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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고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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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라고사 조약은 152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맺은 조약으로, 몰루카 제도(향신료 제도)의 영유권을 확정하고, 양국의 활동 범위를 동경 17도를 기준으로 분할했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몰루카 제도와 그 동쪽의 지역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고, 스페인은 태평양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조약에 필리핀이 명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으며, 그 대가로 포르투갈로부터 35만 두카트를 받았다. 이 조약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경계선을 변경하지 않았으며, 스페인의 동등한 반구 주장을 유효하게 만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고, 포르투갈은 몰루카 제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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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고사 조약
조약 개요
명칭사라고사 조약
원어 명칭Treaty of Zaragoza
종류조약
체결일1529년 4월 22일
체결지사라고사, 아라곤
서명 장소사라고사
관련 조약토르데시야스 조약
관련 정보"모르카 문제"를 해결
당사국
참여국카스티야 왕관(합스부르크 가문)
포르투갈 왕국(1521)
시각 자료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자오선(보라색)과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으로 정해진, [[몰루카 제도]]의 반자오선(녹색)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자오선 (보라색)과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정해진 몰루카스 반대 자오선 (초록색)

2. 배경

디에고 리베이로의 1529년판 파드론 레알 상세 지도. 스페인이 향신료 제도가 자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주장하며 1521년 티도레 술탄국에 관여한 것을 보여준다.


교황 칙서를 통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와 스페인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권리가 공식화된 후, 포르투갈 왕국카스티야 왕국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새로 발견된 지역에 대한 독점권을 서로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대서양에 경선을 설정하여 선의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에 귀속시켰으나, 정확한 경계선은 설정되지 않아 양측은 각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탐험대는 1498년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발견했고, 포르투갈 인도 함대는 주요 남부 항구를 빠르게 장악하여 1504년 코친 전투에서 캘리컷 왕국을, 1509년 디우 전투에서 구자라트 술탄국과 그 동맹국을 물리쳤다. 1511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인 말라카를 정복했다. 알부케르크는 육두구와 정향의 유일한 원산지이자 유럽의 인도양 탐험의 주요 목적지였던 "향신료 제도"(현재 인도네시아반다 제도, 테르나테, 티도레)의 위치를 알게 되어,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가 이끄는 탐험대를 보냈다. 1512년 초 탐험대는 소순다 열도,[1] 부루섬, 암본섬, 세람섬을 거쳐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아브레우의 부관 프란시스쿠 세르랑은 난파로 인해 북쪽으로 항해하다 테르나테 근처에서 침몰했지만, 상 조앙 바티스타 데 테르나테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세르랑은 친구이자 사촌일 가능성이 있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에게 향신료 제도에 대한 편지를 보냈고, 이는 마젤란이 스페인 왕실에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를 위한 자금 지원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3] 이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이끌게 된 마젤란의 함대는 1521년 11월 6일 몰루카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젤란과 세르랑은 만나지 못했는데, 세르랑은 필리핀 막탄 전투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테르나테 섬에서 사망했다.[4]

마젤란-엘카노 원정 (1519-1522) 이후, 카를 5세는 몰루카 제도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카스티야 지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가르시아 조프레 데 로아이사가 이끄는 두 번째 탐험대를 파견했다.[5] 탐험대는 티도레에 정박하여 요새를 건설했으나, 이미 테르나테에 정착한 포르투갈과 갈등이 발생했다. 스페인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후에도 거의 10년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2. 1.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

