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3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펠리페 3세는 스페인 왕국의 왕으로, 정치를 싫어하여 총신 레르마 공작에게 대부분의 업무를 위임했다. 그는 네덜란드와의 휴전, 모리스코 추방 등을 단행하며 스페인 제국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의 치세는 경제적 어려움과 종교적 문제로 특징지어졌으며, 역사적으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군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포르투갈의 30년 전쟁 관련자 - 주앙 4세
주앙 4세는 1640년 포르투갈 독립을 쟁취하고 스페인과의 복고 전쟁을 이끈 브라간사 공작 출신의 국왕으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더불어 음악가로서 문화 예술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그의 딸은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다. - 스페인의 30년 전쟁 관련자 -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1559년에 태어나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제후 연맹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마그데부르크 약탈과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632년 레히 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 펠리페 3세 - 모리스코 추방
1609년 스페인에서 발생한 모리스코 추방은 종교적, 사회적 갈등, 경제적 어려움, 전쟁 패배 등을 배경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후손인 모리스코들을 강제로 추방한 사건으로, 펠리페 3세의 칙령에 따라 진행되어 스페인 경제에 타격을 입혔고 소수자 차별의 역사적 교훈으로 남았다. - 펠리페 3세 - 산토 토마스 대학교
산토 토마스 대학교는 1611년 마닐라에 설립된 필리핀 최고(最古)의 사립 로마 가톨릭 연구 대학이자 아시아 최대 가톨릭 대학교 중 하나로, 교황청립 및 왕립 대학교 칭호를 가지며, 캠퍼스는 국립 역사 랜드마크 및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펠리페 3세 | |
---|---|
기본 정보 | |
![]() | |
재위 | 1598년 9월 13일 – 1621년 3월 31일 |
전임자 | 펠리페 2세 |
후임자 | 펠리페 4세 |
출생일 | 1578년 4월 14일 |
출생지 | 마드리드, 카스티야 왕관, 스페인 |
사망일 | 1621년 3월 31일 |
사망지 | 마드리드, 카스티야 왕관, 스페인 |
매장지 | 엘 에스코리알 |
배우자 |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 (1599년 4월 18일 결혼, 1611년 10월 3일 사망) |
자녀 | 안, 프랑스 왕비 인판타 마리아 펠리페 4세 마리아 안나, 신성 로마 황후 인판테 카를로스 페르난도 추기경 인판타 마르가리타 인판테 알론소 |
왕가 | 합스부르크 왕가 |
아버지 | 펠리페 2세 |
어머니 | 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서명 | Firma del Rey Felipe III.svg |
칭호 | |
군주 | 스페인 국왕 포르투갈 국왕 나폴리 국왕 시칠리아 국왕 사르데냐 국왕 밀라노 공작 부르고뉴 공작 샤롤레 백작 |
언어별 이름 | |
스페인어 | Felipe III |
기타 | |
로마자 표기 | Felipe 3세 |
2. 생애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업무를 총신인 레르마 공작에게 맡겼다.[104] 펠리페 2세는 하루 14시간 이상 집무실에서 일했지만, 펠리페 3세는 정치를 싫어했다.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 즉위 직후 선왕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삼촌을 톨레도 대주교로 앉히는 등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했다.[105] 그는 복잡한 정책보다는 무난하고 손쉬운 일처리를 원했으며,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을 즐기느라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105]
1601년 레르마 공작은 수도를 바야돌리드로 옮겼으나 1609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같은 해 4월 9일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이 맺어졌으며, 같은 날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 추방령을 내렸다.[106] 이로 인해 발렌시아 왕국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 명, 아라곤 왕국에서 7만 명, 안달루시아에서 8만 명, 카스티야에서 3만 명 등 총 30만 명에 달하는 모리스코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104]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농지를 경작할 모리스코들이 사라지면서 비옥한 농지들 대부분이 버려졌고, 짐꾼, 마부 등 궂은 일을 할 인력도 부족해졌다.[105]
1612년 이후 레르마 공작의 정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레르마 가문의 권력 독점, 개인적인 부의 축적, 사치스러운 지출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40] 결국 펠리페 3세는 1618년 10월, 레르마 공작의 권한을 박탈하고 직접 통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40]
