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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시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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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디 시콧은 1905년부터 1920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투수였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14시즌 동안 208승을 기록했으며, 너클볼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1917년에는 28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다승,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에 연루되어 영구 제명되었다. 이후 주유소 운영, 야생동물 관리인, 포드 자동차 회사 근무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196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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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시콧
기본 정보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의 시콧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1919년)
본명에디 시콧
출생일1884년 6월 19일
출생지미시간주스프링웰스
사망일1969년 5월 5일 (84세)
사망지미시간주리보니아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양타
데뷔 리그MLB
데뷔1905년 9월 3일
마지막 리그MLB
마지막 경기1920년 9월 26일
선수 경력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5년)
보스턴 레드삭스 (1908년–191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2년–1920년)
통계 (MLB)
승패 기록208승 149패
평균 자책점2.38
탈삼진1,374
수상 경력
월드 시리즈 우승1917년
AL 승리 리더1917년, 1919년
AL 평균 자책점 리더1917년
기타1917년 4월 14일 노히트 노런 달성

2. 선수 경력

에디 시콧은 선발 투수이자 너클볼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였다. 그는 MLB에서 14시즌 동안 활동하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뛰었고, 통산 208승 149패를 기록했다.[7][9]

190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데뷔했으나 잠시 마이너 리그를 거쳤고, 1908년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1912년 시즌 중반 시카고 화이트삭스트레이드된 후 기량이 만개하여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1917년에는 28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다승, 평균 자책점(1.53), 이닝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해 화이트삭스는 1917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으며, 시콧은 시리즈에서 1승 1패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1919년에도 29승으로 다시 리그 다승왕에 오르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나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에 가담한 블랙삭스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1920년 시즌 후 다른 7명의 선수와 함께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영구 제명될 당시 시콧은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 1. 초창기

프랑스계 캐나다인 부부의 아들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7] 그는 선발 투수이자 너클볼 전문가였다.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팀 오거스타 투어리스트에서 야구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때 타이 콥과 한 팀에서 뛰었다. 두 선수 모두 MLB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했고, 시콧은 1905년 9월 3일 MLB에 데뷔했다. 타이거스 소속으로 3경기에 출전해 1승 1패, 평균 자책점 3.50을 기록했지만, 시즌 후 방출되었다.

이후 한동안 메이저 리그 무대에 서지 못하다가, 1908년 시즌 전에 보스턴 레드삭스와 2500USD에 계약하며 복귀했다. 레드삭스에서는 통산 41승 48패를 기록했고, 1912년 7월 2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화이트삭스로 이적한 후 시콧의 기량은 만개했다. 1913년에는 18승 11패, 평균 자책점 1.58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1916년에는 리그 승률 1위를 차지했으며, 그의 선수 경력 최고의 해는 1917년이었다. 이 해 시콧은 28승을 거두며 다승, 평균 자책점(1.53), 이닝 부문에서 리그 1위를 휩쓸었다. 특히 4월 14일에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1916년 9월 15일부터 1917년 7월 25일까지 25경기 연속으로 6이닝 이상 투구하며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는데, 이는 훗날 퀄리티 스타트로 불리는 기록의 당시 최장 연속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반세기 후 밥 깁슨에 의해 깨졌다.[5] 이 해 화이트삭스는 1917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4승 2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콧은 월드 시리즈에서 1차전 선발승, 3차전 선발패를 기록했고, 5차전에서는 6이닝 구원 등판했으나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3경기에서 총 23이닝을 던지며 5실점만을 허용하는 좋은 투구를 보였다.

1918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12승 19패로 부진했다.

하지만 1919년에는 29승 7패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다시 한번 다승, 승률, 이닝, 완투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6000USD였으며, 30승을 달성할 경우 10000USD의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시즌 막판, 구단주 찰스 코미스키가 보너스 지급을 피하기 위해 감독 키드 글리슨에게 시콧을 남은 경기에 등판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 사건이 시콧이 동료 칙 간딜의 승부 조작 제의에 가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보면 시콧은 시즌 마지막 주인 9월 19일, 24일, 28일(시즌 최종전)에도 평소와 같은 간격으로 등판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8][7] 당시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시콧은 12명에 달하는 대가족의 가장이었다.[9] 그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14년간 활동하며 통산 208승 149패를 기록했고, 영구 제명 전까지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2. 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190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3경기를 뛴 후 메이저 리그로 돌아오지 못했던 시콧은 1908년 시즌 전 보스턴 레드삭스와 2500USD로 계약을 맺었다. 보스턴 소속으로 뛰는 동안 41승 48패를 기록했으며, 1912년 7월 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트레이드되었다.

