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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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국사는 우다 천황, 다이고 천황, 스자쿠 천황 3대에 걸친 역사를 다룬 정사 편찬 사업으로, 936년 시작되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936년 찬국사소가 설치되어 편찬이 시작되었고, 954년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총재로 임명되어 작업이 촉진되었으나, 969년 이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40권본과 50권본이 존재했으며, 50권본은 속삼대실록으로 불렸다. 헤이안 시대에는 초고가 존재했으나 소실되었고, 현재는 일본기략 등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전해진다. 쇼타이의 변 이후 기술 방침 문제와 우다 천황 사후 편찬 동기 상실이 미완의 원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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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사 | |
---|---|
개요 | |
이름 | 신국사 (新国史) |
유형 | 일본의 공식 역사서 |
언어 | 일본어 |
저자 | 오에노 아사쓰나 (大江朝綱) |
역사 | |
편찬 시작 | 9세기 말 |
편찬 중단 | 간표 (寛平) 연간 (889년 ~ 898년) |
편찬 재개 | 엔기 (延喜) 연간 (901년 ~ 923년) |
미완성 | 완성되지 못함 |
특징 | |
내용 | 일본의 역사를 다룸 |
기존 역사서와의 차이점 | 기존의 역사서를 수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추가 |
영향 | 후대의 역사 연구에 영향을 미침 |
구성 | |
분량 | 총 200권 (예정) |
현재 | 현재는 일부 내용만 전해짐 |
참고 문헌 | |
관련 서적 | 본조서적목록 (本朝書籍目録) 슈가이쇼 (拾芥抄) |
추가 정보 | |
중요성 | 일본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
평가 |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됨 |
2. 편찬 과정
우다 천황과 다이고 천황 2대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다룬 정사(正史) 편찬 사업은 스자쿠 천황 쇼헤이 6년(936년)에 찬국사소(撰国史所)라는 기관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고, 무라카미 천황 덴랴쿠 8년(954년)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를 총재(総裁)로 삼아 작업 촉진을 꾀하였으나, 안나 2년(969년)을 마지막으로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책이 완성되었다는 기록도 없어서 미완에 그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6]
다만 초고는 존재했고 사본 등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치조 천황 간코 7년(1010년) 무렵에 천황이나 당시의 권력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신국사의 편찬 재개를 검토하였지만, 천황이 붕어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6] 후지와라노 미치노리(신제이)가 작성한 도서 목록 등에 따르면 40권본과 50권본이 있었다. 후자가 특히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렸던 점에서, 메이지 시대 반 노부토모 이래 우다・다이고 2대가 기록된 것이 40권, 나머지 10권에서 스자쿠 천황 1대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초고가 남아 있었지만, 후에 완전히 흩어져서 현대에는 『주우키』 등에 그 일부가 인용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일본기략』 집필 당시 《신국사》의 초고가 원전의 일부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사학자 호소이 히로시(細井浩志)는 『신국사』를 토대로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 가운데 현대에 과학적으로 발생일을 산출할 수 있는 일식 등의 천문현상 기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서, 쇼타이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일치하지만 엔기 이후 হঠাৎ 기재 누락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쇼타이의 변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아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그쳤다는 견해를 제시했다.[7]
2. 1. 찬국사소 설치와 초기 편찬 작업 (936년 ~ 954년)
936년(쇼헤이 6년) 스자쿠 천황 대에 우다 천황과 다이고 천황 2대에 걸친 정사(正史) 편찬을 위해 찬국사소(撰國史所)라는 기관이 설치되었다. 후지와라노 쓰네스케와 다이라노 고레모치가 벳토(別当)로 임명되어 오에노 아사쓰나 등에게 편찬 작업을 보좌하게 했다.[6]그러나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고, 954년(덴랴쿠 8년) 무라카미 천황은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를 총재(総裁)로 삼고, 오에노 아사쓰나를 벳토로 임명하여 스자쿠 천황 시대의 기록을 추가하고 작업 속도를 높이도록 명했다.[6]
2. 2.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총재 임명과 편찬 작업 촉진 (954년 ~ 969년)
936년 스자쿠 천황 대에 선국사소라는 기관이 설치되어 후지와라노 쓰네사다와 다이라노 이모치가 벳토(別当)로 임명되고, 오에노 아사쓰나 등이 편찬 작업을 보좌했다. 그러나 작업은 지지부진했고, 954년 무라카미 천황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를 총재(総裁)로 임명하고 오에노 아사쓰나를 벳토로 삼아 스자쿠 천황 시대의 기록을 추가하도록 지시하며 편찬 작업을 독려했다.[6]957년 오에노 아사쓰나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오에노 고레토키가 벳토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율령제가 이완되면서 조정 내에서 정사 편찬에 대한 의욕이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969년을 마지막으로 《신국사》 편찬 관련 활동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책이 완성되었다는 기록도 없어 미완성으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6]
