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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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설울프는 9세기 웨섹스의 왕으로, 아버지 에그버트의 뒤를 이어 839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켄트의 부왕으로 경험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부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애설울프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고 토지 정책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바이킹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외교적으로는 머시아 및 프랑크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855년 로마 순례를 다녀온 후 프랑크 왕국의 유디트와 결혼했으나, 아들 애설발드의 반란을 겪었다. 858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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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울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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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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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웨식스 왕 |
재위 기간 | 839년–858년 |
이전 통치자 | 에그버트 |
다음 통치자 | 에젤발드 |
왕가 | 웨식스 |
사망일 | 858년 1월 13일 |
매장지 | 스테이닝 이후 윈체스터 |
배우자 | 오스부르 주디스 오브 플랑드르 |
자녀 | 켄트의 에젤스탄 에젤스위스, 머시아의 왕비 에젤발드, 웨식스 왕 에젤베르트, 웨식스 왕 에젤레드 1세, 웨식스 왕 알프레드 대왕 |
부친 | 에그버트, 웨식스 왕 |
이름 | |
로마자 표기 | Æthelwulf |
발음 (IPA) | /ˈæðelwuɫf/ |
2. 역사적 배경
9세기 초,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의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머시아와 웨섹스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머시아는 820년대까지 잉글랜드 남부를 지배했지만, 웨섹스는 독립을 유지했다. 789년 웨섹스의 왕 베오르트릭은 머시아 왕 오파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 애설울프의 아버지 웨섹스의 에그버트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에그버트는 784년에 잠시 켄트의 왕이었던 켄트의 앨문드의 아들이었다.
802년 에그버트가 왕위에 올랐지만, 200년 동안 세 가문이 웨섹스 왕위를 놓고 다투었기 때문에 그가 지속적인 왕조를 세울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에그버트의 통치 초기 20년 동안은 콘월 원정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역사학자 리처드 에이벨스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으로, 에그버트가 베오르트릭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경쟁 왕실을 억압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시아 왕과 켄트 신민 간의 관계는 소원했다. 켄트의 엘도르만은 켄트 수도원의 지배권을 놓고 캔터베리 대주교 울프레드 (805–832)와 다퉜던 코엔울프 왕의 궁정에 참석하지 않았다. 코엔울프의 주요 관심사는 켄트의 부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후계자 머시아의 시올울프 1세 (821–823)와 베오른울프 (823–826)는 울프레드 대주교와 관계를 회복했고, 베오른울프는 켄트의 부왕 켄트의 발드레드를 임명했다.
2. 1. 앵글로색슨 칠왕국 시대의 개막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후, 중세 초기의 잉글랜드에는 원래 섬에 살던 켈트족과 유틀란트 반도 등에서 바다를 건너 온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이 각각 소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작은 왕국까지 포함하면 100개가 넘지만, 전통적으로 칠왕국 시대라고 불린다. 이들 왕국은 서로 다투며 경쟁했다. 웨섹스는 색슨족이 건설한 왕국 중 하나로, 머시아에 종속되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일찍 독립하여 9세기 중반 이후 급속히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자주 침략하던 시대이기도 했다.2. 2. 칠왕국 시대의 종말과 웨섹스의 부상
