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니무스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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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495년 마누엘 1세의 명령으로 건설이 시작되어 300년이 걸려 완공되었으며,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과 엔히크 항해왕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남쪽 정문, 서쪽 출입구, 회랑 등이 주요 건축물이며, 바스코 다 가마와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무덤이 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리스본 조약이 이곳에서 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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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무스 수도원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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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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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모스테이루 두스 제로니무스 |
로마자 표기 | Mosteiro dos Jerónimos |
위치 | 산타마리아드벨렝 |
도시 | 리스본 |
국가 | 포르투갈 |
좌표 | 38°41′52″N 9°12′22″W |
종류 | 수도원 |
건축 양식 | 포르투갈 고딕 건축, 마누엘 양식 |
재료 | 리오즈 |
소유주 | 포르투갈 공화국 |
종교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명칭 |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기준 | iii vi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ID | 263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지정 연도 | 1983년 |
역사 | |
착공일 | 1495년 |
개장일 | 1495년 |
건축가 | 디오고 드 보이타카 |
지정 | 포르투갈 |
지정 종류 | 비 이동식 |
지정 기준 | 국가 기념물 |
지정일 | 1907년 1월 10일 |
지정 번호 | IPA.00006543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공식 URL |
2. 역사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역사는 크게 건립 배경, 건설 과정, 왕정 시대, 그리고 근현대로 나눌 수 있다.
- 건립 배경 및 건설 과정: (하위 섹션 "건립 배경" 및 "건설 과정" 참조)
- 왕정 시대: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 연합 이후, 펠리페 2세는 1604년 수도원을 왕실 장례 기념물로 지정하고 왕족과 히에로니무스회 수도사 외 출입을 금지했다.[6] 1625년에는 새로운 정문, 회랑 문, 문지기 집, 계단, 상부 성가대 입구 홀 등이 건설되었고, 1640년 수도원장 벤투 드 시퀘이라의 명령으로 인판테 루이스(마누엘 1세의 아들)와 종교 단체 관련 서적을 보관하는 수도원 도서관이 건설되었다.[6]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회복 후 수도원은 중요성을 되찾고 왕실 묘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의 주앙 4세의 자녀들, 아폰수 6세,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 등이 안치되었다.[6] 1682년에는 추기경 엔히크의 시신이 안치되었고, 1855년 아폰수 6세 등은 상 빈센테 데 포라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세뇨르 도스 파소스 형제단이 상투아니우 예배당을 점령하여 금색 타일 천장으로 재단장하고, 성 제롬의 문장이 있는 계단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는 등 예배당 내부 장식이 강화되었다.[6] 제단화는 1709년과 1711년에 완성되었고, 1713년에는 성물실이 재단장되었다.[6] 1720년 화가 엔히크 페레이라는 왕들의 초상화와 성탄 그림 연작을 제작했다.[6]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난간 등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곧 수리되었다.[6]

- 근현대: (하위 섹션 "근현대" 참조)
2. 1. 건립 배경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이전에 같은 장소에 존재했던 산타 마리아 드 벨렘 교회를 대체했는데, 이곳에서는 군사-종교 그리스도 기사단의 수도사들이 항해자들을 도왔다.[2] 프라이아 두 레스텔루 항구는 항해자들에게 유리한 지점이었는데, 안전한 닻과 바람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여 테주 강 입구로 들어가는 배들이 찾았다.[3]현존하는 건물은 마누엘 1세 (1469–1521)의 명령에 따라 1495년 몬테모르 오 벨류 궁정에서 착공되었는데, 이는 그의 사후 이베리아 왕조 왕국이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비스 왕가의 일원들을 위한 최종 안식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4] 1496년, 마누엘 왕은 이 부지에 수도원 건설 허가를 교황청에 청원했다.[2] 레스텔루 은수처 (''Ermida do Restelo'')로 알려진 이 교회는 바스쿠 다 가마와 그의 사람들이 1497년 인도 원정을 떠나기 전 밤을 보내 기도할 때 이미 낡은 상태였다.[3][5]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과 엔히크 항해왕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02년 마누엘 1세에 의해 착공되어[12] 1511년에 회랑 등 대부분이 완성되었으나, 이후 마누엘 1세의 죽음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 연합으로 인한 중단 등으로 인해 최종 완공까지 300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건축 자금은 처음 바스쿠 다 가마가 가져온 향신료의 판매로 인한 막대한 이익으로 충당되었으며, 그 후에도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으로 충당되었다.
