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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장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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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장형왕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잉글랜드를 통치한 웨섹스 왕국의 왕으로, 알프레드 대왕의 아들이자 앵글로색슨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데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잉글랜드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에드워드는 머시아를 병합하고 데인족의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으며, 잉글랜드의 법과 행정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딸들은 유럽의 왕족과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실의 위상을 높였다. 에드워드는 학문과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앵글로색슨 시대의 건축과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장형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잉글랜드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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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장형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은화에 묘사된 초상
은화에 묘사된 초상
칭호앵글로색슨인의 왕
통치 기간899년 10월 26일 ~ 924년 7월 17일
대관식900년 6월 8일
킹스턴어폰템스
선임자알프레드 대왕
후임자애설스탠 (또는 엘프위어드 (논쟁 중))
왕가웨식스 왕가
배우자에크윈
엘플레드
에드기푸
자녀애설스탠
요크의 여왕 (추정: 이디스 오브 폴스워스)
엘프위어드
에드윈 (장형왕 에드워드의 아들)
에드기푸
에아드힐드
에드기트
에드먼드 1세
에드레드
에드버러
아버지알프레드 대왕
어머니에알스위스
출생 시기870년대 중반 추정
사망일924년 7월 17일
사망 장소파든 (체셔), 체셔, 머시아
매장 장소윈체스터 뉴민스터 수도원, 이후 하이드 수도원으로 이장
영어 이름
영어 이름Edward the Elder
웨스트 색슨 왕국
웨스트 색슨 왕Westseaxna cyning

2. 배경

머시아는 8세기에 잉글랜드 남부에서 지배적인 왕국이었으며, 825년 엘런던 전투에서 웨섹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그 후 두 왕국은 동맹을 맺었고, 이는 바이킹에 대한 잉글랜드의 저항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1] 865년, 덴마크 바이킹 대 이교도 군대가 동앵글리아 왕국에 상륙하여 침략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동앵글리아인들은 바이킹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고, 바이킹은 이듬해 노섬브리아를 침략했다. 그들은 867년에 괴뢰 왕을 임명한 후 머시아로 이동하여 867-868년 겨울을 보냈다.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은 웨섹스의 애설레드 왕과 그의 동생이자 훗날 알프레드 대왕과 합세하여 바이킹을 공격했지만, 바이킹은 교전을 거부했다. 결국 머시아인들은 그들과 평화를 샀다. 이듬해 데인족은 동앵글리아를 정복했고, 874년에는 버그레드 왕을 추방했으며, 그들의 지원으로 켕울프가 머시아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877년에 바이킹은 머시아를 분할하여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켕울프에게 서부 지역을 남겨두었다. 878년 초에 그들은 웨섹스를 침략했고, 많은 웨섹스인들이 그들에게 복종했다. 당시 왕이었던 알프레드는 서머셋의 애설니 섬에 있는 외딴 기지로 물러났지만, 에딩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바이킹이 웨섹스와 서부 머시아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바이킹은 여전히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 및 동부 머시아를 점령하고 있었다.[2]

3. 유년 시절

알프레드 대왕의 유서. 대왕은 아들 에드워드에게 유산의 대부분을 상속하도록 기록하고 있다.


에드워드의 부모는 868년에 결혼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의 아버지는 에설레드 무셀(:en:Æthelred Mucel)이라는 이름의 가이니 지역의 에얼도먼(영주)이었으며, 그녀의 어머니 에어드부르흐는 머시아 왕족이었다. 알프레드 왕과 알프스위스 사이에는 요절한 자식을 제외하고 5명의 자녀가 있었다. 장녀는 에설플리드로, 서머시아 태수 에설레드와 결혼했다. 에설플리드는 남편이 죽은 후 머시아를 통치했다. 에드워드는 그 다음으로 태어났으며, 차녀는 샤프츠베리 수도원의 수녀가 된 에설기프이다. 셋째 딸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와 결혼한 엘프스리스이다. 막내 아들 에설워드는 라틴어를 포함한 학문 교육을 받았다. 학술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는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에설워드는 아들을 낳았다. 이 외에도 몇 명의 자녀가 더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부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가진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웨섹스 왕족에서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었지만, 역사학자 바바라 요크는 외할머니 에어드부르흐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에어드부르흐는 머시아 왕족이었고, 이는 머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목표로 하는 웨섹스 왕국의 정책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왕의 출생 연도를 870년대 중반으로 추정한다. 그의 누나 에설플리드는 부모의 결혼 다음 해에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여동생 엘프스리스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요크는 에드워드가 에설플리드보다 엘프스리스와 나이가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893년에는 에드워드가 군 부대를 이끌었고, 894년경에는 장남 애설스턴이 태어났으므로, 이 무렵에는 결혼 적령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서 주교의 저서 《알프레드 왕의 생애》에 따르면, 에드워드와 엘프스리스는 왕궁에서 남녀 전담 교사의 지도를 받았으며, 시편 및 고대 영어 문학과 같은 세속적인 문학을 읽었다. 또한, 우아함이나 겸손함과 같은 궁정의 미덕에 관한 교육도 받았으며, 아버지 왕에게 순종하고 방문객에게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왕자와 공주가 똑같이 양육된 사례로는 에드워드 왕자와 엘프스리스 공주가 유일하다.

