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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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투안 라 발레는 170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하며 카리브해 지역에서 아시엔다를 운영했다. 그는 마르티니크에서 커피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며 아프리카 노예를 대규모로 부렸으며, 노예를 투자 대상으로 여겼다. 라 발레는 유럽 금융가와 어음 거래를 통해 농장 규모를 확장했으나, 7년 전쟁과 해적의 공격으로 사업이 파산했다. 라 발레는 노예 고문 및 살해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며, 결국 예수회에서 사임했다. 그의 파산 사건은 프랑스 예수회의 위기를 초래하여, 결국 프랑스에서 예수회 활동이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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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 발레 | |
---|---|
기본 정보 | |
출생 | 1708년, 툴루즈 |
사망 | 1767년 12월 13일, 파리 |
국적 | 프랑스 왕국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소속 | |
수도회 | 예수회 |
직업 | 선교사 사업가 |
경력 | |
주요 활동 | 마르티니크 선교 활동 예수회 마르티니크 관구장 사업 실패 후 예수회 파산 원인 제공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루이 15세 예수회 |
2. 생애
앙투안 라 발레는 1707년 프랑스 남부 루에르그 지방에서 태어났다. 1725년 툴루즈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견습생 과정을 거쳤다. 그는 파리의 루이 르 그랑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예수회는 16세기부터 멕시코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일대에 아시엔다와 그에 따른 인력, 노예, 가축 등을 확보하고 있었다.[6] 1565년에서 1568년 사이에는 상인 알론소 곤잘레스(Alonso González)를 통해 16,800마리의 양을 구매했고, 산타루시아(Santa Lucia) 지역의 목초지 350km2와 경작지 3642ha도 구매하여 아시엔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587년 이래 멕시코의 테포트조트란(Tepotzotlán), 푸에블라(Puebla), 발라돌리드(Valladolid), 멕시코시티(Mexico City) 등에 대형 콜레주들을 설립하였고, 콜레주가 세워질 때마다 가톨릭 신자들의 기증이나 예수회 선교단, 콜레주의 자금을 통해 학교 주위에 아시엔다들이 형성되었다.[6]
라 발레는 1740년 33세의 나이에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제도 예수회 선교단의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마르티니크의 생피에르 지역의 작은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4년 만에 교구 선교단 책임자가 되었다. 1755년에는 서인도제도의 모든 예수회 교회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3. 아시엔다 경영
멕시코뿐 아니라 페루에도 예수회의 아시엔다들이 있었는데, 유럽에서의 기부, 증여를 통해 모은 자금으로 더 많은 토지를 구매하였다. 페루의 예수-마리아 지역(the hacienda of Jesús Maria)은 작지만(3.24km2) 기름진 토양과 풍부한 물 때문에 경작에 적합하였고, 후아우라(Huaura) 아시엔다는 33.24km2로 넓은 편이었다.[7]
1741년, 예수회 신부 라 발레는 해외 선교에 배정되어 1742년 카리브 해의 섬 마르티니크(Martinique)에 도착했다.[1] 당시 마르티니크의 경제는 수출용 커피, 사탕수수 및 기타 작물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8만 명의 인구 중 6만 5천 명이 아프리카 노예였다.[2] 1753년, 라 발레는 예수회 마르티니크 선교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라 발레는 투자를 통해 선교단의 수입을 늘리고자 임대 부동산을 구입하고, 1748년에는 인근 섬 도미니카에 18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있는 농장을 구입했다. 곧 그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예수회 소유 농장에서 200명 이상, 도미니카에서 194명의 노예를 부리며 예수회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이자 노예 소유자 중 하나가 되었다. 라 발레는 노예를 가톨릭으로 개종할 잠재적 대상보다는 투자 대상으로 여겼다.[3]
예수회는 해외 선교에서 노예 문제와 오랫동안 연관되어 있었다. 16세기에 예수회 총장은 선교지에서 노예를 금지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 17세기에 여러 예수회 신학자들이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 글을 썼고, 반대자들은 침묵하거나 처벌을 받았다. 라 발레 시대에 이르러 예수회는 전 세계적으로 2만 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일부 예수회는 반대했지만, 다른 예수회는 노예에 대한 고문과 신체적 처벌을 승인했다. 카리브해에서 예수회는 "공포에 기반한 착취적인 노동 시스템"에 참여했다. 아프리카 노예는 농장주보다 훨씬 더 많았고, 농장주들은 노예 반란을 두려워하여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했다.