2. 2. 건설 과정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원래 산타 마리아 드 벨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산타 마리아 드 벨렘 교회는 그리스도 기사단 수도사들이 항해자들에게 도움을 주던 곳이었다.[2] 프라이아 두 레스텔루 항구는 테주 강 입구에 있어 안전하게 닻을 내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3]마누엘 1세는 1495년 몬테모르 오 벨류 궁정에서 수도원 건설을 명령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이베리아 왕조 왕국이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비스 왕가의 일원들을 위한 안식처로 사용하고자 했다.[4] 1496년, 마누엘 왕은 교황청에 수도원 건설 허가를 요청했다.[2] 바스쿠 다 가마와 그의 선원들이 1497년 인도 원정을 떠나기 전 밤을 보내며 기도했던 레스텔루 은수처 (''Ermida do Restelo'')는 이미 낡은 상태였다.[3][5]
수도원과 교회 건설은 1501년 1월 6일에 시작되어 100년 후에 완공되었다.[2][3] 마누엘 1세는 아프리카와 동방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부과되는 5%의 세금인 "Vintena da Pimenta"에서 얻은 돈으로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는 연간 70kg의 금에 해당하며, 후추, 계피, 정향 수입에 부과된 세금은 왕실로 직접 들어갔다.[3][2]
마누엘 1세는 히에로니미테 수도사들을 수도원에 배치했다. 수도사들의 역할은 국왕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레스텔로 항구에서 전 세계의 미지의 땅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항해사와 선원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3][2] 수도사들은 1833년 종교 단체가 해산되고 수도원이 버려질 때까지 4세기 넘게 이 역할을 수행했다.[3][2]
수도원은 마누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양식은 해양 요소와 해상 탐험 중에 발견된 물체를 통합한 복잡한 조각 테마를 갖춘 화려한 건축 양식으로, 석회암으로 조각되었다. 건축가 디오고 드 보이타카[3]는 세투발의 예수 수도원에서 이 스타일을 개척했다. 보이타카는 수도원, 성물실 및 식당의 계획을 세우고 공사를 계약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아이다, 알칸타라 계곡, 라베이라스, 리우 세쿠 및 테르세나에서 채석된 금색 석회암인 "calcário de lioz"를 사용했다.[2]
보이타카의 뒤를 이어 1517년경 건설을 담당한 사람은 스페인 출신인 후안 데 카스티요였다. 카스티요는 점차 마누엘 양식에서 스페인 플라테레스크 양식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은세공품(''plata'')의 장식적 특징을 암시하는 화려한 장식을 포함했다. 마누엘 1세가 1521년에 사망하면서 건설은 중단되었다.
니콜라우 샹트레네는 르네상스 테마로 깊이를 더했고, 건축가 디오고 데 토랄바는 1550년에 수도원 건설을 재개하여 주요 예배당, 성가대석을 추가하고, 르네상스 모티프만 사용하여 수도원의 2층을 완성했다. 디오고 데 토랄바의 작업은 1571년에 제롬 드 루앙(제로니모 드 루앙이라고도 함)에 의해 이어졌으며, 그는 몇 가지 고전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합병으로 인해 건설이 중단되었다. 이는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 건설이 할당된 모든 자금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과 엔히크 항해왕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02년 마누엘 1세에 의해 착공되었고[12], 1511년에 회랑 등 대부분이 완성되었으나, 이후 마누엘 1세의 죽음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 연합으로 인한 중단 등으로 인해 최종 완공까지 300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건축 자금은 처음 바스쿠 다 가마가 가져온 향신료의 판매로 인한 막대한 이익으로 충당되었으며, 그 후에도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으로 충당되었다.
