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아보가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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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177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과학자이다.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수학과 물리학을 독학하며 연구를 시작했으며, 토리노 대학교 교수와 왕립 베르첼리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알려진 기체 분자 수에 관한 중요한 이론을 제시했으며, 이는 현대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아보가드로의 업적은 사후에 재평가되었으며, 분자 이론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물질 1몰당 분자 수는 아보가드로 수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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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아보가드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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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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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렌초 로마노 아메데오 카를로 아보가드로 () |
출생 장소 | 토리노, 사르데냐 왕국 |
사망 | (79세) |
사망 장소 | 토리노, 피에몬테-사르데냐 |
국적 | 이탈리아 |
분야 | 화학, 물리학 |
직장 | 토리노 대학교 |
주목할 만한 학생 | 스타니슬라오 카니차로 |
알려진 업적 | 아보가드로의 법칙, 아보가드로 상수 |
영향 | 존 돌턴,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
![]() | |
이름 | |
로마자 표기 | Amedeo Avogadro |
발음 (IPA) | 영어: , 이탈리아어: |
학문적 경력 | |
근무지 | 토리노 대학교 |
영향 관계 | |
영향을 받은 사람 | 스타니슬라오 카니차로 |
영향을 준 사람 | 존 돌턴,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
2. 생애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1776년 토리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당시 사르데냐 왕국 피에몬테 지방에서 법률가와 의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8][9] 아보가드로 역시 법률을 공부하여 1796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8][9] 그 후 법률가로 활동하면서 1800년대 초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전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8][9]
1806년 토리노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1809년 왕립 베르첼리 대학의 자연 철학 교수가 되었다.[8][9] 1815년에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7명이라고도 함)[6] 1820년에는 토리노 대학교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나,[8] 1821년 3월 피에몬테 봉기에 참여하여 1822년에 정치적 문제로 해임되었다.[6] 1833년 토리노 대학교에 복직하여 1850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통계, 기상학, 도량형과 관련된 직책을 맡았고 (그는 미터법을 피에몬테에 도입), 공공 교육에 관한 왕립 최고 평의회의 위원이었다.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그의 논문에는 프랑스어 논문이 많았으나, 살아있을 때에는 다른 화학자들과의 소극적인 접촉과 그의 연구를 그 스스로 인용하는 버릇으로 인해서 국내외에서 유명하지는 않았다.[8][9]
아보가드로는 1850년에 토리노 대학교 교수 자리에서 은퇴하였고,[8] 1856년, 80세를 일기로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9] 그는 평생 거의 국외에서 무명에 가까웠으며, 아보가드로의 업적이 재평가된 것은 그의 사후 4년 후인 1860년의 일이다.[8][9]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1776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8][9] 그의 아버지는 당시 사르데냐 왕국 피에몬테 지방에서 법률가와 의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아보가드로 역시 법률을 공부하여 1796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8][9]1800년대 초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전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8][9] 그 결과 1806년 토리노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09년에는 왕립 베르첼리 대학의 자연 철학 교수가 되었다.[8] 1815년에는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8]
|thumb|''Mémoire sur les chaleurs spécifiques'' (고체 및 액체의 비열에 관한 연구)
2. 2. 학문적 경력
1806년 토리노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1809년 왕립 베르첼리 대학의 자연 철학 교수가 되었다.[8][9] 1815년에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7명이라고도 함)[6] 1820년에는 토리노 대학교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나,[8] 1821년 3월 피에몬테 봉기에 참여하여 1822년에 정치적 문제로 해임되었다.[6] 1833년 토리노 대학교에 복직하여 1850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통계, 기상학, 도량형과 관련된 직책을 맡았고 (그는 미터법을 피에몬테에 도입), 공공 교육에 관한 왕립 최고 평의회의 위원이었다.그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그의 논문에는 프랑스어 논문이 많았으나, 살아있을 때에는 다른 화학자들과의 소극적인 접촉과 그의 연구를 그 스스로 인용하는 버릇으로 인해서 국내외에서 유명하지는 않았다.[8][9]
2. 3. 은퇴와 죽음
아보가드로는 1850년에 토리노 대학교 교수 자리에서 은퇴하였고,[8] 1856년, 80세를 일기로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9] 그는 평생 거의 국외에서 무명에 가까웠으며, 아보가드로의 업적이 재평가된 것은 그의 사후 4년 후인 1860년의 일이다.[8][9]3. 업적
아보가드로는 전기, 액체의 증류, 비열, 모세관, 원자의 부피에 대한 많은 논문을 썼고, 논문집 ''Fisica di corpi ponderabiliit'' 4권을 1837년부터 1841년까지 출판하였다.[10] 1815년에는 기체 밀도에 관한 논문인 ''Mémoire sur les masses relatives des molécules des corps simples, ou densités présumées de leur gaz, et sur la constitution de quelques-uns de leur composés, pour servir de suite à l'Essai sur le même sujet, publié dans le Journal de Physique, juillet 1811프랑스어|단순 물질 분자의 상대적 질량에 관한 노트, 또는 기체의 추정 밀도 및 그 화합물의 구성에 관하여, 1811년 7월 Journal de Physique에 게재된 동일 주제에 대한 에세이의 후속편'')을 발표했다. 1821년에는 ''Nouvelles considérations sur la théorie des proportions déterminées dans les combinaisons, et sur la détermination des masses des molécules des corps프랑스어|조합에서 결정된 비율 이론에 대한 새로운 고찰, 그리고 원자 질량 결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곧이어 ''Mémoire sur la manière de ramener les composès organiques aux lois ordinaires des proportions déterminées프랑스어|결정된 비율의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 유기 화합물을 찾는 방법에 대한 노트")를 발표했다.