9세기 초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이 거의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머시아와 웨섹스가 가장 중요한 남부 왕국이었다. 830년 이후 웨섹스의 에그버트는 머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애설울프가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이 정책은 이어졌다. 머시아 왕 위글라프가 839년에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베르트울프는 런던에서 머시아 주화를 다시 발행했다. 두 왕국은 840년대 중반에 공동 주화를 발행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주었다. 버크셔는 844년까지 머시아에 속했지만, 849년에는 웨섹스의 일부가 되었다. 베르트울프는 852년에 사망했고, 웨섹스와의 협력은 그의 후계자인 버그레드 치하에서 계속되었다. 853년 애설울프는 버그레드가 웨일스를 공격하여 전통적인 머시아의 패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세기 말부터 바이킹의 습격이 있었지만, 794년과 835년 사이에는 공격 기록이 없었다. 835년에는 켄트의 쉬피 섬이 황폐화되었다. 836년 에그버트는 서머싯의 카햄프턴에서 바이킹에게 패배했지만, 838년에는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콘월 사람들과 바이킹 연합군을 물리치고 콘월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3. 초기 생애
애설울프는 웨섹스의 에그버트 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825년, 아버지 에그버트가 엘런던 전투에서 머시아의 베오른울프 왕을 상대로 승리하여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머시아의 지배를 종식시킨 후, 애설울프는 역사에 등장한다. 에그버트는 셔본 주교인 얼스탄과 햄프셔의 앨더먼인 울프하르드를 켄트로 보내 부왕인 발드레드를 몰아내게 하였고, 애설울프를 켄트 왕국의 부왕으로 임명했다.[2] 애설울프는 켄트, 서리, 서섹스, 에섹스를 통치하며 웨섹스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애설울프는 켄트의 부왕으로서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켄트의 앨더먼을 통해 통치하고 그들의 이익을 증진했다.[2]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828년 캔터베리에서 에그버트는 로체스터 주교구에 특권을 부여했고, 사이먼 케인스에 따르면 에그버트와 애설울프는 울프레드 대주교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머시아 출신의 울프레드 대주교와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니콜라스 브룩스는 울프레드의 머시아 출신과 인맥이 약점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4. 웨섹스의 왕
애설울프는 839년 웨섹스 왕위에 오르면서, 켄트의 부왕으로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 그는 아버지 에그버트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즉위하면서 아들 애설스탄에게 켄트, 에식스, 서리, 서식스 지역을 주었지만, 애설스탄에게 아버지 만큼의 권력을 주지는 않았다. 애설스탄은 아버지의 헌장에 증언했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헌장을 발행할 권한은 없었다.
애설울프는 웨섹스와 켄트를 별개의 영역으로 통치했고, 각 왕국에서의 회의에는 해당 국가의 귀족들만 참석했다. 역사가 자넷 넬슨은 "애설울프는 아버지-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와 별개의 엘리트들의 동의를 통해 유지되는 여러 왕국으로 이루어진 카롤링거 스타일의 가족 회사를 운영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켄트 지역 귀족 출신 앨더맨을 임명하고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유지했지만, 교회에 대한 지원은 줄였다. 843년, 애설울프는 켄트의 주요 앨더맨인 에얼헤어의 형제 애설모드에게 리틀 차트에 10개 은신처를 하사했고, 애설모드는 853년 형의 사망으로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844년에는 켄트의 호턴에 있는 토지를 앨더맨 에어드에게 하사했으며, 지역 토지 소유주에게 토지의 일부를 양도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830년 이후 에그버트는 머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애설울프 역시 이 정책을 이어갔다. 런던은 전통적으로 머시아 도시였지만, 830년대에는 웨섹스의 지배를 받았고, 애설울프 즉위 직후 머시아의 지배로 돌아갔다. 위글라프는 839년에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인 베르트울프는 런던에서 머시아 주화를 부활시켰다. 두 왕국은 840년대 중반에 공동 주화를 발행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머시아 주화 부활에 대한 웨섹스의 도움을 시사하고 두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은화는 중세 및 후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사용된 거의 유일한 동전이었다. 애설울프의 주화는 캔터베리의 주요 조폐소와 로체스터의 부조폐소에서 나왔는데, 두 곳 모두 에그버트가 켄트 지역을 장악한 후 자신의 주화를 만들 때 사용했다.
