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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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소인은 756년, 고묘 황후가 남편 쇼무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도다이지 대불에 유품을 봉헌하면서 시작된 창고이다. 덴표 시대의 불교를 통한 국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다이지가 지방 사찰의 본사로 지정되면서 쇼소인은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 관련 물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쇼소인은 북창, 중창, 남창으로 구분되며, 특히 북창에는 천황과 황후 관련 물품이 보관되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쇼소인에는 9,000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8세기 일본에서 제작된 미술 공예품과 당나라, 중앙 아시아, 인도 등에서 수입된 물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쇼소인 보물은 불교 유물, 의류, 가구, 악기, 무기 등으로 분류되며, 매년 가을 나라 국립 박물관에서 일부가 전시된다. 또한 쇼소인은 8세기 서사실에서 나온 1만 점 이상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으며, 신라 시대의 앙탄자, 모전, 신라장적 등 한국 관련 유물도 소장하고 있어 고대 한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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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소인 | |
|---|---|
| 위치 정보 | |
| 기본 정보 | |
| 종류 | 사찰 |
| 창건 시기 | 나라 시대 |
| 소재지 | 일본 나라현나라시 자소시마치 129 |
| 문화재 지정 | 국보, 세계유산(문화유산) |
| 상세 정보 | |
| 건축 양식 | 아제쿠라 양식 |
| 보관품 | 쇼소인 보물 |
| 소속 | 도다이지 |
| 홈페이지 | 쇼소인 홈페이지 |
2. 역사
쇼소인은 본래 도다이지의 여러 창고 중 하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창고들이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아 '쇼소인'이라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그 시작은 756년 고묘 황후가 남편 쇼무 천황의 유품을 도다이지 대불에 봉헌하면서부터이며, 이후 많은 귀중한 물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었다.
에도 시대까지는 조정의 감독 하에 도다이지가 관리하였으나[15], 메이지 시대 이후 국가 관리 체제로 전환되어 내무성, 농상무성, 궁내성, 제실박물관 등으로 소관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으로 국유화되어 궁내부 도서료를 거쳐, 현재는 궁내청 산하의 쇼소인 사무소가 관리하고 있다.
쇼소인에는 일본뿐 아니라 당나라, 신라, 백제, 고구려 등 동아시아 각국과 서역, 멀리는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지에서 유래한 다양한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회화, 서적, 공예품, 도검, 악기, 가면 등 다방면에 걸친 소장품들은 고대 미술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로 인해 쇼소인은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으로도 불린다.[16] 또한 나라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쇼소인 문서나 도다이지 대불 개안 법요 관련 물품, 고대 약품 등도 함께 보관되어 있어 귀중한 문화재의 보고로 평가받는다.
쇼소인 정창(正倉) 건물 자체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의 일부로 등재되었으며, 일본의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과 초기 역사 (8세기)
나라 시대의 관청이나 큰 사원에는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쇼소(正倉)'는 본래 세금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했으며, 율령제 하에서 관청에 설치되었다. 큰 사찰에도 물품이나 보물을 보관하는 쇼소가 있었고, 쇼소를 담으로 둘러싼 구역을 '쇼소인'이라고 불렀다. 남도 칠대사 등 여러 사찰에 쇼소인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도다이지의 것만 남게 되어, '쇼소인'은 도다이지 경내의 특정 보물 창고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도다이지 건립은 쇼무 천황의 명으로 시작된 국가적인 불교 사찰 건설 사업의 일환이었다. 쇼무 천황의 치세인 덴표 시대에는 각종 재해와 정치적 혼란, 전염병이 연이어 발생했다.[3]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서 쇼무 천황은 전국적인 사찰 건립을 추진했으며, 도다이지를 그 중심 사찰로 삼았다. 쇼무 천황은 불교 신앙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쇼소인의 직접적인 기원은 756년 7월 22일(덴표쇼호 8년 6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묘 황후는 남편 쇼무 천황의 49재를 맞아, 천황이 생전에 아끼던 유품 약 650점과 60여 종의 약품을 도다이지의 본존 비로자나불(대불)에게 봉헌했다.[4] 이는 남편의 명복을 빌고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고묘 황후는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쇼무 천황과 자신에 관련된 물품들을 추가로 봉헌했으며, 이 헌납품들이 쇼소인에 보관되게 되었다. 봉헌된 물품의 목록은 『도다이 사 헌물장』(총 5권)이라는 문서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진다.
2. 2. 헤이안 시대 (9세기 ~ 12세기)
헤이안 시대인 950년, 도다이지 안에 있던 겐사쿠인(羂索院)의 창고 나라비쿠라(双倉)가 파손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나라비쿠라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들은 쇼소인의 남쪽 창고인 난소(南倉)로 옮겨지게 되었다.헤이안 시대의 여러 문서 기록에는 쇼소인이 "칙봉창고(勅封倉庫)"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쇼소인이 사실상 천황의 명령에 따라 엄격하게 관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칙봉(勅封)'이란 본래 천황의 서명이 담긴 종이를 열쇠에 감아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며, 쇼소인이 이러한 엄밀한 의미의 칙봉이 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 이후이지만, 헤이안 시대에도 이미 사실상의 칙봉으로 여겨졌다. 창고의 문을 열 때에는 반드시 천황이 보낸 사신인 칙사(勅使)가 입회해야 했다.
