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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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나자와성은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가가 잇코잇키의 거점이었던 오야마고보에서 시작되었다. 1580년 사쿠마 모리마사가 오야마고보를 점령하고 가나자와성으로 명명했으며, 이후 마에다 가문이 가가 번을 통치하며 성을 확장했다. 1871년 일본 제국 육군에 넘겨져 사령부로 사용되다, 1949년 가나자와 대학 캠퍼스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가나자와조 공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이시카와 문, 산주켄 나가야, 쓰루마루 창고 등 중요 문화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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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자와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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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나자와성 |
로마자 표기 | Kanazawa-jō |
다른 이름 | 오야마성 (尾山城, Oyama-jō) 오노에성 (尾上城, Onoe-jō) 긴조 (金城, Kinjō) |
종류 | 평산성 |
축성 시작 | 1580년 |
축성자 | 사쿠마 모리마사 |
주요 건축 자재 | 불명 |
해체 | 1871년 |
현재 상태 | 부분적으로 재건 |
소유 | 불명 |
통제 | 불명 |
역사 | |
건설 시작 | 덴쇼 8년 (1580년) |
건설자 | 사쿠마 모리마사 |
개축 |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나가 |
폐성 | 메이지 4년 (1871년) |
주요 사건 | 1580-1945년 사용 |
구조 | |
양식 | 제곽식 평산성 |
천수각 구조 | 5중 6층 (1592년 축조, 비현존) |
고산카이야구라 (望楼型3重4階) 구조 | 3중 4층 망루형 (1603년 축조, 비현존) |
문화재 정보 | |
문화재 지정 | 국가 지정 사적 (가나자와성터) |
중요 문화재 | 이시카와 문 삼십간 나가야 쓰루마루 창고 |
시설 | |
보존 상태 | 나가야, 문, 야구라, 도조, 흙벽, 이축 노 무대, 석벽, 해자 |
재건축 | 히시야구라, 하시즈메 문, 가호쿠 문, 하시즈메 문 쓰즈키야구라, 오십칸 나가야, 네즈미타 문, 교쿠센인마루 정원 |
2. 역사
무로마치 시대 말기, 조도 신슈 종파 승려 렌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잇코-잇키가 가가국의 공식 통치자인 토가시 씨를 몰아내고, "농민 왕국"으로 알려진 일종의 신정 공화국을 세웠다. 1546년 오야마고보가 건립되어 가가 잇코잇키[38]로 가가의 지배권을 얻은 혼간지의 거점이 되었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사쿠마 모리마사를 가가국에 보냈고, 사쿠마 모리마사는 오야마고보를 점령하고 가나자와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후,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가가 지역을 얻은 마에다 도시이에가 6월 14일에 입성하여 오야마성으로 명명했다.
1587년 바테렌 추방령[39]으로 영지를 잃은 다카야마 시데토모가 마에다 도시이에의 부름을 받아 오야마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고, 이때 오야마 성은 다시 가나자와 성으로 불렸다. 1592년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가 다시 성을 개축했다.
1602년 천수각이 낙뢰로 소실되어 삼층 망루가 대신 지어졌다. 이 무렵 가나자와 성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1632년 다쓰미 용수[40]를 성내로 끌어들였다. 1759년 호레키 대화재로 소실될 위기를 넘겼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가나자와를 자신의 영지로 삼고,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가가 번을 노토국과 엣추국까지 확장했다.[1]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1592년에 성을 완전히 재건하라고 명령했고, 기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을 초청하여 건설을 지원하게 했다.
1631년 화재로 성이 소실되어 니노마루 제2곽이 확장되고, 다쓰미 운하가 성 부지를 통과하여 건설되었으며, 고위 가신들의 저택은 성 해자 밖으로 이전되었다. 1759년 가나자와 대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성 부지는 일본 제국 육군에 넘겨져 일본 제국 육군 제9사단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1875년 육군 제7연대가 가나자와 성에 설치되었다. 1881년 화재로 이시카와 문, 산짓켄 나가야[41], 쓰루마루 창고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1898년 육군 제9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어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1949년 전후 신설된 가나자와 대학 캠퍼스로 활용되었다. 1995년 가나자와 대학이 이전했고, 2001년 히시 망루, 하지즈메 문, 하시즈메몬쓰즈키 망루, 고짓켄 나가야가 복원되어 가나자와조 공원(金沢城公園)으로 개명되었다.
