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이자와 다다히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일본의 고고학자로, 1949년 이와주쿠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을 발견하여 일본 구석기 시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26년 도쿄에서 태어나 가마쿠라와 기류에서 성장했으며, 청년학교를 졸업했다. 해병단 복무 후 고고학 연구를 위해 잡화 행상을 하며 유적을 조사했고, 세리자와 쵸스케와의 만남을 통해 고고학적 조언을 얻었다. 이와주쿠 유적 발견 초기에는 학계의 외면과 비판을 받았지만, 꾸준한 연구 끝에 1967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하며 공헌을 인정받았다. 1989년 사망 후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으며,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과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설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쓰노미야 대학 교수 - 가사하라 도쿠시
    가사하라 도쿠시는 난징 대학살 연구에 매진하며 일본군 학살을 인정하는 일본 역사학자로, 10만 명 이상 20만 명 정도의 희생자 수를 추정하고 역사 교육 분야에도 기여하고 있다.
  • 우쓰노미야 대학 교수 - 사사키 히토시
    사사키 히토시는 일본 축구 선수이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우쓰노미야 대학과 후쿠시마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체육 교육과 여성 체육 진흥에 기여한 인물이다.
  • 일본의 구석기 시대 - 후지무라 신이치
    일본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구석기 유물 발굴 조작이 발각되어 고고학계에서 추방되었으며, 이 사건은 연구 윤리와 검증 시스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 일본의 구석기 시대 - 뗀석기
    뗀석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구 중 하나로, 돌을 깨거나 떼어 만들어 구석기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으며, 긁개, 박편 석기 등 다양한 제작 방식과 주먹도끼, 찍개 등 여러 형태가 있다.
  • 일본의 고고학자 - 오타니 고즈이
    오타니 고즈이는 니시 혼간지의 주지로 종파 근대화를 추진하고 중앙아시아 탐험을 통해 '오타니 컬렉션'을 수집했으나, 재정 스캔들과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일본의 승려이자 탐험가, 학자이다.
  • 일본의 고고학자 - 에가미 나미오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의 고고학자이자 문화사학자로, 흉노 문화와 동서 문화 교류사를 연구하며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주창하여 일본 고대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도쿄 대학 교수 및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그의 업적은 일본 고고학 분야에 해외 조사 연구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자와 다다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이자와 다다히로의 동상
본명아이자와 다다히로
로마자 표기Aizawa Tadahiro
다른 이름아이자와 주요
출생1926년 6월 21일
출생지일본
사망1989년 3월 22일 (향년 62세)
안장지미상
직업상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활동 기간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학문적 배경
분야고고학
영향세리자와 초스케, 스기하라 소스케
수상군마 현 공로상, 요시카와 에이지 상
주요 업적이와주쿠 유적의 발견으로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입증

2. 생애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26년(다이쇼 15년) 도쿄 하네다에서 태어났다.[3] 1934년(쇼와 9년) 가마쿠라로 이사하면서 고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3] 1935년(쇼와 10년)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와 함께 군마현 기류로 이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승 봉공으로 보내져 고독한 환경에 놓였다. 청년학교가 최종 학력이 되었다.[3]

1944년(쇼와 19년) 해병단에 입단하여 구축함 "츠타"에 승선하였다.[3] 1945년(쇼와 20년) 종전을 맞아 기류로 돌아왔다.[3] 소년 시절부터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는 고고학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잡화(후에는 낫토) 행상을 시작했고, 틈틈이[6] 아카기 산기슭 각지에서 유적을 조사하거나 토기, 석기를 채취했다.[3]

1949년(쇼와 24년), 이와주쿠에서 발견한 석기가 구석기 시대 유물인지 확인받기 위해 도쿄로 갔다가 평생의 스승이 되는 세리자와 쵸스케를 만났다.[3] 이후 아이자와는 세리자와로부터 고고학 관련 조언을 얻기 위해 기류에서 도쿄까지 약 120km 거리를 자전거로 당일치기 왕복하기도 했다.[3]