2. 3.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1912년 7월 22일, 보스턴 레드삭스는 에디 시콧을 시카고 화이트삭스트레이드했다. 시콧은 화이트삭스 유니폼을 입고 선수 경력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팀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 잡았고, 1917년에는 팀의 1917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1919년에는 다시 한번 리그 최다승 투수가 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시콧은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에 가담한 블랙삭스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시콧은 1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첫 타자에게 사구를 내주는 등 불안한 출발을 보였고, 결국 3.2이닝 동안 6실점하며 크게 부진했다. 4차전에서는 투수 땅볼 처리 실책과 중계 플레이 실책 등 자신의 실책 2개로 2점을 내주었고, 팀 타선의 침묵 속에 완투패를 당했다. 승부 조작 공모자들이 도박사로부터 약속된 보수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자, 시콧은 7차전에서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던지기로 결심했고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9] 하지만 화이트삭스는 전력상 우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시내티 레즈에게 3승 5패로 패배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시콧은 승부 조작의 대가로 시리즈 시작 전에 1만달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7]

1920년 시즌 시콧은 21승을 기록하며 레드 페이버, 레프티 윌리엄스, 디키 카와 함께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4명의 20승 투수가 탄생하는 이른바 '20승 쿼텟'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필라델피아 지역 신문인 노스 아메리칸 지가 도박사 빌리 마허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1919년 월드 시리즈 승부 조작 스캔들을 폭로하면서 시콧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다음 날 시콧은 구단주 찰스 코미스키에게 승부 조작 가담 사실을 인정했지만, 코미스키는 "그런 얘기는 나한테 하지 말고 대배심에 가서 말하라"고 소리쳤다고 한다.[9] 결국 시콧은 일리노이주 쿡군 대배심에 출석하여 8명의 연루 선수 중 가장 먼저 혐의를 자백했다. 코미스키는 형사 기소 직전, 시콧을 포함해 승부 조작 의혹이 제기된 7명(칙 간딜은 1919 시즌 후 은퇴)에게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리는 전보를 보냈다.

1921년 시콧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과거의 자백을 철회하는 진술서를 제출했지만 재판은 진행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관련 자료가 도난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시콧을 포함한 선수 전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하지만 무죄 평결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다음 날 성명을 통해 "야구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콧 등 8명의 선수를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하는 처분을 내렸다.

영구 제명 당시 시콧은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 3. 1. 1913-1916 시즌

1912년 7월 2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트레이드된 후, 시콧은 1913년에 이르러 잠재력을 만개시켰다. 그는 이 해 18승 11패, 평균 자책점 1.58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1916년에는 승률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916년 9월 15일부터는 훗날 퀄리티 스타트로 알려지게 되는 기록 행진을 시작했는데, 1917년 7월 25일까지 25경기 연속으로 6이닝 이상 투구하며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밥 깁슨이 경신하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가장 긴 연속 퀄리티 스타트 기록이었다.[5]

1913–1916 시즌 주요 성적
연도평균 자책점경기선발완투이닝탈삼진
1913년CWS18111.58413018268.0121
1914년CWS11162.04453015269.1122
1915년CWS13123.02392615223.1106
1916년CWS1571.78441911187.091


2. 3. 2. 1917 시즌: 월드 시리즈 우승

1917년은 에디 시콧에게 최고의 해였다. 그는 이 해에 28승을 거두며 승리, 평균 자책점, 이닝 부문에서 아메리칸 리그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평균 자책점은 1.53을 기록했다. 4월 14일에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하기도 했다.

또한, 1916년 9월 15일부터 1917년 7월 25일까지 시콧은 25경기 연속으로 6이닝 이상 투구하며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는데, 이는 훗날 퀄리티 스타트로 알려지게 된 기준에 해당한다. 시콧의 25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 기록은 밥 깁슨이 이를 넘어서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가장 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5]

이 해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17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뉴욕 자이언츠 (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4승 2패로 꺾고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시콧은 월드 시리즈에서 총 3경기에 등판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전에서는 승리 투수가 되었고, 3차전에서는 패전을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6이닝 동안 구원 등판했지만 승패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시리즈 전체에서 그는 23이닝을 던지며 5실점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투구를 선보였고, 등판한 3경기 중 2경기를 완투했다.

