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데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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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왕국은 지중해 사르데냐 섬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국가이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비잔틴 제국, 사라센족의 침입을 거쳐 4개의 사법구로 분열되었다. 이후 피사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영향 아래 놓였고, 1297년 교황령의 봉토로 아라곤 왕국에 귀속되었다. 아라곤-스페인 통치 시기에는 자치권을 유지하며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고, 1720년 사보이아 가문이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고 사르데냐를 획득하며 사르데냐 왕국을 건국했다. 사보이아 왕국은 프랑스와의 전쟁, 나폴레옹의 침략을 겪었으며, 빈 회의 이후 영토를 회복하고 제노바를 병합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고, 카보우르 총리의 주도하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추진하여 1861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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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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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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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사르데냐 사르데냐-피에몬테 피에몬테-사르데냐 |
토착어 명칭 | |
상태 | 왕국 |
상태 설명 | 아라곤 왕관 및 스페인 제국의 연합 국가 (1324–1708, 1717–1720) 오스트리아의 일부 (1708–1717) 사보이의 주권 국가 (1720–1861) |
시대 | 중세, 근세,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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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칼리아리 (1324–1720, 1798–1814) 토리노 (1720–1798, 1814–1861) |
국가 표어 | FERT (사보이 가문의 표어) |
국가 | 사르데냐 국가 "사르데냐 국가" |
정부 형태 | 절대 군주제 (1324–1849) 의회 군주제 (1849–1861) |
통치자 칭호 | 국왕 |
초대 통치자 | 하이메 2세 |
초대 통치자 재임 기간 | 1324–1327 (최초) |
마지막 통치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마지막 통치자 재임 기간 | 1849–1861 (마지막) |
총리 칭호 | 총리 |
초대 총리 | 체사레 발보 |
초대 총리 재임 기간 | 1848 (최초) |
마지막 총리 | 카밀로 벤소 |
마지막 총리 재임 기간 | 1860–1861 (마지막) |
입법부 | 의회 (1848년부터) |
상원 | 수발피노 상원 (1848년부터) |
하원 | 대리자 회의소 (1848년부터) |
이전 국가 | 아르보레아 재판관 피사 공화국 사사리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 사보이 공국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공국 아라곤 왕관 중앙이탈리아 연합주 |
이전 국가 국기 | image_file: Flag of the Giudicato of Arborea.svg image_file: Flag of the Republic of Pisa.svg image_file: Flag_of_Sassari_(1259–1323).svg image_file: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 image_file: Savoie flag.svg image_file: Flag of Genoa.svg image_file: Flag of Genoa.svg image_file: Royal Banner of Aragón.svg image_file: Flag of Italy (1861-1946).svg |
계승 국가 | 이탈리아 왕국 |
계승 국가 국기 | image_file: Flag of Italy (1861–1946).svg image_file: Flag of France.svg |
설립 사건 | 교황의 투자 |
설립 날짜 | 1297 |
실제 설립 | 실제 설립 |
설립 날짜 | 1324 |
합스부르크 왕조 | 합스부르크 왕조 |
합스부르크 왕조 날짜 | 1708 |
스페인 재정복 | 스페인 재정복 |
스페인 재정복 날짜 | 1717 |
사보이 왕가 편입 | 사보이 왕가 편입 |
사보이 왕가 편입 날짜 | 1720 |
완전한 융합 | 완전한 융합 |
완전한 융합 날짜 | 1848 |
사보이 및 니스의 상실 | 사보이와 [[니스 백국 상실]] |
사보이 및 니스의 상실 날짜 | 1860 |
멸망 날짜 | 1861년 3월 17일 |
멸망 사건 | 이탈리아 왕국 선포 |
존속 기간 | 1297—1861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프랑스 모나코 |
공용어 | 이베리아 시대: 사르데냐어 코르시카어 카탈루냐어 스페인어 사보이 시대: 이탈리아어 (16세기부터 본토에서 공식적으로 사용; 1760년 사르데냐에 도입) 프랑스어 (16세기부터 본토에서 공식적으로 사용) 피에몬테어 리구리아어 오크어 아르피탄어 |
통화 | 칼리아레세 (1813년까지) 사르데냐 스쿠도 (1816년까지) 피에몬테 스쿠도 (1816년까지) 프랑스 프랑 (1800–1814) 사르데냐 리라 (1816–1861) |
민족 | 사르데냐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국교) |
인구 (1821년) | 3,974,500명 |
2. 역사적 배경
"시칠리아 왕" 칭호는 중세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영토는 명목상 "시칠리아 왕국"이었다. 13세기 말 이후, 시칠리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이후 스페인)에 의해 사실상 식민지로 지배되었다.
