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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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령 버마는 1820년대부터 1948년까지 영국이 지배한 미얀마의 역사적 시기이다. 영국은 3차례의 전쟁을 통해 버마를 점령하고,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를 혼합하여 식민 지배를 했다. 영국은 버마족을 차별하고 소수 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민족 갈등을 심화시켰다. 20세기 초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독립의 열망이 커졌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했지만, 영국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인해 현재까지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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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버마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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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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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적인 긴 이름 | 버마 |
일반 이름 | 버마 |
시대 | 서양 제국주의 시대 |
시작 사건 |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
시작 연도 | 1824년 |
시작 날짜 | 3월 5일 |
종료 사건 | 독립 선언 |
종료 연도 | 1948년 |
종료 날짜 | 1월 4일 |
존속 기간 | 1824년–1948년 |
이벤트 1 | 얀다보 조약 |
날짜 이벤트 1 | 1826년 2월 24일 |
이벤트 2 |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
날짜 이벤트 2 | 1852년–1853년 |
이벤트 3 |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
날짜 이벤트 3 | 1885년 |
이벤트 4 | 영국령 인도로부터 분리 |
날짜 이벤트 4 | 1937년 (버마 정부 법) |
이벤트 5 | 대영 제국 내에서 부분적인 자치 상태 획득 |
날짜 이벤트 5 | 1937년 4월 1일 |
이벤트 6 | 일본과 태국 침공 및 버마국 수립 |
날짜 이벤트 6 | 1942년–1945년 |
선행 국가 1 | 꼰바웅 왕조, 1824년 |
선행 국가 2 | 꼰바웅 왕조, 1885년 |
선행 국가 3 | 영국령 인도, 1937년 |
선행 국가 4 | 버마국, 1945년 |
후행 국가 1 | 일본 점령, 1942년 |
후행 국가 2 | 버마국, 1943년 |
후행 국가 3 | 태국 점령 |
후행 국가 4 | 독립 후 버마, 1948년 |
현재 국가 | 미얀마 |
망명 수도 | 심라, 펀자브 주, 영국령 인도, 1942년–1945년 |
별칭 | 영국인, 버마인 |
면적 | 알 수 없음 |
면적 순위 | 알 수 없음 |
GDP (PPP) | 알 수 없음 |
GDP (PPP) 연도 | 알 수 없음 |
HDI | 알 수 없음 |
HDI 연도 | 알 수 없음 |
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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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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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텍스트 | |
수도 | |
국가 | |
언어 | |
공용어 | 영어 |
일반 언어 | 버마어 룽투어 메이테이어 힌두스타니어 타밀어 텔루구어 벵골어 구자라트어 오디아어 펀자브어 네팔어 쿤밍 방언 민난어 광둥어 하카어 표준 중국어 케다 말레이어 남부 태국어 북부 태국어 |
종교 | |
통치 | |
통치자 칭호 | 군주 |
통치자 | 빅토리아 (1862–1901) |
통치자 | 에드워드 7세 (1901–1910) |
통치자 | 조지 5세 (1910–1936) |
통치자 | 에드워드 8세 (1936) |
통치자 | 조지 6세 (1936–1948) |
대표 칭호 | 총독 |
대표 | 아서 퍼브스 페이어 경 (최초, 1862–1867) |
대표 | 휴버트 랜스 경 (최후, 1946–1948) |
부대표 | 바 모 (1937–1939) |
부대표 | 우 누 (1947–1948) |
부대표 칭호 | 총리 |
입법부 | 버마 입법 위원회(1897–1936) |
입법부 | 버마 의회(1936–1947)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통화 |
2. 역사적 배경
버마는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국경을 맞댄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자인 영국은 호시탐탐 버마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820년대 초, 버마군은 영국령 인도와의 국경 근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 이 지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도로 도망가자, 버마군도 국경을 넘어 영국령 인도에 침범하였다. 이것은 침략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에게는 큰 기회였다. 영토 침범을 이유로 영국은 즉각 버마에 군사를 출동시키고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순식간에 버마의 수도 양곤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버마의 장군 밴둘라가 전사하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승리자 영국은 미얀마의 주요 도시 아라칸, 아삼 등 주요 도시들을 빼앗았다. 