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피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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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피냘은 1598년부터 1600년까지 스페인이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시도했던 임시 항구 설치 시도와 관련된 사건을 의미한다. 대항해 시대,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 스페인은 중국과의 무역을 모색하며 필리핀 총독을 통해 중국 해안에 후안 데 사무디오를 파견하여 무역 허가를 요청했다. 광둥 당국의 허가를 받아 엘피냘에 임시 정착했지만,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의 반발과 무력 충돌로 인해 스페인은 엘피냘을 포기하고 중국 진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엘피냘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며, 사건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동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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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냘 | |
---|---|
개요 | |
이름 | 엘 피냘 |
원어명 | Pinhal (포르투갈어) |
어원 | 소나무 숲 |
지리 | |
위치 | 중국 주강 삼각주 |
역사 | |
개항 | 1598년~1600년 |
운영 주체 | 스페인 |
항구 정보 | |
유형 | 항구 |
2. 역사적 배경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외 탐험을 통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제국 사이에 발견된 땅들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나뉘었으나, 반대편의 반자오선은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다.[14]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서 몰루카스 동쪽에 반자오선을 그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를 정했으나, 16세기 당시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의 미비로 정확한 경도선을 긋는 문제는 논쟁거리였다. 그 결과, 1542년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를 식민지화했을 때, 실제로는 반자오선 서쪽에 있었음에도 불구, 자신들의 영역 안에 있다고 믿었다.[14]
155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로 부터 마카오를 할양받아 중국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15] 마카오는 중국과 일본 시장을 독점하며 번성했지만, 스페인의 진출을 경계했다.[15]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는 이베리아 연합으로 이어졌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사이에 새로운 무역 기회를 열었다. 그러나 마카오는 스페인의 동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이 중국 무역 독점권을 위협하고, 명나라의 봉쇄 조치를 유발하여 마카오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을 우려했다. 1585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금령을 내렸으나, 마카오와 마닐라 모두 이를 무시했다.[15]
1574년 중국 해적 리마홍(임봉)이 마닐라를 공격한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 1590년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고 류큐, 중국, 타이완 등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스페인은 중국 내 거점 확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17]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과 26성인 순교 사건은 스페인이 일본의 적대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했음에도 이러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17] 1598년, 필리핀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스만은 후안 데 사무디오를 중국 해안으로 파견하였다.[17]
2. 1. 대항해 시대와 이베리아 연합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외 탐험을 개시,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제국 사이에 발견된 땅들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100레구아 즈음에 자오선을 긋고, 이 자오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스페인에, 동쪽은 포르투갈에 소속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 자오선의 반대편에 그어지는 반대자오선(antimeridian)이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다.[14]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서 몰루카스 동쪽에 반대자오선을 긋고 이 반대자오선을 중심으로 스페인인들은 동쪽, 포르투갈인들은 서쪽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의 미비로 인하여 정확한 경도선(longitude)을 긋는 문제는 논쟁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인들이 1542년 필리핀제도(the Philippines)를 식민지화할 때, 스페인인들은 필리핀제도가 자신들의 영역 안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반대자오선 서쪽에 있었다.