4. 왕태자 시대

에드워드는 왕의 아들로서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춘 왕실의 왕자, 즉 애설링이었다. 그는 재위 중인 왕의 장남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왕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촌들이 있었기에 그의 즉위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애설헬름과 애설월드는 알프레드의 형이자 선왕인 애설레드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이 유아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1]

애설헬름은 880년대 중반 알프레드의 유언에서만 기록되어 있으며, 아마도 그 후 10년 안에 사망했을 것이지만, 애설월드는 그가 등장하는 유일한 헌장에서 에드워드보다 위에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아마도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애설월드는 또한 그의 어머니 울프스리스가 여왕으로서 헌장에 증인으로 서명했기 때문에 유리했을 수 있는 반면, 에드워드의 어머니 엘스위스는 왕의 아내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은 적이 없었다.[2] 그러나 알프레드는 자신의 아들에게 상당한 이점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유언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의 아들에게 소수의 영지를 남겼고, 대부분의 재산을 에드워드에게 물려주었으며, 여기에는 부크랜드(토지 소유자가 양도할 수 있는 헌장으로 부여된 토지)를 포함한 모든 켄트의 토지를 포함했다. 알프레드는 또한 매르시아의 앨돌먼(ealdorman)인 에설울프와 그의 사위인 애설레드와 같이 자신의 왕위 계승 계획을 지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진급시켰다. 에드워드는 그의 아버지의 여러 헌장에 증인으로 서명했고, 종종 그와 함께 왕실 순방에 동행했다. 898년의 켄트 헌장에서 에드워드는 ''삭소눔의 렉스(rex Saxonum)''으로 증인으로 서명했는데, 이는 알프레드가 그의 아들을 켄트의 부왕으로 만들어 웨섹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강화하려는 그의 할아버지 에그버트가 채택한 전략을 따랐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에드워드가 성장하자 알프레드는 그에게 군사 지휘와 왕실 행정 경험을 줄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893년부터 896년까지 바이킹의 새로운 공격을 격퇴했고, 리처드 아벨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영광은 알프레드 자신이 아닌 애설레드와 에드워드에게 돌아갔다. 893년에 에드워드는 판햄 전투에서 바이킹을 물리쳤지만, 그의 군대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어 그들을 해산해야 했기 때문에 승리를 이어갈 수 없었다. 런던에서 에설레드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구원받았다.

893년경, 에드워드는 아마도 그에게 아들 애설스탄과 요크의 바이킹 왕인 시트릭 케크와 결혼한 딸을 낳은 에그윈과 결혼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에그윈을 ''일루스트리스 페미나''(귀부인)로 묘사하고 에드워드가 애설스탄을 왕위 계승자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10세기 귀족 출신인 캔터베리의 던스탄 성인과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또한 924년에 애설스탄의 즉위에 그의 어머니가 낮은 신분의 첩이라고 주장하는 귀족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에그윈이 에드워드의 정부였다는 주장은 사이먼 케인스와 리처드 아벨스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요크와 애설스탄의 전기 작가인 사라 풋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 주장은 924년의 논쟁적인 왕위 계승의 맥락에서 보아야 하며, 890년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에그윈은 아마도 899년경에 사망했을 것이며, 알프레드의 사망 무렵 에드워드는 앨돌먼(ealdorman) 에설헬름의 딸인 앨플래드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아마도 윌트셔 출신이었을 것이다.