하지만 영국의 야망을 사라질줄 몰랐고 1852년,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미얀마의 저지대 지방이 합병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는 미얀마무역회사가 반출량을 잘못 보고하여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미얀마의 고지대 지방까지 점령되면서 1886년 1월 1일 정식으로 미얀마를 합병하였다. 본격적인 영국령 버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은 꼰바웅 왕조를 쫓아내고 군주제와 귀족 등 계급정책을 박탈하였으며 왕의 옥좌는 콜카타박물관로 가져갔다. 그러나 영국의 미얀마 지배는 조금 특이했다. 영국은 꺼인족 등 미얀마의 소수민족에게는 자치는 허용하여 간접통치를 하였지만, 미얀마의 다수족인 버마족에게는 직접 통치를 시행하였다. 안그래도 버마족과 소수민족은 사이가 안 좋은데 영국이 불난 집에 부채질한 셈이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영국은 버마족보다 소수민족을 크게 우대하여 경찰, 군인, 관료, 중요한 인물 등 모두 소수민족이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인의 미얀마 이주를 허용하여 1931년에는 미얀마 인구의 7%가 인도인이 될 정도로 늘었고 이들은 미얀마의 은행, 상점 등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특히 수도 양곤은 3분의 2가 외국인으로 가득 찼고 그중 무려 53%가 인도인이였다. 영국은 미얀마를 통치하면서 버마족을 크게 차별했고, 전혀 사업화 시킬 의지가 없어서 계속 농촌국가로 유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판단으로 영국은 곡식 생산을 크게 권장하여 1905년에는 아시아 최대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1920년대, 아시아 전역에는 민족주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얀마에는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주의 운동은 오직 버마족을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전혀 이 운동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민족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미얀마의 사정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2. 1. 영국-미얀마 관계 이전
꼰바웅 왕조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했다. 왕은 행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였지만,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는 없었고 행정 명령만 내릴 수 있었다.[6] 버마에는 담마타트(Dhammathat)와 흘타우(Hluttaw)라는 두 가지 법전이 있었다.[7] 흘타우는 재정, 행정, 사법의 세 부서로 나뉘어 있었고, 왕의 명령은 흘타우의 승인을 받아야만 시행될 수 있어 왕권이 제한되었다.[7] 각 주는 흘타우가 임명한 주지사가, 마을은 왕이 승인한 세습 촌장이 통치하여 국가는 분권화되어 있었다.[7]버마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로에 위치하여 무역을 통해 부를 얻었지만, 자급자족 농업이 경제의 기반이었다.[6] 인도 상인들은 해안과 아이라와디강 등의 강을 따라 이동하며 인도 문화를 전파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6] 버마는 동남아시아에서 불교를 대규모로 받아들인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으며, 불교는 영국 통치하에서도 대부분 인구의 공식적인 후원 종교로 남아 있었다.[6]
2. 2. 영국의 식민 지배

꼰바웅 왕조가 아삼 주의 아라칸까지 영토 확장을 결정하면서 영국과 버마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영국의 인도 기지인 칫따공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4년~1826년)을 초래했다. 1824년 영국은 대규모 해상 수송을 통한 상륙 작전을 펼쳐 양곤을 무혈 점령했다.
아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위치한 다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버마군 장군 마하 반둘라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패주했다.[28] 버마는 아삼과 다른 북부 주들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1826년, 얀다보 조약에 의해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영국령 인도 역사상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든 전쟁이었다. 유럽군과 인도군 합쳐 1만 5천 명이 사망했으며, 버마군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알 수 없다.[29]
이 전쟁의 영국 측 비용은 500만~1300만 파운드(2020년 미국 달러 환산으로 180억~480억 달러에 해당)라는 막대한 금액이었다.[30] 이 때문에 영국령 인도에서는 1833년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31]
1852년, 영국에 의해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이 얻고자 했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콜카타와 싱가포르 중간에 위치한 항구와 하부 버마에 있는 티크 숲이었다. 25년간의 평화는 깨졌고, 영국이 하부 버마 전역을 점령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영국은 승리하여 새롭게 점령한 영토에서 티크, 석유, 루비와 같은 자원을 얻었다.