1494년, 포르투갈 왕국카스티야 왕국(스페인)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를 탐험과 식민지화를 위한 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이 조약은 대서양에 경선을 설정하여 선의 서쪽은 카스티야에, 동쪽은 포르투갈에 귀속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조약에서 정확한 경계선은 정해지지 않았고, 양측은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 했다. 이로 인해 지구 반대편 경계가 모호해져 몰루카 제도 영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2. 2. 포르투갈의 동방 진출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탐험대는 1498년에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발견했고, 포르투갈 인도 함대는 주요 남부 항구를 빠르게 장악하여 1504년 코친 전투에서 캘리컷 왕국을, 1509년 디우 전투에서 구자라트 술탄국과 그 동맹국을 물리쳤다.[2]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1511년에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인 말라카를 정복했다. 알부케르크는 향신료 제도 (현재 인도네시아반다 제도와 테르나테, 티도레)가 육두구와 정향의 유일한 원산지이자 유럽의 인도양 탐험의 주요 목적지라는 비밀을 알게 되어,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가 이끄는 탐험대를 파견했다. 1512년 초, 탐험대는 소순다 열도,[1] 부루섬, 암본섬, 세람섬을 거쳐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아브레우의 부관인 프란시스쿠 세르랑은 배가 난파되어 북쪽으로 항해하다 테르나테 근처에서 침몰했지만, 포르투갈 공장과 요새인 상 조앙 바티스타 데 테르나테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세르랑은 친구이자 사촌일 가능성이 있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에게 향신료 제도에 대한 편지를 보냈고, 이는 마젤란이 스페인 왕실에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를 위한 자금 지원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4] 1521년 11월 6일,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이끄는 마젤란의 함대는 동쪽에서 "모든 향신료의 요람"인 몰루카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젤란과 세르랑은 만나지 못했는데, 세르랑은 필리핀막탄 전투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테르나테 섬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5]

2. 3. 마젤란-엘카노 탐험 (1519-1522)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친구이자 사촌일 가능성이 있는 프란시스쿠 세르랑에게서 향신료 제도에 대한 편지를 받고, 스페인 왕실에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를 후원하도록 설득했다.[2][3]

1521년 11월 6일, 마젤란의 함대는 동쪽에서 "모든 향신료의 요람"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당시 함대는 필리핀막탄 전투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이끌었다. 마젤란과 세르랑은 섬에서 만나기 전에, 거의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4]

마젤란-엘카노 탐험 (1519-1522) 이후, 카를 5세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몰루카 제도가 카스티야 지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가르시아 조프레 데 로아이사가 이끄는 두 번째 탐험대를 파견하여 섬을 식민지화했다.[5] 탐험대는 어려움 끝에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여 티도레에 정박했고, 그곳에 스페인은 자체 요새를 건설했다. 이미 테르나테에 정착한 포르투갈과의 필연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스페인은 전투 1년 만에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거의 10년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2. 4. 스페인의 몰루카 제도 진출 시도

마젤란-엘카노 탐험(1519-1522) 이후, 스페인카를 5세는 몰루카 제도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카스티야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가르시아 조프레 데 로아이사가 이끄는 탐험대를 파견하여 이 섬들을 식민지화하려 했다.[5] 이 탐험대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여 티도레섬에 정박했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미 테르나테섬에 정착해 있던 포르투갈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년 간의 전투 끝에 스페인은 패배했지만, 이후에도 거의 10년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분쟁은 몰루카 제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양국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3. 바다호스-엘바스 회의 (1524)

1524년, 몰루카 제도의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바다호스-엘바스 회의"를 개최했다. 양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경계선을 명확히 하고, 세계를 두 반구로 나누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양측은 각각 3명의 천문학자, 지도 제작자, 항해사와 3명의 수학자를 위원으로 임명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안토니우 드 아제베두 쿠티뉴, 디오고 로페스 드 세케이라, 지도 제작자이자 우주지리학자인 로포 호멩 등이 대표단으로 참여했다. 포르투갈의 전권대사는 메르쿠리오 가티네였다. 스페인 측에서는 메르쿠리오 가티네 백작, 가르시아 데 로아이사, 오스마 주교, 그리고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인 가르시아 데 파디야가 참석했다. 이전 포르투갈 지도 제작자였던 디오고 리베이루는 스페인 대표단에 소속이었다.[17]

회의는 바다호스와 엘바스에서 여러 차례 열렸으나, 당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지리적 지식이 부족하여 합의에 실패했다. 각 대표단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도와 지구본을 제시하며 몰루카 제도가 자국 영토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국 왕은 몰루카 제도의 위치가 확정될 때까지 어느 쪽도 추가 원정을 보내지 않기로 합의했다.[17]

회의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카스티야 작가 피터 마터 다르기에라에 따르면, 한 어린 소년이 포르투갈 대표단을 멈춰 세우고 세상 분할에 대해 질문했다. 대표단이 그렇다고 답하자, 소년은 자신의 엉덩이 골을 통해 분할선을 그으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4. 사라고사 조약 (1529)

사라고사 조약은 몰루카 제도에서 동쪽으로 297.5league (1763km, 952해리)[13] 또는 동경 17도로 경계를 정했다.[14] 이로써 몰루카 제도는 포르투갈의 관할 구역 안에 남게 되었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350,000 금 두카트를 지불했다.