자넷 넬슨은 890년대에 알프레드와 에드워드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890년대에 궁정의 후원으로 제작된 동시대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드워드의 군사적 성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10세기 말 애설워드의 연대기에서만 알려져 있다. 알프레드는 생애 말년에 그의 손자인 애설스탄에게 왕위 계승자로 지정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넬슨은 이것이 자신의 아들의 즉위를 지지하기 위해 에드워드가 제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알프레드가 자신의 아들과 손자 사이에 왕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의 일부로 의도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알프레드의 아내 엘스위스는 남편의 생애 동안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무시되었지만,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에 대항하여 아들을 지지했기 때문일 수 있다.

5. 애설월드의 반란

899년 10월 26일 알프레드 대왕이 사망하고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에드워드의 사촌인 에설월드는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했다. 에설월드는 아버지 애설레드 왕이 매장된 윔본과 도르셋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를 점령했다. 에드워드는 군대를 이끌고 인근 철기 시대 요새인 배드버리 링스로 진군했다. 에설월드는 윔본에서 살거나 죽겠다고 선언했지만, 밤에 그곳을 떠나 노섬브리아로 가서 데인족에게 왕으로 인정받았다.[1] 에드워드는 900년 6월 8일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2]

901년 에설월드는 함대를 이끌고 에식스로 왔고, 이듬해 동 앵글리아 데인족에게 잉글랜드 머시아와 북부 웨섹스를 침략하도록 설득했고, 그의 군대는 약탈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에드워드는 동 앵글리아를 약탈하여 보복했지만, 그가 퇴각했을 때 켄트 사람들이 퇴각 명령을 따르지 않고 데인족 군대에 의해 가로막혔다. 양측은 902년 12월 13일 홀름 전투에서 만났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데인족은 "학살의 장소를 지켰다" 즉,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에설월드와 동 앵글리아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에오릭 왕을 포함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켄트 측의 손실에는 에드워드의 세 번째 부인인 에드기푸의 아버지인 켄트의 에올도르만 시게헬름이 포함되었다. 에설월드의 죽음으로 에드워드의 왕위에 대한 위협은 끝났다.

6. 앵글로색슨인의 왕

886년 런던에서 앨프레드는 "데인족에게 복종하지 않은 모든 잉글랜드인"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았고, 그 후 ''Anglorum Saxonum rex''(앵글로색슨족의 왕)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이 칭호는 앨프레드의 후기 헌장과 에드워드의 헌장 중 두 개를 제외한 모든 헌장에 사용되었다.[1] 케인스는 이것을 웨스트색슨족과 머시아족 모두를 포괄하는 "전적으로 새롭고 독특한 정치체의 발명"으로 여겼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플레그문드를 비롯한 웨스트색슨 궁정의 머시아족의 지원을 받아 에드워드에게 상속되었다.

903년 에드워드는 머시아의 토지에 관한 여러 헌장을 발행했다. 그 중 세 개는 머시아 지도자들과 그들의 딸 앨프윈에 의해 증언되었으며, 모두 애설레드와 애설플레드가 "전술한 왕 아래에서 머시아족을 통치하고 권력을 행사했다"는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1] 다른 헌장은 에드워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머시아 지도자들에 의해 발행되었지만, 자체 주화를 발행하지는 않았다.[1] 마틴 라이언은 에드워드의 지위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며, 애설레드와 애설플레드가 잉글랜드 머시아에서 "상당하지만 궁극적으로 종속적인 왕실 권력 분담"을 했다고 말한다.[1]