민돈 민은 점령되지 않은 상부 버마에서 제국주의에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치 체제를 개혁하고 외국과의 유익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 그러나 영국은 1885년 11월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시작했고, 2주도 채 되지 않아 결판이 났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지막 버마 독립 왕이 된 티보 민이 폭군이며, 프랑스 식민 제국 세력을 버마로 끌어들이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영국군은 1885년 11월 28일 만달레이에 입성했다. 이렇게 3차례의 전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영토를 확보한 영국은 현재 미얀마 전역을 점령하고 1886년 1월 1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 편입했다.[32]

2. 2. 1. 영국-미얀마 전쟁 (1824-1886)
영국과 버마의 분쟁은 꼰바웅 왕조가 아삼 주의 아라칸까지 영토 확장을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영국의 인도 기지인 칫따공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4년~1826년)을 초래했다. 1824년 영국은 대규모 해상 수송을 통한 상륙 작전을 펼쳐 양곤을 무혈 점령했다.
아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위치한 다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버마군 장군 마하 반둘라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패주했다.[28] 버마는 아삼과 다른 북부 주들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1826년, 얀다보 조약에 의해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영국령 인도 역사상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든 전쟁이었다. 유럽군과 인도군 합쳐 1만 5천 명이 사망했으며, 버마군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알 수 없다.[29]
이 전쟁의 영국 측 비용은 500만~1300만 파운드(2020년 미국 달러 환산으로 180억~480억 달러에 해당)라는 막대한 금액이었다.[30] 이 때문에 영국령 인도에서는 1833년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31]
1852년, 영국에 의해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이 얻고자 했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콜카타와 싱가포르 중간에 위치한 항구와 하부 버마에 있는 티크 숲이었다. 25년간의 평화는 깨졌고, 영국이 하부 버마 전역을 점령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영국은 승리하여 새롭게 점령한 영토에서 티크, 석유, 루비와 같은 자원을 얻었다.
민동 민은 점령되지 않은 상부 버마에서 제국주의에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치 체제를 개혁하고 외국과의 유익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 그러나 영국은 1885년 11월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시작했고, 2주도 채 되지 않아 결판이 났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지막 버마 독립 왕이 된 티보가 폭군이며, 프랑스 식민 제국 세력을 버마로 끌어들이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영국군은 1885년 11월 28일 만달레이에 입성했다. 이렇게 3차례의 전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영토를 확보한 영국은 현재 미얀마 전역을 점령하고 1886년 1월 1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 편입했다.[32]
2. 2. 2. 영국령 인도 제국 편입과 식민 통치
영국령 인도 제국은 꼰바웅 왕조를 멸망시키고 미얀마를 식민지로 병합하면서, 기존의 통치 체제를 완전히 바꾸었다. 버마인의 무력 저항은 수년간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영국은 1890년까지 마을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관리들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진압했다.[33]영국은 버마 중심부에 대한 직접 통치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를 통치하며, 기존의 정부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티보 왕은 망명했으며,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었다.