2. 1. 유년 시절
돈 카를로스가 정신병으로 사망한 후, 필리페 2세는 아들의 상태가 스페인 궁정의 당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5] 그는 카를로스의 교육이 당쟁의 영향을 받아 광기와 불복종으로 이어졌다고 믿었고, 그래서 이후 아들들의 양육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5] 필리페 2세는 디에고 왕자의 섭정이었던 후안 데 수니가를 필리페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가르시아 데 로아이사를 가정교사로 선택했다.[5] 이들은 필리페 2세의 측근 크리스토바오 데 모우라와 함께 협력했다. 필리페 2세는 이들이 협력하여 필리페 왕자에게 안정적인 양육을 제공하고 카를로스와 같은 운명을 피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었다.[6] 필리페의 교육은 후안 데 마리아나 신부가 제시한 왕자 교육 모델을 따랐는데, 어린 나이에 규제 부과와 격려에 중점을 두어 폭군도 아니고 신하들의 지나친 영향 아래 있지도 않은 국왕을 만들고자 했다.[6]
필리페 왕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대체로 호감을 받았다. '활기차고, 성격이 좋고, 진지하며', 경건하고, '활기찬 몸과 평화로운 성품'을 지녔지만, 체력은 약했다.[7] 불복종하고 정신병에 걸린 카를로스와 비교했을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는 필리페 왕자가 형보다 지능과 정치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7] 필리페는 라틴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와 천문학을 공부했고 능숙한 언어 능력자였던 것 같지만,[6] 최근 역사가들은 그의 가정교사들이 필리페의 유쾌하고, 경건하며, 공손한 성품에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상 그가 특별히 지능적이거나 학업적으로 재능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고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페는 순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딸들에게 보낸 서신은 궁정의 음모에 대처하는 그의 조언에서 특징적인 신중함을 보여준다.[9]
필리페는 10대 초반에 미래의 르마 공작이 될 당시 국왕의 시종이었던 데니아 후작을 처음 만났다.[8] 르마와 필리페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지만, 르마는 국왕과 필리페의 가정교사들에게 부적절한 인물로 여겨졌다. 필리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르마는 1595년 발렌시아 총독으로 파견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고 호소한 후 2년 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 필리페 2세는 왕자의 미래를 점점 더 걱정했고, 그의 아들의 미래의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로 모우라를 세우려고 시도하며, 그의 동맹자인 가르시아 로아이사 이 히론을 톨레도 대주교로 임명했다.[10] 왕자는 새로운 보수적인 도미니크회 신부를 고해 신부로 맞이했다.[10] 다음 해에 필리페 2세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필리페 3세가 되었다.
2. 2. 레르마 공작의 집권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달리 정치를 싫어했고, 대부분의 업무를 총신 레르마 공작에게 맡겼다.[104]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가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했다.[105] 그는 복잡한 정책보다는 무난하고 손쉬운 일처리를 원했으며,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기느라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105]1601년 레르마 공작은 수도를 바야돌리드로 옮겼으나 1609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같은 해 4월 9일에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이 맺어졌으며, 같은 날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106] 이로 인해 스페인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펠리페 3세의 치세부터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04][105]

펠리페 3세는 즉위 직후 레르마 공작을 왕실 고문으로 임명하고, 모든 정부 업무가 서면으로 제출되어 레르마 공작을 거쳐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지시했다.[23][24] 왕실 회의에서의 논의도 국왕의 서면 지시에 따라서만 시작되었고, 모든 왕실 회의 구성원들은 국왕의 대리인인 레르마 공작과 완전한 투명성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6] 1612년에는 펠리페 3세가 회의들에게 마치 그가 국왕인 것처럼 레르마 공작에게 복종하도록 명령할 정도였다.[25]
이러한 새로운 정부 시스템은 국왕이 직접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기존 개념과 반대되었기에 인기가 없었다.[30] 곧 스페인 정부는 레르마 공작의 친척, 하인, 정치적 친구들로 채워졌다.[31] 레르마 공작은 정치에서 자신의 공개적인 모습을 더욱 제한하고, 자신은 펠리페 3세를 위해 일할 뿐이라고 강조하며 대응했다.[32]