2. 3. 편찬 중단과 미완성 (969년 이후)
안나 2년(969년)을 마지막으로 신국사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이는 율령제 이완에 따라 조정에서 정사 편찬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신국사는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6]3. 내용 및 구성
《신국사》는 우다 천황과 다이고 천황 2대에 걸친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스자쿠 천황 때 편찬이 시작되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치조 천황 때 편찬이 재개될 뻔했으나 이치조 천황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후지와라노 미치노리(藤原通憲)의 도서 목록 등에 따르면 40권본과 50권본이 있었으며, 50권본은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렸다. 헤이안 시대에는 초고가 남아 있었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현재는 『주우키(中右記)』 등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전해질 뿐이다. 『일본기략(日本紀略)』 작성 시 《신국사》의 초고가 참고 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3. 1. 우다 천황, 다이고 천황, 스자쿠 천황 3대
우다 천황(宇多天皇) ・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2대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다룬 정사(正史) 편찬 사업은 스자쿠 천황(朱雀天皇) 쇼헤이 6년(936년)에 찬국사소(撰国史所)라는 기관이 세워져서 후지와라노 쓰네스케(藤原恒佐) ・ 다이라노 고레모치(平伊望)가 벳토(別当)로 임명되어 오에노 아사쓰나 등에게 작업을 보좌하게 하였다.[6] 그러나 작업은 신통치 못했고,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 덴랴쿠(天暦) 8년(954년)에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를 총재(総裁)로 삼아서 오에노 아사쓰나를 벳토로 삼고 스자쿠 천황 시대의 추가를 명하는 동시에 작업의 촉진을 꾀하였다.[6] 그러나 3년 뒤에 오에노 아사쓰나가 급서하고 벳토가 오에노 고레토키(大江維時)로 대체되었고, 시기를 같이 하여 일본에서 율령제의 이완으로 조정 내에서의 정사 편찬에 대한 의욕도 옅어져가는 등, 안나 2년(969년)을 마지막으로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게 된다.[6] 또한 이 책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없어서 미완에 그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6]다만 초고는 존재하고 있을 정도였고 사본 등의 형태로 소유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치조 천황(一条天皇) 간코(寛弘) 7년(1010년) 무렵에 천황이나 당시의 권력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신국사의 편찬 재개를 검토하였지만, 천황이 붕어하면서 실현에 옮기지는 못하게 되었다.[6] 후지와라노 미치노리(藤原通憲, 신제이信西)가 작성한 도서 목록 등에 따르면 40권본과 50권본이 있었다.[6] 후자가 특히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점에서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반 노부토모(伴信友) 이래 우다 ・ 다이고 2대가 기록된 것이 40권, 나머지 10권에서 스자쿠 천황 1대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6]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초고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 완전히 흩어져서 현대에는 『주우키(中右記)』 등에 그 일부가 인용되어 남아 전해질 뿐이다.[6] 또한 『일본기략(日本紀略)』의 집필 당시 《신국사》의 초고가 그 원전의 일부로써 사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6]
사학자 호소이 히로시(細井浩志)는 『신국사』를 토대로 하였다고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 가운데 현대에는 과학적으로 발생일을 산출해낼 수 있는 일식 등의 천문 현상 기사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검토해서, 쇼타이(昌泰)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합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기(延喜) 이후 돌연 기재 누락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쇼타이의 변(昌泰の変), 즉 다이고 천황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다자이후(大宰府)로 좌천(사실상 유배)시킨 사건(이 사건을 전후하여 「엔기」로 연호를 바꾸었다)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았고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그쳤다는 견해를 세우고 있다.[7] 또한 《신국사》는 사실상 폐위되어 오래 살았던 요제이 상황(陽成上皇)에 대해 고코 천황(光孝天皇)의 친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일단은 신적강하(臣籍降下)된 뒤에 황족으로 복귀하여 황위를 이었던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덴랴쿠 3년(949년) 우다 상황의 서거로 인해 적극적인 편찬 동기가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는 견해를 세우고 있다.[7] 한편 우다 천황과 요제이 상황 사이의 대립과 정사 편찬과의 관련성 문제는 엔도 케이타(遠藤慶太)가 『일본삼대실록』 편찬의 동기로써 거론하고 있다.[8]
