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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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앙 3세는 포르투갈의 왕으로, 1521년부터 1557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마누엘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502년 리스본에서 출생했다. 주앙 3세는 카타리나 데 아우스트리아와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일찍 사망했고, 그의 손자 세바스티앙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를 확장하고,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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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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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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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 포르투갈 국왕 |
통치 기간 | 1521년 12월 13일 – 1557년 6월 11일 |
즉위 방식 | 칭송 |
대관식 | 1521년 12월 19일 |
이전 통치자 | 마누엘 1세 |
다음 통치자 | 세바스티앙 |
배우자 | 카타리나 데 아우스트리아 (1525년 결혼) |
자녀 | 아폰수, 포르투갈 왕자 마리아 마누엘라, 아스투리아스 여공 마누엘, 포르투갈 왕자 필리프, 포르투갈 왕자 주앙 마누엘, 포르투갈 왕자 |
왕가 | 아비스 |
아버지 | 마누엘 1세 |
어머니 | 마리아 데 아라곤 이 카스티야 |
출생일 | 1502년 6월 6일 |
출생 장소 | 알카소바 궁, 리스본, 포르투갈 |
사망일 | 1557년 6월 11일 (55세) |
사망 장소 | 리베이라 궁, 리스본, 포르투갈 |
매장지 | 제로니무스 수도원 |
종교 |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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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포르투갈어 | João III |
로마자 표기 | Joã오 III |
발음 (IPA) | IPA|pt|ʒuˈɐ̃w |
별칭 | |
별칭 | 경건왕 주앙 (João, O Piedoso) |
기타 | |
통치 면적 | 4,000,000 제곱킬로미터 |
2. 초기 생애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의 장남 주앙은 1502년 6월 6일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1503년 왕위 계승자로 선언되었으며, 점성술사 토마스 데 토레스, 비스의 주교 디오고 데 오르티즈,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루이스 테이셰이라 로보 등 당대 저명한 학자들에게 교육받았다. 1514년 자신의 저택을 받고 아버지의 행정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16세에 사촌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마누엘 1세와 결혼했다. 주앙은 이 일로 깊은 모욕감을 느껴 우울증을 겪었고, 이는 훗날 그가 '경건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1][2][3][4]
2. 1. 출생과 교육
주앙은 마누엘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1502년 6월 6일 리스본에서 태어났다.[1][2][3] 이 사건은 질 비센테의 ''방문극 또는 목동의 독백''(''Auto da Visitação ou Monólogo do Vaqueiro'')이 여왕의 침실에서 공연되면서 기념되었다.1503년에 어린 왕자는 왕위 계승자로 선언되었는데, 이 해는 그의 막내 여동생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사벨라는 훗날 1527년부터 153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주앙은 점성술사 토마스 데 토레스, 비스의 주교 디오고 데 오르티즈, 그리고 포르투갈 최초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중 한 명이자 시에나 대학교 총장(1476) 및 페라라 법학 교수(1502)였던 루이스 테이셰이라 로보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그리고 지리학을 공부했다.[4]
주앙의 연대기 작가인 안토니우 데 카스틸류는 "돔 주앙 3세는 문제를 쉽게 해결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항상 보여준 실질적인 훈련으로 문화적 부족함을 보완했다"라고 말했다(''Elogio d'el rei D. João de Portugal, terceiro, do nome''). 1514년 그는 자신의 저택을 받았고, 몇 년 후 아버지의 행정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16세의 나이에 주앙은 그의 사촌이자 20세였던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엘레오노르는 그의 아버지 마누엘과 결혼했다. 주앙은 이에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우울해졌고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주앙이 나중에 열렬한 종교인이 되어 '경건왕'(포르투갈어: ''o Piedoso'')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2. 2. 결혼과 초기 통치
1521년 12월 19일, 주앙 3세는 리스본의 상 도밍고스 교회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의 36년간의 통치는 국내외 정치, 특히 유럽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광범위한 활동으로 특징지어졌다.[21] 주앙 3세는 선임자들이 유지해오던 절대주의 정치를 이어갔으며, 포르투갈 코르테스를 단 세 번, 매우 긴 간격을 두고 소집했다. 그는 1525년 토르스 노바스, 1535년 에보라, 1544년 알메이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했으며, 재위 초기에 왕국 내 행정 및 사법 체계를 재구축하려 노력했다.주앙 3세의 여동생 이사벨라 (포르투갈 공주)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하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 및 신성 로마 제국과 더욱 강력한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 주앙 3세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카를 5세의 여동생이자 그의 전 약혼녀였던 카트린 오스트리아와 크라투에서 결혼했다.[21] 이 결혼을 통해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주앙 3세 사망 당시, 그의 손자 세바스티앙 1세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3. 정책
주앙 3세는 절대주의 정치를 이어갔으며, 포르투갈 코르테스를 1525년 토르스 노바스, 1535년 에보라, 1544년 알메이림에서 단 세 번 소집했다. 그는 재위 초기에 왕국 내 행정 및 사법 체계를 재구축하려 노력했다.
