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탕강 굽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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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탕강 굽이 전투는 1945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 제28군이 영국군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일본군은 버마 방면군에 합류하기 위해 시탕강을 건너는 작전을 시도했으나, 영국군의 정보 우위와 우기라는 악조건 속에서 실패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버마 전선에서의 일본군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방 연합군이 참여한 마지막 대규모 육상 전투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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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탕강 굽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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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시탕강 굽이 전투 |
관련 전쟁 | 버마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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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45년 7월 2일 – 1945년 8월 7일 |
장소 | 미얀마 시탕강 페구산맥 |
결과 | 영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영국 인도 버마 |
교전국 2 | 일본 |
지휘관 | |
지휘관 1 | 몬타구 스탑퍼드 프랭크 메저비 프랜시스 터커 (대행) |
지휘관 2 | 기무라 헤이타로 사쿠라이 쇼조 혼다 마사키 |
일본군 지휘관 | 마츠야마 유조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제12군 제4군단 136부대 |
병력 2 | 버마 방면군 (잔존 병력) 제28군 제33군 제15군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총합: 2,000명 전사: 95명 부상: 322명 비전투 사상자: 1,600명 |
사상자 2 | 총합: 14,000명 전사: 8,500명 포로: 740명 비전투 사상자: 5,000명 이상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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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4년 초, 인도 주둔 영국군은 증강되었고 보급 기반 시설을 확장하여 버마로의 공격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은 인도로의 침공 (우고 작전)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임팔 전투와 코히마 전투에서 대패하고 북부 버마에서 패퇴하였다.[7] 윌리엄 슬림과 제14군과의 메이틸라-만달레이 전투에서의 추가 패배 이후, 일본군은 버마 방어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8]
이 무렵, 아웅 산 휘하의 버마 국민군은 (버마 애국군으로 개명하며) 편을 바꿔 일본군 정찰대와 수색대를 사냥하고 있었다.[9]
4월 동안, 영국 및 인도 제4군단은 중앙 버마에서 시탕강 계곡을 따라 483km 전진했다. 일본군의 후위 부대는 수도이자 주요 항구인 양곤까지의 진격을 막았지만, 5월 2일, 양곤은 연합군의 상륙 작전 (드라큘라 작전)으로 함락되었다. 5월 6일, 제4군단의 선두 부대인 제17사단은 양곤 북동쪽 45km 떨어진 흘레구에서 ''드라큘라'' 작전을 수행한 병력과 합류했다.
양곤 함락 후, 슬림 휘하의 제14군 사령부는 실론으로 이동하여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제33군단 사령부에서 신설된 제12군 사령부는 몬터규 스토포드 중장이 지휘했다. 제12군은 시탕 계곡의 제4군단을 인수하고 이라와디 계곡의 일부 사단을 직접 지휘했다.[10]
사쿠라이 쇼조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28군은 아라칸과 이라와디강 계곡에서 후퇴한 후, 중앙 버마의 이라와디강과 시탕강 사이에 있는 낮은 산, 구릉, 고원 지대인 페구 요마스에 도달했다.[11] 그들은 또한 제4군단과 맞섰던, "카니" 부대라고도 불리는 마쓰이 히데지 소장의 제105독립혼성여단(대공포 부대, 비행장 건설 대대, 해군 앵커리지 부대 및 부사관 학교 병력)과 합류했다.[3]
페구 요마스에 갇힌 일본군은 버마 방면군에 합류하여 태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탈출 작전을 준비했다. 시탕강은 건널 수 없었고, 1942년 최초의 시탕교 전투 당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군사적 장벽이었다.[12]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는 제33군에게 시탕강을 가로지르는 양동 작전을 통해 이 탈출을 엄호하도록 명령했지만, 해당 군은 겨우 한 개 여단 정도의 병력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이 작전의 지원을 위해 제15군은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제28군과 협력하기로 했다.[9]
2. 1. 전황 악화
1944년 초, 인도 주둔 영국군은 증강되었고 보급 기반 시설을 확장하여 버마로의 공격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은 인도로의 침공 (우고 작전)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임팔 전투와 코히마 전투에서 대패하고 북부 버마에서 패퇴하였다.[7] 윌리엄 슬림과 제14군과의 메이틸라-만달레이 전투에서의 추가 패배 이후, 일본군은 버마 방어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8]이 무렵, 아웅 산 휘하의 버마 국민군은 (버마 애국군으로 개명하며) 편을 바꿔 일본군 정찰대와 수색대를 사냥하고 있었다.[9]
4월 동안, 영국 및 인도 제4군단은 중앙 버마에서 시탕강 계곡을 따라 483km 전진했다. 일본군의 후위 부대는 수도이자 주요 항구인 양곤까지의 진격을 막았지만, 5월 2일, 양곤은 연합군의 상륙 작전 (드라큘라 작전)으로 함락되었다. 5월 6일, 제4군단의 선두 부대인 제17사단은 양곤 북동쪽 45km 떨어진 흘레구에서 ''드라큘라'' 작전을 수행한 병력과 합류했다.