4. 1. 중앙 집권화와 토지 정책
애설울프는 종속국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하고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그는 켄트와 웨섹스를 별개의 영역으로 통치했지만, 각 왕국의 회의에는 해당 국가의 귀족들만 참석하도록 하여 왕의 권위를 강화했다.[2]애설울프는 칙허 보유지 제도를 도입하여 토지 소유 제도를 개혁했다.[3] 이는 왕이 칙허를 통해 토지를 하사하고, 그 토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제도였다. 칙허 보유지는 매매와 양도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왕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역사적으로 칙허 보유지화 정책은 잉글랜드가 봉건화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4. 2. 바이킹과의 전쟁
애설울프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의 침략은 계속되었지만, 그는 효과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웨섹스를 보호했다. 843년 카햄프턴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4] 851년 애클레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바이킹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5] 이 승전 소식은 샤를 2세의 서프랑크 왕국에까지 전해져 애설울프의 명성을 높였다.
애설울프는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대신, 앨더맨(ealdorman)이 이끄는 징집병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합의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선호했다. 이는 왕의 명령이 강조되었던 그의 아들 알프레드 대왕의 하향식 군대 지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840년대 초부터 바이킹의 습격은 점차 증가했으며, 850년에는 잉글랜드에서 겨울을 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4. 3. 외교 관계
애설울프는 머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공동의 적인 바이킹과 웨일스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853년, 애설울프는 자신의 딸 애설스위스를 머시아의 왕 버그레드와 결혼시켜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9]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애설울프는 샤를 2세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로마 순례길에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여 샤를 2세의 환대를 받았다. 특히 856년에는 샤를 2세의 딸 유디트와 결혼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다.[10] 이는 단순한 정략결혼을 넘어, 서프랑크 왕국의 우호국으로서 웨섹스의 지위를 브리튼 섬 내에서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4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펠릭스라는 프랑크인이 "애설울프가 발행한 문서에 내가 책임을 진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양국 간 인적 교류도 활발했으며 애설울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0]
5. 로마 순례와 결혼
855년, 애설울프는 막내아들 알프레드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교황 레오 4세는 알프레드를 영적인 아들로 삼고, "집정관의 띠"를 수여하여 부자(父子) 간에 영적인 연결을 만들었다.[6]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liber vitae''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애설레드도 함께 로마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6] 애설울프는 로마에서 1년간 머물면서 로마 교구에 금관, 금 술잔 등 많은 선물을 바쳤고, 윌리엄 오브 말름스베리에 따르면 화재로 파괴된 영국 순례자들을 위한 색슨인 구역 복구에도 기여했다.[7]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애설울프는 서 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 궁정에 머물렀고, 856년 10월 Verberie에서 그의 어린 딸 유디트와 결혼했다. 이는 이례적인 일로, 카롤링거 왕조 공주들은 대개 수녀원에 보내졌고 외국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는 유디트에게 성유를 부어 왕비로 즉위시켰는데, 이는 카롤링거 왕조 왕비가 성유를 받은 첫 사례였다.[8]
유디트와의 결혼은 애설발드의 반란을 야기했는데, 성유를 받은 카롤링거 왕비의 아들이 왕위 계승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5. 1. 반란과 유언
855년 애설울프가 막내아들 알프레드와 함께 로마 순례를 떠난 사이, 그의 부재를 틈타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서의 전기에는 "애설울프 왕이 로마에서 돌아오기 전에, 아들(차남) 애설발드와 측근들이 터무니없는 일을 꾸몄다.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국외로 몰아내려 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1] 이 쿠데타는 내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왕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애설울프는 동쪽을, 애설발드는 서쪽을 다스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12]이후 애설울프는 "자신의 사후, 자식들이 불필요하게 다투지 않도록"[13] 상속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그는 개인 재산과 정치적 영토를 아들, 딸, 친척에게 분배했다.[14] 또한 빈민 구제를 위해 상속 토지의 10분의 1을 사용하고, 매년 300 만쿠스를 로마로 보내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오로 성당 조명, 그리고 교황을 위해 사용하도록 지시했다.[14]