1955년(쇼와 30년) 결혼하였고,[3] 1961년(쇼와 36년) 군마현에서 표창을 받았다.[3] 1967년(쇼와 42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하였다.[3] 1972년(쇼와 47년) 우쓰노미야 대학에서 강사를 맡았으나,[3] 1973년(쇼와 48년) 아내가 사망하였다.[3] 1977년(쇼와 52년) 아이자와 지에코(相沢千恵子일본어, 훗날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 관장)와 재혼하였다.[3]

1989년(헤이세이 원년) 사망하였고,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3] 가사카케 촌으로부터 명예촌민 제1호 칭호를 받았다.[3] 묘소는 기류 시 야쿠오지에 있다.

1991년(헤이세이 3년)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이 개관되었고(명예 관장은 세리자와 쵸스케가 맡았다),[3] 재야 고고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창설되었다.[3] 1992년(헤이세이 4년)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 후원회가 설립되었다.[3]

2. 1. 출생과 성장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26년(다이쇼 15년) 도쿄 하네다(羽田)에서 태어났다.[3] 1934년(쇼와 9년) 가마쿠라로 이사하면서 고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3] 1935년(쇼와 10년)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와 함께 군마현 기류로 이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승 봉공으로 보내져 고독한 환경에 놓였다. 청년학교가 최종 학력이 되었다.[3]

1944년(쇼와 19년) 해병단에 입단하여 구축함 "츠타"에 승선하였다.[3] 1945년(쇼와 20년) 종전을 맞아 기류로 돌아왔다.[3] 소년 시절부터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는 고고학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잡화(후에는 낫토) 행상을 시작했고, 틈틈이[6] 아카기 산기슭 각지에서 유적을 조사하거나 토기, 석기를 채취했다.[3]

1949년(쇼와 24년), 이와주쿠에서 발견한 석기가 구석기 시대 유물인지 확인받기 위해 도쿄로 갔다가 평생의 스승이 되는 세리자와 쵸스케를 만났다.[3] 이후 아이자와는 세리자와로부터 고고학 관련 조언을 얻기 위해 기류에서 도쿄까지 약 120km 거리를 자전거로 당일치기 왕복하기도 했다.[3]

2. 2. 고고학 연구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소년 시절부터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 고고학 연구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소규모 간행물(나중에는 낫토)의 행상을 시작했고, 행상을 하는 틈틈이[6] 아카기 산기슭의 각지에서 유적을 조사하거나 토기 · 석기를 채취하였다.[3] 1949년, 이와주쿠에서 발견한 석기가 구석기인지 감정받기 위해 도쿄로 갔고, 평생의 스승이 되는 세리자와 초스케(당시 메이지 대학 대학원생, 후의 도호쿠 대학 교수)를 만난다. 그 후, 아이자와는 세리자와로부터 고고학상의 조언을 얻기 위해, 종종, 기류에서 도쿄까지의 약 120km를 자전거로 당일치기 왕복하고 있었다.

2. 3. 이와주쿠 유적 발견과 초기 어려움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26년 도쿄 하네다에서 태어났다.[3] 1934년 가마쿠라로 이사하여 고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나,[3] 1935년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군마현 기류로 이주하였다.[3] 얼마 지나지 않아 소승 봉공으로 보내져 고독한 환경에서 청년학교를 졸업한 것이 최종 학력이 되었다.[3]

1945년 종전 후 기류로 돌아온 아이자와는 고고학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잡화 행상을 하며[3] 아카기산록 각지에서 유적을 조사하고 토기와 석기를 채취했다.[6][3] 1949년 이와주쿠에서 발견한 석기가 구석기인지 감정받기 위해 도쿄로 가 세리자와 쵸스케를 만났다.[3] 이후 아이자와는 세리자와로부터 고고학적 조언을 얻기 위해 기류에서 도쿄까지 약 120km를 자전거로 당일치기 왕복하기도 했다.[3]