1612년 이후 레르마 공작의 정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레르마 가문의 권력 독점, 개인적인 부의 축적, 사치스러운 지출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40] 결국 펠리페 3세는 1618년 10월, 레르마 공작의 권한을 박탈하고 직접 통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40]
2. 3. 모리스코 추방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106] 이는 80년 전쟁의 12년 휴전 선언과 같은 시기에 발표되었다.[45] 모리스코들은 수 세기 전 레콩키스타 기간 동안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들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슬람 관습을 포함한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46]
모리스코들을 완전히 스페인에서 몰아내자는 생각은 발렌시아 대주교이자 발렌시아 총독이었던 후안 데 리베라가 제안했는데, 그의 견해는 펠리페 3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펠리페 3세가 800년 이상 스페인에 살았고 동화되어 있던 국민을 추방하도록 결정한 것은 교리적인 고려보다는 재정적인 고려, 즉 모리스코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에 기반했는데, 이는 스페인, 특히 발렌시아의 다른 기독교인들의 질투와 분노를 야기했다.[49] 왕실 재무부는 추방된 사람들의 자산을 몰수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은 저렴한 토지나 영지를 받게 되었다.[49]
펠리페 2세는 남부 지역의 국내 전략에서 모리스코의 위협 제거를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고, 1560년대에 동화 정책을 시도했지만, 1570년에 끝난 모리스코 반란을 야기했다.[47] 펠리페 2세는 통치 말년에 모리스코들을 개종시키고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다시 활성화했지만, 스페인 남부에만 약 20만 명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세기 초가 되자 이 정책이 실패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46]
1609년부터 1614년 사이에 약 275,000명[46]에서 300,000명[48]이 넘는 모리스코들이 스페인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해군과 3만 명의 군인이 동원되어 가족들을 오스만 튀니지 또는 사아디 왕조의 모로코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 어린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해결에 개입했는데, 이슬람 국가로 데려가 무슬림으로 키울 수 있는지, 스페인에 남아 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펠리페는 7세 미만의 모리스코 어린이는 이슬람 국가로 데려갈 수 없다고 결정했지만, 발렌시아에 남은 어린이들은 노예가 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으며,[49] 리베라의 극단적인 제안 중 일부는 거부했다.[50]
이 조치는 당시에는 인기가 있었고 이전 정책과도 일치했지만, 발렌시아 왕국, 아라곤 왕국, 무르시아 왕국의 경제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 지역의 값싼 노동력 공급과 임대료를 내는 토지 소유자 수가 상당히 감소했고, 농업 생산량도 감소했다.[51] 사탕수수와 쌀 재배는 뽕나무, 포도밭, 밀로 대체되어야 했다.
발렌시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 명, 아라곤에서 7만 명, 안달루시아에서 8만 명, 카스티야에서 3만 명 등 총 3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스페인에서 빠져나갔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104] 농사를 지을 모리스코들이 사라지면서 비옥한 농지들 대부분이 버려졌고 짐꾼, 마부 등 궂은 일을 할 인력도 없어졌다.[105]
2. 4. 말년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달리 정치를 싫어했고, 대부분의 업무를 총신 레르마 공작에게 맡겼다.[104]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 즉위 직후 선왕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105] 레르마 공작은 무난하고 쉬운 일처리를 선호했으며,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105]1601년 수도를 바야돌리드로 옮겼으나 1609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같은 해 4월 9일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모리스코 추방령이 내려졌다.[106] 이로 인해 30만 명에 달하는 모리스코들이 스페인을 떠나면서, 스페인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104] 펠리페 3세의 치세부터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612년 이후 레르마 공작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레르마 가문의 권력 독점, 개인적인 부 축적, 사치스러운 지출은 그의 아들 우세다 공작, 크리스토발 데 산도발마저 우려하게 만들었다. 펠리페 3세의 고해 신부 등의 10년간의 외교적 노력과 마가레타 왕비[15]의 압력으로, 펠리페 3세는 통치 방식을 바꾸려 했다. 펠리페 3세는 레르마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1618년 3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는 것을 지지했다.