양곤 함락 후, 슬림 휘하의 제14군 사령부는 실론으로 이동하여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제33군단 사령부에서 신설된 제12군 사령부는 몬터규 스토포드 중장이 지휘했다. 제12군은 시탕 계곡의 제4군단을 인수하고 이라와디 계곡의 일부 사단을 직접 지휘했다.[10]
사쿠라이 쇼조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28군은 아라칸과 이라와디강 계곡에서 후퇴한 후, 중앙 버마의 이라와디강과 시탕강 사이에 있는 낮은 산, 구릉, 고원 지대인 페구 요마스에 도달했다.[11] 그들은 또한 제4군단과 맞섰던, "카니" 부대라고도 불리는 마쓰이 히데지 소장의 제105독립혼성여단(대공포 부대, 비행장 건설 대대, 해군 앵커리지 부대 및 부사관 학교 병력)과 합류했다.[3]
페구 요마스에 갇힌 일본군은 버마 방면군에 합류하여 태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탈출 작전을 준비했다. 시탕강은 건널 수 없었고, 1942년 최초의 시탕교 전투 당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군사적 장벽이었다.[12]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는 제33군에게 시탕강을 가로지르는 양동 작전을 통해 이 탈출을 엄호하도록 명령했지만, 해당 군은 겨우 한 개 여단 정도의 병력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이 작전의 지원을 위해 제15군은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제28군과 협력하기로 했다.[9]
2. 2. 일본군의 고립과 철수 계획
1944년 초, 인도 주둔 영국군은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버마로의 공격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우고 작전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이는 일본의 대패로 이어졌다.[7] 윌리엄 슬림 휘하 제14군과의 메이틸라-만달레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버마 방어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8]1945년 4월, 영국군과 인도군의 제4군단은 중앙 버마에서 시탕강 계곡을 따라 300마일(483km)을 전진했다. 일본군 후위 부대는 수도이자 주요 항구인 양곤까지의 진격을 막았지만, 5월 2일 연합군의 드라큘라 작전으로 양곤은 함락되었다.
양곤 함락 후, 사쿠라이 쇼조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28군은 아라칸과 이라와디강 계곡에서 후퇴하여 페구 산맥에 고립되었다.[11] 버마 방면군에 합류하여 태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탈출 작전을 준비했고, 기무라 헤이타로 버마 방면군 사령관은 제33군에게 시탕강을 가로지르는 양동 작전을 통해 이 탈출을 엄호하도록 명령했다.[9]
1945년,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 제14군의 반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3월 말, 일본 미얀마 방면군은 이라와디 회전에서 패배했고, 미얀마 국민군은 일본군을 공격했다. 4월 23일, 미얀마 방면군 사령부는 양곤에서 몰멘으로 후퇴했다. 제15군은 타웅우를 거쳐 태국이나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동을 시작했고, 제33군도 시탕강 하구 동해안으로 후퇴했다.[20][21]
영국군은 시탕강 서안을 따라 진격 및 드라큘라 작전으로 5월 2일 무방비 상태의 라군을 점령했다. 5월 3일, 미얀마 방면군은 제28군에게 라군의 견고한 방어를 명령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22]
제28군과 독혼 제105여단만이 시탕강 서안에 고립된 상황에서, 제28군 사령관 사쿠라이 쇼조는 페구 산맥에 웅거하여 유격전을 계속할 계획이었다.[23] 그러나 4월 하순, 상황이 악화되자 사쿠라이 중장은 독단으로 병력을 결집하여 시탕강 동안으로 철수하는 "매 작전"을 계획했다.[23] 4월 26일, 제28군은 제54사단 및 진무병단(제55사단의 잔류 부대)에 페구 산맥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6월 4일, 미얀마 방면군은 제28군에게 전투 부대는 서안에 머물러 공세를 계속하도록 명령했지만, 제28군은 전 부대 철수를 건의했다. 6월 25일, 미얀마 방면군은 제28군 주력의 몰라멘 전진을 명령했다.[27] 미얀마 방면군은 시탕강 하구의 제33군과 샨 고원의 봉집단(제56사단 기반)이 공세 작전을 실시하여 제28군의 철수를 지원하도록 했다.