2. 1. 가가 잇코잇키와 오야마 고보
무로마치 시대 말기, 조도 신슈 종파 승려 렌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잇코-잇키가 가가국의 공식 통치자인 토가시 씨를 몰아내고, 나중에 "농민 왕국"으로 알려진 일종의 신정 공화국을 세웠다. 그들의 주요 거점은 고다츠노 능선의 끝에 위치한 요새화된 사찰 단지인 '''오야마 고보'''였다. 높은 언덕에 의해 뒷받침되고 양쪽으로 강에 의해 둘러싸여 자연 요새였으며, 그 주변에 성하 마을이 발달했다. 이것이 가나자와시의 시작이었다. 1546년에는 해자나 울타리 등을 갖춘 성의 형태를 갖춘 사찰인 오야마고보(가나자와 어당)가 건립되어 가가 잇코잇키[38]로 가가의 지배권을 얻은 혼간지의 거점이 되었다.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장군 사쿠마 모리마사를 가가국을 정복하도록 보냈다. 사쿠마 모리마사는 오야마고보를 함락시키고,[12] 같은 해에 '''가나자와성'''으로 개칭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그는 그 후 이 지역을 봉토로 하사받았으며 해자와 주변 성하 마을의 레이아웃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암살 이후 그는 시바타 가쓰이에 편에 섰고,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패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가증을 받은 마에다 도시이에가 6월 14일에 입성하여 '''오야마성'''으로 개칭했다.
1587년 바테렌 추방령[39]으로 영지를 잃은 기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이 도시이에에 의해 불려 오야마성을 대대적으로 개조했다(다시 가나자와성으로 개칭된 것은 이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도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가 다시 개조를 실시하여, 석축과 100칸 해자를 축조했다.[13] 1602년 천수각이 낙뢰로 인해 소실[13], 그 대신 삼층 망루가 건조되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가나자와성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2. 2. 사쿠마 모리마사와 가나자와성
1546년 성의 전신인 오야마고보가 건립되어, 가가 잇코잇키[38]로 가가국의 지배권을 얻은 혼간지의 거점이 되었다. 1580년 사쿠마 모리마사가 오야마고보를 공격해 수중에 넣고 가나자와성으로 명명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후,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가가 지역을 얻은 마에다 도시이에가 1583년 6월 14일에 입성하여 오야마성으로 명명했다. 1587년 바테렌 추방령[39]으로 영지를 잃은 다카야마 시데토모가 마에다 도시이에의 부름을 받아 오야마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면서 다시 가나자와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1592년 도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가 성을 개수했고, 1602년 천수가 낙뢰로 소실되어 천수 대신 삼층 망루가 지어졌다. 이 무렵부터 가나자와성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2. 3. 마에다 가문의 시대
1546년 성의 전신인 오야마고보가 건립되어, 가가 잇코잇키[38]로 가가 국의 지배권을 얻은 혼간지의 거점이 되었다. 1580년 사쿠마 모리마사가 오야마고보를 공격해 수중에 넣고 가나자와 성이라고 명명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후,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가가 지역을 얻은 마에다 도시이에가 1583년 6월 14일에 입성하고 오야마 성이라고 명명했다.1587년 바테렌 추방령[39]으로 영지를 잃은 다카야마 시데토모가 마에다 도시이에의 부름을 받아 오야마 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했다. 이때 오야마 성의 명칭도 원래 이름이었던 가나자와 성으로 다시 불렸다고 전해진다. 1592년 도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가 다시 성을 개축했다.