레르마는 여러 세력의 연합에 의해 몰락했다. 아들 우세다는 발타사르 데 추니가, 올리바레스와 동맹을 맺었다. 레르마는 공작령으로 떠났고, 펠리페 3세는 10월에 전직 발리도(총신)의 권한을 박탈하고 직접 통치할 것을 선언했다.[40] 우세다가 궁정의 주요 목소리를 차지했지만, 데 추니가가 펠리페 3세의 외교 및 군사 장관이 되었다. 펠리페 3세는 레르마의 전 국무장관 로드리고 칼데론을 마가레타 왕비를 마법으로 죽였다는 의심 등으로 고문하고 처형했다.[41]
3. 대외 관계
펠리페 3세는 아버지로부터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영국-스페인 전쟁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쟁을 물려받았다. 펠리페 3세의 외교 정책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에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다.[64] 레르마에게 네덜란드 반란군에게 '피와 철'의 전쟁을 벌이라고 지시한 것이 그 예이다.[32]
1609년 스페인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펠리페 3세는 네덜란드와 휴전을 모색했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고, 1618년경에는 스피놀라, 푸엔테스, 비야프랑카, 오수나, 베드마르 등 펠리페 3세의 '총독'들의 정책이 마드리드의 레르마 정책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33] 이들은 해외에 파견된 중요한 스페인 대표들로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지도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판단과 심지어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하게 되었다.[33] 당시 정부의 소통에 대한 어려움이 이러한 현상을 부추겼지만, 이 현상은 필립 3세 치세에 그의 부왕이나 아들 시대보다 훨씬 두드러졌다.
이탈리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나타났다. 푸엔테스 백작은 밀라노 공국(Duchy of Milan) 총독으로서 마드리드로부터의 지침 부족을 이용하여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신의 매우 개입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1607년 베네치아 공화국(Venetian Republic)을 침략하여 교황청을 지원하겠다는 독자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38] 비야프랑카 후작 역시 밀라노 총독으로서 외교 정책에 대해 자신의 상당한 판단을 행사했다. 레르마의 측근인 산도발 가문과 결혼한 오수나 공작은 필립 치세 말기에 나폴리 총독으로 상당한 독립성을 보였다. 베네치아 주재 스페인 대사이자 영향력 있는 베드마르 후작과 함께 오수나는 광범위한 군대를 양성하고, 베네치아 선박을 나포하며, 충분히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반란의 위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결국 펠리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개입하여 선거에서 페르디난트 2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한 것은 레르마의 몰락과 마드리드 궁정 내 강경파들의 등장 이후였다.
3. 1. 네덜란드와의 관계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로부터 두 가지 주요 분쟁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의 중요한 일부였던 개신교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잉글랜드와의 비교적 최근의 분쟁이었으며, 스페인이 소규모 영국 군대에 막대한 군사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었다.펠리페 2세는 저지대에 남은 영토를 자신의 딸인 이사벨라 스페인 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알베르트 대공에게 상속했다. 이사벨라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그 지방은 다시 스페인 왕에게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이사벨라가 자녀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었기에,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였고 펠리페 2세는 펠리페 3세가 조기에 이 상황을 수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2] 결과적으로, 펠리페 3세의 네덜란드 외교 정책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대공들을 통해 수행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플랑드르 군(Army of Flanders)에서 스페인 장군으로 활약한 이탈리아 출신의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1603년 오스텐데 포위전(siege of Ostend)에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한 후, 마드리드의 중앙 평의회와 거의 독립적으로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하기 시작했다.[34] 그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중앙 자금 지원 없이도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35] 레르마는 스피놀라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에서 성공적인 군 지휘관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놀라의 낮은 출신을 경멸했고 그가 궁정에서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을 두려워했다.[36] 1618년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몇 년 동안, 스피놀라는 라인란트에 대한 개입과 저지대를 두 동강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적대 행위를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을 패배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 가톨릭 정치의 '거미줄 속의 거미'로 묘사된 스피놀라는 마드리드의 펠리페와 상당한 협의 없이 활동했다.[37]
펠리페 3세의 외교 정책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위 후 9년 동안 그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다.[64]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의 신하들에게 '피와 철'의 전쟁을 벌이라는 레르마에게 내린 지시는 이를 반영한다.[32] 1609년 스페인이 재정적으로 고갈되었고 펠리페 3세가 네덜란드와 휴전을 모색했음이 분명해진 후에는 축소 정책 기간이 뒤따랐다. 그러나 배경에서는 긴장이 계속 고조되었고, 1618년까지 펠리페 3세의 '총독'들의 정책은 마드리드의 레르마의 정책과 점점 더 상충되었다.[33] 펠리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개입하여 선거에서 페르디난트 2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네덜란드와의 재개전을 준비한 마지막 시기는 주로 레르마의 몰락과 마드리드 궁정에서 더욱 공격적인 새로운 조언자들의 등장 이후에 일어났다.
