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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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악은 683년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로,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음악을 의미한다. 453년 신라 왕이 일본 천황의 죽음에 조문 사절과 악사를 파견한 기록이 있으며, 신라금, 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했다. 헤이안 시대에 고려악에 흡수되어 점차 사라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악’이라는 용어는 덴무 천황 12년(683년) 1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 날, 오와리다노마이(소노다 춤) 및 고구려(고마), 백제, 신라 삼국(미츠노쿠니)의 악(우타마히)을 정원(오호바) 안에서 연주(츠카에마츠)했다.[1]
2. 역사
인교 천황 42년(추정 453년) 1월, 천황의 붕어 시에 신라의 왕이 소식을 듣고 놀라 슬퍼하며, 조문 사절과 악사들을 보냈다. 이들은 나니와쓰에 도착했을 때 소복을 입고 조문하고, 여러 악기를 갖추고 나니와쓰에서 교토에 이르기까지 통곡하며 춤추고 노래했다.[2]
신라금이나 횡적(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했으며, 쇼소인에는 신라금과 그 琴柱가 보존되어 있다.
악사 수는 직원령 17에서는 4명, 『령집해』에 인용된 아악 대속 오와리 조족 설에서는 무사·금사 각 1명씩이었다. 고닌 10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19년 1월 11일) 태정관부에 의하면 각 1명씩으로 줄었다. 『류취삼대가』 사이코 2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56년 2월 1일) 태정관부에서는 무사를 정지시키고 오절무사를 설치했다.[3]
『속일본기』 덴표 3년(731년) 6월 기록에는 아악료 잡악생의 정원을 정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신라악 악생은 4명이었다.[4] 그러나 요로령에서는 20명으로, 가쇼 원년(848년) 9월에는 금생·무생 각 10명이었다가 같은 해에 각 2명씩으로 줄었다.[3]
덴표 12년(744년) 12월, 쇼무 천황이 미노국후와군의 후와돈궁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미노국부에 들러 비다악과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5] 『속일본기』에는 레이키 원년 7월에 신라인 74가를 미노국으로 이적시켜 세키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어[6], 미노국에는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 신라악은 고려악, 백제악과 함께 좌우 양부제의 우방 고려악에 흡수되었고, 신라금, 신라적 등의 악기도 점차 사라졌다.
2. 1. 신라악의 전래와 초기 형태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악’이라는 용어는 덴무 천황 12년(683년) 1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는 오와리다노마이(소노다 춤) 및 고구려(고마), 백제, 신라 삼국(미츠노쿠니)의 악(우타마히)을 정원(오호바) 안에서 연주(츠카에마츠)했다는 내용이 있다.[1]
이보다 앞선 인교 천황 42년(추정 453년) 1월에는, 신라 왕이 천황의 붕어 소식에 조문 사절과 악사를 보냈고, 이들이 나니와쓰에 도착하여 소복 차림으로 조문하고,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이 있다.[2]
신라악은 신라금이나 횡적(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했으며, 쇼소인에는 신라금과 그 琴柱가 보존되어 있다.
직원령 17에 따르면 악사 수는 4명이었으나, 『령집해』에 인용된 기록에는 무사·금사 각 1명씩으로, 고닌 10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19년 1월 11일) 태정관부에 의하면 각 1명씩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후 『류취삼대가』에 수록된 사이코 2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56년 2월 1일) 태정관부에서는 무사를 정지하고 오절무사를 설치했다.[3]
『속일본기』 덴표 3년(731년) 6월 기록에는 아악료 잡악생의 정원을 정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신라악 악생은 4명이었다.[4] 그러나 요로령에서는 20명으로, 가쇼 원년(848년) 9월에는 금생·무생 각 10명으로 기록되었다가 같은 해에 각 2명씩으로 줄었다.[3]
덴표 12년(744년) 12월, 쇼무 천황이 미노국후와군의 후와돈궁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미노국부에 들러 비다악과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5] 『속일본기』에는 레이키 원년 7월에 신라인 74가를 미노국으로 이적시켜 세키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어[6], 미노국에는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 신라악은 고려악, 백제악과 함께 좌우 양부제의 우방 고려악에 흡수되었고, 신라금, 신라적 등의 악기도 점차 사라졌다.
2. 2. 아악료와 신라악
일본서기의 덴무 천황 12년(683년) 1월 기록에 "신라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1] 이날 오와리다노마이(소노다 춤) 및 고구려(고마), 백제, 신라 삼국(미츠노쿠니)의 악(우타마히)을 정원(오호바) 안에서 연주하였다.
인교 천황 42년(추정 453년) 1월, 천황의 붕어 시에 신라의 왕이 조문 사절과 악사들을 보냈고, 이들은 나니와쓰에서 교토에 이르기까지 통곡하며 춤추고 노래했다.[2]
신라금이나 횡적(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했으며, 쇼소인에 신라금과 그 琴柱가 보존되어 있다.