사보이아 왕가 (사보이아 공국)는 1720년 시칠리아와 교환하는 형태로 사르데냐를 획득하여 사르데냐 왕국이라 칭했다. 사보이아 왕가는 대륙을 근거지로 하여, 피에몬테의 토리노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피에몬테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사르데냐 섬만을 지배하며 칼리아리로 근거지를 옮겼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제노바 공화국'''을 포함한 구 영토를 회복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 건국이 선포될 때까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을 주도했다.
2. 1. 초기 역사 (로마 시대 ~ 중세)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기원전 238년 이후, 사르데냐는 5세기 중반 반달족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534년에는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고, 9세기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비잔티움 속주로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과의 연락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섬의 유력 가문들이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외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아랍인들의 약탈과 정복 시도에 직면한 사르데냐는 ''translatio imperii''("통치의 이전") 원칙을 사용하여 고대 로마와 비잔틴 모델에 따라 스스로를 조직했다. 당시 서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관행과는 달리, 섬은 통치자와 그의 가족의 사유 재산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군주 공화국과 같은 별개의 실체였다.
705년에서 706년 사이,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라센족이 해안 도시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사르데냐의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9세기에 타로스는 사라센의 공격으로 인해 1800년 이상 점령 후 오리스타노로 옮겨졌고, 카랄리스, 포르토 토레스 등 다른 많은 해안 중심지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015~1016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무자히드 알 아미리(라틴어로 ''뮤세토'')가 지휘한 또 다른 대규모 사라센 해상 공격이 있었으나, 사법부가 해양 공화국인 피사와 제노바 함대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아랍인들과의 싸움에서 두 해양 공화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21]
대분열 이후 로마는 사르데냐 교회, 정치 및 사회에 라틴어를 회복하고, 비잔틴인들이 가톨릭 노르만족에 의해 몰락한 후 남부 이탈리아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마침내 한 가톨릭 통치자 아래 섬을 재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판사"라는 칭호조차도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험악한 관계 시대(1182년 라틴인 학살, 1204년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 1261년 콘스탄티노플 탈환)에 그리스 교회와 국가의 비잔틴 유물이었다.[22]
9세기 또는 10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섬에서 통치했던 아르콘(ἄρχοντες) 또는 라틴어로 judicesla[23][24]는 비잔티움 황제의 명목상의 봉신이었지만, 사르데냐 전체의 진정한 왕(Κύριε βοήθε ιοῦ δού λού σου Tουρκοτουρίου ἅρχωντοσ Σαρδινίας καί τής δού ληςσου Γετιτ[25])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26][27] 이들 중 두 명의 이름, 투르코투리우와 살루시우(Tουρκοτουριου βασιλικου προτοσπαθαριου [28] και Σαλουσιου των ευγενεστατων άρχωντων)[29][30]만이 알려져 있으며, 10세기에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콘들은 여전히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글을 썼지만, 1070년 라콘-구날레의 토르키토리오 1세가 발행한 칼리아리 사법부의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인 ''카르타 볼가레''는 이미 로망스 사르데냐어로 쓰여졌지만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했다.[31]
이 왕국은 칼리아리, 아르보레아, 갈루라, 로그도로의 네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었고, 이전 왕국처럼 완벽하게 조직되었다. 그러나 섬 전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 교황청과 특히 "판사"(지역 통치자)와 동맹을 맺어 정치적, 경제적 영향권을 확보한 이탈리아 국가인 제노바와 피사의 영향을 받았다. 제노바는 사르데냐의 북부와 서부 지역(갈루라와 로그도로 사법부)에, 피사는 남부와 동부(칼리아리와 아르보레아 사법부)에 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32][33] 이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싸우는 왕으로 자신을 여기는 판사들 사이에 장기간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원인이었다.[34][35]
