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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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노슈는 일본의 돌담 기술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특히 노즈라즈미(자연석 쌓기) 방식으로 돌담을 쌓는 기술을 가진 이들을 말한다. 아노우즈미는 아노슈가 시공한 노즈라즈미 돌담을 속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노슈는 돌담 쌓는 방식의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신메이신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아노우즈미의 견고성을 시험하는 실험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노슈는 고토 가문과 아와타 가문 등 주요 가문을 중심으로 기술이 전승되었으며, 아즈치성, 히코네성 등 여러 성의 석축에 참여했다. 현대에도 아와타 가문은 아노슈의 기술을 계승하며 문화재 복원 및 해외 석축 시공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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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슈 | |
---|---|
개요 | |
명칭 | 穴太衆 (아노슈) |
종류 | 석공 집단 |
활동 시기 |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 |
주요 활동 지역 | 시가현 오쓰시 아노 |
상세 정보 | |
기원 | 시가현 오쓰시 아노 지역의 석공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석벽 축조 담당 |
특징 | 뛰어난 석축 기술 보유 전국 시대 무장들의 성곽 축조에 참여 |
주요 건축물 | 오사카성 교토 니조성 나고야성 |
기술 전승 | 현대까지 아노 석공 기술이 전승됨 |
관련 용어 | 里坊 (사토보) |
2. 역사
2. 1. 기원과 초기 활동
2. 2. 아즈치성 축성과 명성
2. 3. 에도 시대 이후
3. 아노즈미 (穴太積)
'''아노우즈미'''(穴太積)는 노즈라즈미 (野面積み)를 가리켜 쇼와 초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속칭이며, 아노슈가 시공한 노즈라즈미 돌담을 말한다.[2] 그러나 노즈라즈미를 아노우즈미 돌담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노슈는 돌담 기술자이므로, 실제로 옥석 쌓기나 절석 쌓기도 시공할 수 있었다.
시가현고카시 고난초에서 미나구치초에 걸쳐 있는 신메이신 고속도로에서 서일본 고속도로 오쓰 공사 사무소가,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목표로 아노우즈미의 채용을 검토했을 때, 현대 건축에 적용 가능한지 시험하기 위한 첫 실험으로 교토 대학 대학원에서 아노슈즈미와 콘크리트 블록에 의한 옹벽을 나란히 놓고 최대 하중 250톤을 가해 실험한 결과, 하중 200톤 시점에서 콘크리트 블록 쪽이 먼저 균열이 생기고, 하중 230톤에서 콘크리트 붕괴의 위험이 있어 실험이 중지되었다.[3] 이 결과에 따라, 공사 현장에서 출토된 화강암 등을 재이용한 높이 3.5m, 길이 260m의 석축이 해당 구간에 채용되어 신설되었다.
3. 1. 노즈라즈미와 아노즈미
'''아노우즈미'''(穴太積)는 노즈라즈미 (野面積み)를 가리켜 쇼와 초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속칭이며, 아노슈가 시공한 노즈라즈미 돌담을 말한다.[2] 그러나 노즈라즈미를 아노우즈미 돌담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노슈는 돌담 기술자이므로, 실제로 옥석 쌓기나 절석 쌓기도 시공할 수 있었다.시가현고카시 고난초에서 미나구치초에 걸쳐 있는 신메이신 고속도로에서 서일본 고속도로 오쓰 공사 사무소는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목표로 아노우즈미의 채용을 검토했다. 현대 건축에 적용 가능한지 시험하기 위한 첫 실험으로 교토 대학 대학원에서 아노슈즈미와 콘크리트 블록에 의한 옹벽을 나란히 놓고 최대 하중 250톤을 가해 실험한 결과, 하중 200톤 시점에서 콘크리트 블록 쪽이 먼저 균열이 생기고, 하중 230톤에서 콘크리트 붕괴의 위험이 있어 실험이 중지되었다.[3] 이 결과에 따라, 공사 현장에서 출토된 화강암 등을 재이용한 높이 3.5m, 길이 260m의 석축이 해당 구간에 채용되어 신설되었다.
3. 2. 아노즈미의 견고성
'''아노우즈미'''(穴太積)는 노즈라즈미 (野面積み)를 가리키는 속칭으로, 쇼와 초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아노슈가 시공한 노즈라즈미 돌담을 말한다.[2] 그러나 노즈라즈미를 아노우즈미 돌담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2] 아노슈는 돌담 기술자이므로, 옥석 쌓기나 절석 쌓기도 시공할 수 있었다.
시가현 고카시 고난초에서 미나구치초에 걸쳐 있는 신메이신 고속도로에서 서일본 고속도로 오쓰 공사 사무소는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위해 아노우즈미의 채용을 검토했다. 교토 대학 대학원에서 아노슈즈미와 콘크리트 블록 옹벽을 나란히 놓고 최대 하중 250톤을 가하는 실험을 한 결과, 200톤 시점에서 콘크리트 블록 쪽이 먼저 균열이 생기고, 230톤에서 콘크리트 붕괴 위험으로 실험이 중지되었다.[3] 이 결과에 따라, 공사 현장에서 출토된 화강암 등을 재이용한 높이 3.5m, 길이 260m의 석축이 해당 구간에 채용되어 신설되었다.