2. 3. 왕정 시대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 연합 이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604년 7월 16일 수도원을 왕실 장례 기념물로 지정하고 왕족과 히에로니무스회 수도사 외에는 출입을 금지했다.[6] 1625년에는 새로운 정문, 회랑 문, 문지기 집, 계단, 상부 성가대 입구 홀 등이 왕실 건축가 테오도시오 프리아스의 설계와 석공 디오고 바스의 시공으로 건설되었다.[6] 1640년, 수도원장 벤투 드 시퀘이라가 수도원 도서관 건설을 명령했으며,[6] 이곳에는 인판테 루이스(마누엘 1세 국왕의 아들)와 종교 단체 관련 서적들이 보관되었다.[6]1640년 포르투갈 독립 회복으로 수도원은 이전의 중요성을 되찾고 왕실 판테온의 매장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의 주앙 4세의 여덟 자녀 중 넷인 인판테 테오도시오(1634–1653), 인판타 조아나(1636–1653), 아폰수 6세(1643–1683),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1638–1705)가 묻혔다.[6] 1682년에는 추기경 엔히크의 시신이 횡랑 예배당에 안치되었다.[6] 1855년 9월 29일, 아폰수 6세의 시신은 세 형제 및 누이와 함께 상 빈센테 데 포라 수도원의 브라간사 왕가 왕실 판테온으로 옮겨졌다.
1663년, 세뇨르 도스 파소스 형제단이 상투아니우 예배당을 점령했고, 1669년 금색 타일 천장으로 재단장했다. 1770년에는 성 제롬의 문장이 있는 계단 프레스코화가 완성되었다.[6] 제단화는 1709년과 1711년에 완성되었고, 귀중한 알파이아가 종교 단체에 전달되었으며, 1713년에는 성물실이 재단장되었다.[6] 1720년, 화가 엔히크 페레이라는 포르투갈 국왕들을 그리는 임무를 맡아 왕실 연작을 '살라 도스 레이스'(왕의 홀)에 배치했다.[6] 그는 성탄 그림 연작도 완성했다.[6]
1755년 리스본 지진 당시 수도원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난간과 상부 성가대 일부만 파괴되었으나 곧 수리되었다.[6]
2. 4. 근현대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난간과 상부 성가대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곧 수리되었다.[6] 1833년 12월 28일, 국가 법령에 의해 세속화되었고, ''리스본 왕립 카사 피아''(경건한 리스본 왕실)로 이전되어 산타 마리아 드 벨렘의 새로운 민간 교구의 교구 교회로 사용되었다.[7] 이 과정에서 많은 예술 작품과 보물이 왕실로 이전되거나 분실되었고, 수도원은 비어있게 되면서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7]1860년부터 건축가 라파엘 실바 e 카스트로의 감독 하에 남쪽 파사드에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1898년에는 도밍고스 파렌테 다 실바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다.[7] 회랑 물탱크, 내부 성직자 방 및 주방이 철거되었지만, 건축가 J. 콜슨이 제안한 신고전주의 마누엘 양식 요소를 도입하는 세 가지 재건 프로젝트는 승인을 얻지 못했다.[7] 건축가 발렌틴 조제 코레아는 카사 피아 옴부즈맨 에우제니우 데 알메이다에 의해 오래된 기숙사의 2층을 재정비하고 창문을 디자인하는(1863–1865) 고용되었다.[7] 이후 사무엘 바레트로 교체되어 기숙사 서쪽 끝에 탑을 건설했다.[7] 1867년과 1868년 사이에는 이탈리아 풍경 디자이너 람보이스와 치나티가 수도원 내 개조 작업을 계속하여 교회 부속 건물과 파사드를 변경했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7] 그들은 갤러리와 왕의 홀을 철거하고, 동쪽 기숙사의 탑, 상부 성가대의 장미 창을 건설하고, 종탑의 피라미드 모양 지붕을 주교관 모양의 디자인으로 대체했다.[7] 1884년 이후, 레이문도 발라다스가 회랑과 ''살라 도 카피툴로'' 복원을 시작했고, 아치형 천장을 건설했다.[7] 1888년에는 알렉산드르 에르쿨라누의 무덤이 ''살라 도 카피툴로''에 안치되었다.[7]