2. 4. 학계와 사회의 외면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45년 종전 후에도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6][3] 그는 고고학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간행물, 낫토 등을 판매하는 행상을 하며 틈틈이 아카기 산기슭의 유적을 조사하고 토기와 석기를 채취했다.[6] 1949년에는 이와주쿠에서 발견한 석기의 감정을 위해 도쿄로 가 세리자와 초스케를 만났고, 이후 그에게 고고학적 조언을 얻기 위해 120km 거리를 자전거로 왕복하기도 했다.[6]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자와는 학계와 사회로부터 외면받았다. 청년학교가 최종 학력이었던 그는 제도권 학계에 진입하기 어려웠다. 1972년 우쓰노미야 대학에서 강사직을 맡기도 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그의 공헌은 사후에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9년 사망 후 훈5등 서보장이 추서되었고, 가사카케 촌에서 명예촌민 칭호를 받았다.[6] 1991년에는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이 개관하고, 재야 고고학 연구자를 위한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제정되었다.[6]

2. 5. 인정과 수상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61년 군마현에서 표창을 받았고,[3] 1967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했다.[3] 1989년 사망 후에는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으며,[3] 가사카케 촌으로부터 명예촌민 제1호 칭호를 받았다.[3] 1991년에는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이 개관되었고, 재야 고고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창설되었다.[3]

2. 6. 만년과 죽음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1955년 결혼하였고, 1961년 군마현에서 표창을 받았다.[3] 1967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하였다.[3] 1972년 우쓰노미야 대학에서 강사를 맡았으나,[3] 1973년 아내가 사망하였다.[3] 1977년 아이자와 지에코(相沢千恵子, 훗날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 관장)와 재혼하였다.[3]

1989년 사망하였고,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3] 가사카케 촌으로부터 명예촌민 제1호 칭호를 받았다.[3] 묘소는 기류 시 야쿠오지에 있다.

1991년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이 개관되었고(명예 관장은 세리자와 쵸스케가 맡았다),[3] 재야 고고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창설되었다.[3] 1992년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 후원회가 설립되었다.[3]

3. 업적

1949년 이전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이전의 구석기 시대 존재가 부정되었다. 특히 간토 롬 층은 화산재 퇴적층으로, 인간 거주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나오라 노부오 등의 구석기 발견 보고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5][2]

1946년,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이와주쿠의 절개된 간토 롬 층의 노두 단면에서 석기(잔석기)와 닮은 돌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구석기로 단정하기에는 이르렀고, 확실한 구석기를 채취하기 위해 이와주쿠에서의 발굴을 독자적으로 계속했다.

1949년 여름, 아이자와는 이와주쿠의 간토 로옴층 중에서 분명히 인공품으로 인정되는 창선형석기(흑요석으로 만든 첨두기)를 발견했다. 아이자와는 이와주쿠에서 채취한 석기와 돌 조각을 들고 고고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붉은 흙에서도 석기가 출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지만, 아이자와의 설명을 제대로 들어주는 학자는 없었다. 그는 기류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로 오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초가을, 메이지 대학 학부생 세리자와 쵸스케는 아이자와로부터 이 석기를 받아 보게 되었고, 동 대학 조교수 스기하라 소스케에게 연락해 흑요석제의 양면 조정 찌르개나 소형 돌칼 등의 석기를 보여 주었다.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이와주쿠 현지에서 스기하라, 세리자와, 오카모토 오사무, 아이자와 등 6명이 소발굴을 실시했다. 11일 당일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발굴을 진행하여 스기하라가 달걀 모양의 구석기(훗날 날 부분 간돌도끼)를 발굴했다. 9월 20일, 스기하라는 이 발굴 결과를 일본의 주요 신문에 발표했다.