6월 27-28일, 제28군은 작전 개시를 7월 20일, 도하를 7월 24일 밤으로 확정했다.[28]
2. 3. 정보 유출과 영국군의 대비
영국 정보부는 일본군의 돌파 시도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이에 몽타규 스톱포드 장군은 프랭크 메세르비 장군에게 100마일이 넘는 전선에 제4군단을 배치하여 길을 막도록 명령했다.[9] 1945년 7월 2일, 구르카 정찰대가 소규모 일본군 부대를 매복하여 전멸시키고, 일본군의 돌파 작전("매 작전")에 대한 완벽한 작전 계획이 담긴 통신 가방을 노획했다.[9][30] 이 정보는 영국군에게 신속하게 배포되었고, 영국군은 2주 동안 대비할 시간을 얻었다.[6]
노획한 문서에는 부대 편성, 물자 상황, 행동 경로, 암호 등 상세한 탈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30] 영국군은 다른 노획 문서나 포로의 증언도 참고하여, 제28군 전체의 작전 계획을 추정할 수 있었다.[30] 일본 측의 작전 개시일은 7월 18일에 포로가 된 연락 장교와 헌병군조로부터 밝혀졌다.[30] 한편, 영국군은 일본 제28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여, 제4군단 사령부에서는 16,000명으로 판단했다.[16]
영국군은 일본군의 전력을 깎아내기 위해 제28군 장병을 최대한 많이 사살하기로 결정했다. 메세르비 제4군단 사령관은 일본군 주력의 도하 지점을 피유=냥레빈 간 120km 범위로 추정하고, 제17인도사단에 3개 대대를 증원했다.[30] 제17인도사단의 병력은 부족했지만, 노획한 지도를 통해 일본군이 야간 행동으로 돌파를 시도할 지점을 추측하고 복병을 배치했다. 영국군은 보병에 의한 추격은 지양하고, 포병과 항공 부대에 의해 일본군을 격멸할 계획이었다.[30]
2. 4. 우기의 영향
시탕 작전 당시, 버마에는 우기가 도래했다.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에 걸쳐 남부 버마에서는 폭우가 쏟아졌고, 5월 20일에는 본격적인 우기에 접어들었다.[27] 도하가 이루어지는 시탕강 하류 지역은 강폭이 200m, 유속이 초당 2m를 넘었고, 강변도 논과 습지가 온통 침수되어 수심이 70cm 이상에 달했다.
폭우 때문에 일본군의 무선 연락은 감도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5월 상순 이후에는 미얀마 방면군 사령부, 제28군 사령부, 진무병단 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통이 되었다[27]. 전령이 강에서 익사하는 경우도 발생했으며, 무전기 배터리 부족으로 부대 간의 연락은 어려워졌다[31].
영국군에게도 폭우와 홍수는 행동의 방해가 되었다. 전차나 트럭 등의 차량은 간선 도로 외에는 주행할 수 없게 되었고, 키가 작은 구르카병은 걷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침수된 곳도 있었다[15]. 비행장도 종종 사용 불능 상태가 되었고, 제221비행연대는 톤구 비행장의 1개 중대를 제외하고는 근접 항공 지원에서 철수해야 했다[32].