1894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무덤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7] 1898년, 조각가 코스타 모타가 조각한 바스쿠 다 가마와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무덤이 남쪽 측면 예배당에 안치되었다.[7] 이후 조앙 데 데우스(1899), 알메이다 가레트(1902), 시도니우 파이스(1918), 게라 준케이로(1923), 테오필로 브라가(1924)의 무덤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7]

1899년, 공공 사업부는 국립 산업 및 상업 박물관으로 사용될 부속 건물 완공 공모전을 열었지만 취소되었고, 포르투갈 민족학 박물관이 설치되었다.[7][8] 1898년에는 중앙 부속 건물을 1895년 파렌테 다 실바가 작업한 후 수도원의 추가 개조가 시작되었고, 1924년에는 조각가 코스타 모타가 성직자들이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의자인 cadeiralspt 복원을 완료했다.[8] 1938년에는 아벨 만타가 디자인하고 리카르두 레오네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남쪽 정면에 설치되었고, 높은 성가대석의 오르간이 해체되었다.[8]
1939년, 현대 포르투갈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수도원과 탑의 개조 공사가 완료되었다.[8] 캐노피와 알렉상드르 에르쿨라누의 무덤이 해체되었고, 회랑 안뜰이 포장되었다.[8] 1940년, 포르투갈 세계 박람회를 위해 수도원 앞 공간이 재설계되었다.[8] ''카사 피아''는 회랑의 내부 공간을 비웠고, 카몽이스와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은 아래 성가대석으로 옮겨졌다. 1950년에는 레보초가 디자인하고 알베스 멘데스가 제작한 창문들이 완공되었다.[8]
1951년, 오스카르 카르모나 대통령의 유해가 ''Sala do Capítulo''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에 국립 판테온으로 옮겨졌다.[8] 1963년에는 해양 박물관이 수도원의 서쪽 건물에 개관했다.[8]
1983년, 유네스코는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1985년, 포르투갈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했을 때 공식 행사가 이 기념비의 회랑에서 열렸다.[8]
1990년대에는 ''4 séculos de pintura'' (4세기 회화pt, 1992)와 ''"Leonardo da Vinci – um homem à escala do mundo, um Mundo à escala do homem"''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계 규모의 남자, 남자 규모의 세계pt, 1998) 전시회가 열렸으며, 후자에는 빌 게이츠로부터 임시 대여된 레스터 코덱스가 포함되었다.[8]
20세기 말에는 주 예배당(1999년)과 회랑(1998~2002년)을 포함한 보존, 청소 및 복원 작업이 계속되었다.[8] 2007년 12월 13일, 리스본 조약이 수도원에서 서명되어 유럽 연합 개혁의 기초를 마련했다.
3. 건축
디우구 보이탁은 5개의 베이와 3개의 통로를 가진 홀 교회 형식의 교회 기초를 놓았으며, 단일 볼트 아래에 명확히 표시되었지만 약간 돌출된 트랜셉트와 높은 성가대석을 설치했다. 보이탁은 처마 장식까지 교회의 벽을 쌓은 후 수도원 건설을 시작했다.