3. 2. 영국과의 관계
펠리페 3세는 즉위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두 가지 주요 분쟁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오랫동안 지속된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의 중요한 일부였던 개신교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잉글랜드와의 비교적 최근의 갈등이었다. 이 전쟁은 스페인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소규모 영국 군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다.펠리페 3세의 외교 정책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위 후 처음 9년 동안 그는 '위대한 승리'를 얻기 위해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64] 레르마에게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신하들에게 '피와 철'의 전쟁을 벌이라고 지시한 것에서 이러한 강경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32] 1609년, 스페인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펠리페 3세는 네덜란드와 휴전을 모색했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고, 1618년경에는 펠리페 3세의 '총독'들—스피놀라, 푸엔테스, 비야프랑카, 오수나, 베드마르 등—의 정책이 마드리드의 레르마 정책과 점점 더 갈등을 빚게 되었다.[33] 펠리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개입하여 선거에서 페르디난트 2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다시 준비한 마지막 시기는 주로 레르마의 몰락과 마드리드 궁정에서 더욱 강경한 새로운 조언자들이 등장한 이후였다.
3. 3. 30년 전쟁 개입
펠리페 3세는 아버지로부터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영국-스페인 전쟁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쟁을 물려받았다. 그의 외교 정책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에는 '위대한 승리'를 위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다.[64] 레르마에게 네덜란드 반란군에게 '피와 철'의 전쟁을 벌이라고 지시한 것이 그 예이다.[32]1609년 스페인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펠리페 3세는 네덜란드와 휴전을 모색했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고, 1618년경에는 스피놀라, 푸엔테스, 비야프랑카, 오수나, 베드마르 등 펠리페 3세의 '총독'들의 정책이 마드리드의 레르마 정책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33]
특히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플랑드르 군(Army of Flanders)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1603년 오스텐데 포위전(siege of Ostend)에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다.[34] 그는 마드리드의 중앙 평의회와 거의 독립적으로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했으며, 스페인의 자금 지원 없이도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35] 레르마는 스피놀라를 경계했는데, 그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낮은 출신을 경멸했고, 궁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36] 1618년 전쟁 발발 직전, 스피놀라는 라인란트 개입과 저지대 분할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을 패배시키는 계획을 세웠고, 마드리드와 거의 협의 없이 활동했다.[37]
결국 펠리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개입하여 선거에서 페르디난트 2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한 것은 레르마의 몰락과 마드리드 궁정 내 강경파들의 등장 이후였다.