우기의 도래는 위생 환경의 악화도 초래했다. 일본 제54사단에서는 6월 상순부터 콜레라 환자가 다발했고, 카츠부대(제49사단에서 배속된 보병 제153연대 기간) 지휘관인 타케다 히카루 대좌를 포함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페스트 발생의 조짐도 있었다[31].
3. 전투 경과
3. 1. 일본 제28군의 페구 산맥 집결
1945년 4월 26일, 제28군은 페구 산맥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3] 그러나 영국군과의 교전, 수송 및 통신 능력 부족으로 인해 부대 집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제28군 수송대는 물자 운반을 담당하여 군량 및 탄약 2개월분을 적치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각 부대가 자력으로 군량을 운반해야 했다.[33]제28군의 주력 부대인 제54사단은 5월 2일 전투에서 통신대가 괴멸되어 통신기 및 암호서를 모두 손실했고,[34] 이라와디강 서안에 도착하기까지 포병 장비 대부분을 파기했다.[35] 5월 7일부터 25일 사이에 이라와디강을 도하한 후,[36] 영국군과 교전하면서 파우칸 평지에서 식량을 수집하고 6월 하순에 페구 산맥에 거의 집결을 완료했다.[37] 탄가프(en) 지구의 바바 부대(보병 제121연대 주력)는 제28군 직할로 5월 26일에 페구 산맥 온곤에 집결했다.[38]
제55사단의 진무병단(나가사와 간이치 소장)은 5월 11일에 출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집결했다.[39] 이들은 페구 산맥에서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도하 준비를 진행했으며, 키타무라 히사오 중위가 수영 지도 및 지형 정찰에 활약했다.[40] 제55사단의 신위 부대(기병 제55연대 주력)도 6월 상순에 자율적으로 페구 산맥으로 이동했다.[41] 간성병단(보병 제112연대 주력)은 포파산에서 철수한 후 제28군 사령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독자적으로 페구 산맥에 들어갔다. 이후 잘못된 정보를 듣고 시탄강을 도하했으나, 보병 제112연대 제1대대와 나카지마 중포병대대는 7월 16일에 페구 산맥에서 제28군 주력에 합류했다.[42]
독립혼성 제105여단(감위병단, 마쓰이 히데하루 소장)은 랑군을 출격하여 영국군과 교전 후 페구 산맥 남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계속했으며, 6월 10일에 제28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44] 이들은 제13근거지대 관계의 해군 육전대 650명을 지휘하에 두었다.[43]
일부 부대는 집결에 실패하기도 했다. 제28군의 제118병참병원은 파운데(en)를 출발하여 페구 산맥에 들어갔지만, 군 사령부와 연락이 닿지 않은 채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했다.[33] 독립혼성 제72여단(관철병단)은 통신 두절 상태에서 분산되었고, 여단 주력은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여 독자적으로 시탄강을 도하했다.[45] 여단 주력과 헤어진 독립보병 제542대대는 5월 하순에 페구 산맥에서 제28군 주력에 합류했다.[46]
3. 2. 시탕 강 도하 시도
1945년 7월 20일, 일본 제28군은 시탕강을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50] 일본군은 몬순으로 인해 증수된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나 작은 배 등 열악한 도하 장비를 사용해야 했다.[51]영국군은 포병대를 위한 지역과 항공기를 이용한 지역, 두 개의 살상 지역을 설정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3] 공중과 지상에서 전선 관측 장교가 투입되었고,[4][9] 몬순에도 불구하고 전차와 보병은 차량과 도보로 이동하며 진지 사이의 틈을 메웠다.[4]
제28군 주력, 제54사단, 진무병단, 독립혼성 제105여단 등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도하를 시도했다.[50] 제54사단의 키바 지대는 퉁구 남방에서,[50] 제54사단 주력은 퓨 북방에서 도하를 시도했다.[50] 제28군 직속 부대 주력은 퓨 남방에서, 진무병단은 캬우키 부근에서, 독립혼성 제105여단은 뉼앙레빈 부근에서 도하를 시도했다.[50]
영국군의 포격과 제273비행대, 제607비행대 등의 공습으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6] 특히 시탕강 본류에 이르기 전 쿤 강에서도 비로 인한 증수로 강폭이 100m를 넘었지만, 일본군은 밧줄을 이용하여 뗏목을 운행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 도하를 시도했다.[51] 습지대 때문에 포격을 피하기 위한 참호를 파는 것도 불가능했다.[51] 많은 일본군 병력이 익사하거나 전사했다.[51]
제55사단은 펜웨곤에 주둔한 제19 인도사단의 요새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고,[4] 시탕강 건너편에 있던 영국군 전선 관측 장교는 생존자들이 재정비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려 하자 계속해서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했다.[2]
제28군 주력 부대는 7월 28일에 시탕강을 도하했고,[52] 제54사단은 7월 23-27일에 도하했다.[52] 진무 집단은 7월 30일-8월 13일에, 독립혼성 제105여단은 7월 26일 경까지 도하를 마쳤다.[53][54]
