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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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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이다. 1868년 여산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동헌 앞, 베다리 옆 옥터, 시장 부근 등지에서 백지사,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처형되었으며, 김성첨을 비롯한 23명이 기록되었으나, 실제 순교자는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순교성지에는 순교상, 십자가, 안내판, 주차장 등이 있으며,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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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여산숲정이순교성지
여산숲정이순교성지
국가대한민국
위치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295번지 외 26필지
시대조선시대
지정 번호125
지정일2007년 10월 19일
유형기념물
면적일원
익산시 여산면

2. 역사적 배경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도 처형은 주로 전주, 여산, 나주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1866년에는 주로 전주에서, 1868년에는 여산에서 집중적으로 처형이 진행되었다. 당시 전라도에는 순천부의 전진영, 운봉현의 좌진영, 나주목우진영, 여산현의 후진영, 전주의 중진영의 5개 진영(鎭營, 討捕營)이 있었고, 각 진영의 토포사는 영장을 겸직하며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병인박해 때 여산에서도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1868년부터 동헌 앞 백지사터, 베다리 옆 옥터의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사 시키는 것), 교수형(배다리옆 옥터의 교수대), 참수형(시장과 부근의 숲정이) 등으로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이고 기록도 없이 순교한 신도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전주 숲정이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고 한다.

2. 1. 전라도 지역의 순교 상황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도 처형은 주로 전주, 여산, 나주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1866년에는 주로 전주에서, 1868년에는 여산에서 집중적으로 처형이 진행되었다. 당시 전라도에는 5개의 진영(鎭營, 討捕營)이 있었다. 순천부의 전진영, 운봉현의 좌진영, 나주목우진영, 여산현의 후진영, 전주의 중진영이 있었고, 각 진영의 토포사는 영장을 겸직하며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병인박해 때 여산에서도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1868년부터 동헌 앞 백지사터, 베다리 옆 옥터의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사 시키는 것), 교수형(배다리옆 옥터의 교수대), 참수형(시장과 부근의 숲정이) 등으로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이고 기록도 없이 순교한 신도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전주 숲정이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고 한다.

2. 2. 여산 지역의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 천주교도들의 처형은 주로 전주와 여산, 나주 등에서 이루어졌는데, 1866년 당시에는 주로 전주에서, 1868년에는 여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1] 여산에서는 1868년부터 동헌 앞 백지사터, 베다리 옆 옥터의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사 시키는 것), 교수형(배다리옆 옥터의 교수대), 참수형(시장과 부근의 숲정이) 등으로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었다.[1]

기록에 남아있는 순교자는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지만,[1] 기록 없이 순교한 신자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주 숲정이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동헌(지금의 경로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형이 집행되었다.[1]

3. 순교 방식

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뿌려 질식시키는 백지사(白紙死) 형벌은 여산 동헌(현재의 경로당) 뜰에서 주로 집행되었다.[1]

3. 1. 백지사(白紙死)

백지사(白紙死)는 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뿌려 질식시키는 형벌이다. 여산 동헌(현재의 경로당) 뜰에서 주로 집행되었다.[1]

4. 주요 순교자

여산 숲정이에서 순교한 주요 순교자들


병인박해 때 여산 숲정이에서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김성첨(토마스)과 그의 가족이 있다. 김성첨은 금산, 진산, 고산 등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이끌던 지도자로, 옥중에서도 신자들을 격려하며 신앙을 지켰다.[1] 김성첨과 그의 가족 6명은 옥중에서 함께 기도하고 형벌과 굶주림을 견디며 순교하였다.[1]

4. 1. 김성첨(토마스)과 그 가족



김성첨(토마스)은 금산, 진산, 고산 등지에서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김성첨은 옥중에서도 신자들에게 "천당 지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을 참아받지 못하겠냐? 감심으로 참아받자"라며 격려하였다고 전해진다.[1]

김성첨과 그의 가족 6명은 옥중에서도 항상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형제애를 나누며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며 순교하였다.[1]

5.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의 현재

현재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이다.