초기에는 북쪽 창고인 호쿠소(北倉)만이 칙봉의 대상이었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중앙의 주소(中倉)와 남쪽의 난소(南倉)까지 모두 칙봉창고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다이지의 물품들을 보관하던 난소는 칙봉에서 해제되어, 도다이지의 승려 조직이 관리하는 강봉(鋼封)으로 변경되었다.
1185년에는 고시라카와 천황 주도로 대불 재건을 기념하는 개안회가 열렸는데, 이때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던 불구(仏具)들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2. 3. 가마쿠라 시대 ~ 무로마치 시대 (12세기 ~ 16세기)
(해당 섹션 제목과 요약에 부합하는 내용이 주어진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4. 에도 시대 (17세기 ~ 19세기)
에도 시대까지 쇼소인은 조정의 감독 하에 도다이 사가 관리하였다.[15] 이 시기에도 여러 차례 수리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연도 (일본 연호) | 내용 | 비고 |
|---|---|---|
| 1603년 (게이초 8년) | 쇼소인 수리 | [51] |
| 1610년 (게이초 15년) | 태풍 피해를 정리하던 승려 3명이 북창의 물품을 훔쳤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 [51] |
| 1693년 (겐로쿠 6년) | 쇼소인 수리 | [51] |
| 1830년 (분세이 13년) | 지붕이 크게 파손되었다. | [51] |
| 1833년 (덴포 4년) ~ 1836년 (덴포 7년) | 쇼소인 수리 | [51] |
에도 시대 이후 1875년(메이지 8년)부터는 내무성 관리로 넘어가는 등 관리 주체가 변경되었다.
2. 5. 메이지 시대 이후 (19세기 ~ 현재)
원래 도다이지의 창고였으나, 에도 시대까지는 조정의 감독 하에 도다이 사가 관리하였다.[15] 메이지 시대 이후 국가 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담당 관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1875년(메이지 8년), 쇼소인에 보관된 보물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내무성의 관리하로 옮겨졌다. 이때 도다이지의 승려 조직이 관리하던 난소(南倉)도 다시 칙봉(勅封)이 되었다. 1881년 (메이지 14년) 4월 7일에는 농상무성이 설치되면서 내무성 박물국이 농상무성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1884년 (메이지 17년) 5월에는 궁내성 소관이 되었다. 1908년 (메이지 41년) 4월에는 제실박물관의 주관이 되었다.
쇼소인의 보물은 평상시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거풍(擧風)[67] 시에 국내외의 고관 등 일부에게만 제한적으로 관람이 허용되었다.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40년 11월,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도쿄 황실 박물관에서 개최된 쇼소인 보물 특별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부터는 매년 가을 거풍 시기에 맞춰 나라 공원 안에 있는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쇼소인 전시회가 개최되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다만, 관리하는 궁내청에서 정리가 끝난 9000여 점의 보물 중 매년 수십 점만이 선별되어 공개되므로, 대표적인 보물을 모두 보려면 여러 해에 걸쳐 방문해야 한다.
1947년 (쇼와 22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쇼소인을 포함한 황실 재산이 국유 재산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궁내부 도서료의 주관이 되었다. 현재는 궁내청 산하의 시설 등 기관인 쇼소인 사무소가 쇼소인 보물고와 보물을 관리하고 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고도 나라의 문화재의 일부로서 쇼소인 정창(正倉) 건물이 포함되었으며, 이 건물은 일본의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3. 쇼소인의 구조
나라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청이나 큰 사찰에는 여러 창고가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정창(正倉)'이란 본래 "정세(正税)를 수납하는 창고"라는 의미로, 율령제 시대에 각지에서 바친 쌀이나 조포(調布) 등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성을 비롯한 관청에 설치되었다. 또한, 큰 사찰에는 각각의 사령(寺領)에서 납부된 물품이나 사찰의 기물, 보물 등을 보관하는 정창이 있었으며, 정창이 모여있는 구역을 담으로 둘러싼 것을 '정창원(正倉院)'이라고 불렀다. 남도 칠대사에는 각각 정창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도다이지 정창원 내의 정창 1동만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쇼소인'은 현재 도다이지에 있는 정창원 보물고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쇼소인'은 귀중한 문화재의 보고(寶庫)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오키노시마는 "바다의 쇼소인"[19], 고야산 레이호칸은 "산의 쇼소인"[20], 가스가타이샤는 "헤이안 시대의 쇼소인"[21][22], 국보인 헤이조 궁 터에서 출토된 목간은 "지하의 쇼소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3].