1602년 천수가 낙뢰로 소실되어 천수 대신 삼층 망루가 지어졌다. 이 무렵 가나자와 성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1632년 다쓰미 용수[40]를 성내로 끌어들였다. 1759년 호레키 대화재로 소실될 위기를 넘겼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가나자와를 자신의 영지의 기지로 삼았으며,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가가 번을 노토국과 엣추국까지 확장했다.[1]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1592년에 성을 완전히 재건하라고 명령했고, 성 설계에 전문 지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기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을 초청하여 건설을 지원하게 했다.
새로운 성에는 원래 6층짜리 덴슈가 있었으나, 160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대신 혼마루 궁궐, 즉 마에다 가문의 거처로 내곽이 사용되었고, 3층짜리 야구라 포탑이 있었다.
1631년에 성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당시 광범위하게 개조되었다. 니노마루 제2곽이 확장되었고, 다쓰미 운하가 성 부지를 통과하여 건설되었으며, 다양한 고위 가신들의 저택은 성 해자 밖으로 이전되었다. 성은 1759년 가나자와 대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73년(메이지 6년), 전국 성곽 존폐 처분 및 병영지 등 선정 방침에 따라 존성 처분이 결정되어 육군성의 재산이 되었다.1875년 (메이지 8년) - 육군 보병 제7연대가 가나자와 성터에 배치되었다.[12]
1881년 (메이지 14년) 1월 10일 - 보병 제7연대 병영에서 발생한 화재로[16] 이시카와 문, 산짓켄 나가야(三十間長屋), 쓰루마루 창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898년 (메이지 31년) - 육군 제9사단 사령부가 가나자와 성터에 설치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1923년 (다이쇼 12년) 6월 14일 - 마에다 도시이에의 가나자와성 입성을 기념하는 축제인 가나자와시 축제가 시작되었다. (현재: 가나자와 백만석 축제)
1949년 (쇼와 24년) 5월 31일 - 전후 신설된 가나자와 대학의 마루노우치 캠퍼스가 되었다.[17]
1995년 (헤이세이 7년) - 가나자와 대학이 이전했다.
1996년 (헤이세이 8년) - 이시카와현이 국가로부터 가나자와성 터를 취득하여, '''가나자와성 터 공원'''으로 정비를 시작했다.
1999년 (헤이세이 11년) - 가나자와성의 목조 복원 정비 사업의 제1기 공사를 착공했다.
2001년 (헤이세이 13년) - 제1기 공사로 히시 망루, 하시즈메 문, 하시즈메몬쓰즈키 망루, 고짓켄 나가야가 목조 복원 완료되어 '''가나자와조 공원'''(金沢城公園)으로 개칭되었다. 산노마루의 소실된 산노마루 우물은 목조 복원되지 않았다.
2006년 (헤이세이 18년) -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18] 이시카와현과 가나자와시는 가나자와성 터를 중심으로 하는 「성하 마을 가나자와의 문화 유산군과 문화적 경관」의 세계 유산(문화 유산)으로의 등록을 목표로, 「세계 유산 잠정 목록」에 기재를 국가 (문화청)에 공동 제안했지만, 계속 심의가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추가 기재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6년 - 2014년 제2기 복원 정비 사업으로 이시카와 문의 보존 수리, 하시즈메 문 야구라 문의 목조 복원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가나자와성의 핵심인 니노마루 어전의 목조 복원에 대해서는, 2007년 9월 19일 이시카와현 의회에서 타니모토 지사가 "그림, 문헌 자료의 해독에 일정 기간이 필요하며, 현 시점에서는 복원은 곤란(요지)"이라는 생각을 나타냈다.
2008년 (헤이세이 20년) - '''가나자와성 터'''로서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헤이세이 22년) - 가와키타 문의 목조 복원과, 이모리 보리(일부)가 복원되었다.
2013년 (헤이세이 25년) - 이시카와 문 개수 공사가 완료되었다.
