 잡게 된 경우, 예를 들어 1658년 로스킬레 조약까지 스코네를 정복하고 합병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13]

5. 2. 크리스티안 2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인해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 "크리스티안 티란"(Kristian Tyrann, 크리스티안 폭군)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14] 스웨덴에서는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에서는 반대로 Christian den Godeda(크리스티안 덴 고데, 크리스티안 선왕)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가짜 문서이다.[15]

덴마크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덴마크 역사 전통에서 크리스티안 2세에게는 어떤 별명도 붙여진 적이 없다.[16] 1979년 리처드슨과의 인터뷰에서, ''덴마크인명사전(Dansk Biografisk Leksikon)''에 크리스티안 2세에 관한 글을 쓴 덴마크 역사학자 미카엘 벤게(Mikael Venge)는 "스웨덴 라디오가 덴마크인들이 스톡홀름 피바다를 옹호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할 때마다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스톡홀름의 관광 가이드들은 구시가지를 안내하면서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에서 "재평가"받았다는 소식을 덧붙인다.[16]

5. 3.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스톡홀름 피바다는 여러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1901년 노벨상 수상자 요하네스 V. 옌센의 소설 『왕의 몰락』(The Fall of the King)에서 이 사건이 묘사된다.[17]
  • 1948년 핀란드 작가 미카 발타리의 역사 소설 『모험가』(원제: Mikael Karvajalka)에서 스톡홀름 피바다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스톡홀름에 있던 젊은 핀란드인 미카엘 카르바얄카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묘사한다.[18]
  • 미국 소설가 존 가드너의 『프레디의 책』(1980)에는 스톡홀름 피바다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19]
  • 덴마크 작가 도릿 빌럼센의 2005년 작품 『Bruden fra Gent』(네덜란드어 번역 제목: De Gentse Bruid, 또는 The Bride From Ghent)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된다. 이 책은 크리스티안 2세의 정부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디베케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이사벨라(Isabella of Austria)(오스트리아의 이사벨라), 그리고 그의 처남인 카를 5세와의 관계를 통해 크리스티안 2세의 삶을 조명한다.
  • 미카엘 호프스트룀 감독의 2023년 영화 『스톡홀름 피바다』(Stockholm Bloodbath)는 이 사건을 어두운 코미디적 색채를 띠고 묘사한다.[20]

참조

[1] 문서 Svenska folkets historia Erik Gustaf Geijer 1845
[2] harvnb
[3] 웹사이트 Stockholm Bloodbath https://www.ne.se/up[...] 2014-01-08
[4] 서적 Det Historiske Overblik https://books.google[...] Gyldendal Uddannelse 2013-07-06
[5] 서적 Långfredagsslaget: en arkeologisk historia Upplandsmuseets
[6] 서적 Svensk Historia
[7] 서적 Storkyrkan: en svensk krönika Bonnier
[8] 서적 Stockholms Blodbad Stockholm
[9] 웹사이트 Christian II http://www.gutenberg[...] 2015-05-12
[10] 웹사이트 Christian II.
[11] 서적 Nordisk historia. Forskningar och undersökningar. Del III. Från Erik den helige till Karl XII Stockholm
[12] 웹사이트 The Stockholm Bloodbath of November 1520 https://blogs.loc.go[...] Library of Congress 2021-11-09
[13] 서적 The Northern Wars. War, State and Society in Northeastern Europe 1558–1721 Pearson Education Limited
[14] 서적 Rulers of Sweden https://books.google[...] Historiska Media 2013-07-06
[15] 서적 41 fortællinger om folk i fædrelandets historie https://books.google[...] Lindhardt og Ringhof 2013-07-06
[16] 뉴스 Kristian II – Tyrann eller den gode? https://web.archive.[...] 2002-05-13
[17] 서적 Dansk litteraturs historie: 1870–1920 https://books.google[...] Gyldendal A/S 2013-07-06
[18] 서적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https://books.google[...] Arno Press 2013-07-06
[19] 서적 Book Review Digest https://books.google[...] H.W. Wilson Co. 2013-07-06
[20] Action, History, War Stockholm Bloodbath https://www.imdb.com[...] Nordisk Film, Viaplay Studios 2024-01-18
[21] 문서 스웨덴의 법률에서 국왕은 선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상당히 불규칙적이었다.
[22] 문서 영어로 anointing이라고 하는 기독교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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