3. 1. 건축 양식

쇼소인은 통나무집 방식인 아제쿠라즈쿠리(校倉造)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바닥이 약 2.5m 높이의 다카유카-시키(高床式) 구조를 가지고 있다.[5] 이는 주로 곡물 창고나 저장고 건설에 사용된 양식으로, 습기를 막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약 33.1m, 깊이 약 9.3m이며, 지붕은 모임지붕(寄棟造) 형태로 기와를 얹었다.
이 건축 양식의 특징은 단면이 삼각형인 나무 기둥(校木, 아제기)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벽체를 만들고, 이때 못이나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조립했다는 점이다.[5] 이러한 구조는 건물이 지진 발생 시 충격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쇼소인은 나라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헤이안 시대의 나라 포위전에서도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6] 정확한 건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쇼무 천황의 유품이 봉헌된 756년 직후에 짓기 시작하여 유품 목록 작성이 완료된 759년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쇼소인은 크게 북창(北倉), 중창(中倉), 남창(南倉)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중 북창과 남창은 전형적인 아제쿠라 구조로 되어 있지만, 중앙의 중창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두꺼운 판자를 끼워 벽을 만든 판창(板倉) 구조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왜 중창만 구조가 다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다. 과거에는 나라 시대 문서에 쇼소인이 '쌍창'(双倉, 소소)으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원래 북창과 남창만 존재하고 가운데는 벽이나 바닥이 없는 트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쌍창이라 불렸다는 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연륜 연대법을 이용한 조사 결과, 처음 지어질 때부터 현재와 같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 형태였음이 밝혀졌다.[38]
과거에는 아제쿠라 구조의 장점으로 습한 날씨에는 목재가 팽창하여 외부 습기를 막고, 건조한 날씨에는 목재가 수축하면서 틈이 생겨 통풍이 되므로 창고 내부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보물 보존에 유리하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거운 지붕의 무게 때문에 벽체 목재가 수축하거나 팽창할 여지가 거의 없으며, 벽면에는 빛이 들어올 정도의 틈이 많아 이 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39] 쇼소인의 보물들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여러 겹의 상자에 담겨 보관됨으로써 급격한 습도 변화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쇼소인은 현존하는 나라 시대 창고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며, 당시의 창고 건축 양식인 '쇼소'(正倉)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로서 건축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3. 2. 보존 방식
쇼소인은 귀중한 물건의 보관소였기 때문에 자연적인 기후 조절 시스템을 갖추도록 건설되었다. 이 시스템은 바닥을 2.7m 높이로 올려 건물 아래 공기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습기로부터 구조물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7] 건물 자체의 규모는 정면 약 33.1m, 깊이 약 9.3m, 바닥 아래 기둥 높이는 약 2.5m이다.쇼소인의 북창(北倉)과 남창(南倉)은 교창(校倉) 구조로 지어졌다. 이는 단면이 삼각형인 목재인 교목(校木, 아제기)을 20단 겹쳐 벽체를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 중앙의 중창(中倉)은 기둥 사이에 두꺼운 판을 끼워 넣은 판창 구조로 되어 있어, 양옆의 창고와는 구조가 다르다. 과거에는 교창 구조의 목재가 습도에 따라 팽창하거나 수축하면서 창고 내부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거운 지붕의 하중 때문에 교목이 신축할 여지가 거의 없고, 벽면에는 틈이 많아 외부 공기가 통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이 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39] 쇼소인의 보물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유물을 여러 겹의 상자에 넣어 보관함으로써 습도의 급격한 변화를 막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유물 자체는 내구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향나무 나무로 만든 상자에 보관되었다.[5] 이 상자들은 대략 길이 90cm–110cm, 너비 60cm–70cm, 높이 40cm–50cm 크기였으며, 건물 바닥과 마찬가지로 지면에서 띄워져 보관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교창 구조의 보물창고가 보물을 지켜왔지만, 현대적인 보존 환경을 위해 1952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동보물고(東宝庫)가, 1962년에는 같은 구조의 서보물고(西宝庫)가 완공되었다. 1963년에는 보물 대부분이 이 새로운 보물고로 옮겨졌다. 현재 보물의 대부분은 서보물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동보물고에는 주로 수리 중인 품목이나 서보물고에 공간이 부족한 대량의 염직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천황의 명으로 봉인하는 칙봉(勅封)은 이 새로운 보물고에 시행되고 있다.