[35] 왕정 폐지와 정교 분리는 전통적인 버마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33] 특히 상가로 알려진 불교 승려들은 왕실의 후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정 폐지는 불교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왕실은 상가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고, 불교 대표자로서의 승려들은 대중에게 국가 정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에, 정교 분리는 버마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세속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다.[35] 식민지 인도 정부는 영어와 버마어로 교육하는 세속적인 학교를 설립하는 동시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하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불교와 전통 버마 문화가 멸시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특히 친족, 카친족, 카렌족, 카렌니족과 같은 일부 소수 민족의 기독교 개종에 성공했다.[15]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건설하여 소수 민족 지역의 언어에 대한 문자 체계를 발전시키고 사회 발전, 교육 및 문화 증진에 기여했다.[15]
영국은 중앙 평야 지역 외부는 기존의 전통 구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중앙 평야의 버마인 다수와 산악 지역의 소수 민족 간의 민족적 차이를 악화시키는 "분할 통치"의 일환이었다.[15]
유럽인과 버마인 사이의 혼혈은 앵글로-버마인으로 알려진 토착 유라시아 혼혈인 공동체를 낳았고, 이들은 버마인 위, 영국인 아래에 있는 식민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33]
영국은 버마에서 채털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1926년까지 상부 버마의 노예 제도는 효과적으로 단계적으로 폐지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영국이 버마 전체를 장악한 후에도, 중국에 조공을 계속 바쳤다.[33] 1886년 버마 조약에서 중국은 영국의 상부 버마 점령을 인정하고 영국은 10년마다 베이징에 버마 조공을 계속 지불하기로 합의했다.[34]
2. 2. 3. 식민지 시대 행정 구역
1885년 이후 버마 주는 다음과 같이 행정 구역이 설정되었다.- 미니스터리얼 버마(버마 본토)
- 다닌다리 지구 (타웅구, 타톤, 암허스트, 살윈강, 타보이, 머귀)
- 아라칸 지구 (아캬브, 북아라칸 또는 아라칸 구릉 지대, 캬욱퓨와 산도웨이)
- 바고 지구 (랑군 시, 헨타와디, 페구, 타라와디, 프롬)
- 아이라와디 지구 (바세인, 헨자다, 타예트묘, 마우빈, 미아웅미아, 피야퐁)
- 계획 지역(Scheduled Areas)(변경 지역)
- 샨주
- 파콕쿠 친 힐스
- 카친주
“변경 지역(Frontier Areas)”은 “제외 지역(Excluded Areas)” 또는 “계획 지역(Scheduled Areas)”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행정 구획 중 “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영국령 버마 변경국(Burma Frontier Service)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었고, 나중에 버마 본토에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경 지역에는 친족, 샨족, 카친족(칭포족), 카렌족 등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1년 버마에는 9개 지구(division)가 있었고, 이는 다시 수많은 현(district)으로 나뉘어 있었다.[36]
- 아라칸 지구 (아캬브, 아라칸 구릉, 차우피우, 산도웨이)
- 민부 지구 ( 마궤, 민부, 타예트/Thayet영어)
- 만달레이 지구 (캬욱세/Kyaukse영어, 만달레이, 메이티라, 민잔/Myingyan영어)
- 다닌다리 지구 (타웅구, 타톤, 암허스트, 살윈, 타보이, 머귀)
- 페구 지구 (랑군 시, 헨타와디, 페구, 타라와디/Tharrawaddy, Myanmar영어, 프롬)
- 이라와디 지구 (바세인, 헨자다, 마우빈, 미아웅미아, 피야퐁)
- 사가잉 지구 (바모, 하치도윈, , , 미이트키나, 사가잉, 후콘 계곡, 삼각 원주민 지역)
- 샨 연합주 (북샨, 동샨, 중앙샨, 미에라트/Myelat영어, 카렌, 차인톤/Kyainton영어, 냐웅쉐/Nyaungshwe영어)
- 파콕쿠 구릉 지대 (친 구릉, 마니푸르, 루샤이 구릉, 파콕쿠, , )

2. 2. 4. 식민지 시대 경제

전통적인 버마 경제는 국가가 가장 중요한 상품의 가격을 설정하는 재분배 경제였다. 대다수 인구에게는 자급자족 농업만큼 무역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무역로에 위치하여 외국 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영국의 식민지배와 함께 버마 경제는 세계 시장 경제에 종속되었고, 식민지 수출 경제의 일부가 되었다. 버마의 병합은 새로운 경제 성장기를 불러왔고 사회의 경제적 성격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영국은 이라와디 강 삼각주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개발하고 울창한 맹그로브 숲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건설 이후 유럽에서 수요가 높았던 쌀이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많은 버마인들이 북부 중심지에서 삼각주로 이주하여 인구 집중이 변화하고 부와 권력의 기반이 바뀌었다.