주앙 3세는 인문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질 비센테, 가르시아 드 레젠데, 사 드 미란다, 베르나르딤 히베이루, 페르나웅 멘데스 핀투, 조앙 드 바호스,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 많은 작가들을 후원했으며, 수학자 페드루 누네스와 의사 가르시아 데 오르타도 지원했다. 에라스뮈스는 1527년 주앙 3세에게 자신의 저서 ''크리소스토미 루큐브라치오네스''를 헌정했고,[3][4] 장 페르넬, 후안 루이스 비베스 등도 왕에게 작품을 바쳤다.
주앙 3세는 해외, 특히 파리 대학교에 많은 장학금을 지급했고, 디오구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생트 바르브 대학교에 50명의 포르투갈 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1537년에는 리스본 대학교를 코임브라 대학교로 완전히 이전했다.
1547년, 주앙 3세는 코임브라에 예술 인문학 대학(교양 학문)을 설립하고 보르도의 기엔 대학교 학장인 앙드레 드 고베이아를 초빙하여 대학을 이끌고 교직원을 구성하도록 했다.[5] 앙드레 드 고베이아는 조지 뷰캐넌, 디오구 드 테이브, 제로니무 오소리우 등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학자들을 초빙했다.[6] 그러나 디오구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파리 학파'와 그의 조카 앙드레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보르도 학파' 간의 갈등으로 이단 및 프로테스탄트 동조 혐의가 제기되었고, 1551년까지 모든 외국인 교수가 학교를 떠났다. 1555년 예수회가 대학 운영을 인수했다.
주앙 3세는 신세계, 아시아,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했다. 1540년, "파드로아두" 협정에 따라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여러 차례 청원한 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사도 특사로 임명했다. 그는 생트 바르브 대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디오구 드 고베이아의 지지를 받았으며, 예수회 소속 젊은이들을 영입할 것을 왕에게 권유했다.[5]
3. 1. 해외 정책
크고 광대한 포르투갈 제국은 행정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막대한 대외 부채와 무역 적자에 시달렸다. 포르투갈의 인도와 극동 지역의 이권은 야심 찬 총독들의 형편없는 행정 아래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주앙 3세는 새로운 임명을 통해 이에 대응했지만, 이는 문제를 일으키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총독이 임명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임자와 싸워야 했다. 그 결과 행정 실패로 포르투갈의 무역 독점이 점차 쇠퇴했다. 포르투갈군이 전 세계적으로 직면한 어려운 군사 상황을 고려하여, 1549년 8월 7일, 주앙 3세는 20세에서 65세 사이의 모든 남성 국민을 징병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해외에서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았다. 인도양과 북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은 방어 및 요새화에 대한 지출을 늘렸다. 포르투갈 선박이 이미 사략선의 끊임없는 공격을 견뎌야 했던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의 브라질 확장 시도인 프랑스 남극은 또 다른 전선을 만들었다.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남아메리카 원주민과 동맹을 맺었고, 군사 및 정치적 개입이 이루어졌다. 결국 프랑스는 1565년까지 쫓겨났지만, 그 전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앙 3세 통치의 초기 몇 년 동안, 극동에서의 탐험이 계속되어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술레이만 1세 치하에서 강력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 특히 인도에서의 잦은 공격으로 상쇄되었다. 인도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막대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주앙 3세는 사핌, 아제무르, 크사르에스세기르, 아르질라와 같은 북아프리카의 몇몇 요새를 포기했다.