4. 쇼소인의 보물
쇼소인에는 나라 시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종류와 기원을 가진 귀중한 보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보물들은 756년 고묘 황후가 남편 쇼무 천황의 유품 약 650점과 약 60종의 약품을 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대불)에게 봉헌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헌납된 것들이다. 이러한 헌납품의 목록은 『도다이 사 헌물장』(5종의 헌납장)에 기록되어 쇼소인에 함께 보관되고 있다.[4]
보물들은 쇼소인 내의 북창(北倉, 호쿠소), 중창(中倉, 주소), 남창(南倉, 난소) 세 구역으로 나뉘어 보관되었다. 북창에는 주로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와 관련된 물품이, 중창에는 도다이지 의식 관련 물품이나 문서 등이, 남창에는 950년 옮겨온 불구(仏具) 등을 포함한 물품들이 보관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리나 다른 이유로 반출되었다가 다른 곳에 반납되는 등 보물의 위치는 상당히 이동하였다. 특히 쇼무 천황 관련 유품이 많은 북창은 일찍부터 칙사 입회 하에 문을 여는 등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쇼소인의 보물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 외에도 당나라, 신라, 백제, 고구려 등 동아시아 여러 지역과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서역, 페르시아, 인도, 심지어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지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미술 공예품, 서적, 악기, 무기 등을 망라한다. 이러한 국제적인 성격 때문에 쇼소인은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이라고도 불린다.[2][11]
다만, 『헌물장』에 기록된 모든 물품이 그대로 현존하는 것은 아니다. 무기류, 약재, 서적, 악기 등은 필요에 따라 반출되어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 특히 도검류는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때 대량으로 반출된 후 다른 도검으로 대체되어 반납되기도 했다.[24] 일부 보물은 훼손되어 파편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4. 1. 개요
원래 도다이지(東大寺)의 창고였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국가 관리하에 놓여 내무성, 농상무성을 거쳐 1884년부터 궁내성 관할이 되었다.[15] 태평양 전쟁 후 궁내부를 거쳐 현재는 궁내청 산하 쇼소인 사무소가 관리한다.'정창(正倉)'이란 본래 율령제 하에서 세금으로 거둔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를 의미하며, 관청이나 큰 사찰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정창 여러 개를 담으로 둘러싼 구역을 '정창원(正倉院)'이라 불렀다. 나라 시대 남도 칠대사에도 각각 정창원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소실되고 도다이지의 것만 남아, '쇼소인'은 도다이지 경내의 특정 창고 건물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756년 나라 시대, 고묘 황후는 남편 쇼무 천황의 7주기를 맞아 유품 약 650점과 약 60종의 약품 등을 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대불)에게 봉헌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련 물품을 봉헌했으며, 이들 헌납품 목록은 현존하는 5종의 '헌납장' 문서에 기록되어 쇼소인에 보관되었다.
현재 쇼소인에는 약 9,000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8], 고묘 황후가 기증한 보물은 북쪽 창고(北倉, 호쿠소)에 보관되어 황실의 허가 없이는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었다.[4] 소장품의 약 95%는 8세기경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나머지는 당나라,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서 수입된 것이다.[9][10] 유물에는 그림, 서적, 금속·칠·목공예품, 도검, 도기, 유리 기기, 악기, 가면 등 고대 미술 공예품과 더불어 한반도의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도 포함된다. 소장된 주요 유물 범주는 불교 용품(仏具|부쓰구일본어), 의복 및 장신구(服飾|후쿠쇼쿠일본어), 가구(調度品|조도힌일본어), 놀이 도구(遊戯具|유기구일본어), 악기(楽器|갓키일본어), 무기(武事|부지일본어) 등이다.[12]
보물의 디자인에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의 영향으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서방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어[2][11]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으로 불리기도 한다.[16] 다만 서아시아에서 직접 제작된 것은 유리 기기 등 일부에 한정되며, 대부분은 일본 내에서 외래 양식을 수용하여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7][18]
이 외에도 나라 시대의 사료인 쇼소인 문서(正倉院文書), 도다이지 대불 개안 법요 관련 물품, 고대 약품 등 귀중한 자료들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소장품은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으나, 매년 가을 나라 국립 박물관에서 일부를 선별하여 전시한다.
현대에는 '쇼소인'이 귀중한 문화재 보고(寶庫)를 가리키는 은유로도 쓰여,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쇼소인'[19], 고야산 레이호칸을 '산의 쇼소인'[20], 가스가타이샤를 '헤이안의 쇼소인'[21][22], 헤이조 궁 터 출토 목간을 '지하의 쇼소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23]
4. 2. 주요 보물 (예시)
이 절에서는 쇼소인의 대표적인 보물에 대해 다룬다.[27]; 적칠문관목어주자 (せきしつぶんかんぼくのおんずし)
: 옻칠한 물건 보관함. 높이 102cm. 쇼소인에서 가장 유서 깊으며, 아스카 시대의 덴무 천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덴무 천황의 유애품이다. '고양작'이라고 적혀 있다. 덴무 천황→지토 천황→몬무 천황→겐쇼 천황→쇼무 천황→고켄 천황으로 이어져 고켄 천황이 도다이지에 헌납했다. 국가 진보장에 따르면 천황의 곁에 놓여 있었으며, 쇼무 천황의 필체로 된 '잡집', 겐쇼 천황의 필체로 된 효경, 고묘 황후의 필체로 된 '낙기론', 왕희지의 서법 20권, 칼, 홀 등 천황의 신변을 소중하게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겐쇼 천황 필체의 '효경' 등은 분실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쇼무 천황 필체의 '잡집', 고묘 황후 필체의 '낙기론' 등은 현존하고 있다. 덴무 천황부터 시작하여 6대에 걸쳐 천황에게 전해진 이 주자는 쇼소인 보물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이다.