10월 2일부터 10일에 걸쳐, 스기하라를 대장으로 하고 메이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발굴 조사대가 이와주쿠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했다. 그 결과, 구석기의 존재가 확인되고, 조몬 시대보다 더 이전에 토기나 돌촉을 수반하지 않는 석기 문화가 일본 열도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 되어,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또한 일본 열도의 인류사의 시작도 순식간에 1만 년 전이라는 갱신세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학계나 언론은 이 중대한 발견에 대해 아이자와의 존재를 거의 무시했다. 메이지 대학 편찬의 발굴 보고서에서도 아이자와의 공적은 일체 무시되고 단순한 '조사 안내 및 알선자' 취급했으며, 구석기 시대의 발견은 모두 발굴 조사를 주도한 스기하라 소스케의 공적으로서 발표했다. 게다가 학계 일부나 현지 주민으로부터 이름을 팔고 다녔다느니, 사기꾼이라느니 하는 비방과 중상이 아이자와에게 가해졌다. 당시 일본의 향토사학계는 현지의 부유층과 식자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와주쿠 유적이 존재한 일본 북간토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학력도 재산도 없었던 아이자와의 공적을 낮춰 보면서 '장돌뱅이 주제에' 등으로 멸시하고 그의 공적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자와는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꾸준한 연구 활동을 계속해 수많은 구석기 유적을 발견했다. 점차 아이자와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사라져,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발견한 고고학자로서 정당한 평가가 드디어 이루어지고, 1967년 아이자와는 제1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했다. 이와주쿠 유적이 발견되고 18년 후의 일이었다. 만년에 이르러 아이자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를 찾아 나쓰이도 유적(기류 시)의 발굴에 힘을 쏟았다.

사적·이와주쿠 유적


이와주쿠 박물관

3. 1. 이와주쿠 유적 발견

1949년 이전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이전의 구석기 시대 존재가 부정되었다. 특히 간토 롬 층은 화산재 퇴적층으로, 인간 거주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나오라 노부오 등의 구석기 발견 보고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5]

1946년,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이와주쿠의 간토 롬 층 노두 단면에서 석기와 유사한 돌 조각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발굴을 계속했다. 1949년 여름, 아이자와는 흑요석으로 만든 첨두기(찌르개)를 발견했다. 그는 이 석기를 들고 고고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붉은 흙에서도 석기가 출토될 수 있음을 설명했지만, 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같은 해 초가을, 메이지 대학 학부생 세리자와 초스케는 아이자와가 가져온 석기를 스기하라 소스케 조교수에게 보였다. 스기하라는 석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이와주쿠 현지에서 아이자와 등과 함께 소규모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 결과, 스기하라가 달걀 모양의 구석기(훗날 날 부분 간돌도끼)를 발굴했다. 9월 20일, 스기하라는 이 발굴 결과를 주요 신문에 발표했다.

10월 2일부터 10일 동안, 메이지 대학 중심의 발굴 조사대가 이와주쿠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증명했다. 이로써 일본 열도의 인류 역사는 1만 년 전 갱신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학계와 언론은 아이자와의 공적을 무시하고, 발굴 조사를 주도한 스기하라 소스케의 공적으로 발표했다. 아이자와는 학계 일부와 지역 주민으로부터 비방과 중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향토사학계는 부유층과 식자층으로 구성되어, 학력과 재산이 없던 아이자와를 멸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자와는 꾸준한 연구 활동으로 수많은 구석기 유적을 발견했다. 점차 아이자와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게 이루어졌고, 1967년 제1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을 수상했다.

3. 2. 일본 구석기 연구에 대한 공헌

1949년 이전, 일본의 인류 역사는 조몬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졌고, 구석기 시대의 존재는 부정되었다. 특히 화산재가 퇴적된 간토 롬 층은 격렬한 화산 분화 때문에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자연 환경이 아니었다고 여겨져, 나오라 노부오 등에 의한 구석기 발견 보고는 있었지만,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5][2]

1946년,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이와주쿠의 절개된 간토 롬 층의 노두 단면에서 석기(잔석기)와 닮은 돌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구석기로 단정하기에는 이르렀고, 확실한 구석기를 채취하기 위해 이와주쿠에서의 발굴을 독자적으로 계속했다.

