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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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택은 유방을 따라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그를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한왕에 봉해졌을 때 후가 되었다. 삼진 평정전에서 활약하고 팽성 전투 이후 남부 전선에서 초군을 방어했다. 기원전 201년에 주려후에 봉해졌으며,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 유일하게 열후에 봉해졌다. 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령무후와 도무왕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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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택 | |
---|---|
기본 정보 | |
이름 | 려택 |
한자 표기 | 呂澤 |
출생 | 불명 |
사망 | 기원전 199년 |
사망 장소 | 불명 |
시대 | 전한 |
직함/칭호 | 주려후 |
아버지 | 여공 |
형제자매 | 려택、여석지、여치、여후 |
자녀 | 여대、여산 |
2. 가계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1]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 삼진 평정전에서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적(翟) 공략을 지휘했다.[2]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3] 6월, 유방은 관중에서 유영을 태자로 세우고 장한을 무너뜨린 후 형양으로 돌아갔다.[4] 여택은 남부 전선에서 초군 방위선에 있었다.
3. 약력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정월, 여택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5]
고조 8년(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고조 9년(기원전 198년)에 아들 여대가 려후(酈侯)에 봉해졌다.[5]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여름에 령무후(令武侯)로 시호되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11월에는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여후가 여택의 아들 여대를 여왕(呂王)에 봉하기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여택을 왕으로 봉하여 그 명목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6]
3. 1. 한나라 건국 이전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1]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 장한, 사마흔, 동예의 삼진(三秦) 평정전에서 여택은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정복, 곽정, 곽몽, 주진, 고봉, 풍무택 등의 장교를 이끌고 적(翟) 공략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2]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3]
3. 2. 한나라 건국과 활약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1]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의 삼진(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평정전에서 여택은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정복, 곽정, 곽몽, 주진, 고봉, 풍무택 등의 장교를 이끌고 적 공략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2]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3] 6월, 유방은 관중까지 돌아와 유영을 태자로 세우고 폐구에서 장한을 무너뜨리는 등의 일을 한 후에 형양으로 돌아갔다.[4] 한군은 그 후 한신이 이끄는 북부 공략과 형양, 오창, 성고 등 남부 방위에 전선이 나뉘었지만, 여택은 남부 전선에서 초군 방위선에 있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정월, 여택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5]
3. 3. 주려후 책봉과 사망
기원전 201년 정월,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나라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5]
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기원전 198년에 아들 여대가 려후(酈侯)에 봉해졌다.[5]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여름에 영무후(令武侯)로 시호되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11월에는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여후가 여택의 아들 여대를 여왕(呂王)에 봉하기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여택을 왕으로 봉하여 그 명목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6]
3. 4. 사후 추존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여름, 여택은 령무후(令武侯)로 시호되었다.[6]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11월, 여후는 여택의 아들 여대를 여왕(呂王)에 봉하기 위한 명목으로 여택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하였다.[6]
참조
[1]
Wikisource
『史記』高祖功臣侯者年表
[2]
논문
陳 (2019)
[3]
Wikisource
『史記』項羽本紀
[4]
Wikisource
『史記』秦楚之際月表
[5]
논문
邉見 (2015)
[6]
논문
邉見 (2015)
[7]
서적
사기
[8]
서적
사기
[9]
서적
한서
[10]
서적
한서
[11]
서적
한서
[12]
서적
사기
[13]
문서
사기, 한서 비교
[14]
문서
상제 피휘
[15]
문서
사기 기록 부재
[16]
문서
사기, 한서 기록 비교
[17]
문서
사기, 사기색은 오류 지적
[18]
문서
사기, 한서 순위 비교 및 중복
[19]
문서
원래 지명
[20]
문서
여나라와 제천나라
[21]
문서
추증 및 봉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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