2014년 (헤이세이 26년) - 교쿠센인마루 터의 잠정적 정비가 완료되었다.[19]
2015년 (헤이세이 27년) - 교쿠센인마루 터에 교쿠센인마루 정원과 교쿠센안이 오픈했다.[20]
2017년 (헤이세이 29년) - 쓰루노마루 휴게관이 리뉴얼 오픈했다.[21]
2018년 (헤이세이 30년) - 네즈미타 문 · 네즈미타 문 다리의 목조 복원이 시작되었다.[22]
2020년 (레이와 2년) - 네즈미타 문 · 네즈미타 문 다리의 목조 복원이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23][24] 또한, 네즈미타 문 흙담과 네즈미타 문 나가야 2동을 목조 복원하지 않은 이유는 예산 관계 때문이다.
2021년 (레이와 3년) - 이시카와현이 니노마루 어전 표면의 복원 정비를 위한 기본 방침을 수립했다.[25] 예산 관계와 다른 부분에는 호화로운 장벽화나 장식 쇠붙이가 없었기 때문에, 목조 복원 범위를 니노마루 어전 표면 다이도코로 · 락야쿠 · 반소, 물건 창고, 니노마루 어전 오이마 회전, 니노마루 어전 안쪽을 제외한 니노마루 어전 3200평 중 니노마루 어전 표면의 주요부 1000평(4분의 1)만으로 한정했다.
2022년 (레이와 4년) - 10월 15일, 고주켄 나가야의 매표소로 사용되던 니노마루 안내소를 개장하여 니노마루 정보관으로 개관했다. 같은 날, 가나자와성의 고성인을 발매했다. 디자인은 "생코 벽"과 "다쓰미 용수"의 2종류로, 발매 첫날은 100장 한정으로 시리얼 넘버가 기입된 고성인을 발매했다. 니노마루 정보관 개관 기념 및 고성인 발매 기념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고성인의 판매 첫 번째가 된 사람은, 참석했던 하세 히로시 이시카와현 지사로부터 전달받았다.[26][27]
2024년 (레이와 6년) - 1월 1일에 발생한 레이와 6년 노토반도 지진의 영향으로 4곳의 돌담이 붕괴되었다.[28] 다음날 2일부터 안전 확인이 될 때까지 당분간 공원 내와 겐로쿠엔을 임시 휴원하고, 개최 중인 야간 개원 및 라이트 업의 중단을 결정했다.[29][30] 그 후의 조사에서 돌담의 피해는 27곳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31] 겐로쿠엔은 같은 해 1월 5일[32], 가나자와성 공원은 같은 해 1월 20일[33]에 각각 재개원했다.
3. 구조
가나자와성은 전형적인 평산성으로, 망루를 주 건물로 많이 사용했다. 가벼운 기와를 사용하여 겨울철 눈의 무게를 고려했고, 유사시에는 총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납 성분을 함유한 기와를 사용했다.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있었지만, 천수와 삼층 망루가 소실된 후에는 니노마루를 번주의 거처로 사용했다. 천수는 재건되지 않았다.
견고한 성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사시 성 밖 마을에서 적을 맞이해 공격할 수 있도록 많은 사찰을 건립했다. 그중 하나인 묘류지의 우물에는 가나자와 성과 통하는 길이 있다고 전해진다.
성 주위에는 오테 해자, 이모리 해자, 햣켄 해자, 하쿠조 해자가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오테 해자뿐이다. 나머지 세 해자는 메이지 시대 말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매립되어 도로 등으로 변했다. 현재 이모리 해자는 복원 중이다.
하쿠조 해자는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 도로로 활용되어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었고, 햣켄 해자는 히로사카 사거리와 겐로쿠엔카 사거리를 연결하는 햐쿠만고쿠 도로의 일부가 되어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 햐쿠만고쿠 도로 위를 가로질러 가나자와 성과 겐로쿠엔을 연결하는 이시카와 다리는 과거 햣켄 해자에 놓여 있었다.