2. 3. 3. 1918-1919 시즌

1918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12승 19패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1919년에는 29승 7패를 기록하며 다시 아메리칸 리그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뛰어난 반등을 보여주었다. 이 해 시콧은 승리 외에도 승률, 이닝, 완투 부문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의 1919년 연봉은 6000USD였고, 30승을 달성할 경우 10000USD의 보너스를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단주 찰스 코미스키가 이 보너스 지급을 피하기 위해 시즌 막바지에 감독 키드 글리슨에게 시콧의 등판을 막으라고 지시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7] 이러한 구단주의 인색함이 시콧으로 하여금 팀 동료 칙 간딜의 승부 조작 제의에 응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콧이 9월 19일, 24일, 그리고 시즌 최종전인 28일에도 등판하는 등[8] 시즌 마지막 몇 주 동안 평소와 같은 간격으로 마운드에 올랐다는 기록도 존재한다.[7] 당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시콧은 12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가장이었다.[9]

2. 4. 블랙삭스 스캔들

1913년의 시콧


엘리엇 아시노프의 저서 ''에이트 맨 아웃''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따르면, 시콧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구단주 코미스키로부터 매우 적은 급여를 받고 있었다. 동료 선수 칙 간딜의 반복적인 승부 조작 제안을 거절해왔으나, 1919년 월드 시리즈 직전 코미스키가 약속했던 보너스 지급을 거부하자 결국 승부 조작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승부 조작 의혹 속에서 열린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콧은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3경기에 등판했다. 1차전에서는 첫 타자에게 사구를 내주는 등 3.2이닝 동안 6실점하며 크게 부진했다. 4차전에서는 4회에 자신의 실책 2개(투수 땅볼 악송구와 조 잭슨의 좌익수로부터의 홈 송구를 커트한 실수)로 2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추가 실점은 막았지만, 팀 타선의 침묵으로 완투패를 당했다. 7차전 직전, 다른 공모자들이 도박사로부터 약속된 보수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자 시콧은 팀의 승리를 위해 제대로 뛰기로 결심했다.[9] 7차전에서는 안정적인 투구로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팀은 결국 레즈에게 3승 5패로 패배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시콧은 시리즈 전에 승부 조작 대가로 1만달러를 받았고, 이 중 4천달러미시간주의 농장을 되사는 데 사용했다.[7]

1920년 시즌, 시콧은 개인 통산 세 번째 20승을 달성하며 레드 페이버, 레프티 윌리엄스, 디키 카와 함께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20승 쿼텟'''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7일, 도박사 빌리 마허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1919년 월드 시리즈 승부 조작을 폭로하는 기사가 노스 아메리칸 신문에 실렸고, 시콧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다음 날인 28일, 코미스키 구단주를 만난 시콧은 승부 조작 가담 사실을 인정했으나, 코미스키는 "그런 얘기는 나한테 하지 말고 대배심에 가서 말하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시콧은 같은 날 일리노이주 쿡군 대배심에서 8명의 연루 선수 중 가장 먼저 자백했다.[9] 코미스키는 기소 직전 시콧을 포함한 7명의 의혹 선수(간딜은 1919 시즌 후 은퇴)에게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리는 전보를 보냈다.

1921년 2월 14일, 시콧은 조 잭슨 등 다른 선수들과 함께 과거의 자백을 번복하는 진술서를 제출했다. 재판 과정에서 관련 자료가 도난당하는 등 검찰 측은 승부 조작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8월 2일 시카고 고등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8명 선수 전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 날인 8월 3일, 야구계의 신뢰 회복을 위해 새로 임명된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성명을 통해 시콧을 포함한 8명의 선수를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이후 블랙삭스 스캔들로 불리게 되었다.

3. 영구 제명 이후

야구 선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후 시콧은 미시간 주 리보니아로 돌아갔다. 그는 미네소타 주와 위스콘신 주의 세미프로 팀에서 1924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9] 이후 주유소를 운영했으며, 미시간 주 자연자원부에서 야생동물 관리인으로 근무했고, 포드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여 1944년에 은퇴했다.[6][9]

은퇴 후 마지막 25년 동안은 미시간 주 팜밍턴 근처의 자택 뒤편에 있는 5.5acre 규모의 농장에서 딸기 재배에 힘썼다.[6][9][10] 야구 OB회에서 청동 상을 선물하며 모임 참석을 요청했지만, 딸기 재배와 출하로 바빠 참석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0]

사망 4년 전인 1965년 디트로이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콧은 "확실히 저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난 45년 동안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 죗값은 이제 치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9] 또한 "하루에 2, 3통은 아직 팬들로부터 편지가 오고, 심지어 독일에서 사인을 받고 싶다는 편지가 온 것은 기뻤습니다"라고 말하며 여전한 팬들의 관심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10]

시콧은 1969년5월 5일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9]

그의 이야기는 이후 대중문화에서도 다루어졌다. 1988년 영화 ''에잇 맨 아웃''에서는 배우 데이비드 스트라탄이 시콧 역을 연기했으며,[6] 1989년 영화 ''꿈의 구장''에서는 배우 스티브 이스틴이 연기했다.[6]

시콧의 종손자인 알 시콧(1929–1982) 역시 메이저 리그 투수로 활동했으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 6개 팀에서 뛰며 통산 10승 13패를 기록했다.[6]

4. 투구 스타일

에디 시콧은 너클볼을 전문으로 하는 투수였다. 그는 너클볼의 개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투구의 약 75%가 너클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 또한 싱커슬라이더, 커브도 구사했다.[9]

시콧은 당시 허용되었던 스핏볼, 샤인볼, 에머리볼 등과 같은 반칙 투구에도 능숙했다. 이러한 투구는 1920년에 금지되었지만, 시콧은 1년간의 유예 기간을 받았다.

