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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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적 타협은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기독교 민주주의(DC)가 맺으려 했던 정치적 협력 관계를 의미한다. 1973년 칠레 쿠데타와 석유 위기, 그리고 파시즘 부활에 대한 우려 속에서 PCI의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DC와의 연정을 제안했다. 이 협력은 1976년 총선 이후 현실화되었지만, 중도 좌파 정당과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반대, 극좌 테러리즘의 증가, 그리고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을 겪으며 쇠퇴했다. 결국 1980년 DC의 반공산주의 프로그램 승리와 PCI의 정책 종말 선언으로 역사적 타협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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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다른 이름 | 이탈리아어: Compromesso storico 이탈리아어: Terza Fase (제3단계) 이탈리아어: Alternativa Democratica (민주적 대안) |
지지 정당 | 기독교민주당 (알도 모로) 이탈리아 공산당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
시기 | 1970년대 |
목표 | 정치적 안정과 국가 위기 극복 |
배경 | |
시대적 상황 | 196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의 불안정하고 격동적인 시기 ("납의 시대") |
주요 사건 | 테러 사건 정치적 극단주의 사회적 불안 |
주요 내용 | |
목표 |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간의 정치적 협력 및 정부 구성 참여 |
정치적 함의 |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부 참여 가능성 증대 기독교민주당의 권력 유지 및 안정 도모 |
전개 과정 | |
주창자 | 알도 모로,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
주요 단계 | 양당 간의 비공식적 대화 및 협상 기독교민주당 주도 정부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지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부 참여 시도 |
결과 및 영향 | |
정치적 결과 |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간의 협력 강화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적 정당성 강화 |
사회적 영향 | 사회적 긴장 완화 및 정치적 안정 도모 시도 |
비판 및 논쟁 | |
반대 세력 | 극우 및 극좌 세력 기독교민주당 내부 반대파 이탈리아 사회당 |
비판 내용 | 기독교민주당의 부패 및 권위주의적 성향 묵인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체성 희석 및 서구 사회주의로의 변절 |
종결 | |
주요 사건 | 알도 모로 납치 및 암살 사건 (1978년) |
종결 요인 | 알도 모로의 부재 양당 간의 신뢰 약화 정치적 환경 변화 |
역사적 의의 | |
평가 |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적 위상 변화 사회적 갈등 해결 및 정치적 안정 시도 |
2. 역사적 배경
칠레 쿠데타, 1973년 석유 위기, 납의 시대는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이끄는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역사적 타협을 추진하게 된 주요 배경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1973년 공산주의 잡지 ''린아시타''에 알도 모로가 지지한 기독교 민주주의(DC)와의 "민주적 연합"을 제안하는 기사를 발표했다.[1][2][3] 1976년, PCI와 DC 간의 정치적 동맹이 시작되었고, 모로 총리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베를링구에르를 긴급 회의에 포함시켰다.[7] PCI는 유럽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소련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나 이 타협은 이탈리아 공화당(PRI), 이탈리아 사회당(PSI) 등 중도 좌파 정당들과 줄리오 안드레오티 등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8] 일부 공산주의자들 역시 PCI의 DC와의 협력에 우려를 표했고,[9][10] PCI 지도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11][12]
1976년 총선 이후, PCI는 안드레오티의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으나, 극좌 테러리즘 증가로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하며 반체제적 성격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6]
2. 1. 1973년 칠레 쿠데타
1973년 칠레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가 무너진 사건은 이탈리아 공산당(PCI)에 큰 영향을 주었다. PCI 사무총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칠레의 사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하려면 온건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1][2][3] 그는 기독교 민주주의와의 "민주적 연합"을 제안했다.2. 2. 1973년 석유 위기
1973년 석유 위기는 서구 복지 국가에 큰 도전이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 등장의 배경이 되었다. 이 위기는 복지 지출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1929년 월가 대폭락이 나치즘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것처럼, 석유 위기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4] 스티븐 건들레는 PCI가 납의 시대 동안 테러리스트들의 긴장 전략과 중도 우파 및 극우의 선거 강세로 인해 파시스트 권위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고 우려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했다.[4]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PCI는 적어도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이탈리아식 사회주의를 구조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정부 참여를 목표로 했다.[5] 이는 1944년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 이후 전후 연립 정부와도 일치하는 "정통주의"적인 접근으로 볼 수도 있었다.[6]
2. 3. 납의 시대와 파시즘의 위협
1973년 석유 위기는 서구 복지 국가에 도전하고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야기했다. 이 위기는 복지 지출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1929년의 경제 위기가 나치즘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것처럼, 취약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4] 스티븐 건들레는 PCI가 납의 시대 동안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한 긴장 전략과 중도 우파 및 극우 세력의 선거 강세로 인해 파시스트 권위주의가 부활할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했다고 언급했다.[4]3. 역사적 타협의 전개
칠레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의 주도로 기독교 민주주의당(DC)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베를링구에르는 칠레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온건 세력과의 연합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1][2][3]
1973년 석유 위기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석유 위기는 복지 국가를 위협하고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PCI는 1929년 월가 대폭락 이후 나치즘이 부상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경제 위기가 자유 민주주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티븐 건들레는 납의 시대의 테러와 중도 우파 및 극우의 선거 강세로 인해 파시스트 권위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는 PCI의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고 지적한다.[4]