악사의 수는 직원령 17에서는 4명, 『령집해』에서는 무사·금사 각 1명씩이었다가 고닌 10년(819년)에는 각 1명씩으로 줄었다. 『류취삼대가』 사이코 2년(856년) 기록에는 무사를 정지시키고 오절무사를 설치했다는 내용이 있다.[3]
『속일본기』 덴표 3년(731년) 6월 기록에 따르면, 아악료의 잡악생의 수를 정하면서 신라악은 4명으로 정해졌으나,[4] 요로령에서는 20명이었다. 가쇼 원년(848년) 9월에는 금생·무생 각 10명에서 각 2명씩으로 줄였다.[3]
덴표 12년(744년) 12월, 쇼무 천황이 미노국후와군의 후와돈궁에 행차했을 때 미노국부에서 비다악과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5] 『속일본기』에는 레이키 원년에 신라인 74가를 미노국으로 이적하여 세키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6]
헤이안 시대에 신라악은 고려악, 백제악과 함께 우방 고려악에 흡수되었고, 신라금, 신라적 등의 악기도 사라졌다.
2. 3. 신라악 연주 기록
일본서기의 덴무 천황 12년(683년) 1월 기록에 "신라악"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1] 같은 책 인교 천황 42년(추정 453년) 1월 기록에는 신라 왕이 천황의 붕어 소식을 듣고 조문 사절과 악사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2]
신라금이나 횡적(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쇼소인 어물 중에 신라금과 그 琴柱가 보존되어 있다.
악사의 수는 직원령 17에서는 4명, 『령집해』에 인용된 아악 대속 오와리 조족 설에서는 무사·금사 각 1명씩이었다. 『류취삼대가』소장의 사이코 2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56년 2월 1일) 태정관부에서는 무사를 정지시키고, 대신 오절무사가 설치되었다.[3]
『속일본기』 덴표 3년(731년) 6월 기록에 따르면, 아악료의 잡악생 수를 정했는데 신라악은 4명이었다.[4] 그러나 요로령에서는 20명으로, 가쇼 원년(848년) 9월 격에서는 금생·무생 각 10명이었다가 같은 해에 각 2명씩으로 줄었다.[3]
덴표 12년(744년) 12월, 쇼무 천황은 미노국후와군의 후와돈궁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미노국부에 들러 저녁에 비다악과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5] 『속일본기』에는 레이키 원년 7월에 신라인 74가를 미노국으로 이적하여 세키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6]
헤이안 시대에는 고려악, 백제악과 함께 좌우 양부제의 우방 고려악에 흡수되었고, 신라금, 신라적 등의 악기도 사라졌다.
2. 4. 고려악으로의 흡수
신라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덴무 천황 12년(683년) 1월의 기록이다.[1] 『일본서기』의 인교 천황 42년(추정 453년) 1월, 천황의 붕어 시에 신라의 왕이 조문 사절과 악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2]
신라금이나 횡적(신라적) 등의 악기를 사용한 것으로, 쇼소인 어물 중에 신라금과 그 琴柱가 보존되어 있다.
악사의 수는 직원령 17에서는 4명, 『령집해』에 인용된 아악 대속 오와리 조족 설에서는, 무사·금사 각 1명씩, 령집해 소장의 직원령 17의 고닌 10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19년 1월 11일)의 태정관부에 의하면, 각 1명씩으로 줄었다고 한다. 『류취삼대가』소장의 사이코 2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856년 2월 1일)의 태정관부에서는, 무사를 정지시키고, 대신 오절무사가 설치되었다.[3]
『속일본기』에 따르면, 덴표 3년(731년) 6월에 "아악료의 잡악생의 원을 정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악생의 수가 정해졌다. 그것에 따르면, 신라악은 4명이지만[4], 요로령에서는 20명으로 되어 있다. 그 내역은 가쇼 원년(848년) 9월의 격에서는 금생·무생 각 10명. 같은 해에 이것을 각 2명씩으로 하고 있다.[3]
덴표 12년(744년) 12월에는 쇼무 천황은 미노국후와군의 후와돈궁에 행차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미노국부에 들렀는데, 거기서 저녁에 비다악과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5] 『속일본기』에는, 레이키 원년 7월에 신라인 74가를 미노국으로 이적하여, 세키다군을 세웠다고도 하며,[6] 미노국에는 신라인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신라악은, 헤이안 시대에는 고려악·백제악과 함께, 좌우 양부제의 우방 고려악에 흡수되어, 신라금·신라적 등의 악기도 이윽고 사라졌다.
3. 신라악과 한일 음악 교류
3. 1. 신라악의 영향
3. 2. 현대적 의의
참조
[1]
서적
日本書紀 巻第二十九・天武天皇下・十二年正月十八日条
[2]
서적
日本書紀 巻第十三・允恭天皇四十二年正月十四日条
[3]
서적
続日本紀 2
岩波書店
1990
[4]
서적
続日本紀 巻第十一・聖武天皇・天平三年六月二十九日条
[5]
서적
続日本紀 巻第十三・聖武天皇・天平十二年十二月四日条
[6]
서적
続日本紀 巻第六・元明天皇・霊亀十二年七月二十七日条
[7]
간행물
신라악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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