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2. 연혁
1863년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였다.[2] 당시 조선은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와 무력 시위에 직면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며 외세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특히 1871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1871년 음력 4월,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로 및 지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5] 척화비에는 서양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행위라는 내용의 경고 문구가 새겨졌다.[5]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실각하자 상황이 변했다. 일본 공사의 요구가 있었고,[3]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이 직접 철거를 명하면서[8] 대부분의 척화비가 철거되었다. 서울 종로 보신각 부근에 있던 척화비는 땅에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공사 중 발견되어 현재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는 서울, 부산, 경주, 동래군, 함양군, 청주시 등 약 30여 곳에 척화비가 남아 있다.[9][3]
2. 1. 건립 배경
1863년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정권을 장악하였다.[2] 당시 국제 정세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한반도로 접근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고 때로는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초기에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자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 묘 도굴 미수 사건 등을 겪으면서 외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결국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국가의 정통 학문인 주자학을 수호하고 서학과 기독교 등 외래 사상을 배척하려는 위정척사 사상과도 맞닿아 있었다.[5][6]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다.[5]
특히 1871년(고종 8년) 미국의 침략으로 발발한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외국과의 수교 및 통상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의지를 널리 알리고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1871년 음력 4월 서울의 종로와 전국의 주요 지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5]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새겨 서양 열강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5]
2. 2. 건립과 철거
1863년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했다.[2] 당시 조선은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이들 국가는 한반도에 접근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무력 도발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집권 초기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며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즉 쇄국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국가의 정학(正學)인 주자학을 옹호하고 서학이나 기독교 등 외래 사상을 배척하려는 위정척사 사상과 맞물려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정치 원리로 삼아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했다.[5][6]
특히 1871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조선 왕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외국과의 수교 및 통상을 금지하는 쇄국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5] 이러한 결의를 널리 알리고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1871년 음력 4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5]
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척화비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양이 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는 서양 열강과의 화친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5]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후손들에게 경고했다.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또한 서양 열강과 동일시(왜양일체, 倭洋一體)하여 통상 요구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5] 척화비 건립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는 일부 기여했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도 있다.[7]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실각하면서 철거되기 시작했다. 일본 공사의 요구가 있었으며,[3] 고종 또한 개화 정책을 국시로 삼고 서양의 기술과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서 척화비 철거를 명했다.[8] 서울 종로 보신각 부근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1882년 9월 26일(음력 8월 15일) 땅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 이전 공사 중 발견되어 현재 경복궁 근정전 서쪽 행각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는 서울, 부산, 경주, 동래군, 함양군, 청주시 등 약 30여 곳에 척화비가 남아 있다.[9][3]
3. 내용
척화비에는 주문(主文)으로 다음 문구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4]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그 다음, 작은 글씨로 비석 옆면에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다.[4]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 문구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4]
이는 서양 열강과의 화친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쇄국을 유지하겠다는 흥선대원군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5] 또한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법으로 삼아 자손 대대로 따라야 함을 나타냈다.
4. 척화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추진된 쇄국 정책의 상징물이다.[5][6]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국가의 정통 학문으로 삼아 양학이나 기독교와 같은 외래 사상을 배척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전국 서원을 통해 널리 퍼져 있었다.[5]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을 정치 원리로 삼아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한반도 연안에 접근하는 서구 열강 세력을 무력으로 배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생했다.[5]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 6월(음력 4월), 대원군은 서양과의 화친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쇄국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5]
척화비에는 "양이 침범, 싸우지 않으면 화친,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판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문구를 새겨 서양과의 교류를 강력히 경계했으며, 뒷면에는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새겨 후대에도 이 뜻을 따르도록 명시했다.[5]
척화비는 한성(현 서울특별시)을 비롯한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곳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5] 대원군 정권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마저 서양과 동일시하며(왜양일체)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등 강경한 쇄국 정책을 이어갔다.[5]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일부 기여한 측면도 있으나[7],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국제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고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차단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7]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한 척화비 건립은 당시 조선 지배층의 폐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실각하자, 고종은 개화를 국가 정책 방향으로 선언하고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수용할 것을 명하며 척화비 철거를 지시했다.[8] 서울 종로 보신각 근처에 있던 척화비는 이때 땅에 묻혔다가 1915년 발견되어 현재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 서울, 부산, 경주, 경상도의 동래군, 함양군, 충청도의 청주시 등 대한민국 국내에서 약 30기의 척화비가 남아 그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3]
5. 현황
참조
[1]
서적
Early Korean Encounters with the United States and Japan: Six Essays o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
https://books.googl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8
[2]
웹사이트
History Reference
https://encykorea.ak[...]
[3]
웹사이트
History reference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Stele content
http://contents.hist[...]
[5]
문서
糟谷(2000)pp.223-225
[6]
문서
대원군
[7]
웹사이트
코토뱅크 "척화비"
https://kotobank.jp/[...]
[8]
문서
糟谷(2000)pp.232-233
[9]
뉴스
140살 척화비 이젠 천덕꾸러기 신세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2-06-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