주앙 3세는 마젤란 원정 이후 스페인이 주장했던 "향료 제도"인 말루쿠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10년 동안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후, 1529년 4월 22일 황제 카를 5세와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시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 범위를 정의하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대한 대자오선을 설정했다.[2]
외교는 유럽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해외 식민지를 유지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는 대립했지만, 스페인과는 결혼의 효과도 있어서 관계가 좋았고, 몰루카 제도 영유권으로 다툼이 있었지만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으로 몰루카 제도는 포르투갈이 영유하고, 금·은·향신료 거래를 왕실 독점으로 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인도에도 눈을 돌려, 포르투갈령 인도의 경영을 재건하기 위해 1524년에 바스쿠 다 가마를 파견, 가마는 같은 해 사망했지만 후임 총독들은 현지 세력과의 싸움에 분투하여, 구자라트 술탄국의 바하두르 샤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 끝에 포르투갈령 인도를 확보했다.[22]
이 시기 포르투갈인은 일본으로의 진출도 시작했고, 1543년 일본으로의 조총 전래 (시기는 여러 설이 있음), 1549년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상륙이 거론되며, 1557년에 포르투갈은 중국의 명으로부터 마카오를 차용 (포르투갈령 마카오), 인도양의 중요한 항구를 장악하여 제해권을 장악, 교역을 독점한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판도는 확대되어 몰루카 제도에서 마카오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했다.[23]
포르투갈인은 브라질에도 진출했지만, 마찬가지로 브라질에 나타난 프랑스인이 목재를 벌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브라질 식민을 추진하여 1530년에 카피타니아 제도를 도입, 입식자에게 분할한 브라질 영토를 주고 개척을 도모했지만 실패, 1549년에 카피타니아를 매입하여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소우자를 임명, 왕 직속의 총독에 의한 통치로 전환했다. 이윽고 예수회 사제가 포교를 위해 소우자의 인도로 브라질에 부임, 인디오의 교화와 개척에 기여, 제3대 브라질 총독 멩 데 사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브라질 진출 격퇴도 이뤄냈다. 다만 데 사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흑인노예를 설탕 생산에 사용, 브라질과 아프리카가 유럽과의 삼각 무역에 포함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24]
3. 2. 국제 관계
주앙 3세의 치세는 활발한 외교 활동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스페인과 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어 수년간 이베리아 반도의 평화를 보장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과 부르고뉴 네덜란드의 왕인 미남왕 필리프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결혼했다.[21] 그의 누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했다. 그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고, 그 외에도 다른 결혼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근친 결혼이 잦았던 왕족들은 주앙의 자녀들과 훗날 국왕이 된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의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주앙 3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했지만, 프랑스 사략선의 공격에 맞서 확고하게 대처했다.
그는 1536년 포르투갈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고, 포르투갈 성직자들이 반종교 개혁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교황령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주앙이 포르투갈의 중요한 종교 직책에 원하는 사람을 임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형제인 포르투갈의 엔히크와 아폰수 추기경은 추기경이 되었고, 그의 친아들인 두아르트는 브라가 대교구의 대주교가 되었다.