[14]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 당국으로부터 마카오에 정주지를 할양받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중국과 일본 시장을 독점하고 중국산 물품에 대한 전세계적 수요를 독점 충당함으로써 1580년대까지 마카오는 중개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를 거쳐,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외손자로서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최종 승리하여 포르투갈 국왕도 겸임하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사이에서의 새로운 무역상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스페인 국왕의 포르투갈 왕위 계승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여타 포르투갈 해외 식민 영토와는 달리, 마카오에서는 스페인의 동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인근에 나타나서 중국무역 독점권을 위협할 것은 물론, 스페인인들의 서툰 행동으로 자칫 명조가 유럽인에 대한 전면 봉쇄 조치를 취하게 되면 마카오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 펠리페2세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스페인인들은 중국에 오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1585년 펠리페2세는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이 각자의 영향권이 미치는 영역으로 서로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금령을 발하였다. 그러나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스페인인들이 있는 마닐라(Manila)로 무역선을 보내었으며, 마닐라의 스페인인들 역시 금령을 대놓고 무시하며 중국으로 무역선을 보내었다.[15]
스페인인들이 중국으로 진입하는 기회는, 중국인 해적 리마홍이 1574년 마닐라를 공격함으로써 생겼다. 명 조정은 임봉을 체포하려 하면서, 푸젠성 당국은 임봉 생포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인들이 하문(廈門, Amoy) 남쪽 한 섬에 항구를 설치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핀총독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임봉이 마닐라를 탈출하면서 제안은 무위로 돌아갔다.[16]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고 류큐, 중국, 타이완, 그리고 스페인인이 주둔한 여송(呂宋) 즉 루손섬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중국 내 스페인인을 위한 정주지 할양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과 이후 나가사키(長崎)에서의 프란시스코회 수도승들의 처형 사건으로, 스페인인들은 일본인의 적대감을 확인하였고,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였음에도 이러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1598년, 필리핀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스만은 후안 데 사무디오(Juan de Zamudio)를 중국 해안으로 파견하였다.[17]
2. 2. 마카오와 스페인의 중국 진출 시도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외 탐험을 통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제국 사이에 발견된 땅들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나뉘었으나, 반대편의 반대자오선은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다.[14]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서 몰루카제도 동쪽에 반대자오선을 그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를 정했으나, 16세기 당시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의 미비로 정확한 경도선을 긋는 문제는 논쟁거리였다.[14]155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로 부터 마카오를 할양받아 중국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15] 마카오는 중국과 일본 시장을 독점하며 번성했지만, 스페인의 진출을 경계했다.[15] 1574년 중국 해적 리마홍(임봉)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는 이베리아 연합으로 이어졌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사이에 새로운 무역 기회를 열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는 스페인의 동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15]
1590년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중국 등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스페인은 중국 내 거점 확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17]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과 26성인 순교 사건은 스페인이 일본의 적대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17] 1598년, 필리핀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은 후안 데 사무디오를 중국 해안으로 파견하였다.[17]
3. 엘피냘 항구 수립 시도 (1598-1600)
1598년, 필리핀 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Francisco de Tello de Guzmán)은 후안 데 사무디오(Juan de Zamudio)를 중국에 파견하여 무역 허가와 항구 할양을 협상하게 했다.[18] 사무디오는 광동 영정양(伶仃洋) 인근 대서산(大嶼山, 란타우 섬)에 정박하고, 광동 관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엘피냘에 임시 정착을 허락받았다.[18][19] 광동 당국은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스페인의 은 유입을 기대하며 엘피냘 할양을 허가했다.[19]