5. 유산 및 평가

에디 시콧은 영구 제명 당시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너클볼을 주무기로 삼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14년간 활약하며 통산 208승 149패를 기록했다.

특히 1917년에는 28승을 거두며 승리, 평균 자책점, 이닝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4월 14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또한, 1916년 9월 15일부터 1917년 7월 25일까지 25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밥 깁슨이 경신하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유지된 최장 기록이었다.[5]

1919년에는 29승으로 다시 한번 리그 다승왕과 완투 1위에 올랐으나, 시즌 막판 구단주 찰스 코미스키가 30승 달성 시 지급하기로 한 1만달러의 보너스를 주지 않기 위해 고의로 남은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는 의혹이 있다. 당시 그의 연봉은 6천달러였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된 후, 시콧은 미시간 주 리보니아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주유소를 운영하고, 미시간 주 자연자원부에서 야생동물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이후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다 1944년에 은퇴했다. 말년에는 팜밍턴 근처의 5.5acre 농장에서 딸기 농사를 지었으며, 1969년 5월 5일 84세의 나이로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병원에서 사망했다.[6]

시콧의 이야기는 후대에 여러 작품을 통해 알려졌다. 1988년 영화 ''에잇 맨 아웃''에서는 배우 데이비드 스트라탄이, 1989년 영화 ''꿈의 구장''에서는 배우 스티브 이스틴이 시콧을 연기했다.

그의 종손자인 알 시콧(1929–1982) 역시 메이저 리그 투수로 활동하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 6개 팀에서 뛰었다.

6. 개인사

에디 시콧은 앰브로스 시콧과 아르상주 마리 드루일라드의 아들로, 부모 모두 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7]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7] 러셀 존 프리어와 애니 세실 손턴의 딸인 로즈 엘렌 프리어와 결혼했으며, 두 딸 로즈와 버지니아, 아들 에드워드 주니어를 두었다. 인구 조사에 따르면, 시콧은 12명의 대가족 가장이기도 했다.[9]

블랙삭스 스캔들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영구 추방된 후, 시콧은 미시간 주 리보니아로 돌아갔다. 그는 미네소타 주와 위스콘신 주의 세미프로 팀에서 1924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주유소를 운영했으며, 미시간 주 자연자원부에서 야생동물 관리인으로 근무했고, 포드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여 1944년에 은퇴했다.[9]

은퇴 후 마지막 25년 동안은 팜밍턴 근처의 5.5acre 농장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6][9][10] 야구계 인사들이 그에게 청동 기념패를 선물하며 모임 참석을 권유했지만, 딸기 재배와 출하로 바빴기 때문이다.[10] 1965년 디트로이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확실히 저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난 45년 동안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 죗값은 이제 치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9] 또한, 여전히 하루에 2~3통의 팬레터를 받으며, 독일에서 온 팬의 사인 요청 편지에 기뻐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0]

시콧은 1969년 5월 5일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9]

그의 종손자인 알 시콧(1929–1982) 역시 메이저 리그 투수로 활약하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 6개 팀에서 뛰었다.

시콧의 이야기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졌다. 1988년 영화 ''에잇 맨 아웃''에서는 배우 데이비드 스트라탄이, 1989년 영화 ''꿈의 구장''에서는 배우 스티브 이스틴이 시콧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Eddie Cicotte: From the Hall of Fame Library player files http://www.southside[...]
[2] 뉴스 Cicotte Calls Life Sentence Too Rough Charleston Gazette null
[3] 문서 null 1956-09-24
[4] 뉴스 Whiff of Scandal Wafts Over 1918 World Series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11-10-14
[5] 웹사이트 Prospectus Feature: I Come to Praise Quality Starts, Not to Bury Them https://www.baseball[...] 2016-05-02
[6] 웹사이트 Eddie Cicotte http://sabr.org/biop[...] 2011-10-16
[7] 웹사이트 Eddie Cicotte - BR Bullpen http://www.baseball-[...] Baseball-reference.com 2013-10-17
[8] 웹사이트 Eddie Cicotte - 1919 Pitching Gamelog http://www.baseball-[...] Baseball-reference.com 2013-10-22
[9] 웹사이트 Eddie Cicotte http://sabr.org/biop[...] SABR.org 2013-10-18
[10] 서적 メジャー・リーグ紳士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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