이 조약에는 황제가 언제든지 조약을 철회하고자 할 경우 거래가 무효가 되며, 포르투갈은 지불한 돈을 반환받고, 각 국가는 "현재와 동일한 권리와 행동을 갖는다"는 안전 조항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그의 숙적 프랑수아 1세에 대한 코냑 동맹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돈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선의 서쪽에 있는 모든 땅과 바다, 즉 아시아와 지금까지 "발견된" 인접한 섬들을 통제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태평양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필리핀이 조약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은 선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이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2년 카를 5세는 필리핀을 식민지화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군도가 향신료가 없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지나치게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펠리페 2세는 1565년에 성공하여 마닐라에 최초의 스페인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가 예상했듯이 포르투갈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16]

이후 이베리아 연합 시대에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의된 선의 서쪽으로 훨씬 더 확장되었고, 조약에 따라 스페인 영토가 되었을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1750년, 마드리드 조약에서 새로운 경계가 그어졌으며, 브라질의 현재 경계가 확립되었다.

4. 1. 조약의 내용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몰루카 제도를 지배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필리핀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다.[16] 조약은 몰루카 제도에서 동쪽으로 297.5league (1763km, 952nmi) 또는 동경 17도로 경계를 정했다.[14] 그 대가로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350000두카트를 지불했다.[14]

이 조약에는 안전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황제가 원하면 언제든지 조약을 철회할 수 있고, 이 경우 포르투갈은 지불한 돈을 돌려받고 양국은 "현재와 동일한 권리와 행동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프랑수아 1세에 대한 코냑 동맹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돈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실제로 조약이 철회되지는 않았다.[14]

이 조약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설정된 분계선을 명확히 하거나 변경하지 않았으며, 스페인의 동등한 반구 (각 180°)에 대한 주장도 유효하게 만들지 못했다. 포르투갈의 부분은 지구 둘레의 약 191°였고, 스페인의 부분은 약 169°였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두 부분의 정확한 크기에 대한 ±4°의 불확실성이 있었다.[15]

비록 필리핀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은 조약상 경계선의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2년 카를 5세는 필리핀에 향신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 포르투갈이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필리핀을 식민지화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펠리페 2세는 1565년에 성공하여 마닐라에 최초의 스페인 무역 기지를 설립했고, 예상대로 포르투갈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16]

4. 2. 조약의 한계

이 조약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를 명확히 하거나 변경하지 않았고, 스페인이 주장한 양국 반구의 동일 크기(각 180°) 요구도 충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두 조약의 경계선은 지구를 불균등하게 나누었다. 포르투갈 쪽은 약 191°였고, 스페인 쪽은 약 169°였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두 부분의 크기는 ±4° 정도의 불확실성이 있었다.[15]

5. 조약의 영향

사라고사 조약은 몰루카 제도에서 동쪽으로 1763km (952nmi) 떨어진 곳에 경계선을 정했다.[13][1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코냑 동맹 전쟁 자금을 위해 조약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거나 변경하지 않았고, 스페인의 반구(180°)에 대한 주장도 유효하게 만들지 못했다. 두 조약에 의해 지구는 불균등하게 나뉘었는데, 포르투갈은 약 191°, 스페인은 약 169°를 차지했다. 토르데시야스 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정확한 크기에는 ±4°의 불확실성이 있었다.[15]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스페인은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동군연합을 이루었는데, 이때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1750년 마드리드 조약에서 새로운 경계가 확립되어 브라질의 현재 경계가 만들어졌다.