폴린 스태포드 등 다른 역사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태포드는 애설플레드를 "마지막 머시아 여왕"이라고 묘사하며,[1] 찰스 인슬리는 머시아가 918년 애설플레드가 사망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1] 마이클 데이비슨은 머시아 통치자들이 "신의 은총으로 머시아 군주국을 소유하고 통치하며 방어한다"는 901년의 헌장과 903년 헌장을 대조한다. 데이비슨은 "'앵글로색슨족 왕국'의 이념은 머시아를 흡수하는 데 덜 성공적이었을 수도 있고, 오히려 모호한 정치적 쿠데타였을 수도 있다"고 논평했다.[1]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90년대부터 웨스트색슨 궁정에서 편집되었으며, 9세기 말과 10세기 초의 기록은 역사가들에 의해 웨스트색슨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데이비슨은 "앨프레드와 에드워드는 능숙한 "스핀 닥터"를 소유했다"고 언급한다.[1] ''연대기''의 일부 버전에는 잃어버린 ''머시아 기록''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머시아의 관점과 바이킹에 대한 애설플레드의 캠페인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1]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웨스트색슨 왕가와의 결혼을 통한 연결은 대륙의 통치자들에게 명성이 높았다. 890년대 중반 앨프레드는 그의 딸 애프스리드를 플랑드르의 발두인 2세와 결혼시켰고, 919년 에드워드는 그의 딸 에드기푸를 서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단순왕과 결혼시켰다. 925년 에드워드 사망 후 또 다른 딸 에드기트는 미래의 독일 왕이자 (에드기트 사망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오토와 결혼했다.[1]

7. 남부 데인로 정복

909년, 에드워드는 웨스트 색슨족과 머시아족 연합군을 보내 노섬브리아 데인족을 공격하고, 링컨셔의 바드니 수도원에서 노섬브리아 왕실 성인 오스왈드의 유해를 탈취했다. 오스왈드는 에텔레드와 에텔플레드가 글로스터에 세운 새로운 머시아 미네스터로 이장되었고, 데인족은 에드워드의 조건에 따라 평화를 받아들여야 했다.[1] 이듬해 노섬브리아 데인족은 머시아를 습격하여 보복했지만, 귀가 길에 테텐홀 전투에서 머시아-웨스트 색슨 연합군과 마주쳐 처참한 패배를 겪었다. 그 후, 노섬브리아 데인족은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 동안 험버 강 남쪽으로 모험하지 않았고, 에드워드와 그의 머시아 동맹군은 이스트 앵글리아와 바이킹 동머시아의 5개 도시: 더비,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를 정복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1]

911년, 머시아의 영주 에텔레드가 사망하자 에드워드는 런던과 옥스퍼드 주변의 머시아 영토를 장악했다. 에텔레드의 뒤를 이어 그의 미망인 에텔플레드(에드워드의 누이)가 머시아 부인이 되었는데, 에텔레드가 말년에 무능해진 것으로 보여 수년 동안 통치자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1]

에드워드와 에텔플레드는 바이킹의 공격에 대비하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911년 11월, 에드워드는 하트퍼드의 리 강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베드퍼드케임브리지의 데인족 공격을 방어했다. 912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에식스주의 말든으로 진군하여 위탐에 요새를 건설하고 하트퍼드에 두 번째 요새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여 런던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데인족 지배하에 있던 에식스의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장려했다. 913년에 에드워드의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에텔플레드는 머시아에서 요새 건설을 계속했다.[1] 914년, 바이킹 군대가 브르타뉴에서 출항하여 세번 강 어귀를 약탈했다. 그 후, 남동 웨일스(현재 헤리퍼드셔의 아르첸필드)의 에르깅을 공격하여 에르깅의 키페일리오그 주교를 납치했고, 에드워드는 은 40파운드의 거액으로 그를 구출했다. 바이킹은 헤리퍼드와 글로스터 군대에 의해 패배했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인질과 맹세를 했다. 에드워드는 바이킹이 약속을 어길 경우를 대비하여 어귀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두 번이나 공격을 격퇴해야 했다. 가을에 바이킹은 아일랜드로 이동했다. 이 사건은 머시아가 지배했던 브리체이니오그와 달리 남동 웨일스가 웨스트 색슨의 세력권에 속했음을 시사한다.[1] 914년 말, 에드워드는 버킹엄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고, 베드퍼드의 데인족 군대 지도자인 튜르케틸 백작이 그에게 복종했다. 이듬해 에드워드는 베드퍼드를 점령하고, 그레이트 우즈 강 남쪽에 바이킹이 북쪽에 건설한 요새에 맞서 또 다른 요새를 건설했다. 916년, 에드워드는 에식스로 돌아가 말든에 요새를 건설하여 위탐의 방어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튜르케틸 백작과 그의 추종자들이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도와 미들랜드의 바이킹 군대 수를 줄였다.[1]