주앙 3세의 치세 동안 영국, 발트해 지역 국가, 플랑드르와의 상업 관계가 강화되었다.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는 포르투갈이 유럽 국가 중 최초로 일본과 접촉했다. 중국에서는 마카오가 포르투갈에 제공되었고, 곧 포르투갈은 이 지역의 중요한 무역로를 장악했다. 남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은 무슬림 경쟁자들과 반란을 일으킨 인도 지도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지속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는 대립했지만, 스페인과는 결혼으로 관계가 좋았고, 몰루카 제도 영유권으로 다툼이 있었지만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으로 몰루카 제도는 포르투갈이 영유했다.[22]
이 시기 포르투갈인은 일본으로 진출했고, 1543년 일본으로의 조총 전래 (시기는 여러 설이 있음), 1549년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상륙이 거론되며, 1557년에 포르투갈은 중국의 명으로부터 마카오를 차용 (포르투갈령 마카오)했다.[23]
3. 3. 문화 정책
주앙 3세는 인문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질 비센테, 가르시아 드 레젠데, 사 드 미란다, 베르나르딤 히베이루, 페르나웅 멘데스 핀투, 조앙 드 바호스,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 많은 작가들을 후원했으며, 수학자 페드루 누네스와 의사 가르시아 데 오르타도 지원했다. 루이스 테이셰이라 로보와 같은 포르투갈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에라스뮈스는 1527년 주앙 3세에게 자신의 저서 ''크리소스토미 루큐브라치오네스''를 헌정했다.[3][4] 장 페르넬, 후안 루이스 비베스 등도 왕에게 작품을 바쳤다.주앙 3세는 해외, 특히 파리 대학교에 많은 장학금을 지급했고, 디오구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생트 바르브 대학교에 50명의 포르투갈 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1537년에는 리스본 대학교를 코임브라 대학교로 완전히 이전했다.
1547년, 주앙 3세는 코임브라에 예술 인문학 대학(교양 학문)을 설립하고 보르도의 기엔 대학교 학장인 앙드레 드 고베이아를 초빙하여 대학을 이끌고 교직원을 구성하도록 했다.[5] 앙드레 드 고베이아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스코틀랜드, 프랑스, 포르투갈 학자들을 초빙했다.[6] 여기에는 조지 뷰캐넌, 디오구 드 테이브, 제로니무 오소리우, 니콜라스 드 그루시, 기욤 게랑테, 엘리 비네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페드루 누네스의 현대 연구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그러나 디오구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파리 학파'의 정통적 견해와 그의 조카 앙드레 드 고베이아가 이끄는 '보르도 학파'의 세속적 견해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이단 및 프로테스탄트 동조 혐의가 제기되었고, 결국 1551년까지 모든 외국인 교수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1555년 예수회가 대학 운영을 인수했다.
주앙 3세는 신세계, 아시아,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했다. 1540년, "파드로아두" 협정에 따라 포르투갈 동인도 선교를 위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여러 차례 청원한 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사도 특사로 임명했다. 그는 생트 바르브 대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디오구 드 고베이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왕에게 새로 설립된 예수회 소속 젊은이들을 영입할 것을 권유했다.[5] 예수회는 특히 포르투갈인과 원주민 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종교 재판
주앙 3세는 주변 카스티야의 압력과 신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를 제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보고에 의해 포르투갈에 종교 재판을 설립하도록 설득되었다.[1] 로마와의 10년간의 협상 끝에, 포르투갈 종교 재판소는 1536년에 교황의 특허를 받았다.[1][2] 초대 대심문관은 국왕의 형제인 추기경 엔히크였다(그는 나중에 국왕이 되었다).[3][4]
종교 재판의 활동은 서적 검열, 점술, 마녀 재판, 중혼에 대한 탄압과 재판뿐만 아니라 성범죄, 특히 소돔 혐의에 대한 기소로 확대되었다.[5] 포르투갈에는 개신교도와 유대인이 두드러지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재판은 대신 신 기독교인을 표적으로 삼았다.[5]
포르투갈의 종교 재판은 점차 광범위한 관료주의를 갖춘 매우 강력한 실체가 되었다.[6] 리스본, 코임브라, 에보라, 고아에는 각각 중앙 사무실이 있고 수십 명의 관리들을 고용하는 심문 법원이 있었다.[7] 종교 재판의 절차는 가혹하고 불규칙했으며, 어떤 고발도 증거로 받아들이고, 죄수에게 변호사를 선택할 권리를 부인하고, 종교 재판 외부에서는 항소를 허용하지 않았다.[8] 처벌은 벌금과 투옥에서 재산 몰수와 추방에 이르렀으며, 이단에 대한 처형은 국왕의 사법에 의해 집행되었다.[8][9] 1543년에서 1684년 사이에 최소 1,379명이 화형에 처해졌고, 최소 19,24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 사망했다.[8]