3. 1. 예수회의 아시엔다 확장
예수회는 16세기부터 멕시코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일대에 아시엔다와 그에 따른 인력, 노예, 가축 등을 확보하고 있었다.[6] 1565년에서 1568년 사이에는 상인 알론소 곤잘레스(Alonso González)를 통해 16,800마리의 양을 구매했고, 산타루시아(Santa Lucia) 지역의 목초지 350km2(1억 평)와 경작지 3642ha(약 1100만 평)도 구매하여 아시엔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587년 이래 멕시코의 테포트조트란(Tepotzotlán), 푸에블라(Puebla), 발라돌리드(Valladolid), 멕시코시티(Mexico City) 등에 대형 콜레주들을 설립하였고, 콜레주가 세워질 때마다 가톨릭 신자들의 기증이나 예수회 선교단, 콜레주의 자금을 통해 학교 주위에 아시엔다들이 형성되었다.[6]
멕시코뿐 아니라 페루에도 예수회의 아시엔다들이 있었는데, 유럽에서의 기부, 증여를 통해 모은 자금으로 더 많은 토지를 구매하였다. 페루의 예수-마리아 지역(the hacienda of Jesús Maria)은 작지만(3.24km2, 약 103만 평) 기름진 토양과 풍부한 물 때문에 경작에 적합하였고, 후아우라(Huaura) 아시엔다는 33.24km2(약 1,000만 평)로 넓은 편이었다.[7]
1741년, 예수회 신부 라 발레는 해외 선교에 배정되어 1742년 카리브 해의 섬 마르티니크(Martinique)에 도착했다.[1] 당시 마르티니크의 경제는 수출용 커피, 사탕수수 및 기타 작물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8만 명의 인구 중 6만 5천 명이 아프리카 노예였다.[2] 1753년, 라 발레는 예수회 마르티니크 선교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라 발레는 투자를 통해 선교단의 수입을 늘리고자 임대 부동산을 구입하고, 1748년에는 인근 섬 도미니카에 18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있는 농장을 구입했다. 곧 그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예수회 소유 농장에서 200명 이상, 도미니카에서 194명의 노예를 부리며 예수회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이자 노예 소유자 중 하나가 되었다. 라 발레는 노예를 가톨릭으로 개종할 잠재적 대상보다는 투자 대상으로 여겼다.[3]
예수회는 해외 선교에서 노예 문제와 오랫동안 연관되어 있었다. 16세기에 예수회 총장은 선교지에서 노예를 금지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 17세기에 여러 예수회 신학자들이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 글을 썼고, 반대자들은 침묵하거나 처벌을 받았다. 라 발레 시대에 이르러 예수회는 전 세계적으로 2만 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일부 예수회는 반대했지만, 다른 예수회는 노예에 대한 고문과 신체적 처벌을 승인했다. 카리브해에서 예수회는 "공포에 기반한 착취적인 노동 시스템"에 참여했다. 아프리카 노예는 농장주보다 훨씬 더 많았고, 농장주들은 노예 반란을 두려워하여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했다.
3. 2. 노예 노동력 착취
앙투안 라 발레는 마르티니크와 도미니카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노예를 부렸다.[3] 1742년, 라 발레는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다.[1] 당시 마르티니크의 인구 8만 명 중 6만 5천 명이 아프리카 노예였다.[2] 예수회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이자 노예 소유자 중 하나였으며, 라 발레는 노예를 투자 대상으로 여겼다.[3]
라 발레 시대에 예수회는 전 세계적으로 2만 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했으며, 대부분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3] 당시 예수회는 아시엔다에서 흑인 노예, 강제 노역을 하는 원주민(미타요스), 예속된 직능전문가(야나코나스)등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다.[9] 농장주들은 노예 반란을 두려워하여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했다.[3]
4. 라발레트 파산 사건
앙투안 라 발레는 중남미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사탕수수 농장인 아시엔다를 운영하며 큰 부를 쌓았다.[11]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로, 정제하여 유럽에 팔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11] 라발레트는 이 돈으로 농장 규모를 확장했고,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지자 유럽 금융가들과 어음 거래를 시작했다.[11] 그는 돈을 빌려 땅을 사고, 설탕 원당을 보내 대금을 갚는 방식으로 거래했다.[11]
1751년, 라 발레는 농장주들로부터 예금을 받고, 파리 또는 마르세유에서 인출할 수 있는 상업 어음을 발행했다.[11] 그는 이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현금 작물이나 노예를 받기도 했다.[11] 또한 돈을 빌려주고 프랑스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환어음을 지급했다.[11] 1754년, 그는 상업 활동 해명을 위해 프랑스로 소환되었다.[11] 1755년 마르티니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농장은 황폐해져 있었고, 그는 환어음을 기반으로 더 많은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11]