917년은 전쟁의 결정적인 해였다. 4월에 에드워드는 노샘프턴셔의 토체스터에 노샘프턴의 데인족에 대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고, 위기감메르라는 이름의 확인되지 않은 장소에 또 다른 시설을 건설했다. 데인족은 토체스터, 베드퍼드, 위기감메르를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실패했고, 에텔플레드는 더비를 점령했는데, 이는 바이킹 군대의 분열과 조정 부족으로 인해 지원받은 잉글랜드의 방어 조치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데인족은 베드퍼드셔의 템프스퍼드에 자체 요새를 건설했지만, 여름 말에 잉글랜드군은 이를 공격하여 동 앵글리아의 마지막 데인 왕을 죽였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콜체스터를 점령했지만, 이를 지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데인족은 말든을 포위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보복했지만, 수비대는 구원받을 때까지 버텼고 퇴각하는 군대는 심한 패배를 겪었다. 에드워드는 토체스터로 돌아가 석벽으로 요새를 강화했고, 인근 노샘프턴의 데인족이 그에게 복종했다. 케임브리지와 이스트 앵글리아의 군대도 복종했고, 그해 말까지 레스터, 스탬포드, 노팅엄, 링컨 등 5개 도시 중 4개의 데인 군대만이 저항을 계속했다.[1]

918년 초, 에텔플레드는 싸움 없이 레스터의 복종을 확보했고, 노섬브리아의 요크 데인족은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노섬브리아를 침공한 노르웨이인(노르드) 바이킹에 대한 보호를 위해 그녀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6월 12일에 사망하여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에드워드에게 같은 제안이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노르드 바이킹은 919년에 요크를 점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웨스트 색슨 주요 버전에 따르면, 에텔플레드의 사망 후 머시아인들은 에드워드에게 복종했지만, 머시아 버전(《머시아 기록》)은 918년 12월에 그녀의 딸 엘프윈이 "머시아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웨섹스로 이송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머시아는 에드워드에 의해 진압된 지속적인 반독립을 위한 시도를 했을 수 있으며, 그 후 에드워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탬포드는 에텔플레드의 사망 전에 에드워드에게 항복했고, 노팅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918년 판에 따르면, "머시아에 정착한 모든 사람들, 데인족과 잉글랜드인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이는 그가 험버 강 남쪽의 모든 잉글랜드를 통치했음을 의미하지만, 링컨이 예외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920년대 초의 바이킹 요크의 동전이 아마도 링컨에서 주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

8. 주조

에드워드 장형왕의 은화


후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주요 통화는 은화였으며, 일부 동전에는 왕의 양식화된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에드워드의 동전 앞면에는 "EADVVEARD REX"가, 뒷면에는 주조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주조 장소는 그의 통치 시기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아들 애설스탄 시대에는 표시되어 에드워드 시대의 많은 주조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배스, 캔터베리, 체스터, 치체스터, 더비, 엑서터, 헤리퍼드, 런던, 옥스퍼드, 슈루즈베리, 사우샘프턴, 스태퍼드, 월링퍼드(Wallingford), 웨어햄(Wareham), 윈체스터와 다른 도시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앨설레드 또는 앨설플래드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은 없었지만, 910년경부터 잉글리시 머시아의 조폐국에서는 뒷면에 독특한 장식 디자인이 있는 동전을 생산했다. 이것은 920년 이전에 중단되었으며, 아마도 앨설플래드가 자신의 통화를 형제의 통화와 구별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플레그문드의 이름으로 소량의 동전이 발행되기도 했다.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주조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첫 10년 동안 남부에서는 25명 미만에서 마지막 10년 동안 67명으로 증가했고, 잉글리시 머시아에서는 약 5명에서 23명으로 증가했으며, 정복된 데인로에서는 27명이 증가했다.[1]

9. 교회 정책

908년, 캔터베리 대주교 플레그문드는 국왕과 백성에게서 모금한 자금을 교황에게 전달하기 위해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직접 로마로 향한 것은 100년 만의 일이었다. 이 방문은 웨섹스 교구 재편 계획의 승인을 교황에게 받기 위한 방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른 무렵 웨섹스에는 윈체스터 교구와 셔본 교구 두 개의 주교구가 있었다.[2]

