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알토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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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리 알토넨은 핀란드 대공국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이다. 러시아 제국군에 복무하며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나, 1905년 모스크바에서 반제정 봉기에 가담하여 체포되었다. 이후 "알리 바바"라는 필명으로 언론 활동을 하며 사회주의 계열 신문 출판에 관여했고, 핀란드 사회민주당 당 간부로도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 적위군 지도자가 되었으며, 핀란드 내전에 참전했으나 백위군에 체포되어 1918년 라흐티 강제 수용소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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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 알토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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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알렉시 아알토넨 |
| 출생일 | 1884년 8월 2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러시아령 핀란드 얨새 |
| 사망일 | 1918년 5월 (33세) |
| 사망 장소 | 핀란드 라흐티 |
| 소속 | 러시아 제국 붉은 핀란드 |
| 경력 | |
| 복무 기간 | 1903년–1905년, 1917년–1918년 |
| 최종 계급 | 중위 |
| 참전 | 러일 전쟁 핀란드 내전 |
| 정치 활동 | |
| 사상 | 사회주의 |
| 활동 | 사회주의 선전 지도 |
| 조직 | 적위군 |
| 소속 정당 | 핀란드 사회민주당 |
| 기타 정보 | |
| 모교 | 유바스퀼래 고등학교 졸업 |
| 사망 원인 | 처형 |
| 묘지 | 라흐티 강제 수용소 |
2. 생애
알리 알토넨은 핀란드 대공국(러시아 제국의 종속국) 얌사에서 태어났다. 위베스퀼레의 고등학교(fi)에서 2학년부터 수학했으며, 1903년에 7학년으로 졸업했다. 이듬해부터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1905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반제정 봉기(ru)에 가담하여 체포, 강등되었다. 그 후 "알리 바바"(Ali Babafi)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투르쿠, 비보르크, 코트카에서 사회주의 계열 신문의 출판에 관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10월부터 헬싱키에서 적위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듬해 초 핀란드 내전이 발발하자 탐페레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백위군 측에 체포되어, 8월에 라흐티의 강제 수용소에서 백위군의 에스토니아인 장교 한스 칼름에 의해 총살되었다.[3]
2. 1. 초기 생애 (1884년 ~ 1905년)
알토넨은 얨섀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7년, 여자 초등학교 교사의 지원을 받아 위배스퀼래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1903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소위로 복무했으며, 이후 러시아 1905년 혁명의 사회주의 단체와 연관되었다. 혁명이 실패하자 알토넨은 모스크바에서 투옥되었고 군대에서 추방되었다.[1] 석방된 후 핀란드로 돌아와 투르쿠, 비푸리, 코트카의 노동 언론에서 일했다. 신문 기사 외에도 시와 단편 소설을 썼지만,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았다. 때때로 "Ali Baba"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1] 그는 또한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당 간부로 일했다.[2]2. 2. 러시아 혁명 가담과 언론인 활동 (1905년 ~ 1917년)
알토넨은 얨섀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7년, 여자 초등학교 교사의 지원을 받아 위배스퀼래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1903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다. 1904년~1905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소위로 복무했으며, 이후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사회주의 단체와 연관되었다. 혁명이 실패하자 알토넨은 모스크바에서 투옥되었고 군대에서 추방되었다.[1] 석방된 후 투르쿠, 비푸리, 코트카의 노동 언론에서 일했다. 신문 기사 외에도 시와 단편 소설을 썼지만,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았다. 때때로 알토넨은 "Ali Baba"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1] 그는 또한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당 간부로 일했다.[2]2. 3. 핀란드 내전 참전과 최후 (1917년 ~ 1918년)
1917년 10월, 알리 알토넨은 헬싱키에서 노동자 질서 경비대를 조직했는데, 이 경비대는 곧 적위대로 발전했다. 11월 1917년 핀란드 총파업 이후, 아돌프 타이미가 거부하면서 알토넨은 질서 경비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주로 그가 러시아에서 얻은 군사적 경험 때문이었다.[3] 1918년 1월 초, 알토넨은 적위대를 위한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으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핀란드 적위대는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1월 13일, 적위대 참모는 가능한 한 빨리 그의 공석을 채우기로 결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과도한 음주에도 불구하고, 알토넨은 볼셰비키로부터 대량의 총과 탄약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월 28일, 알토넨은 에로 하아팔라이넨으로 교체되었다. 내전은 하루 전에 시작되었다.[4]알토넨은 이후 참모로 옮겨졌다. 그는 러시아인 대령 미하일 스베치니코프와 함께 적위대를 위한 군사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월 30일에 수립되었고, 주요 공세는 열흘 후에 시작되었다.[5] 알토넨은 탐페레로 보내져, 스베치니코프, 후고 살멜라, 베르네르 레흐티매키의 지휘를 받는 해메 전선 참모로 근무했다. 3월 초, 알토넨과 스베치니코프는 또 다른 적위대 공세를 위한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해메 전선이 북쪽에서 붕괴된 후, 그는 탐페레 전투 마지막 날에 도시를 떠났다. 4월 5일과 6일 밤 사이에, 알토넨은 적군의 부대를 이끌고 적의 포위 공격을 뚫고 내시예르비 호수의 얼음을 건너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6]
탐페레 주변에서 몇 차례 충돌이 있은 후, 알토넨과 그의 부대는 동쪽으로 향하던 수만 명의 적위대 난민 대열에 합류했다. 4월 말, 그들의 길은 라흐티 근처 나스톨라 마을에서 독일군에 의해 막혔다. 알토넨은 체포되어 헨날라 수용소로 끌려갔고, 1918년 5월에 에스토니아인 대령 한스 칼름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는 1천 명이 넘는 적위대의 집단 무덤에 묻혔다.[3]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ian Civil Wars, 1916–1926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
뉴스
Aleksi (Ali) Aaltonen
http://www.museo24.f[...]
2017-04-13
[3]
서적
Neljä väkivallan kuukautta Jämsässä 1918
Gummerus
[4]
뉴스
Mannerheim saa tehtävän
https://web.archive.[...]
2017-04-13
[5]
뉴스
Kronologia: Tammikuu
http://itsenaisyys10[...]
2017-04-13
[6]
뉴스
Punaisten pakoretki 6.4. Näsijärven kautta
http://www.pispala.f[...]
201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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