; 평라전배원경 (へいらでんはいのえんきょう)・평라전배팔각경 (へいらでんはいのはっかくきょう)
: 거울의 뒷면을 다른 재료로 장식한 보석 거울이다. 쇼소인에는 56면의 거울이 전해지고 있지만, 나전칠기 세공 거울은 평라전배원경 7면과 평라전배팔각경 2면, 총 9면이 전해진다. 단, 이 중 5면은 가마쿠라 시대에 도난당했으며, 산산조각 난 1면을 제외한 4면은 파편을 연결하여 보수했다. 지름 약 27cm. 야광패의 나전칠기 세공을 별갑, 호박, 터키석, 라피스 라줄리로 장식한 매우 호화로운 거울이다. 이 보물은 쇼소인 보물의 화려함과 세계성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이며, 야광패, 별갑은 동남아시아산, 호박은 미얀마 또는 중국산, 터키석은 이란산, 라피스 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산으로 여겨진다.
; 금은산수팔괘배팔각경 (きんぎんさんすいはっけはいのはっかくきょう)
: 지름 40.7cm. 평라전배원경, 평라전배팔각경과 마찬가지로 보석 거울이지만, 이 거울은 뒷면에 은판을 붙여 세공을 했다. 게다가 주요 부분에는 도금을 해 매우 정교한 거울이다. 중앙의 손잡이에는 봉래산을 나타내고, 그 주위에 물새, 거북, 학, 봉황, 용, 공작, 원앙, 앵무새, 사슴 등을 배치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바깥쪽에 오언율시가 새겨져 있으며,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 "홀로 외로운 모습에 나그네 되어 이국에 있음을 슬퍼하고 근심하며, 즐거움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도 화답하는 이 없어 몇 년이나 흘렀는가. 이제 새롭게 이 마음을 비추는 훌륭한 거울이 완성되었네. 그러고 보니 이 거울에 비추기에 어울리는 저 아름다운 사람을 멀리서 떠올리네. 이 거울 속을 춤추는 봉황은 가까운 숲의 둥지로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용은 바다를 건너온 지 얼마 안 되었네. 이 거울을 잘 간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세. 그리고 그날에 이것을 풀어 사랑하는 사람을 비추리라."
; 황금유리전배십이릉경 (おうごんるりでんはいのじゅうにりょうきょう)
: 은제 보석 거울로 뒷면이 칠보로 되어 있다. 쇼소인 유일의 칠보 제품이지만, 고대 칠보 자체의 자료는 극히 적다. 본 거울의 일부는 성분이 용해되지 않은 채 불투명한 부분도 많아, 미숙한 유리 제작 기술에 기인하며, 칠보의 기원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거울에는 상자가 현존하며, 칠피팔각경상이라고 불린다. 생가죽을 거울 상자용으로 형성하고, 천 위에 검은 옻칠을 칠해 금은니로 마무리했다. 이 제법은 나라 시대에 성행했지만, 무로마치 이후 잊혀져 메이지 시대의 쇼소인 보물 수리 과정에서 재발견되었다.
; 조모립녀병풍 (とりげりつじょのびょうぶ)
: 당풍의 여성이 그려진 여섯 폭의 병풍. 현재는 국가 진보장에 기재된 쇼무 천황의 유애 보물로 유명하다. 나무 아래에 당풍의 여성을 한 명씩 그린 여섯 폭 한 쌍으로, 예전에는 여성의 의복 등에 새의 깃털이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은 거의 탈락해 버렸으며, 세 번째 여성의 어깨 부분에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깃털은 일본 특산의 꿩의 깃털이며, 짙은 당의 정취에도 불구하고 국산임이 밝혀졌다.[28] 에도 시대에 상당히 수리 보필이 이루어졌으며, 제6폭은 얼굴을 제외하고 거의 스미요시 나이키의 보필이다.
; 조모전서병풍 (とりげてんしょのびょうぶ)・조모첩성문서병풍 (とりげじょうせいぶんしょのびょうぶ)
: 한문을 새겨 넣은 대형 병풍. 조모립녀병풍과 마찬가지로 고묘 황후에 의해 헌납된 것으로, 쇼무 천황의 곁에서 사용된 품목이다. 조모전서병풍은 전서와 같은 글자의 해서를 섞어 쓴 것, 조모첩성문서병풍은 육중한 해서로 쓴 병풍으로, 문장은 군주의 좌우명과 같은 것으로, 천황의 곁에 놓인 병풍에 어울린다. 문자는 새의 깃털과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조모립녀병풍과 마찬가지로 깃털은 일본 특산의 꿩이다. 이 두 병풍은 에도 시대에 몇 차례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지만, 고대 천황의 집무실을 장식했던 모습을 현재까지 잘 전하고 있다. 또한 각각 수납용 주머니도 현존하며, 이 또한 헌납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품목이다.