4. 종교 정책
펠리페 3세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599년 사촌 마가리타 오스트리아 여왕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왕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11] 마가리타 왕비는 궁정에서 레르마 공작의 영향력에 맞서 끊임없이 싸웠으며, 1611년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12] 펠리페 3세는 그녀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으며, 1605년 아들을 낳은 후에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14]
펠리페 3세의 종교 정책에는 왕비 외에도 여러 종교 고문들이 영향을 미쳤다. 그의 조모이자 고모인 마리아 오스트리아 황후와 그녀의 딸 마가리타 십자가 공주는 궁정 내에서 강력한 친(親) 오스트리아파이자 가톨릭 세력을 형성했다.[11] 이들은 1600년부터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재정 지원을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14]
펠리페 3세의 딸 마리아 아나 공주의 고해신부였던 후안 데 산타 마리아 신부는 왕의 말년에 그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15] 펠리페 3세의 고해신부 루이스 데 알리아가와 함께 1618년 레르마 공작의 실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15] 마가리타 왕비의 총애를 받던 수녀 마리아나 데 산 호세 역시 왕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15]
5. 경제 정책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업무를 총신인 레르마 공작에게 맡겼다.[104]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 즉위 직후 펠리페 2세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친인척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105] 그는 복잡한 정책보다는 쉬운 일처리를 선호했고,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정무를 소홀히 했다.[105]
1601년 레르마 공작은 수도를 바야돌리드로 옮겼으나, 1609년 다시 마드리드로 복귀했다. 같은 해 4월 9일,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모리스코 추방령이 내려졌다.[106] 이로 인해 발렌시아 인구의 3분의 1을 포함하여 총 30만 명에 달하는 모리스코들이 추방되었는데,[104]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105] 모리스코들이 사라지면서 많은 농지가 버려졌고, 궂은 일을 할 인력도 부족해졌다.[105]
펠리페 3세의 통치 기간은 심각한 경제 문제로 특징지어진다. 1590년대부터 계속된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했고, 1599년부터 1600년까지 그리고 그 후 몇 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의 10% 이상이 사망했다.[52] 마테오 알레만(Mateo Alemán)은 '카스티야에서 내려온 역병과 안달루시아에서 일어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고 묘사했다.[53] 흉작은 농촌 지역에, 역병은 도시 인구에 큰 영향을 미쳐 제조업 수요를 감소시키고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54]
재정적으로도 펠리페 3세는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빚을 물려받았고, 왕실 과세 부담이 카스티야에 집중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1616년까지 카스티야는 제국 총비용의 65%를 부담했다.[55] 펠리페 3세는 코르테스에서 충분한 자금을 얻지 못했고, 카스티야 코르테스에 더욱 의존하게 되면서 코르테스는 새로운 자금 지원을 특정 프로젝트에 묶기 시작했다.[56] 1607년의 재정 위기까지 코르테스는 3년마다 소집될 것을 주장했고, 펠리페 3세는 왕실 자금 사용에 대해 맹세해야 했다.[56]
펠리페 3세와 레르마 공작의 위기 해결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고, 왕실 가족 규모 증가로 인해 왕실 경비는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28][57] 펠리페 3세가 발행한 구리 베용(véllon) 주화는 상당한 불안정을 초래했다.[55] 1607년, 펠리페 3세는 파산했고, 왕실은 아시엔토 세금 제도를 장기 주로스(juros) 채권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이는 단기적인 이익만 가져왔다.[55] 1618년까지 펠리페 3세의 왕실 수입은 거의 모든 채권자에게 배정되어 지출 재량권이 거의 없었다.[55] 제노바 은행가와 대출자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들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58]
펠리페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아르비트리스타(arbitristas)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60] 이들은 농촌 인구 감소, 관료적인 행정, 사회 계층과 부패 등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61] 그러나 펠리페 3세는 지역 법률과 관습에 따라 통치하며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귀족 영지 통합을 장려하고 왕실 토지를 매각했으며,[62] 프랑스의 인텐단트(intendant)와 유사한 직책을 만들려는 시도는 지역 반대로 실패했다.[62] 펠리페 3세 말년에야 개혁 위원회인 후타 데 레포르마시온(Junta de Reformación)이 설립되었지만,[63] 실질적인 성과는 펠리페 4세 시대에 나타났다.