1517년, 스페인 건축가 후안 데 카스티요가 공사를 이어받아 옹벽과 독특한 단일 경간 리브 볼트를 완성했다. 이는 폭 19m의 교회를 가로지르는 별 모양 볼팅과 트레이서리 볼트의 조합이었다.[11] 각 리브 세트는 보스로 고정되었고,[11] 트랜셉트의 가로 볼트는 기둥 없이 설계되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11]
카스틸료는 또한 르네상스 양식의 그로테스크 또는 꽃무늬 요소로 6개의 높이 25m의 팔각형 기둥을 장식했다. 이 후기 고딕 홀은 건축적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트랜셉트 근처 북쪽 기둥에는 보이탁 또는 카스틸료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메달이 있다.
측면 통로 끝과 성가대석 양쪽에는 16~17세기 마누엘 양식 제단이 있으며, 조각된 나무에 금색과 녹색 안료로 장식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다색 에나멜 테라코타로 된 성 제롬의 이미지를 받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여왕은 성가대석을 왕족의 묘지로 주문했으며, 제로니무 데 루앙(장 드 루앙)이 고전 양식으로 제작했다. 왕실 무덤은 대리석 코끼리 위에 놓여 있고, 이오니아식 기둥과 코린트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가대석 왼쪽에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의 무덤이, 오른쪽에는 포르투갈의 주앙 3세와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의 무덤이 있다.
3. 1. 마누엘 양식
마누엘 양식(Manueline)은 해양 요소와 해상 탐험 중 발견된 물체를 통합한 복잡한 조각 테마를 갖춘, 풍부하게 장식된 건축 양식이다. 석회암으로 조각되었다.[2] 디오고 드 보이타카(Diogo de Boitaca)는 세투발의 예수 수도원(Monastery of Jesus of Setúbal)에서 이 양식을 개척했다.[3] 보이타카는 수도원, 성물실 및 식당의 계획과 공사 계약을 담당했다. 그는 아이다(Ajuda), 알칸타라 계곡, 라베이라스(Laveiras), 리우 세쿠(Rio Seco) 및 테르세나(Tercena)에서 채석된 금색 석회암인 "calcário de lioz"를 사용했다.[2]1517년경, 보이타카의 뒤를 이어 스페인 출신 후안 데 카스티요(Juan de Castillo)가 건설을 담당했다. 카스티요는 점차 마누엘 양식에서 스페인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은세공품(''plata'')의 장식적 특징을 암시하는 화려한 장식을 포함했다. 1521년 마누엘 1세가 사망하면서 건설은 중단되었다.
이후 여러 조각가들이 이 건물에 흔적을 남겼다. 니콜라우 샹트레네(Nicolau Chanterene)는 르네상스 테마로 깊이를 더했고, 건축가 디오고 데 토랄바(Diogo de Torralva)는 1550년에 수도원 건설을 재개하여 주요 예배당, 성가대석을 추가하고, 르네상스 모티프만 사용하여 수도원의 2층을 완성했다. 1571년, 디오고 데 토랄바의 작업은 제롬 드 루앙(Jérôme de Rouen, 제로니모 드 루앙(Jerónimo de Ruão)이라고도 함)에 의해 이어졌으며, 그는 몇 가지 고전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3. 2. 주요 건축물

수도원의 화려한 측면 입구는 주앙 데 카스틸루가 설계했으며, 그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사실 건물의 주 출입구는 아니다.[9] 이 문은 높이 32m, 폭 12m로 2층 높이에 달한다. 화려한 특징으로는 풍부한 박공과 첨탑이 있으며, 조각된 틈새에 캐노피 아래에 서 있는 많은 조각상들이 있고, 두 문 사이에는 항해왕 엔히크의 조각상이 받침대 위에 서 있다.