3. 1. 아보가드로의 법칙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아보가드로 법칙은, 기체의 종류가 다를지라도 온도와 압력이 같다면 일정 부피 안에 들어 있는 입자 수는 같다는 법칙이다. 실제로는 이상 기체에 한해서 성립한다.[11]이 법칙은 Journal de physique프랑스어에 단위입자의 상대적 질량 및 이들의 결합비를 결정하는 하나의 방법/Essai d'une manière de déterminer les masses relatives des molécules élémentaires des corps, et les proportions selon lesquelles elles entrent dans ces combinaisons }}{{해석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1811년 처음 나왔다.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아보가드로 사후 1860년 스타니슬라오 칸니차로가 카를스루에의 화학국제회의에서 아보가드로의 법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아보가드로는 이 논문에서 존 돌턴의 원자론에 입각하여 1808년에 발견된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의 기체 반응의 법칙을 기초로 하여 원자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체 반응의 법칙은 반응하는 기체의 부피는 항상 간단한 정수비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입자수도 간단한 정수 비가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아보가드로는 이를 토대로 하여 같은 온도와 같은 압력 하에서 같은 부피의 기체는 같은 수의 입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전까지의 원자설과 모순이 생길 수 있다. 당시는 홑원소물질 입자는 한 개의 원자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아보가드로의 설명대로라면 부피비와 입자수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수소 2부피, 산소 1부피가 결합하면 물 2부피가 생성된다. 현대의 방식으로 이를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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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의 존 돌턴의 원자설에 기초하면 다음과 같이 표기된다. 이 식에서의 입자수 비는 아보가드로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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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가드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홑원소물질의 입자는 단일 입자로 되어있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수소, 산소, 질소 등의 기체가 이원자분자 상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1811년에 그는 물, 질산, 아질산, 암모니아, 일산화 탄소, 염화 수소의 올바른 분자식을 제시하였으며, 1814년에는 이산화 탄소, 이황화 탄소, 이산화 황, 황화 수소의 분자식을 제시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그의 법칙을 금속에도 적용하여 17종류의 금속의 원자량을 계산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현대과학 중 이상기체의 계산에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입자갯수의 계산이 중요한 학문에서 기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고 평가된다.
분자 이론에 대한 아보가드로의 기여를 기리기 위해, 물질 1몰당 분자 수는 아보가드로 수, ''N''A로 명명되었다. 아보가드로 수는 화학 반응의 결과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다. 이를 통해 화학자들은 주어진 반응에서 생성된 물질의 양을 매우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
'''0℃''', '''1.013×105Pa'''에서, 1mol 6.0221×1023개의 기체분자를 모으면, 그 '''종류에 관계없이''' 22.414 l(리터)가 된다.
3. 1. 1. 법칙의 배경과 의의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아보가드로 법칙은, 기체의 종류가 다를지라도 온도와 압력이 같다면 일정 부피 안에 들어 있는 입자 수는 같다는 법칙이다. 실제로는 이상 기체에 한해서 성립한다.[11]아보가드로는 존 돌턴의 원자론에 입각하여 1808년에 발견된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의 기체 반응의 법칙을 기초로 하여 원자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체 반응의 법칙은 반응하는 기체의 부피는 항상 간단한 정수비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입자수도 간단한 정수 비가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아보가드로는 이를 토대로 하여 같은 온도와 같은 압력 하에서 같은 부피의 기체는 같은 수의 입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전까지의 원자설과 모순이 생길 수 있다. 당시는 홑원소물질 입자는 한 개의 원자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아보가드로의 설명대로라면 부피비와 입자수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수소 2부피, 산소 1부피가 결합하면 물 2부피가 생성된다. 현대의 방식으로 이를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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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의 존 돌턴의 원자설에 기초하면 다음과 같이 표기된다. 이 식에서의 입자수 비는 아보가드로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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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가드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홑원소물질의 입자는 단일 입자로 되어있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수소, 산소, 질소 등의 기체가 이원자분자 상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1811년에 그는 물, 질산, 아질산, 암모니아, 일산화 탄소, 염화 수소의 올바른 분자식을 제시하였으며, 1814년에는 이산화 탄소, 이황화 탄소, 이산화 황, 황화 수소의 분자식을 제시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그의 법칙을 금속에도 적용하여 17종류의 금속의 원자량을 계산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현대과학 중 이상기체의 계산에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입자갯수의 계산이 중요한 학문에서 기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고 평가된다.