예수회의 사업은 처음에는 순조로웠으나, 카리브해 해적선에 의해 설탕 수송선이 털리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1] 1756년, 프랑스에 있던 그의 가장 중요한 대리인이 라 발레가 채권자에게 발행한 환어음을 현금화할 수 없게 되면서 파산했다.[11] 설탕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아 돈을 갚기로 한 날, 라발레트에게 돈을 빌려준 유럽 금융가들이 파산해 버린 것이다.[11] 돈을 받지 못한 금융가들은 프랑스 법원에 예수회 본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11] 프랑스에 있는 예수회는 라 발레의 채권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려 시도했고 그의 사업 관행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11] 한편,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영국과의 전쟁으로 마르티니크는 가난해졌고, 프랑스로 제품을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11]
프랑스 의회에서는 실태조사를 벌여 예수회의 불법 사례들을 하나하나 밝혀 내고 예수회 회원의 저서 24권을 압수해 이 조직 자체를 불법으로 공포한다.[11]
4. 1. 7년 전쟁과 해적의 공격
앙투안 라 발레는 중남미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사탕수수 농장인 아시엔다를 운영하며 큰 부를 쌓았다.[11]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로, 정제하여 유럽에 팔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11] 라발레트는 이 돈으로 농장 규모를 확장했고,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지자 유럽 금융가들과 어음 거래를 시작했다.[11] 그는 돈을 빌려 땅을 사고, 설탕 원당을 보내 대금을 갚는 방식으로 거래했다.[11]1751년, 라 발레는 농장주들로부터 예금을 받고, 파리 또는 마르세유에서 인출할 수 있는 상업 어음을 발행했다.[11] 그는 이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현금 작물이나 노예를 받기도 했다.[11] 또한 돈을 빌려주고 프랑스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환어음을 지급했다.[11] 1754년, 그는 상업 활동 해명을 위해 프랑스로 소환되었다.[11] 1755년 마르티니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농장은 황폐해져 있었고, 그는 환어음을 기반으로 더 많은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11]
예수회의 사업은 처음에는 순조로웠으나, 카리브해 해적선에 의해 설탕 수송선이 털리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1] 1756년, 프랑스에 있던 그의 가장 중요한 대리인이 라 발레가 채권자에게 발행한 환어음을 현금화할 수 없게 되면서 파산했다.[11] 설탕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아 돈을 갚기로 한 날, 라발레트에게 돈을 빌려준 유럽 금융가들이 파산해 버린 것이다.[11] 돈을 받지 못한 금융가들은 프랑스 법원에 예수회 본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11] 프랑스에 있는 예수회는 라 발레의 채권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려 시도했고 그의 사업 관행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11] 한편,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영국과의 전쟁으로 마르티니크는 가난해졌고, 프랑스로 제품을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11]
4. 2. 프랑스 예수회 추방
예수회 선교단의 책임자였던 앙투안 라 발레는 중남미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아시엔다를 차려 큰 부를 얻었다.[11] 당시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로 정제하여 유럽에 팔면 큰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라발레트는 벌어들인 돈으로 농장 규모를 계속해서 넓혀나갔으며, 아시엔다를 대형화 하기 위해 유럽 금융가들과 어음거래를 시작했다.[11]초기에는 사업이 순조로웠으나, 카리브해 해적선에 의해 설탕 수송선이 털리면서 사업에 문제가 발생했다.[11] 돈을 갚기로 한 날 설탕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자 유럽 내 금융가들이 파산했고, 이들은 프랑스 법원에 예수회 본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11]
1761년, 예수회 방문자 장-프랑수아 드 라 마르셰는 라 발레를 조사하기 위해 마르티니크로 가서 그가 노예 4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증거를 발견했다.[11] 라 발레는 노예들 중에 마법사와 독을 쓰는 자들이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로렌초 리치는 라 발레가 살인죄를 범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처벌을 명령하지는 않았다.[11] 라 발레는 "세속적인 상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1762년에 예수회에서 사임했다.[11]
"라발레트 사건"은 프랑스 예수회에 위기를 초래했다. 1762년까지 라발레트가 발생시킨 부채는 총 620만 리브르에 달했다.[11] 예수회는 채권자들을 만족시키려 노력했지만, 1762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예수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고 프랑스 내 학교 일부를 압수했다.[4] 1764년 고등법원은 프랑스와 식민지에서 예수회 질서를 해산하고, 프랑스 예수회원의 활동을 중단시켰다.[4] 앙투안 라 발레는 1767년에 사망했으며,[4] 예수회는 1814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5]
5. 라발레트 사건의 여파와 역사적 의미
예수회 선교단의 책임자였던 라발레트는 중남미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사탕수수 아시엔다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11] 당시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로, 유럽에 판매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라발레트는 이 돈으로 주변 땅을 매입하여 농장 규모를 확장했다. 아시엔다 대형화를 위해 유럽 금융가들과 어음 거래를 시작, 돈을 빌려 땅을 사고 설탕 원당으로 대금을 갚는 방식이었다.