고막은 이중 문 위에 있으며, 반부조로 성 제롬의 생애의 두 장면을 묘사한다. 왼쪽에는 사자의 발에서 가시를 제거하는 장면이, 오른쪽에는 사막에서 성인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들 사이의 스팬드럴에는 마누엘 1세 국왕의 문장이 있으며, 아치볼트와 고막은 마누엘 양식의 상징과 요소로 덮여 있다. 성모 마리아 (벨렘)는 아치볼트 꼭대기의 받침대에 있으며, 대천사 미카엘이 그 위에 있고, 포탈 위에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가 있다. 포탈의 각 측면에는 풍성하게 장식된 몰딩이 있는 커다란 창문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남쪽 출입구보다 규모는 작지만, 이 문은 장식과 주 제단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문이다.[9] 이 서쪽 출입구는 고딕 양식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1517년 니콜라우 찬테렌이 건설했으며, 아마도 그의 포르투갈 첫 의뢰였을 것이다. 현재는 19세기에 추가된 현관이 가로지르며, 이는 교회와 회랑 사이의 전환을 형성한다.
팀파늄에는 예수의 탄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태고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리는 천사), 예수의 탄생 (예수 아기의 탄생), 그리고 공현절 (동방 박사의 경배)이 있다.[10] 두 천사가 포르투갈의 문장을 아치볼트 근처에 들고 있다. 출입구 양쪽의 모서리는 조각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중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캐노피 아래 틈새에 무릎을 꿇고 있는 마누엘 1세와 아라곤-카스티야의 마리아 여왕의 조각상이 있고, 각각 수호성인인 성 예로니모와 성 세례자 요한이 있다.[10] 받침 코벨은 문장을 들고 있는 작은 천사로 장식되어 있으며, 왕 옆에는 천구의와 여왕 옆에는 세 개의 꽃이 핀 나뭇가지가 있다. 르네상스 요소에는 로마식 복장의 천사, 케루빔, 왕의 세부 묘사와 사실성, 그리고 성 예로니모의 누드 연구가 포함된다.[10]
수도원 전체에는 그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에 성 예로니모가 묘사되어 있으며, 세 가지 중요한 예가 있다.[10]
- ''O Penitente no deserto'' (''사막의 참회자''): 바스코 다 가마의 무덤 근처의 부합창단에 있으며,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는 동안 손에 돌을 들고 있는 사막의 수척한 성인을 보여준다.[10]
- ''O Estudioso na sua cela'' (''그의 서재의 학자''): 열린 책에 둘러싸여 작업대에 앉아있는 성자를 보여준다.[10]
- ''O Doutor da Igreja'' (''교회의 박사''): 높은 합창단에 있으며, 추기경의 붉은 옷과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엄숙한 성 예로니모를 묘사한다.[10]
이 성인은 항상 사자와 성경과 함께한다.[10]

디우구 보이탁은 5개의 베이가 있는 3개의 통로가 있는 교회의 기초를 놓았고, 단일 볼트 아래에 명확하게 표시되었지만 약간 돌출된 트랜셉트와 높은 성가대석이 있었다. 홀 교회 레이아웃은 동일한 높이의 통로와 네이브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탁은 처마 장식까지 교회의 벽을 쌓은 다음 인접한 수도원 건설을 시작했다.
스페인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후안 데 카스티요는 1517년에 공사를 계속했다. 그는 옹벽과 독특한 단일 경간 리브 볼트를 완성했는데, 이는 폭 19미터의 교회를 가로지르는 별 모양 볼팅과 트레이서리 볼트의 조합이었다.[11] 볼팅의 각 리브 세트는 보스로 고정되어 있다.[11] 트랜셉트의 가로 볼트의 대담한 디자인(1522)에는 기둥이나 열이 없지만, 보이탁은 원래 트랜셉트에 3개의 베이를 계획했다. 트랜셉트의 지지되지 않는 볼트는 방문객에게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11]
카스틸료는 또한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인 정교한 그로테스크 또는 꽃무늬 요소로 6개의 높이 25미터의 가늘고 섬세한 팔각형 기둥을 장식했다. 이 후기 고딕 홀의 건설은 미학적으로나 건축적으로 걸작이며, 이 광대한 건물의 공간적 효과를 증폭시킨다. 트랜셉트와 가장 가까운 북쪽 기둥에는 보이탁 또는 후안 데 카스틸료의 초상화로 의도적으로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메달이 있다.