5. 제국 경영
포르투갈 제국은 방대하고 행정 비용이 많이 들어, 대외 부채와 무역 적자에 시달렸다. 인도와 극동 지역의 이권은 야심찬 총독들의 행정 아래 혼란스러워졌다. 주앙 3세는 새로운 임명을 통해 대응했지만, 문제는 지속되었고, 심지어 신임 총독이 전임자와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정 실패로 포르투갈의 무역 독점은 쇠퇴했다. 1549년 8월 7일, 주앙 3세는 군사적 어려움을 고려하여 20세에서 65세 사이의 모든 남성을 징병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해외에서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았다. 인도양과 북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은 방어 및 요새화에 더 많은 지출을 했다. 대서양에서는 프랑스 식민 제국이 브라질 확장을 시도하며 프랑스 남극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었다. 프랑스는 남아메리카 원주민과 동맹을 맺고 군사 및 정치적으로 개입했다. 1565년에 프랑스는 쫓겨났지만, 그 전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앙 3세 통치 초기에 극동 탐험이 계속되어 중국과 일본에 도달했다. 그러나 술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인도에서 잦은 공격을 가하며 압력을 가했다. 인도 방어 비용은 막대했고, 사핌, 아제무르 등 북아프리카 요새를 포기해야 했다.
주앙 3세는 마젤란 원정 이후 스페인이 주장하던 말루쿠 제도 지배권을 확보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1529년 4월 22일, 카를 5세와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여 아시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 범위를 정하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대자오선을 설정했다.[2]
외교는 유럽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해외 식민지를 유지, 발전시키는 정책이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식민지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는 대립했지만, 스페인과는 관계가 좋았다. 사라고사 조약으로 몰루카 제도는 포르투갈이 영유하고, 금, 은, 향신료 거래를 왕실 독점으로 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포르투갈령 인도 경영을 위해 1524년 바스쿠 다 가마를 파견했으나, 그는 같은 해 사망했다. 후임 총독들은 구자라트 술탄국의 바하두르 샤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 끝에 포르투갈령 인도를 확보했다.[22]
이 시기 포르투갈은 일본 진출을 시작, 1543년 조총 전래(시기는 여러 설이 있음),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상륙이 있었다. 1557년 포르투갈은 명으로부터 마카오를 차용(포르투갈령 마카오)하여, 인도양의 주요 항구를 장악하고 교역을 독점한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판도를 몰루카 제도에서 마카오를 거쳐 일본까지 확대했다.[23]
5. 1. 아프리카와의 관계
주앙 3세 시대에는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 간의 무역이 아르귐, 미나, 몸바사, 소팔라, 모잠비크 등의 페이토리아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7] 주앙 3세 치하에서 여러 원정대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시작하여 대륙 내륙으로 진출했다. 이 원정대는 항해사, 상인, 모험가, 그리고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아프리카의 선교는 코임브라 예술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그 목적은 국왕의 지배권을 확대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발전시키며 원주민을 기독교화하는 것이었다. 지역 통치자들과의 관계는 주앙이 그들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드러나듯이 노예 무역으로 인해 종종 복잡해졌다.[8]주앙 3세는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요새를 모두 포기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각 점령지의 경제적 또는 전략적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했다. 주앙 3세는 1541년에 사핌과 아자모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1549년에는 아르질라와 알카세르 세게르를 포기했다. 세우타, 탕헤르, 마자간의 요새는 "중화포와 경화기 및 칼날의 일반화로 인해 강요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처하기 위해" 강화되었다.