2. 2. 아라곤-스페인 통치 시기 (1297년 ~ 1720년)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아라곤 왕국 국왕 하이메 2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앙주 왕가에 반환하도록 압박했지만, 그 대가로 코르시카와 함께 사르데냐 「왕국」을 하사했다(사르데냐 국왕 하이메 1세).[38] 이 반환은 사실상 무효화되었지만, 양도는 1302년의 칼타벨로타 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하이메 2세는 1323년부터 사르데냐 침공을 시작했지만, 원주민, 제노바인, 피사인들의 저항으로 정복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1세기에 걸친 항쟁 속에서 제노바와 피사의 세력은 쇠퇴했고, 아라곤 연합 왕국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코르시카는 제노바의 지배하에 남았다).[38] 이후 사르데냐는 명목상 아라곤 연합 왕국의 한 왕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카탈루냐인의 식민지로 지배되었고, 에스파냐 왕국 성립 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1353년, 아르보레아는 아라곤과 전쟁을 벌였다. 아라곤 왕국은 1420년까지 마지막 판결구(사르데냐의 토착 왕국)들을 정복하지 못했다.[38]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 왕국은 아라곤 왕관의 일부로서 별개의 성격을 유지했으며, 단순히 아라곤 왕국에 편입되지 않았다. 아르보레아와의 분쟁 당시 아라곤의 페드로 4세는 왕국에 자치 입법부와 법 전통을 부여했다. 왕국은 국왕의 이름으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1420년, 시칠리아 왕이자 아라곤 왕위 계승자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는 마지막 판사였던 나르보네의 윌리엄 3세로부터 아르보레아 판결구의 남은 영토를 약 55537.8°C에 매입했고, 사르데냐 왕국은 카스텔사르도(당시 ''카스텔도리아'' 또는 ''카스텔제노베세''라고 불림)를 제외한 섬 전체로 확장되었다. 카스텔사르도는 1448년 도리아 가문으로부터 빼앗아 ''카스티요 아라고네스''(''아라곤 성'')로 개명되었다.
결코 정복되지 않았던 코르시카는 공식 명칭에서 제외되었고, 사르데냐는 아라곤 왕관과 함께 통합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38] 지역 왕국들, 코뮌, 시뇨리아의 패배, 확고한 아라곤(후에 스페인)의 지배, 불모의 봉건제 도입,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사르데냐 왕국의 멈출 수 없는 쇠퇴를 가져왔다. 총독 니콜로 카로츠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고 1470년대에 총독군을 물리쳤으나, 1478년 마코메르 전투에서 패배하여 섬의 추가 반란을 종식시킨 지역 귀족 레오나르도 알라곤, 오리스타노 후작의 지휘 아래 짧은 기간의 봉기가 발생했다. 북아프리카 해적의 끊임없는 공격과 일련의 페스트(1582년, 1652년, 1655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2. 3. 사보이아 가문 통치 시기 (1720년 ~ 1861년)

1720년,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 섬을 할양하고, 그 대가로 사르데냐 섬을 할양받았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사르데냐 왕의 칭호를 얻고 "사르데냐 왕국"을 건국했다.[39] 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1713년 우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스페인의 사르데냐 지배가 끝나고, 사보이아 가문이 시칠리아와 밀라노 공국의 일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사배열 동맹 전쟁 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에 넘겨주고 사르데냐를 받는 데 동의, 1720년 2월 17일 헤이그 조약에서 공식 비준되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년 - 1738년)에서는 프랑스·스페인 편에 서서 참전하여, 롬바르디아를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로부터 반(反)오스트리아 동맹 제안을 받았지만, 사보이아와 니스 할양 요구에 1792년 9월부터 동맹을 거부하고 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패배, 1796년 케라스코 휴전으로 사보이, 니스 등을 프랑스에 할양했다. 1798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토리노에서 추방되고, 피에몬테 공화국이 성립되어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사르데냐 섬으로 거점을 옮겼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1792~1815)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본토를 상실하고 사르데냐 섬으로 피난했다. 1802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즉위하여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또한 이때 제노바 공화국을 병합했다.
1821년 3월, 자유주의 장교단을 중심으로 한 헌법 혁명이 발발했다. 사보이아-카리냐노 가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헌정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적 간섭으로 실패했다.
1831년, 카를로 펠리체가 사망하여 카리냐노 공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청년 이탈리아를 탄압하는 등 절대주의적 군주로 행동했다.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유럽 각지에서 자유주의·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북이탈리아에서도 반 오스트리아 반란이 발발, 카를로 알베르토는 롬바르디아 지방 병합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다(제1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그러나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패배, 카를로 알베르토는 퇴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52년, 총리로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를 등용했다. 사르데냐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유지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이탈리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입헌군주제 국가인 사르데냐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사르데냐는 크림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 편에 참전, 프랑스·영국의 환심을 얻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유리한 국제 관계를 구축했다.