1949년 여름, 아이자와는 이와주쿠의 관동 로옴층 중에서 분명히 인공품으로 인정되는 창선형석기(흑요석으로 만든 첨두기)를 발견했다. 아이자와는 이와주쿠에서 채취한 석기와 돌 조각을 들고 고고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붉은 흙에서도 석기가 출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지만, 아이자와의 설명을 제대로 들어주는 학자는 없었다. 그는 기류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로 오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초가을, 메이지 대학 학부생 세리자와 쵸스케는 아이자와로부터 이 석기를 받아 보게 되었고, 동 대학 조교수 스기하라 소스케에게 연락해 흑요석제의 양면 조정 찌르개나 소형 돌칼 등의 석기를 보여 주었다.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이와주쿠 현지에서 스기하라, 세리자와, 오카모토 오사무, 아이자와 등 6명이 소발굴을 실시했다. 11일 당일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발굴을 진행하여 스기하라가 달걀 모양의 구석기(훗날 날 부분 간돌도끼)를 발굴했다. 9월 20일, 스기하라는 이 발굴 결과를 일본의 주요 신문에 발표했다.

10월 2일부터 10일에 걸쳐, 스기하라를 대장으로 하고 메이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발굴 조사대가 이와주쿠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했다. 그 결과, 구석기의 존재가 확인되고, 조몬 시대보다 더 이전에 토기나 돌촉을 수반하지 않는 석기 문화가 일본 열도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 되어,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또한 일본 열도의 인류사의 시작도 순식간에 1만 년 전이라는 갱신세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학계나 언론은 이 중대한 발견에 대해 아이자와의 존재를 거의 무시했다. 메이지 대학 편찬의 발굴 보고서에서도 아이자와의 공적은 일체 무시되고 단순한 '조사 안내 및 알선자' 취급했으며, 구석기 시대의 발견은 모두 발굴 조사를 주도한 스기하라 초스케의 공적으로서 발표했다. 게다가 학계 일부나 현지 주민으로부터 이름을 팔고 다녔다느니, 사기꾼이라느니 하는 비방과 중상이 아이자와에게 가해졌다. 당시 일본의 향토사학계는 현지의 부유층과 식자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와주쿠 유적이 존재한 일본 북간토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학력도 재산도 없었던 아이자와의 공적을 낮춰 보면서 '장돌뱅이 주제에' 등으로 멸시하고 그의 공적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자와는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꾸준한 연구 활동을 계속해 수많은 구석기 유적을 발견했다. 점차 아이자와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사라져,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발견한 고고학자로서 정당한 평가가 드디어 이루어지고, 1967년 아이자와는 제1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吉川英治文化賞)을 수상했다. 이와주쿠 유적이 발견되고 18년 후의 일이었다. 만년에 이르러 아이자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를 찾아 나쓰이도 유적(기류 시)의 발굴에 힘을 쏟았다.

4. 저서


  • 1969년 《'이와주쿠'의 발견-환상의 구석기를 찾아-》(岩宿」の発見-幻の旧石器を求めて-)

5.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

1991년 9월 15일,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창설되었다. 1992년 9월 15일, 제1회 상을 후지무라 신이치에게 증정했으나 2000년 11월 12일에 반납되었다. 1993년 9월 15일에는 제2회 상을 유이 시게야에게 증정했다. 1995년 9월 15일, 제4회 상을 동북 구석기 문화 연구소에 증정했으나, 2000년 11월 12일에 후지무라 신이치와 함께 상을 반납했다. 1996년 9월 15일에는 제5회 상을 오제키 키요코에게 증정했고, 1999년 9월 10일에는 제7회 상을 마츠시마 에이지에게 증정했다.

참조

[1] 서적 面白くてよくわかる!世界史―世界史を「流れ」でつかむ大人の教科書 アスペクト 2011-01-01
[2] 문서 明石原人やニール・ゴードン・マンロー
[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三省堂 2008-12-01
[4] 서적 面白くてよくわかる!世界史―世界史を「流れ」でつかむ大人の教科書 アスペクト 2011-01-01
[5] 문서 아카시 원인(明石原人)이나 닐 고든 먼로 참조
[6]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三省堂 2008-12-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