측면 통로 끝과 성가대석 양쪽에는 16세기와 17세기에 지어진 제단(역시 마누엘 양식)이 있다. 이들은 조각된 나무로 장식되어 있고 금색과 녹색 안료로 도금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다색 에나멜 처리된 테라코타로 된 성 제롬의 이미지를 받치고 있다.
이 성가대석은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여왕에 의해 왕족의 마지막 안식처로 주문되었다. 그것은 고전 양식의 제로니무 데 루앙(장 드 루앙)의 작품이다. 왕실 무덤은 대리석 코끼리에 놓여 있으며, 이오니아식 기둥 사이에 놓여 있으며, 코린트식 기둥으로 덮여 있다. 성가대석 왼쪽에 있는 무덤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그의 아내 아라곤의 마리아 (1482-1517)의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무덤은 포르투갈의 주앙 3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의 것이다.
교회 내부 하부 성가대석에는 바스코 다 가마(1468–1523)와 대항해 시대의 위대한 시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1527–1580)의 석관이 있다. 두 석관 모두 19세기 조각가 코스타 모타가 조각했으며, 조화로운 네오-마누엘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두 사람의 유해는 1880년에 이 석관으로 옮겨졌다.


보이탁은 수도원의 거대한 정방형 회랑(55 × 55m)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섬세한 트레이서리 위에 놓인 넓은 아치와 멀리언이 있는 창문으로 아치형 천장을 만들었다. 주앙 드 카스틸류는 하층에 고전적인 덧칠을 하고 더 안으로 들어간 상층을 건설하여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러한 회랑의 건설은 당시 새로운 시도였다. 카스틸류는 보이탁이 만든 원래의 둥근 기둥을 직사각형 기둥으로 바꾸고, 플라테레스코 양식의 장식으로 장식했다. 각 날개는 트레이서리 볼트가 있는 6개의 베이로 구성된다. 네 개의 내부 베이는 거대한 부벽에 놓여 넓은 아케이드를 형성한다. 코너 베이는 대각선 아치형 구조로 연결되어 풍부하게 장식된 코너 기둥을 보여준다. 회랑은 장식적 장식과 아르밀라리 천구, 문장, 그리고 포르투갈의 성장하는 세계 권력을 보여주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와 같은 왕조적 상징적 동기를 통해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회랑의 내부 벽에는 유럽, 무어 및 동양적 모티프 외에도 항해 요소가 포함된 마누엘 양식의 풍부한 모티프가 있다. 둥근 아치와 수평 구조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과 명확하게 일치하는 반면, 동시에 스페인 건축과의 관계도 있다. 내부 안뜰의 외부 벽 장식은 카스틸류가 플라테레스코 양식으로 만들었다. 아케이드는 건설에 세공 측면을 제공하는 트레이서리 아치를 포함한다.
이 아케이드 중 하나에는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수한 무덤이 있으며, 강당에 있는 다른 여러 무덤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메이다 개릿 (1799–1854), 작가 겸 역사가 알렉상드르 에르쿨라누 (1810–1877), 전 대통령 테오필루 브라가 (1843–1924)와 오스카르 카르모나 (1869–1951)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강당 맞은편의 식당에는 18세기의 여러 ''아줄레주'' 타일이 있다.
1850년 복원 이후 수도원에 추가된 건물에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u Nacional de Arqueologia)과 ''해양 박물관''(해양 박물관)이 서쪽 날개에 설립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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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de eLearning do Instituto Politécnico de To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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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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