농지 조성을 위해 농부들은 영국 은행이 담보 대출을 해주지 않아 고금리로 체티아르라고 불리는 인도 타밀계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렸다. 인도 사채업자들은 담보 대출을 제공했지만, 차용자가 채무 불이행을 하면 곧바로 담보를 압류했다.[37]
동시에 수천 명의 인도 노동자들이 버마로 이주했고(버마계 인도인), 더 적은 임금으로 일하려는 의지 때문에 버마 농부들을 빠르게 대체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일자리를 잃고 해체되는 사회 속에서 길을 잃은 버마 마을 주민들은 때때로 절도와 강도 행위에 가담했고, 곧 영국인들에 의해 게으르고 무절제한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버마 사회의 기능 장애 수준은 살인 사건의 급증으로 드러났다."[38]
이처럼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이라와디 계곡 전역에 철도가 건설되고 수백 척의 증기선이 강을 따라 운항하는 등 어느 정도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모든 운송 수단은 영국이 소유했다. 따라서 무역 수지가 영국령 버마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급속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공무원은 대부분 앵글로 버마인과 인도인으로 구성되었고, 버마인은 군대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군대는 주로 인도인, 앵글로 버마인, 카렌족 및 기타 버마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1887년 양곤에 영국군 병원이 설립되었다.[39] 국가는 번영했지만, 버마인들은 그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영국령 버마 시대를 소설로 묘사한 조지 오웰의 소설 버마의 날들 참조) 1941년 버마인들의 생계 조건을 묘사한 영국 관리의 보고서는 버마인들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외국 지주와 외국 사채업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국가 자원의 상당 부분이 수출되고 농민과 국가 전체가 점진적으로 빈곤해졌다…. 농민들은 사실상 더 가난해졌고 실업이 증가했다…. 버마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사회적 양심의 쇠퇴로 이어졌고, 빈곤과 실업 상황에서 범죄가 크게 증가했다.”[40]
3.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 투쟁
20세기 초, 버마 청년 불교 협회(YMBA)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식민 당국이 종교 단체를 허용했기 때문에 YMCA를 본떠 만들어졌다.[20] 이후 (GCBA)[41]로 대체되었으며, 버마 본토 각지 마을에 나타난 ''Wunthanu athin''(민족 단체들)과 관련이 있었다.[42] [43]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는 아일랜드 출신 불교도 는 기독교와 영국의 지배권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소란죄로 두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다.
20세기 초, 교육받은 계층에서 새로운 세대의 버마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그중에는 런던 유학을 허락받아 법률을 공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버마의 상황이 개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신념과 함께 귀국했다. 1920년대 초의 진보적인 헌법 개정으로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의회, 대학, 그리고 영국령 인도 내 버마 자치권이 강화되었다. 공공 기관에서 버마인 대표를 늘리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일부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개혁의 범위도 불충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1920년, 새로운 대학법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이 법이 영속적인 식민지 지배와 엘리트 계층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학생들에게 있었다. 식민지 교육 제도에 항의하여 전국적으로 "국민학교"가 등장했다. 후에 이 파업의 날은 ""이 되었다.[42] [44] 1920년대 후반에는 ''Wunthanu athin''이 주도하여 추가적인 파업과 반세금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정치 활동가 중 저명한 인물은 아라칸의 우 오타마와 우 세인다 등의 승려(''hpongyi'')였으며, 그들은 나중에 영국에 대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또한 독립 후에는 버마 정부와도 싸우게 된다. 우 위사라는 이 운동에서 최초의 순교자였으며, 수감 중 장기간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했다.[42]
1930년 12월, 사야 산이 지도한 타라와디의 지방세 항의 운동은 처음에는 지역적이었지만, 이후 정부에 대한 전국적인 반란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2년 동안 지속된 사야 산의 난은 신성한 새 가루다의 버마 이름인 갈론을 冠한 단체가 주도했기 때문에 갈론의 난(Galon Rebellion)이라고도 불린다. 가루다는 나가의 적이며, 즉 영국을 나가로 본 것이다. 진압을 위해 영국은 수천 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정치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 사야 산은 최종적으로 처형되었지만, 그의 재판에는 후일 민족 운동의 기수가 될 바 모와 우 소가 변호인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42]