3. 2. 40권본과 50권본 (속삼대실록)
우다 천황(宇多天皇)과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2대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다룬 정사(正史) 편찬 사업은 스자쿠 천황(朱雀天皇) 쇼헤이 6년(936년)에 찬국사소(撰国史所)라는 기관이 세워져 시작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신통치 못했고,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 덴랴쿠(天暦) 8년(954년)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를 총재(総裁)로 삼아 작업 촉진을 꾀하였으나, 안나 2년(969년)을 마지막으로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완성되었다는 기록도 없어 미완으로 그친 것으로 여겨진다.[6]이치조 천황(一条天皇) 간코(寛弘) 7년(1010년) 무렵, 천황이나 당시 권력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신국사 편찬 재개를 검토하였지만, 천황이 붕어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6] 후지와라노 미치노리(藤原通憲, 신제이信西)의 도서 목록 등에 따르면 40권본과 50권본이 있었는데, 후자가 『속삼대실록』이라고 불렸다. 메이지 시대 반 노부토모(伴信友) 이래 우다・다이고 2대가 기록된 것이 40권, 나머지 10권에 스자쿠 천황 1대가 추가되어 『속삼대실록』이라 불렸다는 것이 통설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초고가 남아 있었지만, 후에 완전히 흩어져 현대에는 『주우키(中右記)』 등에 일부 인용되어 전해질 뿐이다. 『일본기략(日本紀略)』 집필 당시 《신국사》 초고가 원전 일부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3. 3. 소실과 전래
헤이안 시대에는 초고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 완전히 흩어져서 현대에는 『주우키』 등에 그 일부가 인용되어 남아 전해질 뿐이다. 또한 『일본기략』 집필 당시 《신국사》의 초고가 그 원전의 일부로써 사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6]사학자 호소이 히로시는 『신국사』를 토대로 하였다고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 가운데 현대에 과학적으로 발생일을 산출해낼 수 있는 일식 등의 천문 현상 기사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검토했다. 그 결과, 쇼타이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일치하지만, 엔기 이후 돌연 기재 누락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쇼타이의 변(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다자이후로 좌천시킨 사건)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아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그쳤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신국사》는 요제이 상황에 대해 고코 천황의 친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신적강하된 뒤에 황족으로 복귀하여 황위를 이었던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덴랴쿠 3년(949년) 우다 상황의 서거로 인해 적극적인 편찬 동기가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7] 한편 우다 천황과 요제이 상황 사이의 대립과 정사 편찬과의 관련성 문제는 엔도 게이타가 『일본삼대실록』 편찬의 동기로써 거론하고 있다.[8]
4. 편찬 중단 원인 분석
《신국사》 편찬은 스자쿠 천황 쇼헤이(承平) 6년(936년)에 찬국사소(撰国史所)라는 기관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무라카미 천황 덴랴쿠(天暦) 8년(954년)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총재로 임명되어 작업 촉진을 꾀하였으나, 3년 뒤 벳토(別当)였던 오에노 아사쓰나가 급서하면서 오에노 고레토키(大江維時)로 교체되었다. 이와 함께 율령제가 이완되면서 조정 내에서 정사 편찬에 대한 의욕이 옅어졌고, 안나 2년(969년)을 마지막으로 활동 기록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6] 완성되었다는 기록도 없어 미완으로 그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치조 천황 간코(寛弘) 7년(1010년) 무렵 편찬 재개가 검토되기도 하였으나, 천황의 붕어로 실현되지 못했다.[6]
4. 1. 쇼타이의 변과 기술 방침 문제
쇼타이의 변(昌泰の変, 901년)은 다이고 천황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다자이후로 좌천(사실상 유배)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연호가 엔기로 바뀌었다. 사학자 호소이 히로시는 『신국사』를 토대로 하였다고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 가운데 현대에 과학적으로 발생일을 산출해낼 수 있는 일식 등의 천문현상 기사가 쇼타이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일치하지만, 엔기 이후 돌연 기재 누락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쇼타이의 변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았고,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그쳤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7]호소이 히로시는 《신국사》가 사실상 폐위되었으나 장수했던 요제이 상황에 대해, 고코 천황의 친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신적강하된 뒤에 황족으로 복귀하여 황위를 이었던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보았다. 덴랴쿠 3년(949년) 우다 상황의 서거로 인해 적극적인 편찬 동기가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하였다.[7] 한편 우다 천황과 요제이 상황 사이의 대립과 정사 편찬과의 관련성 문제는 엔도 케이타(遠藤慶太)가 『일본삼대실록』 편찬의 동기로써 거론하고 있다.[8]