908년, 데네울프 주교가 사망한 후 프리테스탄이 윈체스터 주교좌를 계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윈체스터 주교좌는 둘로 분할되었다. 윌트셔 지역 및 버크셔 지역은 람즈버리 교구가 관할하고, 햄프셔 및 서리 지역은 윈체스터 교구가 계승했다. 이 교구 분할에 관한 칙허장은 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칙허장 발부 시기가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같은 해 아서 주교가 사망했고 셔본 교구도 분할되었다. 909년부터 918년 사이에 데번, 콘월 지역을 담당하는 크레디턴 교구, 서머싯 지역을 담당하는 웰스 교구, 도싯을 담당하는 셔본 교구로 나누어졌다. 이 분할의 목적은 캔터베리 대주교구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웨섹스 주교의 세속적 역할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즉, 주교는 지방의 행정관이 아닌 왕실의 대리인으로서 왕실 재판과 방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왕 재위 초, 그의 어머니 에알스위스는 성 마리아를 기리는 성 마리아 수도원 (윈체스터)을 수녀들을 위해 세웠다. 에드워드 왕의 딸 윈체스터의 에드버그는 그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에드버는 이후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12세기에는 오스버트 오브 클레어에 의해 성인전에 대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901년, 에드워드는 남성들을 위한 주요 종교 시설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아마도 부왕 알프레드의 유언이었을 것이다. 윈체스터 대성당 옆에는 이전부터 올드 민스터가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새로 뉴 민스터를 세웠다. 뉴 민스터는 올드 민스터보다 규모가 컸으며, 왕실 묘소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수도원에는 901년에 퐁티외에서 잉글랜드로 이송된 것으로 여겨지는 성 주도크의 유물이 안치되었고, 같은 해 사망한 그림발드가 매장되었으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902년에는 에알스위스가 사망하여 뉴민스터에 안장되었고, 부왕 알프레드의 유해도 올드민스터에서 뉴민스터로 옮겨졌다. 920년대에는 에드워드 왕의 형제 에델워드 (알프레드 대왕의 아들)와 그의 아들 에르프워드, 그리고 에드워드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924년 에드워드 왕의 아들 애설스탄이 왕위를 계승하자, 뉴민스터는 왕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에드워드 왕 사후, 애설스탄의 계승에 대해 윈체스터가 반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뉴민스터에 매장된 다른 왕은 959년에 매장된 에드위 왕뿐이다.

에드워드 왕이 올드민스터를 확장하는 대신, 그 규모를 능가하는 새로운 수도원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윈체스터 주교 데네울프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왕은 올드민스터에 뉴민스터를 위한 부지와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한 베딩턴 지역의 70하이드 토지 제공을 명했다. 이로 인해 에드워드 왕은 뉴민스터에서는 후원자로 기억되었지만, 올드민스터에서는 '탐욕스러운 왕'(rex avidus)으로 기억되었다. 에드워드 왕은 올드민스터가 '웨섹스 왕가'의 묘소가 아닌 '앵글로색슨인의 왕'으로서의 묘소로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교회를 지었을 수 있다.

현대 역사가 앨런 새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에드워드 왕의 뉴민스터 수도원에 대한 기증 방식은 그의 일반적인 교회 정책과 거의 일치했다.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거의 기증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발부된 칙허장의 수에서 보듯이 그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드워드 왕이 펼친 왕정은 세속적, 교회적 자원을 모두 자신을 위해 활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적인 웨섹스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20세기 역사가 패트릭 워몰드는 알프레드 대왕이나 에드워드 왕 모두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그다지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며, 에드워드 왕이 부왕의 유해를 옆의 왕실 묘소로 옮긴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서 더 진실한 기도가 드려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10. 학문과 문화

9세기, 앵글로색슨의 학문 수준은 특히 웨섹스에서 크게 떨어졌다. 머시아의 학자 플레그문드 등은 알프레드 대왕의 학문 부흥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알프레드와 에드워드의 궁정에서 머시아인들이 두각을 나타냈고, 머시아 방언과 학문은 웨스트색슨에게 존경받았다.[1] 알프레드의 학문 부흥 정책이 그의 아들 시대에도 계속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알프레드 시대에 라틴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책들은 계속 복사되었지만, 독창적인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930년대에 앵글로색슨 사각형 카롤링거 소문자체 필체가 완성되었는데, 그 초기 단계는 에드워드 시대에 해당한다. 캔터베리, 윈체스터, 우스터의 대성당들이 주요 학문 및 필사 중심지였으며, 수도원은 애설스탄 시대까지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2] 에드워드 시대의 필사본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존하는 대규모 앵글로색슨 시대 자수는 에드워드 왕 시대에 제작되었다. 이 자수들은 19세기에 더럼 대성당의 성 커스버트 관에서 꺼낸 영대, 소매, 허리띠 등이다. 934년 애설스탄이 이것들을 성지에 기증했지만, 자수에 새겨진 글을 보면 에드워드의 두 번째 부인 앨플레드가 윈체스터 주교 프리테스탄에게 선물로 의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애설스탄과 윈체스터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물들은 의도한 곳에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11. 법과 통치