5. 1. 포르투갈의 몰루카 제도 지배 강화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조약선의 서쪽에 있는 모든 땅과 바다, 즉 아시아와 지금까지 "발견된" 인접한 섬들을 통제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태평양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14] 조약에는 필리핀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스페인은 조약선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2년까지 카를 5세는 필리핀을 식민지화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군도에 향신료가 없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카를 5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펠리페 2세는 1565년에 성공하여 마닐라에 최초의 스페인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가 예상했듯이 포르투갈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16]

5. 2.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화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이 서경 17도 서쪽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필리핀에 대한 암묵적인 권리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2년 카를 5세는 필리핀에 향신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 포르투갈이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필리핀 식민지화를 결정했다. 초기 시도는 실패했지만, 1565년 펠리페 2세가 마닐라에 최초의 스페인 무역 기지를 건설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예상대로 포르투갈의 반대는 미미했다.[16]

5. 3. 이베리아 연합과 브라질 확장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스페인은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이 시기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경계선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는데,[16] 이는 본래 조약에 따르면 스페인 영토였어야 할 지역까지 확장된 것이었다. 이후 1750년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새로운 경계가 확립되면서 현재 브라질의 국경선이 만들어졌다.

참조

[1] 서적 Nathaniel's Nutmeg Sceptre
[2] 간행물 Between east and west: the Moluccas and the traffic in spices up to the arrival of Europeans https://archive.org/[...] DIANE Publishing
[3] 서적 Indonesian Banda: Colonialism and its Aftermath in the Nutmeg Islands Yayasan Warisan dan Budaya Banda Naira
[4] 서적 The book of Duarte Barbosa: an account of the countries bordering on the Indian Ocean and their inhabitants
[5] 문서 The expedition of García Jofre de Loaísa (1525–1526) aimed to occupy and colonise the Moluccas. The fleet of seven ships and 450 men included the most notable Spanish navigators including Juan Sebastián Elcano, who lost his life in this expedition, and the young Andrés de Urdaneta.
[6] 문서 The records of the committee, held in the Portuguese national archive at Torre do Tombo, include a letter written by Lopo Homem, Portuguese cartographer and cosmographer, alluding to the quarrel between the two kingdoms over the sovereign rights of each.
[7] 서적 The decades of the newe worlde or west India conteynyng the nauigations and conquestes of the Spanyardes, with the particular description of the moste ryche and large landes and ilandes lately founde in the west ocean perteynyng to the inheritaunce of the kinges of Spayne. ... Wrytten in the Latine tounge[sic] by Peter Martyr of Angleria, and translated into Englysshe by Rycharde Eden. https://quod.lib.umi[...] Early English Books Online Text Creation Partnership 2018-07-13
[8] 서적 Over the Edge of the World: Magellan's Terrifying Circumnavigation of the Globe
[9] 웹사이트 A History of the World in 12 Maps. https://books.google[...] 2018-07-13
[10] 문서 As an example of this partiality, the chief advisor to Charles V, Jean Carondelet, possessed a globe by Franciscus Monachus which showed the islands in the Spanish hemisphere.
[11] 서적 The discoveries of the world: from their original unto the year of our Lord 1555 The Hakluyt Society
[12] 간행물 The image of the Archipelago in Portuguese cartography of th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http://www.persee.fr[...] Persee
[13] 간행물 The linear league in North America
[14] 웹사이트 The Philippine Islands, 1493-1803 http://www.fullbooks[...]
[15] 웹사이트 Demarcation Lines https://libweb5.prin[...] Princeton University Library 2018-04-20
[16] 서적 A History of the Philippines https://books.google[...] UP Press 2018-04-20
[17] 서적 Nathaniel's Nutmeg Sceptre
[18] 간행물 Between east and west: the Moluccas and the traffic in spices up to the arrival of Europeans https://books.google[...] DIANE Publishing
[19] 서적 Indonesian Banda: Colonialism and its Aftermath in the Nutmeg Islands Yayasan Warisan dan Budaya Banda Naira
[20] 서적 The book of Duarte Barbosa: an account of the countries bordering on the Indian Ocean and their inhabitants
[21] 서적 The discoveries of the world: from their original unto the year of our Lord 1555 The Hakluyt Society
[22] 간행물 The image of the Archipelago in Portuguese cartography of th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http://www.persee.fr[...] Persee
[23] 웹사이트 The Philippine Islands, 1493-1803 http://www.full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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