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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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랑은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학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삼론을 정립하여 신삼론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그는 하서지방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중국 남방에서 활동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승랑의 제자인 법랑에 의해 삼론학은 섭령흥황으로 불리며 계승되었고, 길장에 의해 삼론종으로 발전했다. 승랑은 이제합명중도설을 주장하며 당시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인으로 중국 불교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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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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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정보 | |
법명 | 미상 |
그림 | 미상 |
그림 설명 | 미상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입적일 | 미상 |
입적지 | 미상 |
종파 | 미상 |
속명 | 미상 |
학력 | 미상 |
출가 | 미상 |
저작 | 미상 |
소속 | 미상 |
수행 | 미상 |
칭호 | 미상 |
직업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부모 | 미상 |
서명 | 미상 |
웹사이트 | 미상 |
각주 | 미상 |
기본 정보 | |
한글 | 승랑 |
한자 | 僧朗 |
로마자 표기 | Seungna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Sŭngnang |
2. 생애와 활동
양무제(梁武帝)는 승랑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천감(天監) 11년(512)에 우수한 학승 10명을 선발하여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2] 이들 중 승전(勝詮)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섭산(攝山)에 머물렀고, 승전을 계승한 법랑(法朗)은 흥황사(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삼론학 학통(學統)을 섭령흥황(攝嶺興皇)이라 부른다.[2]
법랑의 제자인 길장(吉藏, 549∼623)에 이르러 승랑의 삼론학은 독립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으로 성립되었다.[2] 삼론종에서는 구마라습(鳩摩羅什) · 승숭(僧嵩) · 법도(法度) · 승랑(僧朗) · 승전(僧詮) · 법랑(法朗) · 길장(吉藏)을 7대상승(七代相承)이라 하며 7사(師)로 칭송하는데, 이들 중 승랑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2]
길장(吉藏)은 저술 《대승현론(大乘玄論)》 · 《이제의(二諦義)》 등에서 승랑을 섭령대사(攝嶺大師) · 섭산대사(攝山大師) · 대랑법사(大朗法師) · 낭대사(朗大師) 등으로 칭하며 항상 인용하였으며, 이는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불교를 가르친 최초의 인물인 승랑이 중국 불교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2]
2. 1. 초기 활동
승랑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구마라습에서 승조로 이어지는 삼론학을 배웠다.[2] 당시의 삼론학은 《성실론》이라는 소승(小乘)적 유사상(有思想)에 영향을 받고 있어 본래의 삼론학의 진의(眞意)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2] 승랑은 이러한 사상 조류를 탈피하여 새로운 삼론을 설립하였고, 그의 출현에 따라 과거의 삼론학을 고삼론(古三論), 그의 순수삼론학을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어 삼론학의 분수령을 이루었다.[2]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역량은 중국 하서지방에 널리 알려져 하서대랑(河西大朗) 독보하서(獨步河西)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하였다.[2]삼론의 오의(奧義)를 깊이 터득한 승랑은 중국 남방으로 떠나 회계산 강산사(岡山寺)에 머물렀고, 종산 초당사(草堂寺)에 와서는 그곳에 은퇴해 있던 주옹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그로 하여금 《삼종론》이라는 책을 저술케 했다.[2]
만년에 섭산 서하사(棲霞寺)로 와서 그의 스승이며 주지였던 법도화상의 지위를 계승(500)하였다.[2]
2. 2. 신삼론(新三論) 정립
승랑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구마라습에서 승조로 이어지는 삼론학을 배웠다.[2] 당시의 삼론학은 《성실론》이라는 소승적 유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어 본래의 삼론학의 진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2] 승랑은 이러한 사조를 탈피하여 새로운 삼론을 정립하였는데, 그의 출현에 따라 과거의 삼론학을 고삼론(古三論), 그의 순수삼론학을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어 삼론학의 분수령을 이루었다.[2]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역량은 중국 하서 지방에 널리 알려져 하서대랑(河西大朗) 독보하서(獨步河西)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하였다.[2]2. 3. 섭산(攝山)에서의 활동과 영향력
승랑은 만년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와서 스승이자 주지였던 법도화상(法度和尙)의 지위를 계승하였다(500).[2]양무제(梁武帝)는 승랑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천감(天監) 11년(512)에 우수한 학승(學僧) 10명을 선발하여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켰다.[2] 그 학승 가운데 승전(勝詮)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섭산(攝山 혹은 攝嶺)에 머물렀고, 승전을 계승한 법랑(法朗)은 흥황사(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삼론학(三論學) 학통(學統)을 섭령흥황(攝嶺興皇)이라 부른다.[2]
법랑의 제자인 길장(吉藏, 549∼623) 때에 이르러 승랑의 삼론학(三論學)은 독립된 새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으로 성립되었다.[2]
삼론종(三論宗)에서는 구마라습(鳩摩羅什) · 승숭(僧嵩) · 법도(法度) · 승랑(僧朗) · 승전(僧詮) · 법랑(法朗) · 길장(吉藏)을 7대상승(七代相承)이라 칭하며 7사(師)로 내세우는데, 이들 7인의 정통파 가운데 승랑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2]
길장(吉藏)은 저술 《대승현론(大乘玄論)》 · 《이제의(二諦義)》 등에서 승랑을 섭령대사(攝嶺大師) · 섭산대사(攝山大師) · 대랑법사(大朗法師) · 낭대사(朗大師) 등으로 칭하며 항상 인용하였다.[2]
3.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3][4]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5]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4][5]
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4]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약리이제설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第一義諦)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6]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 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3. 1. 개념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3][4]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5]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4][5]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당시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4]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교", 즉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第一義諦)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6]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3. 2.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과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3][4]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5]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4][5]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4]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第一義諦)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6]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 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3. 3. 의의와 영향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3][4]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5]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와 진제의 이제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4][5]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4]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6]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6]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6]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4. 한국 불교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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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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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삼국시대의 사상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 승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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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승랑
[3]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승랑의 사상
[4]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2체합명중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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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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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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