1858년, 플롱비에르의 밀약을 프랑스와 맺고,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군 지원으로 솔페리노 전투에서 승리,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일부를 얻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파르마 공국·모데나 공국·토스카나 대공국이 사르데냐 왕국으로 합류했다.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의 의용군(적색 셔츠대)가 두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했다. 1860년 10월 26일, 테아노에서 가리발디는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상했다.
1861년, 토리노에서 2월 18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승인했다. 3월 1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가 공식 선언되었다. 여기서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
3. 이탈리아 통일 운동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을 계기로 유럽 각지에서 자유주의·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민족의 봄). 북이탈리아에서도 반 오스트리아 반란이 발발했다(밀라노 5일 전투 등).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고 롬바르디아 지방의 병합을 도모했다(제1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그러나 공화파와의 불화 등으로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패배하여 권위를 상실하고 1849년 퇴위와 망명을 강요당했다.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의 퇴위로 즉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52년 총리로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를 등용했다.
이탈리아의 많은 국가가 1848년의 열광을 거쳐 반동화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르데냐에서는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유지되었고, 교육, 산업, 교통망 정비등 일련의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입헌군주제 국가인 사르데냐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사르데냐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강대국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풍부한 롬바르도-베네토(오스트리아 제국령)을 병합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크림 전쟁에서는 오스만 제국 편에서 참전하여 프랑스·영국의 환심을 얻어 이탈리아 통일을 향한 유리한 국제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1858년, 사르데냐는 플롱비에르의 밀약을 프랑스와 맺고, 대오스트리아 전쟁을 위한 외교적 준비를 완료했다. 1859년 4월 29일 사르데냐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어,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솔페리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일부를 손에 넣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파르마 공국·모데나 공국·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사르데냐 왕국으로의 합류가 선택되었다(중부 통합 여러 주).
1860년에는 가리발디의 의용군(천 명대, 또는 붉은 셔츠대)가 남이탈리아의 두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중부 통합 여러 주의 편입에 있어 프랑스가 플롱비에르의 밀약 이행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보이아와 니스 백작령(알프 마리팀주)의 할양을 강요당했다. 1860년 10월 26일,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회견에서 가리발디는 그를 따르는 병사들에게 "여기에 이탈리아 국왕이 계신다!"라고 알리고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상했다.
1861년, 토리노에 소집된 제1회 이탈리아 국민 의회는 2월 18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승인했다. 3월 1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여기서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
4. 역대 국왕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펠리페 5세 | 1700년 - 1713년 | 스페인 국왕[2] |
카를 6세 | 1713년 - 1720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2]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1720년 - 1730년 | [2]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 1730년 - 1773년 | [2]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 1773년 - 1796년 | [2]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 1796년 - 1802년 | [2]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 1802년 - 1821년 | [2] |
카를로 펠리체 | 1821년 - 1831년 | [2] |
카를로 알베르토 | 1831년 - 1849년 | [2]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1849년 - 1861년 | 이후 이탈리아 국왕[2] |
5. 정치 및 사회
사르데냐는 기원전 238년 코르시카와 함께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고, 5세기 중반 반달족에게 점령당했다가 534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9세기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정복하면서 콘스탄티노플과의 연락이 어려워지자 섬의 유력 가문들이 통치권을 장악했다.