1930년 6월, 도 바마 아시이아 요운("우리 버마인 협회"의 뜻)이 설립되었다. 회원들은 서로를 "타킨(주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원래 인도의 "사히브"와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자(유럽인)를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그들 자신(버마인)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다"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42] 1936년 두 번째 학생 파업의 원인은 대학 잡지에 실린 기사의 필자 이름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대학 간부 직원 중 한 명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었는데, 학생 자치회 지도자인 아웅산과 우 누가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것은 만달레이까지 확대되어 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아웅산과 우 누는 타킨 운동에 가담하여 학생에서 국정으로 진출했다.[42]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 프랑스는 온 힘을 유럽에 쏟아부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공백 상태가 되고 영국은 식민지에는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이 때를 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였다. 이때 미얀마에는 전설적인 민족지도자가 나타났다. 바로 아웅산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30인의 동지 일원이다. 1942년 아웅산은 일본과 함께 미얀마로 돌아와 미얀마의 독립을 주도하였다. 결국 일본은 영국을 내쫓고 미얀마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괴뢰정권인 버마 자유주를 만들었다. 미얀마는 해방자 일본을 열렬히 환영했지만 그들이 더 악랄한 침략자임이 밝혀지자, 아웅산과 동지들은 일본에게 반항하였다. 그들은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을 조직하고 결렬히 일본에 저항했다. 마침내 1945년 5월 일본이 3년간의 미얀마 통치를 끝내고 물러갔다. 그리고 승전국 영국은 미얀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전혀 미얀마를 독립시켜줄 생각이 없었다. 이와중에 아웅산은 런던으로 가서 담판을 벌였다. 그는 뛰어난 말투로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947년 7월, 아웅산과 6명의 요원이 암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아웅산의 동지인 우 누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8년 1월, 미얀마는 드디어 소수민족 거주 지역인 고지대지역을 합쳐 미얀마 연방으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100년이 넘게 통치한 영국도 드디어 철수했고, 미얀마는 독립되었으나 이것은 곧 혼란과 폭동의 원인이 된다.
3. 1. 초기 민족주의 운동 (20세기 초)
20세기 초, 버마 청년 불교 협회(YMBA)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식민 당국이 종교 단체를 허용했기 때문에 YMCA를 본떠 만들어졌다.[20] 이후 버마 협회 연합회(GCBA)로 대체되었으며, 버마 전역의 마을에 생겨난 ''Wunthanu athin''(민족 협회)과 연관되었다.[20]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는 U Dhammaloka가 기독교와 제국 권력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여 두 차례 반역죄 재판을 받았다.교육받은 계층 출신의 새로운 세대의 버마 지도자들은 런던 유학 후 버마의 상황을 개혁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왔다.[20] 1920년대 초의 진보적인 헌법 개혁으로 입법부, 대학교, 버마의 자치권이 확대되었고, 공무원 내 버마인의 대표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20]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개혁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20]
1920년, 학생들은 새로운 대학법에 반대하여 파업을 벌였는데, 이 법이 엘리트에게만 이익을 주고 식민 통치를 영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20] 식민지 교육 제도에 항의하는 '국립학교'가 전국적으로 생겨났고, 이 파업은 '국경일'로 기념되었다.[20] 1920년대 후반에는 ''Wunthanu athin''이 주도하는 추가적인 파업과 반(反)세금 시위가 있었다.[20] 정치 활동가들 중에는 U Ottama와 U Seinda와 같은 불교 승려(''hpongyi'')가 있었고, U Wisara는 감옥에서 장기간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운동의 첫 순교자였다.[20]