사무디오는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무역 허가와 항구 할양을 협상했다. 그는 그곳의 만다린들에게 7,000레알의 선물을 보냈고(다이야오/戴燿중국어가 이끌었고, 량광 총독) 스페인 사람들은 샴 무역상과 동일한 조건으로, 포르투갈보다 50% 높은 세율로, 엘피냘에 임시 정착할 수 있었다.[18] 이는 마카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광둥의 해안 방어 책임자(海道副使; 옛 유럽 자료에서는 ''haitao'')는 마카오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포르투갈의 간섭을 받아들이면 "더 오만해질 것"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8]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해금(海禁) 정책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주를 언제든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20]
같은 시기, 전임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으나, 폭풍우로 인해 엘피냘에 표착하여 사무디오와 만나게 되었다.[21][22] 사무디오는 마닐라로 돌아가 다스마리냐스의 원정에 관하여 보고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다스마리냐스는 엘피냘에 남아 다른 선박들을 기다렸다.[22]
3. 1. 후안 데 사무디오의 파견과 엘피냘 점거
1598년, 필리핀 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Francisco de Tello de Guzmán)은 후안 데 사무디오(Juan de Zamudio)를 중국에 파견하여 무역 허가와 항구 할양을 협상하게 했다.[18] 사무디오는 광동 영정양(伶仃洋) 인근 대서산(大嶼山, 란타우 섬)에 정박하고, 광동 관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엘피냘에 임시 정착을 허락받았다.[18][19] 광동 당국은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스페인의 은 유입을 기대하며 엘피냘 할양을 허가했다.[19]사무디오는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무역 허가와 항구 할양을 협상했다. 그는 그곳의 만다린들에게 7,000레알의 선물을 보냈고(다이야오/戴燿중국어가 이끌었고, 량광 총독) 스페인 사람들은 샴 무역상과 동일한 조건으로, 포르투갈보다 50% 높은 세율로, 엘피냘에 임시 정착할 수 있었다.[18] 이는 마카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광둥의 해안 방어 책임자(海道副使; 옛 유럽 자료에서는 ''haitao'')는 마카오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포르투갈의 간섭을 받아들이면 "더 오만해질 것"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8]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해금(海禁) 정책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주를 언제든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20]
사무디오가 중국에 도착할 즈음, 전임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으나, 폭풍우로 인해 엘피냘에 표착하여 사무디오와 만나게 되었다.[21][22] 사무디오는 마닐라로 돌아가 다스마리냐스의 원정에 관하여 보고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다스마리냐스는 엘피냘에 남아 다른 선박들을 기다렸다.[22]
3. 2.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합류와 포르투갈의 반발
1598년 9월,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던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함대가 폭풍을 만나 엘피냘에 표착하면서 후안 데 사무디오와 합류했다.[21][22] 사무디오는 마닐라로 돌아가 다스마리냐스의 원정에 관해 보고하고 증원을 요청했고, 다스마리냐스는 엘피냘에서 다른 선박들을 기다렸다.[22]엘피냘 항구 수립과 다스마리냐스의 등장은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3] 스페인인들은 중국 물품 가격을 올렸고 포르투갈인들의 구매력과 전매(轉賣)에 의한 마진에도 영향을 주었다.[23] 마카오총독(Captain-major of Macau) 파울루 지 포르투갈(Paulo de Portugal, 재임 1599-1603)은 다스마리냐스에게 엘피냘을 떠날 것을 경고하고, 엘피냘을 봉쇄하며 스페인과의 교역을 금지했다.[24][25]
1599년, 엘피냘의 스페인 인들은 질병과 쇠약함 그리고 반란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려 마닐라로의 귀환을 결정했다.[27] 1599년 11월 16일, 다스마리냐스는 마닐라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바람이 좋지 않아서 중국 해안으로 돌아가야 했다.[28] 포르투갈인들의 예민한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자, 다스마리냐스는 엘피냘로 가지 않고 포르투갈인들이 이전에 정주하였던 마카오 서쪽 섬 낭백오로 갔다.[28] 낭백오에서 파울루 지 포르투갈과 이야기하면서 포르투갈인들의 이익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다스마리냐스가 변호하였고, 친선의 증표로서 다스마리냐스는 마닐라와 마카오가 합법적으로 무역할 수 있는 권한을 국왕에게 요청할 것, 그리고 1600년 2월 이전에 중국을 떠날 것을 약속하였다.[28] 양자는 서면으로 동의서를 작성하였고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다스마리냐스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28]
하지만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낭백오에 온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하라는 마카오 주민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29] 고아 부왕(the Viceroy of Goa)으로부터 스페인인에게 무력을 사용하라는 허락을 받았다.[30] 1600년 1월 17일, 파울루 지 포르투갈이 중무장 함대를 파견하여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했고, 다스마리냐스는 체포되었다.[31] 결국 함선들은 몇 시간동안 서로 포격을 주고받았고, 스페인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화물들을 잃었다.[32] 결국 스페인인들은 정크선을 보내주고 자신들은 서쪽으로 도망하여 광해만(廣海灣) 인근으로 대피하였다가, 얼마 후 마닐라로 회항하였다.[32]
4. 포르투갈과의 무력 충돌 및 스페인의 철수