외부의 도움 없이 아랍인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사르데냐는 ''translatio imperii''("통치의 이전") 원칙에 따라 고대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모델을 기반으로 자치를 유지했다. 섬은 통치자 개인의 소유가 아닌 독립된 실체였으며,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군주 공화국이었다.[21]
705년에서 706년 사이,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라센족이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다. 이후 사라센의 공격으로 9세기에 타로스는 오리스타노로, 카랄리스, 포르토 토레스 등 여러 해안 도시들이 옮겨졌다. 1015년에서 1016년 사이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의 무자히드 알 아미리가 이끄는 대규모 사라센 해상 공격이 있었으나, 사법부는 해양 공화국인 피사와 제노바 함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막아냈다. 교황 베네딕토 8세도 이들 해양 공화국에 지원을 요청했다.[21]
대분열 이후, 로마는 사르데냐 교회와 사회에 라틴어를 회복하고, 섬을 가톨릭 통치 아래 재통합하려 노력했다. "판사"라는 칭호는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갈등 시기에 그리스 교회와 국가의 비잔틴 유산이었다.[22]
9세기 또는 10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섬을 통치했던 아르콘들은 비잔티움 황제의 명목상 봉신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르데냐의 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25][26][27] 이들 중 투르코투리우와 살루시우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1070년 라콘-구날레의 토르키토리오 1세가 발행한 ''카르타 볼가레''는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했지만, 이미 로망스 사르데냐어로 쓰여졌다.[31]
왕국은 칼리아리, 아르보레아, 갈루라, 로그도로의 네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었고, 교황청과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제노바와 피사의 영향을 받았다. 제노바는 주로 북부와 서부 지역, 피사는 남부와 동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32][33] 이는 판사들 간의 장기간 전쟁을 야기했다.[34][35]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아르보레아의 바리소네 2세[36]와 사르데냐의 엔치오에게 사르데냐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바리소네 2세는 1172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37] 엔치오는 1272년 상속인 없이 사망했다.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왕국(1460년 이후 사르데냐 왕국)[38]은 아라곤 연합의 일부였으며, 왕의 인물로만 통합되었다. 아라곤 연합은 여러 국가의 대표자들의 의회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의 유산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요성이 커졌다.
왕국의 개념은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아나니 조약의 비밀 조항에 따라 아라곤의 하이메 2세를 위해 만든 가상의 실체였다. 이는 시칠리아를 앙주 왕조에 복귀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르데냐에서는 네 개의 국가 중 세 개가 피사와 제노바의 통제하에 있었다. 제노바는 코르시카도 통치했다.
이러한 교황의 결정에는 피사와 신성 로마 제국의 기벨린과의 싸움, 사르데냐가 가톨릭 왕들의 통제하에 있었고, 로마에 충성하는 자치주였으며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5. 1. 정치 제도
초기 사르데냐 왕국은 사보이아 가문의 절대 군주정이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알베르티노 헌장이 제정되면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되었다.카보우르 총리 시절에는 의회 정치가 발전하고 행정 개혁이 추진되었다. 1852년 카보우르가 이끄는 자유주의 내각이 구성된 이후, 사르데냐 왕국은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유지하며 교육, 산업화, 교통망 정비 등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39] 이는 이탈리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통일 지지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5. 2. 사회 변화
사르데냐 왕국은 1830년부터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1848년 혁명 기간 중 자유주의적 압력으로 알베르티노 헌장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 1세기 이상 피에몬테의 속국이었던 사르데냐 섬은 샤를 알베르가 발표한 완전 통합으로 본토에 대한 잔여 자치권을 상실했다. 그 결과, 왕국의 기본 제도는 프랑스 모델을 따른 입헌 중앙집권 군주제의 형태로 변화하였다.[39]이탈리아의 많은 국가들이 1848년의 열광을 거쳐 반동화되었지만, 사르데냐에서는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유지되었다. 또한, 교육, 산업, 교통망 정비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이탈리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입헌군주제 국가인 사르데냐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6. 문화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본토와는 다른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사르데냐어가 대표적이며,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해 왔다.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는 바로크 양식을 비롯한 유럽 문화가 유입되기도 했다.
9세기에서 11세기 초 사이에 섬에서 통치했던 아르콘(ἄρχοντες) 또는 라틴어로 judicesla[23][24]는 비잔티움 황제의 명목상 봉신이었지만 사르데냐 전체의 진정한 왕(Κύριε βοήθε ιοῦ δού λού σου Tουρκοτουρίου ἅρχωντοσ Σαρδινίας καί τής δού ληςσου Γετιτ[25])으로 간주될 수 있다.[26][27]
1070년 라콘-구날레의 토르키토리오 1세가 발행한 칼리아리 사법부의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인 '카르타 볼가레'는 이미 로망스 사르데냐어로 쓰여졌지만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했다.[31]
사르데냐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의 통제를 받은 적이 없었고, 로마에 충성하는 자치주였으며 라틴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비잔틴 시대에 비잔틴 예배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7. 평가 및 영향
카보우르 총리의 뛰어난 외교적 역량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정치적 결단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주요 동력이었다.[40] 사르데냐 왕국은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맞서 싸웠으며,[40] 1859년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에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에 대항했다.[40]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통일 이후, 많은 반란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서 발생했다. 이는 피에몬테 지배 계급이 남부를 불공정하게 대우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41] 이러한 지역 간 불균형 문제는 통일 이후 이탈리아의 과제로 남았다.
사르데냐 왕국이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 과정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노력에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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