주앙 3세의 어릿광대는 흑인 아프리카인이었던 주앙 드 사 파나스쿠였으며, 그는 튀니스 정복 (1535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결국 명문 성 야고보 기사단에 입단했다.[9][10]
5. 2. 아시아와의 관계
주앙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아시아 국가들과 활발한 관계를 맺었다.초기에는 극동 지역 탐험을 계속하여 중국과 일본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술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포르투갈은 잦은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2] 인도 방어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고, 결국 사핌, 아제무르 등 북아프리카의 일부 요새를 포기해야 했다.[2]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앙 3세는 마젤란 원정 이후 스페인이 주장하던 말루쿠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529년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황제 카를 5세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범위를 확정하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대자오선을 설정했다.[2]
주앙 3세의 통치 이전에 포르투갈은 이미 시암(1511년), 말루쿠 제도(1512년), 중국 연안(1513년), 광둥(1517년), 티모르(1515년)에 도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일본에 진출했으며, 통치 말년에는 마카오를 중국으로부터 획득했다.[11] 주앙 3세는 인도에서 향신료, 허브, 광물, 직물 등을 수입하고, 중국에서는 사향, 대황, 비단을 수입했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가공되지 않은 실크, 실크 자수실, 대추 야자 열매, 소금, 유황 등을 제공했다.[11]
이슬람교 세력과 다른 민족들이 인도에서 포르투갈 함대를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 지역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부왕이 임명되었지만, 포르투갈 소유물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포르투갈은 코친, 칸누르 등에 상업 거점인 ''페이토리아스''를 설립하여 상업적 지배를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인도 왕국들의 적대 행위와 술탄, 자모린 간의 동맹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를 수립해야 했다. 포르투갈은 인도 해안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고, 고아는 1512년부터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 제국의 본부가 되었다. 고아는 유럽의 문화와 종교를 인도에 도입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1961년 인도에 반환될 때까지 포르투갈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포르투갈은 1543년에 일본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 시대부터 일본은 "지팡구"로 알려져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1550년경부터 일본과 교섭을 시작하여 나가사키에 기지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과의 무역은 선장의 통치하에 포르투갈이 독점했다. 주앙 3세 통치하에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하면서 중국과의 상업 관계와 일본과의 은 무역이 발전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항해 이후, 카스티야 왕관은 말루쿠 제도를 주장했다. 152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자오선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분쟁은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해결되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350,000금 두카트를 지불하고 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1553년 레오넬 데 소사는 포르투갈인이 광저우와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부터 1564년까지 해적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주앙 3세에게 제공되었다. 말라카는 말라카 해협을 통제했으며, 극동에서 포르투갈의 이익에 중요했다. 1511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에 의해 정복된 말라카는 1641년 네덜란드에 의해 점령되었다.
극동으로의 무역로를 따라가기 위해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몬순 바람에 의존했다. 겨울에는 북동 몬순이, 여름에는 남서 몬순이 항해에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은 바람이 바뀌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인도에 영구적인 기지가 필요했고, 고아 외에도 16세기에 스리랑카의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포르투갈령 실론을 세웠다. 포르투갈령 실론은 1658년 네덜란드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었다.
5. 3. 브라질 식민화
주앙 3세 재위 기간 동안 포르투갈 제국은 남아메리카에 12개의 브라질 개척 식민지를 건설했다(1534년 이후).[12] 각 식민지는 자체적인 도나타리 선장을 두었고, 12개의 식민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1549년, 주앙 3세는 브라질 총독령을 설치했고, 12개의 개척 식민지는 이에 종속되었다.[12] 주앙 3세가 임명한 초대 총독인 토메 드 소자는 1549년에 살바도르를 건설했다.[12] 남아메리카 식민지화에 기여한 공로로 주앙 3세는 '식민주의자'(포르투갈어: "o Colonizador")라고 불린다.[12]1500년 브라질 발견 직후, 포르투갈은 그곳에서 브라질나무, 인도 노예, 이국적인 새들을 수입했다. 브라질 나무는 붉은 염료를 생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는 제품이었다. 주앙 3세 통치 기간 동안, 초기 아메리카 대륙의 포르투갈 식민지화 이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브라질 나무 탐색을 강화했고, 브라질의 기후에 적합하고 특히 헤시피와 바이아 주변에서 잘 자라는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다.