후카미 모리오 대좌가 이끄는 해군 육전대 650명은 제28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하다 8월 7-8일에 시탕강 서안에서 영국군에 포위되어 전멸했다.[18][44] 도하에 성공한 생존자는 8명뿐이었다.[44]
3. 3. 견제 공격
일본 제33군은 1945년 7월 3일, 시탕강 굽이 지역에서 제28군의 탈출을 돕기 위한 견제 공격을 실시했다.[2] 그러나 이 공격은 제28군이 강으로 진격하기 일주일 전에 이루어져 시기를 놓쳤다.[2] 일본군은 영국군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진격했고, 많은 병력이 노출된 위치에 이르자 포격과 폭격을 받았다.[4] 왕립 포병대의 전방 관측 장교(FOO)들은 지속적으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발포 신호를 보냈다.[3] 영국 공군의 카브 랭크 순찰대는 스핏파이어와 선더볼트 비행대에게 일본군 목표물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6] 7월 4일 제42 비행대의 선더볼트가 105mm 곡사포 3문을 파괴하기도 했다.[6]제33군은 시탕강 하구 동해안에서 재편성과 연안 방비를 실행하고 있었지만, 휘하의 제53사단과 제18사단에 시탕강 서해안으로의 견제 공격을 명령했다. 제33군과 제28군 사이에는 무선이 불통이었기 때문에 장교 정찰에 의해서 간신히 연락이 이루어졌고, 7월 20일의 도하에 앞서 7월 3일에 견제 공격이 개시되게 되었다. 투입 병력은 제18사단이 1000명, 제53사단이 2000명이었다.[30]
제53사단은 접이식 배 8척, 고무 보트, 현지 민간 선박으로 시탕강을 도하하여[47] 미이토쿄를 목표로 진격, 7월 8일에 미이토쿄와 본팡아우크의 각 집락을 공략했다. 영국군은 반격을 가했고,[30] 7월 9일에는 보병 제128연대장 기쿠치 요시노스케 대좌가 전사했다.[47] 7월 10일, 제53사단은 시탕강 동해안으로 철수했다.[47]
제18사단은 7월 3일 새벽에 사단 주력(보병 제55연대, 보병 제56연대 및 배속 포병 2개 중대 등)이 접이식 배 11척, 고무 보트, 현지 민간 선박으로 시탕강을 도하했다.[48] 제18사단 우익의 보병 제55연대는 사토와존 부근을 점령하여 아비야-니안카시(니앙카슈) 간의 철도선을 차단했고, 좌익의 보병 제56연대는 니안카시역 주변의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고전했다.[30] 7월 7일 공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48] 같은 날 영국군도 니안카시에서 철수했다. 일본 제18사단은 니안카시를 점령 후, 7월 26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7월 30일에 아비야역 주변에서 대화재 발생을 보고했다.[48] 영국군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8월 2일에 사토와존을 1일만 점령하고 철수했다.[30]
한편, 샨 고원에 주둔한 제56사단을 주축으로 한 봉집단(마츠야마 유사 중장)도 6월 28일부터 보병 제113연대에 명령하여 통구 방면으로 참입대를 출격시켰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49] 결국 일본군의 견제 공격은 영국군의 전력을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
3. 4. 도하 이후의 상황
7월 28일, 일본군의 마지막 필사적인 공세가 중단되었다. 일본 제15군은 붕괴된 제28군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다.[4] 카렌 게릴라들은 수백 명의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고 제15군 부대를 공격했다. 연합군 연락 조직인 제136부대(Force 136)는 그들과 협력하여 라이샌더를 사용하여 중상자, 포로, 문서를 후송하고 긴급 물자를 수송했다.[9] 이들은 스핏파이어와 썬더볼트뿐만 아니라 보파이터와 모스키토의 전술 항공대에 표적을 제공했다.[9] 7월 29일까지 제15군은 철수했는데, 돌파가 재앙으로 끝났지만 적어도 흩어진 여러 그룹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4] 전투가 끝났을 때 몇몇 일본군 부대만이 시탕강을 건너 8월 7일까지 생존했고, 이후 연합군 보병에 의해 전체 지역이 정리되었다.[2]제28군 장병들은 도하에 성공한 후 시탕강 동쪽 강둑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빌린을 거쳐 테나세리움 지역(현 타닌다리 지방)으로 향하는 행군을 계속했다. 제54사단(코바 지대를 포함)만 시탕강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샨 고원을 횡단하여 파푼을 거쳐 테나세리움 지역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54사단은 샨 고원의 밀림에 막혀 길을 잃었고, 많은 병사들이 고통을 겪어 8월 15일경 샨 고원 횡단이 단념되었다.[55] 도하로 체력을 소모한 장병들은 동쪽 강둑의 아군 부대에 수용되기까지 낙오자와 자결자가 다수 발생했다. 제28군 참모인 쓰치야 에이이치 중좌는 시탕강 도하로 마지막 난관을 넘었다는 안도감에 야영지에 남아 그대로 죽어버리는 장병이 많았고, 연도에는 수많은 시체가 남아 "시체의 길"이 되었다고 말했다.[56]