1930년 12월, 타라와디에서 Saya San이 주도한 지역 세금 항의가 전국적 반란으로 확대되었다.[20] 2년 동안 지속된 갈론 반란은 신화 속 새 가루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천 명의 영국군이 필요했고, 추가적인 정치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20] Saya San의 재판은 Ba Maw 박사와 U Saw를 포함한 여러 미래의 국가 지도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해주었다.[20]
1930년 5월, ''Dobama Asiayone''(우리 버마인 협회)가 설립되었는데, 회원들은 자신들을 ''thakin''(버마어로 "주인"을 의미)이라고 불렀다.[20] 1936년 두 번째 대학생 파업은 랑군 대학교 학생회 지도자인 아웅산과 꼬 누가 대학 고위 관리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에 대한 퇴학으로 촉발되었다.[20] 이는 만달레이로 확산되어 전 버마 학생 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아웅산과 누는 이후 학생에서 국가 정치로 진출하면서 타킨 운동에 합류했다.[20]
3. 2. 학생 운동과 반식민 투쟁 (1920년대-1930년대)
1920년, 학생들은 새로운 대학법에 반대하여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이 법이 엘리트에게만 이익을 주고 식민 통치를 영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20] 식민지 교육 제도에 항의하는 '국립학교'가 전국적으로 생겨났고, 이 파업은 '국경일'로 기념되었다.[20][42] [44] 1920년대 후반에는 ''Wunthanu athin''이 주도하는 추가적인 파업과 반(反)세금 시위가 있었다. 정치 활동가들 중에는 우 오타마와 우 세인다와 같은 불교 승려(''hpongyi'')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영국에 대항하는 무장 반란을 이끌었고 독립 후에는 민족주의 정부에 대항하기도 했다. 우 위사라는 감옥에서 장기간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운동의 첫 순교자였다.[20][42]1930년 12월, 타라와디에서 사야 산이 주도한 지역 세금 항의가 빠르게 지역적 반란으로, 그리고 나아가 정부에 대한 전국적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2년 동안 지속된 사야 산의 난은 신화 속 새 가루다(나가 즉 영국인의 적)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반군이 들고 다니는 깃발에 새겨져 있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천 명의 영국군이 필요했고, 추가적인 정치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20][42] 처형된 사야 산의 재판은 그의 변호에 참여한 바 모 박사와 우 소를 포함한 여러 미래의 국가 지도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해주었다.[20]
1930년 5월, ''도바마 아시아요네''(우리 버마인 협회)가 설립되었는데,[20] 회원들은 자신들을 ''타킨''(버마어로 "주인"을 의미하는 반어적 이름으로, 인도의 '사히브'와 비슷하게 식민지 지배자들이 빼앗은 명칭을 주장하며 자신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선언했다.)이라고 불렀다.[42] 1936년 두 번째 대학생 파업은 랑군 대학교 학생회 지도자인 아웅산과 우 누가 대학 잡지에 기사를 쓴 저자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여 대학 고위 관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에 대한 퇴학으로 촉발되었다. 이는 만달레이로 확산되어 전 버마 학생 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아웅산과 우 누는 이후 학생에서 국가 정치로 진출하면서 타킨 운동에 합류했다.[20][42]
3. 3. 인도 분리 (1937)와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1937년 영국은 버마 주를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분리하고, 완전히 선출된 의회를 갖춘 새로운 헌법을 부여했다.[45] 그러나 일부 버마인들은 이를 인도의 추가 개혁에서 버마인들을 배제하려는 책략으로 여겼다. 바 모가 버마의 초대 총리가 되었으나, 1939년 우 소에게 축출되었고, 우 소는 1940년부터 1942년 일본과의 통신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총리직을 역임했다.[20]1938년 버마 중부 유전에서 시작된 파업과 시위는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랑군에서는 학생 시위대가 식민 정부 사무국을 봉쇄했고, 영국 기마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랑군 대학교 학생 1명이 사망했다. 만달레이에서는 경찰이 불교 승려들이 이끄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7명이 사망했다. 이 운동은 'Htaung thoun ya byei ayeidawbon'('1300년 혁명')으로 알려졌으며,[42][20] 최초의 순교자 아웅 꺄우가 사망한 12월 20일은 '보 아웅 꺄우의 날'로 기념되었다.[22][4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전선에 집중했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은 버마를 침공하여 1942년 말까지 식민지 대부분을 장악했다. 아웅산은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30인의 동지 중 한 명으로, 1942년 일본과 함께 버마로 돌아와 독립을 주도했다. 1943년, 일본은 버마국을 수립하고 바 모를 국가 원수로 하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고, 반란 활동이 만연했다.