이에 PCI는 이탈리아식 사회주의를 확립하고 기존의 사회적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부 참여를 목표로 했다.[5] 이는 1944년 팔미로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 이후 전후 연립 정부와 유사한 "정통주의"로 볼 수도 있었다.[6]
1976년, PCI와 DC의 협력은 알도 모로 총리가 베를링구에르를 긴급 회의에 포함시키는 등 양가적인 정치 동맹으로 발전했다.[7] PCI는 스페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유럽 공산주의"를 추진하며 소련과의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나 이 타협은 이탈리아 공화당(PRI)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등 다른 중도 좌파 그룹과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 줄리오 안드레오티에게는 인기가 없었다.[8] 일부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PCI가 DC와의 협력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9][10] PCI 지도부 내부에서도 타협의 모호성과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11][12]
1976년 선거 이후, PCI는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다. 이 소수 정부는 PCI와 PSI의 불신임 결의 거부 약속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14][15] 그러나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했고, 특히 붉은 여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PCI는 이에 대응하여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했다.[16]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를 납치하고 살해한 사건(1978년)은 타협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80년, 기독교 민주주의 내에서 반공산주의 노선이 승리하고, 플라미니오 피콜리가 새로운 당 서기가 되면서 타협은 중단되었다. PCI 역시 1979년부터 역사적 타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80년 살레르노에서 베를링구에르는 공식적으로 정책의 종말을 선언했다.[17]
3. 1. 엔리코 베를링구에르의 제안
1973년,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사무총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공산주의 잡지 ''린아시타''에 기독교 민주주의(DC)와의 "민주적 연합"을 제안했다. 이는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전복된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칠레의 사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온건 세력과 연합해야 민주 국가에서 통치할 수 있다고 보았다.[1][2][3]1973년 석유 위기는 PCI의 정책 변화에 또 다른 영향을 주었다. 석유 위기로 복지 국가가 위협받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PCI는 1929년 월가 대폭락 이후 나치즘이 부상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경제 위기가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스티븐 건들레는 납의 시대의 테러와 중도 우파 및 극우의 선거 강세로 인해 파시스트 권위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는 PCI의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고 언급했다.[4] PCI는 이탈리아식 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정부 참여를 목표로 했다.[5] 이는 1944년 팔미로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 이후 전후 연립 정부와 유사한 "정통주의"로 볼 수도 있었다.[6]
1976년, PCI와 DC의 협력은 알도 모로 총리가 베를링구에르를 긴급 회의에 포함시키는 등 양가적인 정치 동맹으로 발전했다.[7] 이는 유기적 중도 좌파를 대체했다. 베를링구에르의 PCI는 스페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유럽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소련과 거리를 두었다.
이탈리아 공화당(PRI)의 우고 라 말파,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베티노 크락시 등 중도 좌파 그룹과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이 타협에 반대했다.[8] 일부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PCI가 DC와의 협력에 전념하는 것에 반발했다.[9][10] PCI 지도부 내에서도 타협의 모호성과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루이지 롱고는 이 제안이 "수수께끼 같고 모호하다"고 비판했다.[11][12] 그러나 루치오 마그리는 베를링구에르가 당내에서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고 언급했다.[13]
1976년 선거 이후, PCI는 안드레오티의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다.[14][15] 그러나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하면서 PCI는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했고, 이는 PCI의 반체제적 자격을 훼손했다.[16]
3. 2. 알도 모로와의 협력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전복된 사건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하기 위해서는 온건 세력과의 연합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1][2][3] 1973년, 이탈리아 공산당(PCI) 사무총장이었던 베를링구에르는 알도 모로가 지지한 기독교 민주주의(DC)와의 "민주적 연합"을 제안하는 글을 발표했다. 1973년 석유 위기는 서구 복지 국가에 대한 도전이었고,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제공했다. PCI는 이 위기가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29년의 위기가 나치즘을 초래한 것처럼, 이번 위기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납의 시대 동안 테러와 중도 우파 및 극우의 선거 강세는 파시스트 권위주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을 더했다.[4]이러한 배경에서 PCI는 정부 참여를 통해 사회적 성과를 공고히 하고 이탈리아식 사회주의를 확립하고자 했다.[5] 이는 1944년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 이후 전후 연립 정부와 일치하는 "정통적"인 접근으로 볼 수도 있었다.[6]
1976년, PCI와 DC 간의 협력은 정치적 동맹으로 발전했다. 알도 모로 총리는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1976년 3월 17일 긴급 회의에 베를링구에르를 포함시켰다.[7] 베를링구에르의 PCI는 스페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유럽 공산주의"를 추진하며 소련과의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나 이 타협은 이탈리아 공화당(PRI)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등 다른 중도 좌파 그룹과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 줄리오 안드레오티에게는 인기가 없었다.[8] 일부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PCI가 DC와의 협력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9][10] PCI 지도부 내부에서도 타협의 모호성과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11][12]
1976년 선거 이후, PCI는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다. 이 소수 정부는 PCI와 PSI의 불신임 결의 거부 약속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14][15] 그러나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했고, 특히 붉은 여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PCI는 이에 대응하여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했다.[16]
1978년 3월 16일, 붉은 여단은 당시 DC 당 의장이었던 알도 모로를 납치했다.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조건을 거부했고, 모로는 1978년 5월 9일에 사망했다.