; 상목랍핵병풍 (ぞうきろうけちのびょうぶ)・양목랍핵병풍 (ひつじきろうけちのびょうぶ)
: 문자 그대로 상과 양이 디자인된 병풍이다. 856년7월 30일 (사이코 3년6월 25일)에 행해진 보물 점검 기록에서, 원래는 하나의 병풍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납결염에 의해 그림이 나타나 있다. 나무 아래에 동물을 배치한 이 양식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성수금수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토 요시노리는, 양목랍핵병풍의 모티프는 조로아스터교 기원으로 '분다히슈'와의 대조를 고찰하고 있다[29]. 코끼리 모티프는 인도 또는 중국의 동물에서 유래한다. 병풍에서는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다양한 동물들이 살아 숨쉬는 낙원의 정경을 볼 수 있다.
; 자단목화협식 (したんもくがきょうしょく)
: 협식이란 앉아서 휴식을 취할 때 팔꿈치 받침으로 사용하는 보조 기구이다. 쇼소인에는 협식이 본 품을 포함하여 3개가 전해지고 있지만, 나머지 2개는 다리 부분만 남아 있다. 본 품은 3개의 협식 중에서 가장 호화로우며, 유일하게 1300년 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금은 그림, 상아 세공 등 사치를 다한 장식이 베풀어져 있지만, 경량화를 추구하여, 일용품으로서의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 국가 진보장에도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쇼무 천황의 일상 휴식의 한때를 받아들인 품목이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또한 협식의 윗면을 덮는 얇은 쿠션과 같은 백라여가 부속된다.
; 어상 (ごしょう)
: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의 침대이다. 히노키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다리 부분 등 부분적으로는 백색 안료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순백색으로 칠해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보물명으로는, 침대 시트나 이불 등이 어상과 세트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실용 가구, 침구를 아는 데 귀중한 품목이 되고 있다. 어상은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가 각각 사용한 2장이 존재하지만, 침대 시트인 광장간양상록은 2명분의 침대를 덮는 크기이다. 이 점으로 보아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는 침대를 나란히 놓고 잠을 잤던 것으로 보인다.
; 화전 (かせん)
: 꽃 등의 무늬를 짜 넣은 펠트 깔개이다. 이 무늬는 둔황이나 투르판에서 발굴된 염직품과 유사하다. 또한 섬유 조사 결과, 재질은 중앙 아시아산 고대 염소의 털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화전에서 중앙 아시아산 알팔파의 열매가 섞여 들어간 채로 남아 있었다. 이 점으로 보아 아마 본 화전은 코카서스 등에서 사는 유목민의 손으로 짜여져, 머나먼 일본으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은훈로 (ぎんくんろ)
: 순은으로 제작된 구형 향로이다. 구형의 중간에서 상하로 쪼개져, 위쪽이 뚜껑, 아래쪽이 몸체로 여겨진다. 특징은 그 크기로 지름 18cm이다. 국외를 포함하여 이 정도 큰 구형 향로는 예가 없다. 전체적으로 정교한 투각을 베풀었으며, 그 기술은 매우 높다. 그러나 1300년 전 오리지널은 뚜껑 쪽이며, 몸체는 메이지 시대의 복원품이다.
; 청반석별합자 (せいはんせきべっこうす)
: 사문암에서 파낸 자라 모양의 용기이다. 복부를 팔각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같은 팔각형의 접시가 꼭 들어맞도록 되어 있다. 언뜻 보면 자라의 장식물 그 자체이며, 주목할 만한 점은 그 리얼한 사실성이다. 부드러운 등딱지, 날카로운 발톱과 입, 반면에 호박을 박은 똘망똘망한 눈은 사랑스럽다. 쇼소인 보물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등딱지에 북두칠성의 문자가 금과 은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으로, 별자리가 새겨진 보물은 쇼소인에서도 극히 드물다.
; 소방지금은회함 (すおうじきんぎんえのはこ)
: 다리가 달린 상자로, 뚜껑, 본체에 금과 은으로 보상화 무늬가 그려져 있다. 30.3cm×21.2cm×8.6cm. 상자 안은 옅은 복숭아색으로 채색되었고, 하얀 꽃잎이 그려져 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자는 헌물 상자라고 불리며, 부처에게 바치는 공물을 넣는 데 사용되었다. 쇼소인에는 이러한 헌물 상자, 책상이 수십 점 전해지고 있으며, 그 대표가 이 소방지금은회함이다. 바닥 부분에 '동소탑'이라고 적혀 있으며, 동소탑은 서소탑과 함께 신호경운 원년(767년), 쇼토쿠 천황의 발원으로 백만 탑을 납입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당초 이 보물은 동소탑의 비품이었지만, 동소탑 폐지 후 쇼소인으로 이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도 헤이안 시대에 도다이 사 켄사쿠인의 창고가 낡아 그 안의 보물을 쇼소인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어떤 원인으로 폐지된 도다이 사 제당의 비품도 쇼소인에 납입되어 전승되고 있다.