4. 주요 가문
4. 1. 고토 가문(後藤家)
고토 모토쓰구(고토 마타베)는 가토 기요마사에게서 석공 기술을 전수받았으며, 이는 《성 석축 시비전초(城石垣始秘伝抄)》의 "성 쌓기의 돌담에 대한 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토 모토쓰구는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전사한다. 전투 전, 그는 배다른 동생 겐파치(훗날 초대 고토 모쿠베)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겐나 원년(1615년) 4월에 그동안 배운 성과를 《석축 근원 초(石垣根元抄)》로 묶어 전수한다. 이 책은 "겐나 8년(1622년) 이래 가보로 삼아, 한 아들에게만 전하고 다른 이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이후 고토 가문의 가장 큰 재산이 된다. 고토 가문이 참여한 석축으로는 가가 번의 가나자와성이 있다.아노슈(穴太衆)의 석축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성으로는 아즈치성, 히코네성, 다케다성, 사사야마성, 가쿠무레성 등이 있다.
4. 2. 아와타 가문(粟田家)
아와타 가문(粟田家)은 에도 시대 초기의 아와야 기헤에를 시조로 하는 회사 조직으로 존속하고 있다. 1964년(쇼와 39년)에 13대째가 아와타 건설을 상호로 사용했고, 1972년(쇼와 47년)에 유한회사로 전환과 14대째를 계승, 2005년(헤이세이 17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2017년(헤이세이 29년) 시점에서는 아와타 스미노리 사장이 "제15대 아노슈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아와타가는 사카모토를 문전 마을로 하는 비에이산엔랴쿠지의 석축 작업을 대대로 맡아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효고현의 다케다성과 사사야마성, 시가현의 아즈치성과 히코네성, 더 나아가 고치성, 스모토성 등의 석축 복원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문화재 복원에도 경쟁 입찰이 도입되어 수주하지 못하는 석축 복원도 많지만, 2010년에 미국에서 실시한 워크숍에서 노즈라즈미의 견고함과 예술성이 평가받아, 댈러스의 롤렉스 지사 등에서도 시공하게 되었다.
기타가키 소이치로의 『오미의 석축 축성자 아나호슈』(쇼와 51년)에 따르면, 아와타씨는 "선조는 아와국에서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5. 석공과 관련된 전설
야마자키 씨가 마루가메 성을 축성할 당시, 석공 하사카 주자부로(羽坂重三郎)에게 "아무도 오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하사카가 성벽을 올라 군사 기밀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7] 이를 염려한 야마자키 씨는 하사카를 이노마루 우물로 불러내 "과연 이것은 오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도발하여 우물에 내려가게 한 뒤 돌을 던져 암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7]
나라현 소장의 『석성 축조 양식 목록』에는 "마루가메 (성의 석성)에서 배웠다"는 기술과 함께, 마루가메 성 석성에 특징적인 부채꼴 배치・배열을 숫자로 암호화한 기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사카의 기법이 널리 퍼졌을 가능성이 시사된다.[8] 이 기술은 시코쿠 동부 계통 석공의 기법을 본보기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 해외 활동
일본의 석공은 조선 출병 시에도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왜성 석성이 확인되고 있다.[9] 무라이 타케시는 근세 성곽을 곡륜 배치와 루호(塁濠, 해자)의 조합으로 5가지 유형으로 대별했는데, 조선반도의 왜성에 관해서는 "킨키형이 주류이며, 여기에 중국형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석공도 킨키·중국 계통으로 여겨진다.[9]
최근에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석성을 시공하고 있다.
7. 한국의 석축 기술과의 비교
일본의 석공은 조선 출병 시에도 활동했다고 여겨지며, 왜성 석성이 확인되고 있다.[9] 고고학 연구에서 무라이 타케시는 근세 성곽을 곡륜 배치와 루호(塁濠, 해자)의 조합으로, 분포하는 지역명을 붙여 "중국형", "동해형", "킨키형", "동해·호쿠리쿠형", "주부형"의 5가지 유형으로 대별했는데, 조선반도의 왜성에 관해서는 "킨키형이 주류이며, 여기에 중국형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석공도 킨키·중국 계통으로 여겨진다.[9] 최근에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석성을 시공하고 있다.
8. 현대의 아노슈
참조
[1]
웹사이트
里坊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0-04-11
[2]
웹사이트
穴太積みの石垣について
http://www.oumi-cast[...]
ウェブサイト「近江の城郭」
2008-02-11
[3]
뉴스
新名神に穴太積み
http://www.kyoto-np.[...]
2008-02-03
[4]
웹사이트
会社概要・沿革
https://web.archive.[...]
株式会社栗田建設
2017-12-16
[5]
뉴스
【フロントランナー】粟田建設社長・粟田純徳さん/自然の石積み、海外で評価
http://www.asahi.com[...]
2017-12-09
[6]
웹사이트
Dallas Rolex Tower
https://kkaa.co.jp/w[...]
[7]
문서
丸亀城二の丸井戸の看板説明
[8]
방송
にっぽん百景・栄華を極めた名城「丸亀城」
2005
[9]
논문
花園史学18号、村井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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