1609년, 스페인 전역에서 모리스코(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교도)의 추방이 실시되었다. 그 수는 27만 명에 달했고, 대부분 농민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심각한 식량 부족에 빠졌다.[104]
6.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
많은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펠리페 3세는 광범위한 근친혼의 결과였다. 그의 아버지인 펠리페 2세는 사촌 간의 결혼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조카인 안나와 결혼했는데, 안나 역시 사촌 간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펠리페 3세는 다시 그의 사촌 형제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 이러한 패턴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되어 궁극적으로 펠리페의 허약한 손자인 카를로스 2세의 시대에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계(Spanish Habsburg line)의 멸망으로 이어졌다.[98]
펠리페 3세의 생모 안나는 펠리페 2세의 조카이다. 카를 2세와 마리아 안나의 딸인 안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의 3촌 당숙과 조카 사이의 결혼으로 태어났으며, 교황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고 결혼했다.
이는 할아버지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 이래로 프랑스와의 대립, 아버지 펠리페 2세의 비타협적인 종교 정책, 포르투갈 합병과 관련이 있다. 당시 명문 스페인 왕실과 신하나 낮은 계급의 제후와의 결혼(귀천결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 각지의 왕족들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결혼도 할 수 없었다(당시 상식으로는 이단자는 이교도보다 악질로 여겨졌다). 같은 가톨릭 교도 왕실로 남은 것은 프랑스 왕가와 두 합스부르크가, 포르투갈 왕가였지만, 프랑스 왕가와는 적대 관계였고, 이 시기의 포르투갈 왕가는 펠리페 2세가 계승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왕국은 통합되어 있었다. 결국 선택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의 근친 결혼뿐이었다. 후에 프랑스 왕가에서도 왕비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선택지가 두 가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근친 결혼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후에 스페인 부르봉 왕가도 비슷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7. 유산과 평가
펠리페 3세는 역사가들에게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대 주요 역사가들은 그를 '눈에 띄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2] '비참한 군주',[3] '유일한 미덕은 악덕의 완전한 부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4]라고 묘사했다. 펠리페 3세는 '통치보다 사냥과 여행을 선호했던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라는 평판을 받아왔다.[83]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펠리페 3세의 통치 시기 스페인이 1598년보다 여러 면에서 더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는 수정주의적 분석이 제시되기도 한다. 알자스 지역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고,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서 우위를 점하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시작하려 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84]
하지만 펠리페 3세가 레르마를 총신(valido)으로 기용한 것은 그에 대한 주요한 역사적 비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펠리페 3세와 레르마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가 스페인 왕실 정부에 미친 영향에 대해 보다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83]
펠리페 3세의 통치 방식은 인문주의적 통치 이론에 대한 반응으로 이탈리아계 인사들 사이에서 유포되던 평화주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0] 또한, 펠리페 2세의 정부 시스템이 실용적이지 않고 왕국의 귀족들을 불필요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레르마의 견해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펠리페 자신의 성격과 레르마와의 우정이 그의 정책 결정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22] 그 결과 펠리페 2세의 모델에서 정부에 대한 왕권의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마가레타 왕비[15] 등의 압력으로 펠리페 3세는 레르마를 해임하고 직접 통치할 것을 선언했다.[40] 로드리고 칼데론은 마가레타 왕비를 마법으로 죽였다는 의심을 받았고, 병사 프란시스코 데 후아라스 살해 혐의로 펠리페 3세에 의해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41]