시탕강 동쪽 강둑의 제33군은 제53사단에게 시탕강 지류인 슈에진강·마다마강 도하 지점을 확보하게 하고, 제28군 장병들의 수용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제56사단도 샨 고원으로의 유도 요원을 제54사단을 맞이하는 인원으로 파견했지만, 제54사단이 샨 고원 진입을 단념하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쿠라이 군사령관 이하 제28군 사령부는 8월 2일까지 도하 지점 근처 미간갼에 머물며 여러 부대의 정보를 수집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8월 9일 슈에진에서 제53사단에 수용되었다. 그 후 제28군 사령부는 8월 15일 제53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같은 날 남방군과 미얀마 방면군으로부터 작전 성공 축전과 종전의 조서 공포를 통보받았다.[57] 제54사단은 종전을 모른 채 동쪽 강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8월 23일 제28군으로부터 정전 명령을 받았다. 8월 초 미야자키 제54사단장이 파악하고 있던 병력은 페구 산계 출발 당시 9000명 이상 중 4000명 이하였다.[58] 진무병단은 특히 사령부의 도하가 늦어져 8월 15일부터 며칠에 걸쳐 겨우 부대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고, 남하 중에 종전을 맞이했다. 독혼 제105여단은 8월 3일 슈에진강을 건너 수용되었지만, 출발 당시 인원 3400명이 2200명으로 줄었다.[56] 8월 15일 종전 후에도 제28군의 많은 병력이 상황을 모른 채 남하 중이었고, 거의 통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전 명령이 쉽게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했다.[59]
4. 결과 및 영향
돌파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일본군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켰다. 부대원들은 카렌 게릴라와 영국 공군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3] 메서비와 스톱퍼드는 이 돌파 작전을 영웅적인 시도로 묘사하며, 740명의 포로 대부분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에서 항복했다고 언급하며,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끈기를 강조했다.[13]
일본군의 손실 중 가장 낮은 사망률을 기록한 부대는 제105 독립 혼성 여단으로, 4,173명 중 2,000명 이상이 시탕강을 건넜다. 제13 해군 경비대는 전멸하여 원래 600명 중 소수만이 탈출했다. 상당수, 최소 70명 이상, 어쩌면 더 많은 수가 페구 요마스에 있는 동안 탈영했다. 이 부대는 이 치명적인 작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제54 사단은 엄청난 손실을 입어 5,000명 이상이 시탕강 돌파 중에 사망했다. 돌파를 시작한 제55 사단 9,000명 중 4,000명 미만이 테나세림 산맥에 도착했다.[2] 제28군에 직할된 18,000명 중 총 6,000명 미만이 시탕강 동쪽 제방에 도달했다.[4] 영국군 및 연합군은 1,500명이 질병으로 고생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이 기간 동안 사망자 95명, 부상자 322명에 불과했는데, 이 중 소수는 "아군 사격"으로 인한 것이었다.[3]
영국 공군은 총 3,045회 출격하여 75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렇게 많은 일본군 병력의 손실은 주로 영국 공군의 공습과 포격 때문이었으며, 참전 군인들은 이 전투를 "포병의 전쟁"이라고 칭했다.[2][6]
이 패배로 일본 버마 지역군은 효과적인 전투력을 잃게 되었다. 버마 대부분이 해방되면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은 일본군이 테나세림 산맥으로 이동하려는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켰다.[4] 그러나 그들은 시탕강 동쪽 제방에 묶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전투 이후 2,000명 이상이 추가로 사망했으며, 그중 많은 수가 평화가 시작된 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방 연합군이 참여한 마지막 대규모 육상 전투였다.[5]
1945년 9월 13일, 한때 강력했던 일본 버마 지역군의 잔존 부대가 영국군에게 항복했다.[2][14]
시탕 작전의 결과, 일본 제28군은 약 15,000명을 시탕강 동쪽 해안의 아군 전선에 도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으며, 일본군의 인적 손실은 페구 산계에 집결했다고 여겨지는 34,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20,000명에 가까워진다[17]。하지만 군 참모 야마구치 소좌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철수에 참가한 병력은 30,872명인 반면 탈출 후의 장악 인원은 13,953명으로 손실은 16,919명이 되었으며, 제28군의 종전 직후 데이터에 따르면 이 손실에는 동 시점의 행방불명자 4,000명과 전병자 2,000명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경우 전사자는 약 11,000명이 된다[16]。한편, 영국군의 추정으로는 일본군의 전사자·행방불명자는 12,000명이다[18]。또한, 투항을 매우 꺼렸던 일본군으로는 드물게, 740명이나 되는 포로가 발생했다[18]。이에 맞선 영국군의 손실은 전사 95명 및 전상 322명으로 극히 적었다[18]。더불어, 영국 제14군 사령관인 윌리엄 슬림 중장은 사쿠라이 제28군 사령관에 대해, 수송력을 갖추지 못한 부대가 조직적인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는 매우 잘 해냈다고 칭찬했다[18]。