에드워드 시대의 행정 및 법률 체계는 기록에 크게 의존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에드워드는 북 랜드(Bookland)에 대한 법률을 공포한 몇 안 되는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에는 북 랜드와 폴크 랜드(Folkland) 분쟁이 자주 발생했는데, 에드워드는 이러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할 것을 촉구했으며, 그의 법률은 관할권이 국왕과 그의 관리에게 속한다고 규정했다.[1]

법전 "에드워드 1세"의 조항 3은 위증 혐의가 확실한 사람은 선서를 통해 결백을 입증할 수 없고, 오직 신판을 통해서만 결백을 입증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잉글랜드에서 신판의 연속적인 역사의 시작이며, 이네 (688~726년)의 법률에도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알프레드 대왕의 법률과 같은 후대의 법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2]

901년 사우샘프턴에서 열린 회의에는 에드워드의 형제와 아들들, 그의 가신(thegn)들과 거의 모든 주교들이 참석했지만, 에덜먼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국왕은 윈체스터 주교로부터 뉴 민스터(New Minster), 윈체스터의 설립을 위한 토지를 얻었다. 910년부터 국왕이 924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에 대한 헌장은 남아 있지 않아 역사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실망시켰다. 헌장은 대개 국왕이 토지를 하사할 때 발급되었는데, 에드워드가 바이킹과의 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재산을 보유하는 정책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헌장은 교회가 소유하게 되어 그들의 기록 보관소에 보존된 재산과 관련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또 다른 가능성은 에드워드가 왕실 남성 구성원에게 돌아갈 조건으로만 재산을 하사하고, 그러한 헌장은 교회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12. 후세

920년,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브리튼의 통치자들이 에드워드에게 항복했다. 스코틀랜드 왕, 라그날 우아 이마이르, 노섬브리아의 에드울프 2세, 노섬브리아에 사는 모든 잉글랜드인, 데인인, 노르드인,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왕과 모든 스트래스클라이드 웨일스인들이 에드워드를 아버지이자 군주로 선택했다.[1]

이 구절은 20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게 단순한 보고로 여겨졌지만,[1] 1980년대 이후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아졌다. 특히, 이 항복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1] 알프레드 P. 스미스는 에드워드가 정복한 바이킹에게 했던 것과 같은 조건을 스코틀랜드인과 노섬브리아인에게 강요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지적하며, 연대기가 왕들 간의 조약을 웨섹스에 대한 항복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

데이비슨은 "아버지와 군주로 선택되었다"는 문구가 다른 왕과의 관계가 아닌, 정복된 군대 집단과 자치구에 적용되었다고 지적하며, 에드워드가 브리튼의 다른 왕들을 강제로 종속시키거나 조건을 지시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1]

에드워드는 919년에 델월과 맨체스터에, 921년에 클루이드 강 어귀의 클레데마타에서 애설플레드의 자치구 건설 정책을 이어갔다.

919년과 그의 생애 마지막 해 사이의 머시아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는 체스터에서 머시아인과 웨일스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머시아와 동부 데인로는 10세기에 전통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샤이어로 조직되었으며, 션 밀러와 데이비드 그리피스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가 919년부터 직접 통제를 가한 것이 머시아의 감성을 무시한 변화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 변화에 대한 분노, 멀리 떨어진 웨섹스에 의한 지배, 에드워드의 행정관들의 재정적 요구는 체스터에서의 반란을 촉발했을 수 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한 직후인 924년 7월 17일 판돈의 왕실 영지에서 사망했으며, 윈체스터의 뉴민스터에 묻혔다. 1109년, 뉴민스터는 도시 성벽 밖으로 옮겨져 하이드 수도원이 되었고, 다음 해에 에드워드와 그의 부모의 유해가 새 교회로 옮겨졌다.