그 밖에도 성 안에는 내측 해자가 있었고, 성 밖에는 동서 내외 총 4개의 소마에 해자가 있었다. 소마에 해자는 후에 용수로로 많이 사용되었다.
마에다 씨는 도쿠가와 씨 다음으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였지만, 그들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가나자와성은 조카마치 중심부에 위치하며, 자체적으로도 전체적인 방어에 기여하는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성은 사이강과 아사노강 사이의 가장 높은 지대에 지어졌고, 해자와 운하 시스템은 추가적인 보호를 제공했다. 가가번의 두 번째 다이묘인 마에다 도시나가는 총 길이가 3000m가 넘는 내부 해자 시스템을 건설했으며, 1600년에서 1614년 사이에 외부 해자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1583년부터 1630년까지 건설된 일련의 운하가 해자 시스템과 연결되었으며, 전체 시스템은 거의 15km에 달했다.[6]
추가적인 보호를 위해 성은 아홉 개의 구획으로 나뉘었고, 흙 성벽과 석벽, 그리고 마에다 씨가 거주하던 본환을 둘러싼 요새화된 문으로 나뉘었다. 가가번의 정부 관련 건물은 주로 제2 보루(니노마루)에 있었다.[7] 많은 일본 성하 마을에서 불교 사찰은 성 방어의 약점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는데, 가나자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찰은 성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역에 전략적으로 그룹화되어 퇴각 시 피난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8]
성의 독특한 흰색 지붕 타일은 납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내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포위 시 타일을 녹여 총알로 주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나자와성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히시 야구라 - 망루, 3층 건물. 지붕 높이: 17.34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255.35m2. 이 망루는 다른 건물들과 약간의 각도를 이루며 지어져, 내부 기둥이 다이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복잡하게 얽힌 내부 기둥과 보 사이의 연결이 어렵게 되어 있다.
- 고주켄 나가야 - 창고로 사용되는 길고 홀과 같은 다면형 포탑, 2층 건물. 지붕 높이: 9.35m에서 10.08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1384.95m2.
- 하시즈메몬 츠즈키 야구라 - 망루 겸 지휘소, 3층 건물. 지붕 높이: 14.69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253.93m2.
- 하시즈메몬 문 - 입구, 문루, 흙벽으로 둘러싸인 마스가타 (masugata) 문 복합 단지.
- 쓰루노마루 도베이 - 이중 토담. 지붕 높이: 2.91m (석벽 위).
- 이시카와몬 문 - 두 가지 독특한 석조 스타일을 가진 입구 복합 단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8개의 별도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 복합 단지는 겐로쿠엔 공원의 입구 중 하나를 마주보고 있다.
성은 넓은 부지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넓고 잘 정돈된 잔디밭과 비공식적인 숲, 다양한 대형 벽, 문,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가나자와 평야의 거의 중앙을 흐르는 사이가와와 아사노가와 사이에 위치한 코타테노 대지 끝에 축조된,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사다리꼴 형태의 평산성이다(과거 "오야마"라고 불린 것도 이 지형에 기인한다. 대지 끝을 산의 꼬리로 간주했다). 야구라 문이나 토담에서 볼 수 있는, 흰 회반죽 벽에 전와를 시공한 해삼벽과 지붕에 흰 연와가 덮인 외관, 망루 1층과 담에 부착된 당파풍과 입모양 파풍의 돌출 창은 가나자와성의 건축적 특징이다.
이곳은 가가 잇코잇키의 거점이었던 정토진종 사원인 "'''오야마 고보'''"였다. 사원이지만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처럼 돌담을 둘러싼 성과 같은 요새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잇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자리에 가나자와성을 축조하여 사쿠마 모리마사를 배치했다. 그 후 모리마사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토벌당했고, 히데요시는 가나자와성을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주었다. 토시이에는 1592년부터 개수 공사를 시작하여 구루와와 해자를 확장하고, 5중 6층의 천수와 망루를 세웠다. 겐로쿠엔은 가가번 4대 번주 마에다 쓰나노리가 가나자와성에 부속하여 만든 연못 정원을 전신으로 하여, 역대 번주들이 개수한 다이묘 정원이다.