견제 공격을 담당한 제33군의 손실은 비교적 가벼웠으며, 그중 제18사단의 사상자는 320명이었다. 영국군에게 일본 측의 작전 계획이 누설된 점[18], 제33군 사령부와 제28군 사령부 사이의 통신 상태가 불량하여 탈출 시작 일시가 적절하게 전달되지 않아 견제 공격의 시작이 너무 빨랐던 점 등으로 인해, 영국군의 전력을 유인하여 도하를 돕는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15]。
본 작전의 의의에 대해, 『전사총서』는 종전이 한 달만 더 빨랐다면 10,000명에 가까운 장병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결과론일 뿐 어쩔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59]。전사 연구가 루이 앨런 또한 만약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절반의 병력을 잃더라도 절반의 장병을 구출하여 다시 싸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겠지만, 직후의 종전으로 헛되이 죽었다고 평가했다[16]。영국 측에서의 의의 부여로, 윌리엄 슬림 중장은 제28군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버마에서의 모든 일본군의 분투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말했다[18]。
4. 1. 일본군의 막대한 피해
시탕 작전에서 일본 제28군은 약 1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는 12,000명에 달했으며, 740명의 포로가 발생했다.[18] 이는 투항을 극도로 꺼렸던 일본군에게는 이례적인 수치였다.[18]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제13 해군 경비대로, 거의 전멸했다.[2] 제54 사단은 5,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2] 반면,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 95명, 부상 322명으로 경미했다.[3]영국 공군은 총 3,045회 출격하여 750LT의 폭탄을 투하했으며,[2][6] 이러한 대규모 일본군 병력 손실은 영국 공군의 공습과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2][6] 참전 군인들은 이 전투를 "포병의 전쟁"이라고 칭했다.[2][6]
이 패배로 일본 버마 지역군은 효과적인 전투력을 잃게 되었다.[4] 윌리엄 슬림 중장은 일본 제28군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버마에서의 모든 일본군의 분투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했다.[18]
4. 2. 일본군의 사기 저하와 항복
시탕 작전의 실패는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3] 부대원들은 영국 공군과 카렌 게릴라에게 끊임없이 공격받았다.[3] 메서비와 스톱퍼드는 이 돌파 작전을 영웅적인 시도로 묘사하며, 740명의 포로 대부분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에서 항복했다고 언급하며,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끈기를 강조했다.[13]
일본군의 손실 중 가장 낮은 사망률을 기록한 부대는 제105 독립 혼성 여단으로, 4,173명 중 2,000명 이상이 시탕강을 건넜다. 제13 해군 경비대는 전멸하여 원래 600명 중 소수만이 탈출했다. 상당수, 최소 70명 이상, 어쩌면 더 많은 수가 페구 요마스에 있는 동안 탈영했다. 이 부대는 이 치명적인 작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제54 사단은 엄청난 손실을 입어 5,000명 이상이 시탕강 돌파 중에 사망했다. 돌파를 시작한 제55 사단 9,000명 중 4,000명 미만이 테나세림 산맥에 도착했다.[2] 제28군에 직할된 18,000명 중 총 6,000명 미만이 시탕강 동쪽 제방에 도달했다.[4]
영국 공군은 총 3,045회 출격하여 75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렇게 많은 일본군 병력의 손실은 주로 영국 공군의 공습과 포격 때문이었으며, 참전 군인들은 이 전투를 "포병의 전쟁"이라고 칭했다.[2][6]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시탕 강 동쪽에 남은 일본군은 추가적인 전투 없이 항복했다.[4][5]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방 연합군이 참여한 마지막 대규모 육상 전투였다.[5] 버마 대부분이 해방되면서, 일본 항복 소식은 일본군이 테나세림 산맥으로 이동하려는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켰다.[4] 그러나 그들은 시탕강 동쪽 제방에 묶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전투 이후 2,000명 이상이 추가로 사망했으며, 그중 많은 수가 평화가 시작된 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5]
1945년 9월 13일, 한때 강력했던 일본 버마 지역군의 잔존 부대가 영국군에게 항복했다.[2][14]