일본의 더 악랄한 침략 사실이 밝혀지자, 아웅산과 동지들은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조직하고 일본에 저항했다. 1945년 5월, 주로 영국 인도군으로 구성된 영국군이 양곤을 탈환하며 일본의 3년간의 통치는 끝났다.
4. 독립 이후
4. 1. 일본 항복 이후 (1945-1948)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버마에는 군정이 들어섰다. 영국 당국은 아웅산과 영국 인도군의 다른 구성원들을 반역죄와 일본과의 협력 혐의로 기소하려 했다.[23] 그러나 버마의 마운트배튼 경은 아웅산의 대중적 인기에 비추어 재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20]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총독 대령 레지널드 도어먼-스미스 경이 귀환했다. 복원된 정부는 국가의 물리적 재건에 중점을 둔 정치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독립 논의를 연기했다.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은 정부에 반대하여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AFPFL 내부에서는 공산당과 아웅산 및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전략을 둘러싼 불화가 발생하여 타킨 툰이 1946년 7월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하고 그 이듬해 10월 CPB가 AFPFL에서 축출되었다.[20]도어먼-스미스는 새로운 총독인 소장 허버트 랜스 경으로 교체되었고, 양곤 경찰은 파업에 돌입했다. 1946년 9월에 시작된 이 파업은 경찰에서 정부 직원으로 확산되어 전면 파업에 가까워졌다. 랜스는 아웅산과 만나 그를 설득하여 다른 AFPFL 구성원들과 함께 총독의 집행 위원회에 합류하게 함으로써 상황을 진정시켰다.[20] 이제 국가 내에서 신뢰도가 높아진 새로운 집행 위원회는 버마의 독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1947년 1월 27일 아웅산-애틀리 협정으로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20]
이 협정은 AFPFL의 공산주의와 보수주의 분파 일부를 불만족하게 만들어 적기 공산당을 타킨 소가 이끌고 지하로 들어가게 하고 보수파는 야당으로 몰아넣었다. 아웅산은 1947년 2월 12일 팡롱 회의에서 소수 민족과 통일 버마를 위한 협정을 성공적으로 체결했으며, 이후 '연합의 날'로 기념되었다.[20][24] 얼마 후, 베테랑 승려 우 세인다가 이끄는 아라칸에서 반란이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20] 아웅산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AFPFL의 인기는 1947년 4월 제헌 의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확인되었다.[20]
그러던 중 1947년 7월 19일, 전대미문의 사건이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버마의 전쟁 전 보수 총리인 우 소는 사무국에서 회의 중이던 아웅산과 그의 내각 구성원 여러 명, 그중에는 그의 형 바 윈(오늘날 민주주의연맹 망명 정부 지도자 Sein Win 박사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20][25] 그 이후로 7월 19일은 버마에서 순교자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사회주의 지도자인 타킨 누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1948년 1월 4일 1947년 버마 독립법에 따라 수립된 버마의 독립을 주재했다. 버마는 독립 시 완전한 독립 공화국이 되기를 선택했고, 영국 자치령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으로 자치령 지위를 얻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버마에서 반영국의 대중적 감정이 강했기 때문일 수 있다.[20]
5. 영국 식민 지배의 유산
영국 식민 지배는 영국령 버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특히 민족 갈등을 심화시켜 현재 미얀마 내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00년 영국령 버마 민족 통계에 따르면 70% 이상이 버마족이었으나, 소수민족과 버마족 간의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고지대에 살면서 독립을 요구했다.
6.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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