엘피냘항구 수립과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Luis Pérez Dasmariñas)의 표류는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을 불편하게 하였다. 무역에 있어서의 효과는 점차 현저해졌다. 스페인인들은 중국 물품 가격을 올렸고 포르투갈인들의 구매력과 전매(轉賣)에 의한 마진에도 영향을 주었다.[23] 마카오총독(Captain-major of Macau, Capitão-mor de Macau) 파울루 드 포르투갈(Paulo de Portugal, 재임 1599-1603)은 마카오의 이익에 호응하여, 다스마리냐스에게 사무디오와 함께 엘피냘을 떠날 것을 경고하였고, 다시 다스마리냐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반항하였다.[24] 엘피냘은 봉쇄되었고, 스페인인을 돕게 되면 중벌에 처한다는 금령이 마카오에 내려졌으며, 스페인인이 마카오에 오게 되면 체포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25] 다스마리냐스는 포르투갈인들이 자신을 해할 것이며, 만약 그럴 경우 포르투갈인들은 다스마리냐스의 몸에 불을 지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26]
엘피냘이 봉쇄되자, 스페인인들은 마카오 탁발수도회에 엘피냘을 몰래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도움은 제한적이었고 1599년 스페인인들은 점점 지쳐갔으며 병자와 약자 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인 사람들을 남겨두었다. 마닐라에서 병력을 증강해 보내는 것이 결정되자, 스페인인들은 엘피냘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이 이들의 출발을 허락하기에 앞서, 여러 관세와 비용을 중국관원들에게 지불해야 했기에, 출발은 지연되었다.[27]
1599년 11월 16일, 다스마리냐스는 마닐라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바람이 좋지 않아서 중국 해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포르투갈인들의 예민한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자, 다스마리냐스는 엘피냘로 가지 않고 포르투갈인들이 이전에 정주하였던 마카오 서쪽 섬 낭백오(浪白澳)로 갔다. 낭백오에서 파울루 드 포르투갈과 이야기하면서 포르투갈인들의 이익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다스마리냐스가 변호하였고, 친선의 증표로서 다스마리냐스는 마닐라와 마카오가 합법적으로 무역할 수 있는 권한을 국왕에게 요청할 것, 그리고 1600년 2월 이전에 중국을 떠날 것을 약속하였다. 양자는 서면으로 동의서를 작성하였고 파울루 드 포르투갈은 다스마리냐스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28]
사실 파울루 드 포르투갈은 낭백오에 온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하라는 마카오 주민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29] 그리고 고아 부왕(the Viceroy of Goa)이 파울루 드 포르투갈에게 스페인인에게 무력을 사용하라는 허락을 내렸다.[30]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할 준비가 진행된 가운데, 다스마리냐스는 포르투갈인들의 행동에 대한 대비를 하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다스마리냐스는 파울루 드 포르투갈이 자신의 말을 어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를 풍문으로 치부하였다. 1600년 1월 17일, 파울루 드 포르투갈이 중국인 소유의 정크선 한 척만 소지한 스페인인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중무장함대를 파견하였고, 다스마리냐스는 부지불식간에 체포되었다.[31] 파울루 드 포르투갈은 다스마리냐스를 체포하여 고아로 보내려고 했지만, 다스마리냐스는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함선들은 몇 시간동안 서로 포격을 주고받았고, 스페인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화물들을 잃었다. 결국 스페인인들은 정크선을 보내주고 자신들은 서쪽으로 도망하여 광해(廣海灣) 인근으로 대피하였다가, 얼마 후 마닐라로 회항하였다.[32]
4. 1. 낭백오에서의 충돌
1599년 11월 16일,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마닐라로 향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중국 해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스마리냐스는 포르투갈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엘피냘 대신 이전에 포르투갈인들이 정착했던 마카오 서쪽 섬 낭백오(浪白澳, Lampacau)로 향했다.[28] 낭백오에서 다스마리냐스는 마카오총독(Captain-major of Macau) 파울루 지 포르투갈(Paulo de Portugal)과 협상하여 포르투갈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1600년 2월 이전에 중국을 떠날 것을 약속했다. 양측은 서면 동의서를 작성했고,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다스마리냐스의 안전을 보장했다.[28]그러나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낭백오에 온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하라는 마카오 주민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29] 고아 부왕(the Viceroy of Goa)으로부터 스페인인에게 무력을 사용하라는 허락을 받았다.[30] 다스마리냐스는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파울루 지 포르투갈이 약속을 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를 무시했다.[31]
1600년 1월 17일,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중무장 함대를 이끌고 낭백오에 있던 다스마리냐스 함대를 공격했다.[31] 당시 다스마리냐스 함대는 중국 정크선 한 척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31] 파울루 지 포르투갈은 다스마리냐스를 체포하여 고아로 보내려 했으나, 다스마리냐스는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양측 함대는 몇 시간 동안 포격을 주고받았고, 스페인 측은 많은 사상자와 화물을 잃었다.[32] 스페인인들은 정크선을 이끌고 서쪽 광해만(廣海灣)으로 퇴각했다가 얼마 후 마닐라로 돌아갔다.[32]
4. 2. 스페인의 엘피냘 포기