분자 이론에 대한 아보가드로의 기여를 기리기 위해, 물질 1몰당 분자 수는 아보가드로 수, ''N''A로 명명되었다. 아보가드로 수는 화학 반응의 결과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다. 이를 통해 화학자들은 주어진 반응에서 생성된 물질의 양을 매우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
(*) '''0℃''', '''1.013×105Pa'''()에서, 1mol 6.0221×1023개의 기체분자를 모으면, 그 '''종류에 관계없이''' 22.414 l(리터)가 된다.
3. 1. 2. 법칙의 한계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이상 기체에 대해서만 정확하게 성립한다. 실제 기체는 분자 간 상호작용, 분자 자체의 부피 등의 영향으로 인해 아보가드로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3. 2. 기타 연구
아보가드로는 전기, 액체의 증류, 비열, 모세관, 원자의 부피에 대한 많은 논문을 썼고, 논문집 ''Fisica di corpi ponderabili'' 4권을 1837년부터 1841년까지 출판하였다.[10] 1815년에는 기체 밀도에 관한 논문인 ''Mémoire sur les masses relatives des molécules des corps simples, ou densités présumées de leur gaz, et sur la constitution de quelques-uns de leur composés, pour servir de suite à l'Essai sur le même sujet, publié dans le Journal de Physique, juillet 1811프랑스어|단순 물질 분자의 상대적 질량에 관한 노트, 또는 기체의 추정 밀도 및 그 화합물의 구성에 관하여, 1811년 7월 Journal de Physique에 게재된 동일 주제에 대한 에세이의 후속편'')을 발표했다. 1821년에는 ''Nouvelles considérations sur la théorie des proportions déterminées dans les combinaisons, et sur la détermination des masses des molécules des corps프랑스어|조합에서 결정된 비율 이론에 대한 새로운 고찰, 그리고 원자 질량 결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곧이어 ''Mémoire sur la manière de ramener les composès organiques aux lois ordinaires des proportions déterminées프랑스어|결정된 비율의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 유기 화합물을 찾는 방법에 대한 노트")를 발표했다. 1841년, 그는 4권으로 구성된 ''Fisica dei corpi ponderabili, ossia Trattato della costituzione materiale de' corpiit''를 발표했다.4. 아보가드로 수
5. 평가 및 영향
아보가드로는 생전에 그의 이론이 과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앙드레 마리 앙페르도 3년 후 유사한 이론을 제안했지만, 역시 같은 무관심에 직면했다.
샤를프레데릭 제라르와 오귀스트 로랑의 유기 화학 연구를 통해서 아보가드로의 법칙이 기체 내에서 동일한 양의 분자가 동일한 부피를 갖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일부 무기 물질 관련 실험에서는 모순처럼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1860년 카를스루에 회의에서 스타니슬라오 칸니차로는 이러한 예외가 특정 온도에서 분자 해리에 기인하며, 아보가드로의 법칙이 분자 질량뿐만 아니라 원자 질량도 결정한다고 설명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1911년, 토리노에서 아보가드로의 1811년 논문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가 열렸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참석하여 그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기렸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1857년에 제안한 기체에 대한 운동 이론을 통해 아보가드로의 법칙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야코뷔스 헨리퀴스 판트호프는 아보가드로의 이론이 희석 용액에서도 성립함을 보였다.
아보가드로는 원자-분자론의 창시자로 칭송받고 있다.
6. 한국의 관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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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pere scelte di Amedeo Avogadro
http://gallica.bnf.f[...]
Accademia delle scienze
[2]
웹사이트
Avogadro, Ame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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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Avogad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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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perCol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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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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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vogadro
http://www.dictio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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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History of anaesth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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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Amedeo Avogadro Italian physic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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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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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學園世界大百科事典
學園出版公社事典編纂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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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서적
Principles of Modern Chemisty
Thomson Brooks/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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