; 백참릉금기여 (しろつるばみあやにしきのきじょく)
: 길이 99cm, 폭 53cm의 천으로, 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에게 헌납할 물건을 실었다. 쇼소인에는 비슷한 크기의 천이 십여 점 전해지고, 그것들과 같은 윗면의 기(책상)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각각의 책상 위 덮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두 호화롭고 사치를 다한 화려한 것이다. 그 중에서 본 품은 삼베를 두 번 접은 심을 능직으로 감싸고, 뒷면에 엷은 녹색의 사를 꿰맨 것뿐인 심플한 천이다. 하지만 본 품은 매우 특이하여 이채를 띠고 있으며, 사자(사자)를 다루는 반라의 인물상은 일본뿐 아니라 서방에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능직의 조직도 매우 드물어, 서방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舶載品인지 국산품인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 곤협계사기여 (こんきょうけちあしぎぬのきじょく)
: 백참릉금기여와 마찬가지로 책상 위에 올려놓는 깔개이다. 본 여는 쇼소인에 전해지는 여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염색물이다. 문양은 연화풍의 꽃좌 위에서 서로 마주보는 물새를, 만개한 꽃나무 아래에 배치한 것이다. 화엽당초와 운형을 조합한 원호형의 띠에 의해 상방 2곳과 하방 1곳으로 구획되어 있다. 문양과 문양 사이는 방염하여 하얗게 선명하게 남고, 빨강, 노랑, 녹색, 짙은 남색으로 보기 좋게 염색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문양 중 하나인 잎의 끝을, 임의로 방염하지 않고 노란색과 녹색을 섞어 황록색으로 얼룩지게 했지만, 놀랍게도 빨강이나 남색 등 다른 염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 기술은 이미 사라졌으며 지금도 해명되지 않았다.
; 난사대 (らんじゃたい)
: 천하 제일의 명향으로 칭송받는 향목. 쇼소인의 중창[30] 약물 선반에 있으며, 현재까지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노리, 오다 노부나가, 메이지 천황 등에 의해 잘려져 있다.[31]
; 나전자단오현비파 (らでんしたんのごげんびわ)
: 쇼무 천황의 유품으로, 인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진 5현 비파로서는 세계 유일. 당나라에서 수입된 품목으로 추정된다. 간발(撥受け)에는 나전칠기로 열대수와 나는 새나 낙타를 타고 비파를 타는 호인을 나타내고, 측면에는 자단에 야광패의 조각을 붙인다[32][33]
; 백유리완 (はくるりのわん)
: 투명하고 매우 옅은 갈색을 띤 컷 글라스의 사발. 알칼리 석회 유리제.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34]
4. 3. 한국 관련 유물
1933년 쇼소인에서 발견된 신라장적은 신라 시대의 촌락 문서로, 당시 신라 사회의 경제와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신라시대의 앙탄자와 모전(毛氈)도 소장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직조 기술을 보여준다.[68] 쇼소인에 소장된 8세기 미술품 중 많은 물품이 신라에서 제작되었다.5. 쇼소인 문서
쇼소인에 보관되어 온 문서군으로, '''쇼소인 문서'''(正倉院文書)라고 불린다. 이 문서들은 쇼소인의 보물과는 별개로 취급되며, 주로 고묘 황후의 황후궁직에서 시작하여 도다이사 사경소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경소에서 작성된 것들이다. 8세기 나라 시대 서사실에서 나온 1만 점 이상의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의 사회, 경제,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문서의 내용은 인구 조사, 세금 기록, 시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727년부터 776년까지 운영된 경전 필사 사무소(사경소)의 일상적인 기록이다. 이 방대한 컬렉션은 8세기 필사본 아카이브로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집중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1830년대에 고고학자 호이다 타다토모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그러나 호이다와 그의 후계자들이 개별 문서들을 떼어내 새로운 두루마리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구성이 일부 훼손되기도 했다. 이후 1901년부터 『대일본고문서』의 처음 25권에 걸쳐 인쇄본으로 출판되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원래 두루마리의 구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현재는 디지털화되어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13]
6. 성어장(聖語蔵)
정창원 구내에는 정창원 본체 외에 또 다른 소형 아자고(倉造) 양식의 창고가 있는데, 이를 "성어장(聖語蔵)"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정창원 문서와는 별도로 고대 불교 관련 서적인 경권류(經卷類)가 보관되어 있었다. 원래 성어장은 동대사 존승원에 있던 경장의 일부였다.