5. 1. 위치 및 구성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여산면 소재지에서 여산고등학교 방향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논 가운데에 있다. 순교 성지 안에는 순교상, 십자가, 안내판, 화장실, 주차장이 있으며 철망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주변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1번 도로가 지나가고 동쪽, 서쪽, 남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1]

진입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왼쪽에 주차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여산 순교 성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진입로를 따라 앞쪽에는 화장실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쉼터와 음수대가 있다.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안내판이 있으며 계단 위에 십자가와 순교상이 있다.[1]

5. 2. 현지 안내문 내용

이곳은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로, 1868년(무진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전주교구 제2의 성지이다.[1]

1866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탄압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가장 극심했다. 당시 금산, 진산, 고산의 깊은 산골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끌려와 처형되었는데, 그중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 6명도 순교하였다. 김성첨은 굶주림과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천당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 정도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아 받자"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들은 감옥 안에서도 쉬지 않고 함께 기도하고 형제애를 나누며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견뎌냈다.[1]

순교자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동헌(지금의 경로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사시키는 백지사(白紙死)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옛 동헌 뜰에는 당시의 박해 사실을 보여주듯 대원군척화비가 서 있다.[1]

6. 의의와 평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의 천주교도들은 주로 전주, 여산, 나주 등에서 처형되었다. 1866년에는 주로 전주에서, 1868년에는 여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졌으며,[1] 여산에서는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 순교하였다.[1]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순교자이고, 기록 없이 순교한 신도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아 전주 숲정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라고 한다.[1]

여산 성지는 1868년(무진년) 박해 때 순교자들이 나온 곳으로, 전주교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지이다.[1]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가장 심해졌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깊은 산골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끌려와 처형되었는데, 그중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과 그의 가족 6명이 순교하였다. 김성첨은 굶주림과 혹독한 형벌에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천당의 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아 받자"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1]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순교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교육의 장으로서 가치가 있다.

6. 1.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의 중요성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의 천주교도들은 주로 전주, 여산, 나주 등에서 처형되었다. 1866년에는 주로 전주에서, 1868년에는 여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1] 당시 전라도에는 5진영(鎭營, 討捕營)이 있었는데, 순천부의 전진영(前鎭營), 운봉현의 좌진영, 나주목우진영, 여산현의 후진영, 전주의 중진영이 있었고, 토포사가 영장을 겸직하며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다.[1]

병인박해 때 여산에서도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1868년부터 동헌 앞 백지사터, 베다리 옆 옥터의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사 시키는 것), 교수형(배다리옆 옥터의 교수대), 참수형(시장과 부근의 숲정이) 등으로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 순교하였다.[1]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순교자이고, 기록 없이 순교한 신도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아 전주 숲정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라고 한다.[1]

6. 2. 순교자들의 신앙

여산 성지는 1868년(무진년) 박해 때 순교자들이 나온 곳으로, 전주교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지이다.[1]

1866년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가장 심해졌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깊은 산골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끌려와 처형되었는데, 그중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과 그의 가족 6명이 순교하였다. 김성첨은 굶주림과 혹독한 형벌에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천당의 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아 받자"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감옥 안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고,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며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견뎠다.[1]

순교자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동헌(지금의 경로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형이 집행되었다. 옛 동헌 뜰에는 당시의 박해 사실을 증명하듯이 흥선대원군척화비가 서 있다.[1]

6. 3. 역사 교육 및 순례지로서의 가치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순교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교육의 장으로서 가치가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라도 천주교도들의 처형은 주로 전주와 여산, 나주 등에서 이루어졌는데, 1868년에는 여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당시 전라도에는 5진영(鎭營, 討捕營)이 있었는데, 순천의 전진영(前鎭營), 운봉의 좌진영, 나주우진영, 여산의 후진영, 전주의 중진영이 있어 토포사가 영장을 겸직하였고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병인박해 때 여산에서도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1868년부터 동헌 앞 백지사터, 베다리 옆 옥터의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사 시키는 것), 교수형(배다리옆 옥터의 교수대), 참수형(시장과 부근의 숲정이) 등으로 김성첨, 김면언, 김정규 등 23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이고 기록도 없이 순교한 신도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전주 숲정이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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