6. 유산과 평가
애설울프는 웨섹스의 왕으로서 중앙 집권화, 토지 정책 개혁, 바이킹 방어, 외교 관계 강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아들 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기반을 마련한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는다.[10] 그러나 애설울프는 때때로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그의 로마 순례와 유디트와의 결혼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경솔한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한다.[10]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애설울프를 과소평가된 군주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는 9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강화는 웨섹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애설울프의 로마 순례를 "위험한 시기에 왕국을 버리도록 이끈 비실용적인 신앙심" 때문이라고 평가하거나, 그의 주디스와의 결혼을 "시대착오적인 늙은이의 어리석음"이라고 묘사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60년대 스턴턴은 그를 "전쟁과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종교적이고 야심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64년 핀버그는 그를 "전쟁에서의 용맹함과 왕자다운 관대함이 영웅 시대를 연상시키는 왕"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1979년 엔라이트는 "그는 무엇보다도 비실용적인 종교적 열광자였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가들은 애설울프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케인스는 그를 "9세기에 그의 백성의 정치적 운명을 확보하고 프랑크 왕국과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이어지는 소통의 채널을 열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스토리는 "애설울프는 9세기 초 오파와 코엔울프의 전성기 이후 출처에서 유례없는 프랑키아와 로마에서 명성을 얻고 키웠다"고 평가했다.
넬슨은 애설울프를 "앵글로색슨인 중 과소평가된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하며, 그가 알프레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애설울프가 왕국의 자원 관리, 왕족 내부 갈등 억제, 주변 왕국과의 관계 관리 등 오랜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해답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답을 찾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애설울프가 옛 웨섹스를 통합하고 데번과 콘월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으며, 켄트를 통치하고 그 정치 공동체의 흐름에 맞춰 일했다고 덧붙였다. 넬슨은 애설울프가 샤를마뉴처럼 명성을 높여 돌아왔으며, 대부분의 동시대 통치자들보다 스칸디나비아의 공격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강조했다.
애설울프는 치세 동안 카롤링거 왕조 방식의 정책을 추진하고, 강온 양면의 수단을 사용하여 웨섹스의 세력 범위를 넓혔다. 그는 종속국을 직접 통치로 전환하고(중앙 집권화), 토지 정책을 전환했으며, 851년의 대 바이킹 해전에서 승리했다. 또한 순례와 성별을 통해 왕의 위신을 높였다. 858년에 사망했지만, 아들들의 상속 분쟁에 휘말려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재닛 넬슨은 "공식 문서 등의 사료에서, 애설울프는 웨섹스나 켄트의 귀족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에 부심(腐心)했으며, 특히 세인(전사)들을 후하게 대우했다"고 말한다. 1780년, 윌트셔의 레버스톡에서 발견된 "Ethelwulf Rex"(국왕 애설울프)라고 각인된 금반지는 강인한 전사 중 한 명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신하들의 지지가 9세기의 왕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참조
[1]
웹사이트
Æthelwulf of Wessex, Wikipedia英語版
http://en.wikipedia.[...]
2007-09-04
[2]
간행물
Æthelwulf (d. 858)’,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DNB
[3]
서적
Yorke, pp.245-251
[4]
서적
青山、p154
[5]
간행물
Anglo Saxon Chronicle, s.a. 851
[6]
간행물
Annals of St Bertin, s.a. 855
ODNB, Æthelwulf
[7]
서적
The lives of the ninth-century popes (Liber pontificalis): the ancient biographies of ten popes from AD 817–891 (1995)
ODNB, Æthelwulf
[8]
간행물
ODNB, Æthelwulf
[9]
서적
Yorke, p95
[10]
간행물
ODNB, Æthelwulf
[11]
서적
Asser, Part 1
[12]
간행물
ODNB, Æthelwulf
[13]
서적
Asser, Life of Alfred, chap. 12
[14]
간행물
ODNB, Æthelwulf
[15]
서적
Asser, Life of Alfred, chapter. 17
[16]
간행물
ODNB, Æthelwu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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