가나자와라는 지명은 무로마치 시대 분메이 연간에는 이미 존재했다[10]고 알려져 있지만, 오야마 고보 시대에는 가나자와의 코타테노 대지 끝, 즉 야마오(오야마)에 있었기 때문에 오야마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사쿠마 모리마사가 신성을 축조했을 때 잇코잇키의 인상이 강한 오야마가 아닌 가나자와를 성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마에다 토시이에가 입성하자 도요토미 정권에 적대하여 멸망한 모리마사가 명명한 가나자와성이 아닌 자신의 출신지인 오와리국에도 통하는 오야마를 채택했다. 하지만 가나자와라는 지명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오야마성의 이름은 보급되지 않았고(도요토미 정권의 공문서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토시이에 자신도 다시 가나자와라는 성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11]
성터는 메이지 이후 존성으로 지정되어 군 시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일부를 남기고 철거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가나자와 대학이 1995년까지 위치해 있었다.
전형적인 평산성으로, 본환, 제2의 환, 제3의 환, 신환, 북의 환, 옥천원환의 구루와가 있었다. 1602년, 낙뢰로 인해 천수각을 소실한 후 재건되지 않고, 대신 삼층 망루가 세워졌다. 이는 당시 가가번이 에도 막부와 긴장 관계에 있었고, 다이묘의 힘을 상징하는 천수에 도쿠가와 가문이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4]
1631년 간에이 대화재 이후에는 제2의 환이 성의 중추가 되어 니노마루 고텐(二の丸御殿)이 번주의 거소가 되었다. 성 주위에는 오테보리, 이모리보리, 햑켄보리, 하쿠초보리가 존재했다.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오테보리뿐이며, 다른 3개의 보리는 메이지 시대 말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매립되어 도로가 되었다. 이 중 이모리보리는 도로 관계상 반 폭의 보리로 복원되었고, 2010년에 다시 물이 채워졌다. 햑켄보리는 메이지 44년에 물이 빠져 햑켄보리 거리(햐쿠만고쿠 거리의 일부)가 되었다. 이시카와몬과 겐로쿠엔을 잇는 이시카와 다리는 그 때 콘크리트 아치교로 재건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흙다리였다. 하쿠초보리는 녹화되어 보행자 전용의 하쿠초로(백조로)로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었다. 또, 이시카와몬 고라이몬의 오른쪽 옆에는 규주간나가야도 소실 전에는 있었다.
번주의 정식 등성 경로는 오테몬(신환)→기리키몬(신환)→카와키타몬(제3의 환)→하시즈메몬(제2의 환)→니노마루 고텐이었다. 이시카와몬이나 네즈미타몬, 도바시몬, 쿠루마바시몬, 우라구치몬은 카라테몬(뒷문)이었다. 오테몬, 기리키몬은 야구라몬이 아니라 이시카와몬 고라이몬과 같은 고라이몬 1동과 토담만 있었다. 또, 그 외에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루트로는 니시초구치몬→도바시몬→우라구치몬과 카나야몬→네즈미타몬→마츠사카몬이 있었다.
성 밖에는 동서로 내외 총 4개의 소우가마에 보리가 파여 있었다. 소우가마에 보리는 후에 용수로로 전용된 부분이 많다. 겐로쿠엔 내의 야마자키야마는 소우가마에 외곽 토루의 일부이며[35], 그 남쪽의 연못은 수보리의 흔적이다.
가나자와성은 그다지 견고한 성이라고 할 수 없었고, 유사시에는 성하 마을에서 적을 맞이하기 위한 군사 거점으로 성 아래 3곳에 사찰군이 설치되었다. 그 중 하나인 테라마치 사찰군의 묘류지(통칭 닌자 사찰)의 우물에는 성내로 통하는 샛길이 있다.