초기 예수회 사업은 순조로웠으나, 카리브해 해적선이 설탕 수송선을 약탈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수송선 미도착으로 유럽 내 라발레트에게 돈을 빌려준 금융가들이 파산했고, 이들은 프랑스 법원에 예수회 본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프랑스 의회는 실태 조사를 통해 예수회의 불법 사례를 밝혀내고, 예수회 회원 저서 24권을 압수하여 조직 자체를 불법으로 공포했다.[11]
"라발레트 사건"은 프랑스 예수회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1762년까지 라발레트의 부채는 총 620만 리브르에 달했고, 이는 전 세계 예수회 부채의 3분의 2였다. 예수회는 채권자들을 만족시키려 했으나, 1762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예수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고 프랑스 내 124개 학교 중 38개를 압수했다. 1764년 고등법원은 프랑스와 식민지에서 예수회 질서를 해산하고, 3,330명의 프랑스 예수회원의 활동을 중단시켰다.[4] 라발레트는 1767년에 사망했다. 예수회는 1814년에야 프랑스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5]
라발레트는 마르티니크에서 노예 4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예수회 방문자 장-프랑수아 드 라 마르셰/Jean-François de La Marche프랑스어는 라 발레가 노예들을 마법사와 독을 쓰는 자들이라고 해명했음에도, 그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총장 로렌초 리치는 라 발레가 살인죄를 범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처벌은 하지 않았다. 라 발레는 1762년에 예수회에서 사임했다.
5. 1. 라발레트의 만행
라발레트의 아시엔다는 수백명의 노예를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당시에는 적은 수의 노예만으로도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8] 하지만 농장 운영에는 문맹의 아프리카 노예들보다 페이오우니즈(peones)라는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주로 활용되었다. 아시엔다의 노동력은 흑인 노예, 강제 노역을 하는 원주민 미타요스(mitayos), 선대로부터 예속된 직능전문가 야나코나스(yanaconas) 등으로 구성되었다.[9]이들 노예와 원주민들은 예수회 밑에서 짐승처럼 취급받았다. 《신들의 열매, 초콜릿》에서는 예수회가 원주민들의 생활과 노동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심지어 매일 밤 종을 울려 부부 관계를 강요했다는 기록을 전한다.[10]
1761년, 예수회 방문자 장-프랑수아 드 라 마르셰/Jean-François de La Marche프랑스어는 라 발레를 조사하기 위해 마르티니크로 갔다. 그는 라 발레가 노예 4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증거를 발견했다. 라 발레는 노예들 중 마법사와 독을 쓰는 자들이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드 라 마르셰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라 발레의 행동이 플랜테이션 계급의 주권에 익숙해진 결과라고 보았다. 드 라 마르셰의 보고는 총장 로렌초 리치에게 전달되었고, 리치는 라 발레가 살인죄를 범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처벌은 하지 않았다. 라 발레는 유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세속적인 상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762년에 예수회에서 사임했다. 라 발레의 살인 사건은 1996년 드 라 마르셰의 보고서가 발견될 때까지 예수회에 의해 무시되었다.
참조
[1]
논문
The Fate of the French Jesuits Creditors under the Ancien Regime
https://www.jstor.or[...]
1976-04
[2]
웹사이트
History of Martinique
https://azmartinique[...]
2023-09-01
[3]
논문
Antoine Lavalette, Slave Murderer: A Forgotten Scandal of the French West Indies
https://www.research[...]
2021
[4]
논문
From Expulsion to Restoration: The Jesuits in Crisis, 1759-1814
https://www.jstor.or[...]
2014–2015
[5]
웹사이트
The Restored Jesuits (1814–1912)
http://www.newadvent[...]
newadvent.org
2017-03-21
[6]
서적
Herman W. Konrad, A Jesuit Hacienda in Colonial Mexico: Santa Lucia,1576~1767
[7]
서적
Nicolas P. Cushner, Lords of the Land: Sugar, Wine and Jesuit Estates of Coastal Peru 1600~1767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0
[8]
서적
Nicolas P. Cushner《Lords of the Land: Sugar, Wine and Jesuit Estates of Coastal Peru》
[9]
서적
위 책
[10]
서적
소피 D.코 외《신들의 열매, 초콜릿》
[11]
간행물
정동준《18세기 중반 프랑스 예수회의 추방 : 라발레트의 파산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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