아메리카 대륙에서 펠리페 3세는 칠레의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 아라우코 전쟁이 격렬하게 계속되었고, 현지 마푸체족은 스페인 도시 7개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1598~1604).[72]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필리프 3세는 1608년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인디언 노예화에 대한 금지를 해제했다.[73][74] 하지만, 산티아고 왕립 청문회는 1650년대에 마푸체 노예 제도가 스페인과 마푸체족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80]
펠리페 3세는 1621년 3월 31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펠리페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8. 자녀
펠리페 3세는 1599년에 사촌 누이인 마가리타 오스트리아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5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이름 | 출생 | 사망 | 참고 |
---|---|---|---|
마가리타 오스트리아 (1584년 12월 25일 – 1611년 10월 3일; 1599년 결혼) | |||
안나 | 1601년 9월 22일 | 1666년 1월 20일 | 프랑스 왕비. 루이 13세와 결혼 |
마리아 | 1603년 2월 1일 | 1603년 3월 1일 | 요절 |
필리페 4세 | 1605년 4월 8일 | 1665년 9월 17일 | 스페인 국왕. 1)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1602년–1644년)와 2) 마리아나 오스트리아와 결혼 |
마리아 안나 | 1606년 8월 18일 | 1646년 5월 13일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 |
카를로스 | 1607년 9월 15일 | 1632년 7월 30일 | 미혼으로 사망 |
페르디난트 | 1609년 5월 16일 | 1641년 11월 9일 | 군 장군이자 추기경 |
마르가리타 | 1610년 5월 24일 | 1617년 3월 11일 | 요절 |
알폰소 | 1611년 9월 22일 | 1612년 9월 16일 | 요절 |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논문
[21]
논문
[22]
논문
[23]
논문
[24]
논문
[25]
논문
[26]
논문
[27]
논문
[28]
논문
[29]
논문
[30]
논문
[31]
논문
[32]
논문
[33]
논문
[34]
논문
[35]
논문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논문
[52]
논문
[53]
논문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논문
[62]
논문
[63]
논문
[64]
논문
[65]
논문
[66]
논문
[67]
논문
[68]
논문
[69]
논문
[70]
논문
[71]
논문
[72]
저널
Las cautivas de las Siete Ciudades: El cautiverio de mujeres hispanocriollas durante la Guerra de Arauco, en la perspectiva de cuatro cronistas (s. XVII)
2024-11-01
[73]
서적
The Other Slavery: The Uncovered Story of Indian Enslavement in America
Houghton Mifflin Harcourt.
[74]
서적
Historias de racismo y discriminación en Chile
2009
[75]
서적
Orbis incognitvs: avisos y legados del Nuevo Mundo
http://www.turismoci[...]
Universidad de Huelva
2019-09-01
[76]
저널
Jesuitas, Franciscanos y Capuchinos italianos en la Araucanía (1600–1900)
[77]
웹사이트
Misioneros y mapuche (1600–1818)
http://www.memoriach[...]
Biblioteca Nacional de Chile
2014-01-30
[78]
웹사이트
Guerra Defensiva
http://www.memoriach[...]
2019-08-03
[79]
저널
Chile como un "Flandes indiano" en las crónicas de los siglos VI y VII
http://www.scielo.cl[...]
2016-01-30
[80]
서적
Historia General de Chile
http://www.memoriach[...]
Editorial Universitaria
[81]
잡지
How could an orange kill a king?
2014-10-29
[82]
서적
Santuário
[83]
논문
[84]
논문
[85]
백과사전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86]
백과사전
Joanna
[87]
백과사전
Habsburg, Elisabeth (eigentlich Isabella von Oesterreich)
[88]
백과사전
Philip II
[89]
백과사전
Habsburg, Maria von Spanien
[90]
백과사전
Habsburg, Karl II. von Steiermark
[91]
백과사전
Maximilian II.
[92]
백과사전
Habsburg, Anna von Oesterreich (1528–1587)
[93]
백과사전
Habsburg, Anna von Oesterreich (Königin von Spanien)
[94]
백과사전
Wilhelm V. (Herzog von Bayern)
[95]
백과사전
Wilhelm V. (Herzog von Bayern)
[96]
백과사전
Habsburg, Maria von Bayern
[97]
서적
Christina of Denmark, Duchess of Milan and Lorraine, 1522–1590
https://archive.org/[...]
E. P. Dutton
[98]
백과사전
Habsburg, Philipp III.
[99]
백과사전
Ferdinand II.
[100]
백과사전
Habsburg, Margaretha (Königin von Spanien)
[101]
백과사전
Habsburg, Maria Anna von Bayern
[102]
백과사전
Habsburg, Maria Anna von Spanien
[103]
백과사전
Habsburg, Philipp IV.
[104]
서적
올라 에스파냐
고려대학교 출판부
[105]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106]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