하시즈메몬 츠즈키야구라의 중앙에는 무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2층으로 올리기 위한 크고 넓은 트여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시즈메몬 츠즈키야구라가 목조로 복원되었을 때, 옛날의 짐을 올리기 위한 트인 공간의 구조는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기와에는 겨울의 적설에 견딜 수 있도록 경량의 납 기와가 사용되었다. 유사시에는 철포탄의 원재료로 전용 가능하다.
니노마루 고텐은 3200평으로 표면(1200평), 어거마이(1000평), 안쪽(1000평)의 3개로 분류되어 있으며 표면은 번주의 정무와 의례를 하는 장소로 호화로운 장벽화와 금속 장식이 있었고, 어거마이는 번주가 생활을 하는 장소로 일부 2층 부분이 있었으며, 안쪽은 번주의 정실(정처)・측실(측첩)・자녀・허리원 등과 여종이 생활하는 장소로 일부 2층 부분이 있었다.
4. 현대의 가나자와성
가나자와성은 메이지 시대 이후 군 시설이 설치되어 건물의 일부를 남기고 철거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1995년까지 가나자와 대학이 위치해 있었다.[10]
성터에는 현재 가나자와성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시카와 문, 산짓켄 나가야, 쓰루마루 창고 등의 중요문화재 건물이 남아있다.[10] 이시카와 문은 가나자와성 공원의 정문 역할을 하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한때는 성의 뒷문이었다.
가나자와성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6]
명칭 | 설명 | 비고 |
---|---|---|
히시 야구라 | 망루, 3층 건물. 지붕 높이: 17.34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255.35m2. | 다른 건물들과 약간의 각도를 이루며 지어져, 내부 기둥이 다이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다. |
고주켄 나가야 | 창고로 사용되는 길고 홀과 같은 다면형 포탑, 2층 건물. 지붕 높이: 9.35m에서 10.08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1384.95m2. | |
하시즈메몬 츠즈키 야구라 | 망루 겸 지휘소, 3층 건물. 지붕 높이: 14.69m (석벽 위), 총 바닥 면적: 253.93m2. | |
하시즈메몬 문 | 입구, 문루, 흙벽으로 둘러싸인 마스가타 (masugata) 문 복합 단지. | |
쓰루노마루 도베이 | 이중 토담. 지붕 높이: 2.91m (석벽 위). | |
이시카와몬 문 | 두 가지 독특한 석조 스타일을 가진 입구 복합 단지. | 국가 중요 문화재. 겐로쿠엔 공원의 입구 중 하나를 마주보고 있다. |
가나자와성 공원은 입장료가 무료이며, 히시야구라, 고지켄 나가야, 하시즈메몬 츠즈키야구라는 유료(성인 320엔, 어린이 100엔)로 운영된다.[36] 이곳에서는 신용 카드(JCB, VISA, 마스터카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다이너스 클럽, 중국 은련)와 교통계 전자 화폐(Suica, ICOCA, TOICA, PASMO, Kitaca, manaca, SUGOCA, nimoca)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겐로쿠엔과 6개의 현립 문화 시설 중 1곳에 입장할 수 있는 '겐로쿠엔 플러스원 이용권' 대상 시설이다.[37]
; 소재지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마루노우치
; 교통
: JR 서일본・IR 이시카와 철도 가나자와역에서 호쿠테츠 버스로 약 15분, '겐로쿠엔 시타' 하차, 도보 약 5분.
; 일본 100명성 스탬프 설치 장소
- 니노마루 안내소 (9:00~16:30)
- 이시카와문 입구 안내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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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에 의한 금택성공원 야간 개원 및 라이트업 중지의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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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6년 노토반도 지진에 수반하는 사적 금택성적의 석벽 피해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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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진종 승려들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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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6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기독교 탄압의 일환으로 시행된 선교사 추방령
[40]
문서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에 흐르는 약 16km의 용수로
[41]
문서
칸막이를 막아 여러 가구가 살 수 있게 만든 길다란 일본식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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