주앙 3세 통치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는 아시아로부터의 수입 감소를 보충할 설탕 생산국으로서의 급속한 발전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발전은 그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세바스티앙 1세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브라질에는 많은 원주민이 없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농장에서 필요한 고된 작업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토 내 노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기니 지역에서 온 첫 번째 노예는 1539년에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들 대부분은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거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진출했지만, 프랑스인이 목재를 벌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브라질 식민을 추진하여 1530년에 카피타니아 제도를 도입, 입식자에게 분할한 브라질 영토를 주고 개척을 도모했지만 실패했다. 1549년에 카피타니아를 매입하여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드 소자를 임명, 왕 직속의 총독에 의한 통치로 전환했다. 예수회 사제가 포교를 위해 소자의 인도로 브라질에 부임, 인디오의 교화와 개척에 기여했으며, 제3대 브라질 총독 멩 데 사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브라질 진출도 격퇴했다. 다만 데 사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흑인노예를 설탕 생산에 사용, 브라질과 아프리카가 유럽과의 삼각 무역에 포함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24]
6. 죽음과 왕위 계승
1539년부터 왕위 계승자는 주앙 마누엘, 포르투갈 왕자였으며, 그는 카를 5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후아나, 포르투갈 공주와 결혼했다. 주앙 3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어린 시절을 넘긴 주앙 왕자는 병약했고, 그의 아내 후아나가 1554년 1월 20일에 세바스티앙 왕자를 낳기 18일 전에 어린 나이(당뇨병)로 사망했다. 1557년 주앙 3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유일한 상속자는 세 살 된 손자 세바스티앙이었다.[29]
주앙 3세의 시신은 리스본의 제르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7. 유산
주앙 3세는 주제 사라마구의 2008년 소설 『코끼리 여행』과 로랑 비네의 2021년 소설 『문명』에 등장한다.
2001년 태국 역사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에서는 언급되지만, 그의 역할은 개봉 당시 삭제되었다.[18]
2016년 4X 비디오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에서는 포르투갈 문명을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하며, 2021년 3월 25일 "뉴 프론티어 패스" DLC의 일부로 출시되었다. 그의 능력과 문명은 해상 무역에 중점을 둔다.[19]
8. 가족
João IIIpt는 1525년에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9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7명이 요절하였다. 마리아 마누엘라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으나 요절하였고, 주앙 마누엘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여 세바스티앙을 낳았다. 또한, 이사벨 모니스와의 사이에서 서자 브라가 대주교 두아르테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1525년 2월 10일 결혼) | |||
아폰수 왕자 | 1526년 2월 24일 | 1526년 4월 12일 | 포르투갈의 왕자 (1526). |
마리아 마누엘라 공주 | 1527년 10월 15일 | 1545년 7월 12일 | 포르투갈의 공주 (1527–1531). 아스투리아스 공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 카를로스 왕자라는 기형아를 낳았으며, 출산 후 며칠 만에 사망. |
이사벨 공주 | 1529년 4월 28일 | 1530년 5월 22일 | |
베아트리스 공주 | 1530년 2월 15일 | 1530년 3월 16일 | |
마누엘 왕자 | 1531년 11월 1일 | 1537년 4월 14일 | 포르투갈의 왕자 (1531–1537). 1535년에 상속자로 선언. |
필리페 왕자 | 1533년 3월 25일 | 1539년 4월 29일 | 포르투갈의 왕자 (1537–1539). 1537년에 상속자로 선언. |
데니스 왕자 | 1535년 4월 26일 | 1537년 1월 1일 | |
주앙 마누엘 왕자 | 1537년 6월 3일 | 1554년 1월 2일 | 포르투갈의 왕자 (1537–1554). 1539년에 상속자로 선언. 스페인의 후아나와 결혼. 그들의 아들이 세바스티앙 1세가 됨. |
안토니우 왕자 | 1539년 3월 9일 | 1540년 1월 20일 | |
이사벨 모니즈 | |||
두아르테, 브라가 대주교 | 1529년 | 1543년 11월 11일 | 사생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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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De Romatinas a Christianitas: o Humanismo à portuguesa e as visões sobre o reinado de Dom João III, O Pied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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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VILIZATION VI - FIRST LOOK: JOÃO III OF POR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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