성어장에 수장된 경권의 주요 내역은 다음과 같다.[35]
| 구분 | 부수 | 권수 |
|---|---|---|
| 수경 | 8부 | 22권 |
| 당경 | 30부 | 221권 |
| 천평경 | 13부 | 18권 |
| 광명황후 발원 "천평 12년 어원경" | 127부 | 750권 |
| 천평승보경 | 4부 | 5권 |
| 천평신호경 | 1부 | 3권 |
| 칭덕천황 발원 "신호경운 2년 어원경" | 171부 | 742권 |
| 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 고사경, 고판경 등 | (총 4960권에 포함) | |
| 총계 | 4960권 | |
이 외에도 가마쿠라 시대의 외전(外典) 사본도 포함되어 있다.[36]
이 경권들은 1894년 황실에 헌납되었고, 성어장 건물 자체도 정창원 구내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다른 정창원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궁내청 정창원 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창원 성어장에 소장된 경권 전체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37]
7. 쇼소인 전시회
쇼소인의 보물은 평상시에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67]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1875년부터 1880년까지 매년 열린 나라 박람회의 일환으로 도다이지 대불전 회랑에서 일부 보물이 공개된 적이 있다. 또한 1889년부터 1940년까지는 보물의 정기 점검 및 통풍 작업인 폭량(曝凉) 시기에 맞추어 일본 국내외의 고관 등 특정 인물에게만 관람이 허용되었다.[67] 예를 들어 1922년에는 당시 영국의 황태자였던 에드워드 8세가 특별히 관람하기도 했다.[50] 모리 오가이는 1920년 폭량 시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51]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공개는 1940년 11월,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도쿄 제실 박물관(현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열린 '정창원 어물 특별전'이 처음이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약 140점의 보물이 공개되었고, 11월 6일부터 24일까지 약 41만 4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여 당시 박물관 입장객 수 기록을 세웠다.[5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10월 21일, 나라 제실 박물관(현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33점의 보물을 전시하는 첫 '정창원 어물 특별 배관'이 열렸으며, 15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53] 이를 계기로 이듬해부터는 매년 가을, 폭량 시기에 맞추어 나라 공원 내에 위치한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쇼소인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 초기에는 '정창원 어물전', '정창원 전람회' 등으로 불리다가 1952년경부터 '정창원전'(正倉院展)이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이 전시회는 2018년에 제70회를 맞이했다.
궁내청이 관리하는 쇼소인 보물은 약 9000점에 달하지만, 매년 전시회에서 공개되는 것은 약 70점 정도이며 전시 품목은 해마다 바뀐다.[55] 따라서 쇼소인의 주요 보물들을 모두 보려면 여러 해에 걸쳐 꾸준히 관람해야 한다. 전시 준비와 철수에는 약 40일이 소요되어 실제 전시 기간은 2주 정도로 짧은 편이다.
쇼소인 전시회는 매년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관람객 수는 특히 2001년(헤이세이 13년) 이후 크게 증가했다. 2001년 나라 국립박물관이 독립 행정 법인이 되면서 외부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전시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처음 4년간은 아사히 신문사가 협력하여 관람객 수가 전년 대비 약 5만 명 증가했으나, 이후 다시 감소하여 독립 행정 법인화 이전 수준인 연간 13만~14만 명대로 돌아갔다. 2005년(헤이세이 17년) 제57회 전시회부터는 요미우리 신문사가 협력 기관이 되어, 요미우리 신문사와 관련 회사들이 이전과는 다른 다채롭고 대규모의 언론 홍보를 진행했다. 최근 관람객 급증 배경에는 쇼소인 전시회에 집중하는 언론 홍보 방식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57] 2019년(레이와 1년) 11월 1일에는 누적 관람객 수가 1천만 명을 돌파했다.[56]
한편,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도 5년에 한 번씩 쇼소인전 시기에 맞추어 관련 소장품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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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간행물
제61회 정창원 전시회 팸플릿
[56]
뉴스
読売新聞
2019-11-02
[57]
서적
正倉院展へのメディア展開 --二〇〇五年秋の「事件」を読む
醍醐書房
2006-04
[58]
전시회
日本国宝展, 御即位記念特別展「正倉院の世界」展
[59]
웹사이트
「天平の秘宝」 ―正倉院宝物を探る―
https://www.nhk.or.j[...]
1981-11-09
[60]
웹사이트
正倉院 天平の宝物を守り抜いてきた宝庫
https://www2.nhk.or.[...]
2024-03-03
[61]
웹사이트
正倉院の奇跡 ~守り継がれた天皇の倉~
https://www.ytv.co.j[...]
2019-10-19
[62]
웹사이트
天皇が創った至宝〜正倉院宝物が伝える“日本誕生”〜
https://www.nhk-onde[...]
2019-10-30
[63]
웹사이트
至宝からひもとく天平の祈り~第72回 正倉院展~
https://www.nhk.or.j[...]
2020-11-01
[64]
웹사이트
史上初のプロジェクトに密着2年!正倉院の1300年前のガラス宝物・完全再現に挑む
https://www.ytv.co.j[...]
2023-11-03
[65]
웹사이트
華麗なる宝物 天平の祈り ~第75回 正倉院展~
https://www.nhk-onde[...]
2023-11-05
[66]
웹사이트
奈良・正倉院~なぜ1300年もお宝を守れた?~
https://artexhibitio[...]
2024-03-02
[67]
문서
쌓아 두었거나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 두었던 물건을 바람에 쐼
[68]
뉴스
1300년 전 신라 양탄자의 '화려한 외출'
http://newsplus.chos[...]
조선일보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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