펠리페 3세는 엘피냘 항구 수립을 이끈 후안 사무디오의 여정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 마닐라최고재판소(la Real Audiencia de Manila)에 알렸다.[33] 그러나 펠리페 3세는 필리핀총독에게 엘피냘 수복을 위한 자문회 구성을 요청하였다.[33]결국 스페인은 엘피냘을 재점령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중국 진출 시도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중국과 스페인 간 무역은 1626년 스페인령 대만 수립 전까지 중국 상인들이 마닐라로 가서 무역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34] 1627년 엘피냘 항구 소유권 회복 계획이 다시 나왔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35]
5. 엘피냘의 위치 비정
엘피냘의 정확한 위치는 사료 부족과 지형 변화로 인해 불분명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측 기록은 엘피냘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2] 학자들은 엘피냘이 마카오 서쪽 서강(西江) 하구, 혹은 주강 하구 영정양(伶仃洋)의 기오도(淇澳島) 주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3][4]
엘피냘의 위치는 현존하는 사료로서 정확히 확인할 수 없을 뿐만러, 퇴적물이 쌓임에 따라 현재 주강 하구 해안선은 16세기의 그것과는 다르다. 당시 스페인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안토니오 데 모르가(Antonio de Morga)는 엘피냘이 광주(廣州)에서 12레구아(legua, 1레구아는 약5.572km)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필리핀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Francisco de Tello de Guzmán)은 8레구아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엘피냘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카오에서 10~12레구아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마카오로부터 2일 정도 걸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거리만 제시하였을 뿐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2] 또한 같은 예수회 기록과 함께 지방지인 『광동통지(廣東通志)』에서는 엘피냘이 하나의 섬이라고 하였다.[3][4]
; 서강 하구설
알버트 카머러(Albert Kammerer), 진궈핑(金國平, Jin Guoping), 프란시스코 로케 데 올리베이라(Francisco Roque de Oliveira)는 엘피냘이 마카오 서쪽 서강(西江) 하구나 주강 하구이자 광동 주해(珠海)와 홍콩 사이의 바다인 영정양(伶仃洋)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5] 『광동통지』에는 "萬曆26년(1598), 루손(呂宋)이 호도문(虎跳門)에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호도문은 현재 광동성 강문시(江門市) 신회구(新會區) 일대 서강 하구 지류 중 하나인 호도문수도(虎跳門水道, the Hutiaomen Channel) 하구에 있다. 예수회의 기록들에서는 엘피냘에 중국 사원 단지가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진궈핑은 이 사원들이 1297년 몽골 군대를 피하여 달아났다가 애산전투(崖山戰鬪) 혹은 애문(崖門) 전투에서 패배하여 충신 육수부(陸秀夫)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남송(南宋) 마지막 황제 송 소제(宋 少帝) 조병(趙昺)을 기리는 사원이라고 주장하였다.[7] 알버트 카머러는 1646년 조르즈 핀투 지 아제베두(Jorge Pinto de Azevedo)의 상주문에 그려진 지도를 근거로, 낭백오(浪白澳, Lampacau) 서강 지류 어귀 "Pinhal"이라는 섬을 엘피냘이라고 보았다.[8]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서 제시하는 엘피냘의 위치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이 보고한 거리와는 일치하지 않으며, 마카오로부터 2일 이상 거리에 존재하고 있다.[9]
; 기오도 주변설
C. R. 복서(C. R. Boxer)와 J. M. 브라가(J. M. Braga)는 엘피냘이 영정양(伶仃洋) 인근의 기오도(淇澳島) 근처라고 보았다.[3][4] 복서는 "Pinhal"이 "소나무숲(pine grove)"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베리아 출신 탐험가들이 지명으로 흔히 사용한 것이었던 바, 엘피냘 항구는 소나무숲에 있었던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복서는 기오도 근처에 있는 정박지 당가만(唐家灣)을 엘피냘로 보고, "이곳은 호문(虎門, the Bocca Tigris)과 마카오 사이에 수 세기동안 소나무숲이 번성한 유일한 곳이다"라고 언급하였다.[10] 존 크로슬리(John Crossley)는 복서의 주장에서 말한 당가만은 인근의 기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 위치는 금성문(金星門, Cumsingmoon) 항구 인근으로 수 세기동안 외국 선박들이 사용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19세기에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자주 사용했다고 전한다.[11]
5. 1. 서강 하구설
엘피냘의 위치는 현존하는 사료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퇴적물이 쌓여 16세기와 현재 주강 하구 해안선이 다르다. 스페인인 안토니오 데 모르가(Antonio de Morga)는 엘피냘이 광저우에서 12레구아(약 5.572km)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필리핀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Francisco de Tello de Guzmán)은 8레구아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엘피냘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카오에서 10~12레구아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마카오로부터 2일 정도 걸렸다고 진술하였으나, 이 기록들은 거리만 제시하였을 뿐 방향은 언급하지 않았다.[2] 또한, 같은 예수회 기록과 함께 지방지인 『광동통지(廣東通志)』에서는 엘피냘이 섬이라고 하였다.[3][4]알버트 카머러(Albert Kammerer), 진궈핑(金國平, Jin Guoping), 프란시스코 로케 데 올리베이라(Francisco Roque de Oliveira) 등은 엘피냘이 마카오 서쪽 서강(西江) 하구 혹은 주강 하구이자 광동 주해(珠海)와 홍콩 사이의 바다인 영정양(伶仃洋)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5] 『광동통지』에는 "萬曆26년(1598), 루손(呂宋)이 호도문(虎跳門)에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호도문은 현재 광동성 강문시(江門市) 신회구(新會區) 일대 서강 하구 지류 중 하나인 호도문수도(虎跳門水道, the Hutiaomen Channel) 하구에 있다. 