4. 2. 요제이 상황 사망과 정치적 동기 약화
949년 요제이 상황이 사망하면서, 고코 천황의 친아들이지만 신적강하 후 황족으로 복귀하여 황위를 이은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강조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국사 편찬 기획은 적극적인 동기를 잃게 되었다.[7]5. 역사적 의의
《신국사》는 우다 천황과 다이고 천황 2대에 걸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편찬이 기획되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된 역사서이다.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신국사》 편찬 사업은 헤이안 시대 초기 정치 상황과 역사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국사》는 일본삼대실록에 이어 육국사(六國史)의 하나로 편찬이 기획되었다.[6] 그러나 잦은 편찬 담당자의 교체와 율령제의 이완에 따른 조정의 역사 편찬 의욕 저하, 쇼타이의 변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술 문제 등으로 인해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7]
학자 호소이 히로시는 《신국사》를 바탕으로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를 분석하여, 쇼타이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일치하지만 엔기 연간 이후 기사 누락이 급증하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좌천시킨 쇼타이의 변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아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완성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7]
또한, 《신국사》는 폐위된 요제이 천황에 맞서 고코 천황의 아들로 신적강하 후 황족으로 복귀해 황위를 이은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덴랴쿠 3년(949년) 우다 천황이 사망하면서 편찬 동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
5. 1. 후대 역사서에 미친 영향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초고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는 완전히 흩어져서 현대에는 『중우기(中右記)』 등에 그 일부가 인용되어 남아 전해질 뿐이다. 일본기략(日本紀略)의 집필 당시 《신국사》의 초고가 그 원전의 일부로써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7]사학자 호소이 히로시(細井浩志)는 『신국사』를 토대로 하였다고 추정되는 『일본기략』의 기사 가운데 현대에는 과학적으로 발생일을 산출해낼 수 있는 일식 등의 천문현상 기사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쇼타이(昌泰) 연간까지는 높은 확률로 일치하지만, 엔기(延喜) 이후 갑자기 기재 누락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쇼타이의 변(昌泰の変), 즉 다이고 천황(醍醐天皇)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다자이후(大宰府)로 좌천(사실상 유배)시킨 사건(이 사건을 전후하여 「엔기」로 연호를 바꾸었다)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았고,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그쳤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7]
5. 2. 당대 정치 상황 이해
헤이안 시대 초기 정치 상황은 신국사 편찬 사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신국사 편찬은 우다 천황과 다이고 천황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스자쿠 천황 시대에 이르러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지와라노 쓰네스케, 다이라노 고레모치, 오에노 아사쓰나 등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으나, 안나 2년(969년) 이후 활동 기록이 사라졌다.[6]편찬 중단의 원인으로는 다음이 거론된다.
- 율령제의 이완으로 조정 내 정사 편찬 의욕 감소
- 오에노 아사쓰나의 급서와 같은 핵심 인물의 부재
- 쇼타이의 변을 전후하여 엔기 연간 이후 기사 누락 급증
특히, 쇼타이의 변은 다이고 천황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다자이후로 좌천시킨 사건으로, 이 사건에 대한 기술 방침이 정리되지 않아 해당 사건 이후의 초고가 미정본으로 남았다는 견해가 있다.[7]
또한, 신국사는 폐위되었던 요제이 천황에 맞서 고코 천황의 친아들이자 신적강하되었다가 황족으로 복귀하여 황위를 이은 우다 천황 계통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기획으로, 덴랴쿠 3년(949년) 우다 천황의 서거로 편찬 동기가 사라졌다는 견해도 제기된다.[7] 우다 천황과 요제이 천황 사이의 대립과 정사 편찬의 관련성은 일본삼대실록 편찬 동기로도 거론된다.[8]
이러한 편찬 중단 원인 분석을 통해 당시 정치적 갈등과 권력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The Six National Histories of Japan
https://books.google[...]
UBC Press
2011-11-01
[2]
웹사이트
Nihon Dai Hyakka Zensho (Nipponica)
https://kotobank.jp/[...]
Shōgakukan
[3]
서적
Political Thought in Japanese Historical Writing: From Kojiki (712) to Tokushi Yoron (1712)
https://books.google[...]
Wilfrid Laurier Univ. Press
2006-01-01
[4]
서적
古代の天文異変と史書
吉川弘文館
2007
[5]
서적
平安勅撰史書研究
皇學館大学出版部
2006
[6]
문서
권기, 미도 관백기
[7]
서적
古代の天文異変と史書
吉川弘文館
2007
[8]
서적
平安勅撰史書研究
皇學館大学出版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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