13. 평판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학문적 소양에서는 아버지보다 훨씬 못했지만, 통치력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웠다"고 한다.[1] 다른 중세 연대기 작가들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으며, 그는 일반적으로 학문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군사적 성공은 뛰어난 인물로 여겨졌다.[1] 존 오브 우스터는 그를 "가장 무적의 왕 에드워드 장형왕"이라고 묘사했다.[1] 그러나 그는 전쟁 지도자로서도 일련의 성공적인 왕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며,[1] 그의 업적은 앨프레드의 에딩턴 전투와 애설스탠의 브루난부르 전투와 같은 유명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가려졌다.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에드워드에 대한 칭찬에 대해 "내 판단으로는 승리의 주요 상은 그의 아버지에게 돌아간다"고 말하며 제한을 두었고,[1] 에드워드는 또한 그의 존경받는 누이인 애설플래드의 칭찬에 의해 가려지기도 했다.[2]

에드워드를 소홀히 한 주된 이유는 그의 통치에 대한 1차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앨프레드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20세기 후반까지 역사가들에게 거의 무시되었지만, 현재는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케인스는 그를 "앨프레드와 애설스탠 사이의 호전적인 부분 그 이상"이라고 묘사했으며, 닉 하이엄은 "에드워드 장형왕은 아마도 잉글랜드 왕들 중 가장 소홀히 여겨지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25년 동안 확장하는 왕국을 통치했고, 단일의 남부 중심 앵글로색슨 왕국을 건설하는 데 다른 어떤 개인만큼이나 기여했지만, 사후에는 그의 업적이 거의 잊혀졌다."라고 평가했다. 1999년에는 그의 통치를 주제로 한 회의가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열렸고, 이 자리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2001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회의 이전에는 에드워드의 통치에 대한 단행본이 출판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수많은 전기 및 기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엄은 에드워드의 유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에드워드의 지도력 아래에서, 대안적인 권력 중심지의 규모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머시아의 독립 궁정은 해체되었고, 데인족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종하거나 추방되었으며, 웨일스 군주들은 국경에서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웨스트 색슨 주교구도 분할되었다. 후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종종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로 묘사되며, 그 주(샤이어), 주 관리(주지사), 지역 법원 및 왕실 조세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중앙 집권성의 상당 부분은 에드워드의 활동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는 중세 잉글랜드의 건축가로 간주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에드워드의 칭호 '장형왕'은 10세기 말 울프스탄의 ''성 애설월드의 생애''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그를 에드워드 순교왕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14. 혼인과 자녀

에드워드는 평생 세 번 결혼하여 14명 정도의 자녀를 두었다.

배우자자녀
Ecgwynn영어 (893년경 결혼)
Ælfflæd (wife of Edward the Elder)영어 (900년경 결혼)
Eadgifu of Kent영어 (919년경 결혼)


15. 계보

에드워드의 부모인 알프레드와 알스위드는 868년에 결혼했다. 알스위드의 아버지는 가이니의 엘도먼인 애설레드 무켈이었고, 어머니 이드부르흐는 머시아 왕가의 일원이었다. 알프레드와 알스위드는 어린 시절을 넘긴 다섯 자녀를 두었다. 장녀는 애설플레드로, 머시아의 영주 애설레드와 결혼하여 그가 죽은 후 머시아의 여주인으로 통치했다. 에드워드는 그 다음이었고, 차녀인 애설기푸는 샤프츠베리 수도원장이 되었다. 셋째 딸인 앨프스리스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와 결혼했고, 막내 아들 애설워드는 라틴어를 배우는 것을 포함한 학문적 교육을 받았다.[1] 어린 나이에 죽은 자녀도 몇 명 있었을 것이다. "부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가진 에드워드의 이름은 웨스트 색슨 왕가에서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었으며, 바바라 요크는 그가 어머니 이드부르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수 있으며, 이는 머시아와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려는 웨스트 색슨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2]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가 87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맏누나인 애설플레드는 부모의 결혼 후 약 1년 후에 태어났을 것이며, 에드워드는 막내 여동생인 앨프스리스와 함께 자랐다. 요크는 따라서 그가 애설플레드보다 앨프스리스에 더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Pseudo-coin; disc brooch; imitation https://www.britishm[...] British Museum
[2] 웹사이트 Pseudo-coin; disc brooch; imitation https://www.britishm[...] British Museum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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