예수회 기록에는 엘피냘에 중국 사원 단지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진궈핑은 이 사원들이 1297년 몽골 군대를 피해 달아났다가 애산전투(崖山戰鬪)에서 패배하여 충신 육수부(陸秀夫)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남송(南宋) 마지막 황제 송 소제(宋 少帝) 조병(趙昺)을 기리는 사원이라고 주장하였다.[7] 알버트 카머러는 1646년 조르즈 핀투 지 아제베두(Jorge Pinto de Azevedo)의 상주문에 그려진 지도를 근거로, 낭백오(浪白澳, Lampacau) 서강 지류 어귀 "Pinhal"이라는 섬을 엘피냘이라고 보았다.[8]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서 제시하는 엘피냘의 위치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이 보고한 거리와는 일치하지 않으며, 마카오로부터 2일 이상 거리에 존재하고 있다.[9]
5. 2. 기오도 주변설
J. M. 브라가(J. M. Braga)와 C. R. 복서(C. R. Boxer)는 엘피냘이 영정양(伶仃洋)의 기오도(淇澳島) 주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3][4] 복서는 "Pinhal"이 "소나무숲(pine grove)"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베리아 출신 탐험가들이 지명으로 흔히 사용한 것이었으므로, 엘피냘 항구는 소나무숲에 있었던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10] 그는 기오도 근처에 있는 정박지 당가만(唐家灣)을 엘피냘로 보았으며, "이곳은 호문(虎門, the Bocca Tigris)과 마카오 사이에 수 세기동안 소나무숲이 번성한 유일한 곳이다"라고 언급하였다.[10] 존 크로슬리(John Crossley)는 복서가 언급한 당가만은 인근의 기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11] 금성문(金星門, Cumsingmoon) 항구 인근인 이 위치는 수 세기동안 외국 선박들이 사용한 곳으로, 특히 19세기에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자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11]6. 사건의 여파
엘피냘 사건 직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는 마닐라 왕립 아우디엔시아에 후안 사무디오의 엘피냘 설립 항해를 승인하지 않았다고 알렸다.[33] 하지만 그는 필리핀 총독에게 엘피냘 복귀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요청했다.[33] 그럼에도 스페인은 엘피냘을 수복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중국 진출 시도는 종결되었다.[34] 중국-스페인 간 무역은 1626년 스페인령 포르모사 수립 전까지 중국 상인들이 마닐라로 가서 무역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34] 1627년 엘피냘 항구 소유권 수복 계획이 다시 나왔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35]
포르투갈인들은 이 사건 이후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위협을 우려하여 경계심이 강화되었다.[36] 1601년, 네덜란드 선박이 마카오에 도착하자,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은 네덜란드 정찰대를 감금하고 17명을 즉결 처형하는 강경 대응을 보였다.[36] 이러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갈등은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이어졌고, 1622년 마카오 공격을 포함, 1661년 전쟁이 끝날 무렵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였다.[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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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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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2]
간행물
Enemy at the Gates - Macao, Manila and the "Pinhal Episode" (end of the 16th Century)
200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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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nando de los Ríos Coronel and the Spanish Philippines in the golden age
Ashgate
2011
[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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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문서
乾隆『廣東通志』卷58「外番志」중, "呂宋國 : 從前未至, 明永樂中一朝. 萬曆二十六年(1598)八月初五日, 徑抵濠鏡澳住舶, 索請開貢. 督撫司道咸謂其越境違例, 議逐之, 諸澳番亦謹守澳門, 不得入. 九月, 移泊虎跳門, 言, 候丈量. 越十月, 又使人言, 已至甲子門, 舟破趨還, 遂就虎跳門, 徑結屋羣居不去. 海道副使章邦翰, 飭兵嚴諭, 焚其聚落. 次年(1599)九月, 始還東洋. 或曰, '此閩廣商誘之使來也.'"
[7]
서적
O Pinhal與 El Pinal考 (Research on O Pinhal and El Pinal)
Macao Foundation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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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us Nijhoff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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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my at the Gates - Macao, Manila and the \"Pinhal Episode\" (end of the 16th Centur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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