4. 3. 한국 독립에 미친 영향
참조
[1]
문서
Shaw p 185
[2]
문서
Allen pp 524–525
[3]
서적
China-Burma-India theater, Volume 3
Historical Division, Dept. of the Army, 1959
[4]
문서
Slim pp. 6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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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ker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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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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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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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서
Farquharson pp 298–300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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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Burma (Myanmar)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Lanham, Maryland
2006
[12]
문서
Slim 1956,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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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Hearn p viii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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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レン|アレン(1995年)]]、103-105頁。"
[16]
문서
"[[#アレン|アレン(1995年)]]、付録5-6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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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472-473頁。"
[19]
문서
"[[#アレン|アレン(1995年)]]、105頁。"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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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30-331頁。"
[21]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12頁。"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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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270-271頁。"
[23]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268-269頁。"
[24]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273-276頁。"
[25]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89頁。"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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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10-311頁。"
[27]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56-359頁。"
[28]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431-432頁。"
[29]
문서
"[[#アレン|アレン(1995年)]]、96頁。"
[30]
문서
"[[#アレン|アレン(1995年)]]、112-119頁。"
[31]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76頁。"
[32]
문서
"[[#アレン|アレン(1995年)]]、75頁。"
[33]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429-430頁。"
[34]
문서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1969年)]]、361頁。"
[3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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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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