3. 3. 유럽공산주의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전복된 사건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하기 위해서는 온건 세력과의 연합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1][2][3] 또한, 1973년 석유 위기는 이탈리아 공산당(PCI)에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안겨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29년 경제 위기가 나치즘으로 이어진 것처럼, 석유 파동이 파시스트 권위주의의 부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4]이러한 배경에서 베를링구에르는 기독교 민주주의(DC)와의 "민주적 연합"을 제안했다. PCI는 스페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유럽 공산주의"를 추진하며 소련과의 거리를 두려 했다. 1976년, PCI와 DC 간의 협력은 알도 모로 총리가 베를링구에르를 긴급 회의에 포함시키는 등 양가적인 정치적 동맹으로 발전했다.[7]
그러나 이 타협은 이탈리아 공화당과 이탈리아 사회당 등 다른 중도 좌파 그룹과 일부 공산주의 지지자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8][9][10] 1976년 선거 이후, PCI는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지만,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하면서 PCI는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하게 되었다.[16]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를 납치하고 살해한 사건은 타협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80년, 기독교 민주주의 내에서 반공산주의 노선이 승리하고, 플라미니오 피콜리가 새로운 당 서기가 되면서 타협은 중단되었다. PCI 역시 1979년부터 역사적 타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80년 베를링구에르는 공식적으로 정책의 종말을 선언했다.[17]
4. 내부 반발과 비판
칠레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기독교 민주주의(DC)와의 협력을 제안하면서 시작된 역사적 타협은, 여러 방면에서 반발과 비판에 직면했다.
이탈리아 공화당, 이탈리아 사회당 등 중도 좌파 정당들과 줄리오 안드레오티 같은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이 타협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제기했다.[8] PCI 내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일부 당원들은 DC와의 협력에만 몰두하는 것에 반발했고, 루이지 롱고 전 당 서기는 이 제안의 모호성과 실행 불가능성을 우려했다.[9][10][11][12]
붉은 여단 등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하면서 PCI는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했고, 이는 당의 반체제적 이미지를 훼손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16]
4. 1. 중도좌파 정당들의 반발
우고 라 말파와 베티노 크락시가 각각 이끌었던 이탈리아 공화당(PRI)과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같은 다른 중도 좌파 그룹은 이 타협에 반대했다. 우익 기독교 민주주의자 줄리오 안드레오티도 이 타협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8]4. 2. 우파 기독교민주당의 의문
줄리오 안드레오티를 비롯한 우파 기독교민주당 인사들은 역사적 타협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8]4. 3. PCI 내부의 비판
이탈리아 공산당(PCI) 내부에서는 역사적 타협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존재했다. 일부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당이 기독교 민주주의 (DC) 정부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이들은 PCI가 DC와의 협력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DC를 권력에서 배제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9][10]지도부 내에서도 타협의 모호성과 구체적인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전 당 서기였던 루이지 롱고는 1975년 지방 선거를 논하면서, 제안된 동맹이 "수수께끼 같고 모호하며, 이러한 모호성이 아마도 우리의 선거 성공에 기여했지만, 이 제안은 실행 불가능하며 우리를 수동성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비판했다.[11][12]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하면서, 특히 붉은 여단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PCI는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는 PCI의 반체제적 성격을 더욱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16]
5. 알도 모로 납치 사건과 타협의 쇠퇴
1978년 3월 16일, 붉은 여단 (Brigate Rosse|브리가테 로세it)은 기독교 민주주의당 의장 알도 모로를 납치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요구 조건을 거부했고, 모로는 1978년 5월 9일에 사망했다.
모로의 납치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타협은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점차 쇠퇴하였다. 1979년 이탈리아 공산당 제15차 회의에서 역사적 타협과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1980년 11월 28일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살레르노에서 이 정책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17]
5. 1. 붉은 여단의 테러
1976년 선거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소수 정부는 PCI와 이탈리아 사회당(PSI)가 불신임 결의를 선언하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정당성을 얻었다.[14][15] 그러나 PCI 내 일부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은 DC 정부를 보이콧했고,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했는데, 주로 붉은 여단 (Brigate Rosse|브리가테 로세it)이 저질렀다. 이에 대응하여 PCI는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16]1978년 3월 16일, 붉은 여단은 당시 기독교 민주주의당 의장이었던 알도 모로를 납치했다.[16] 이탈리아 의회에서 여러 차례 협의를 거친 후,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조건을 거부했고, 알도 모로는 1978년 5월 9일에 사망했다.[16]
5. 2. 정부의 대응과 모로의 죽음
이탈리아 의회에서 여러 차례 협의를 거친 후, 이탈리아 정부는 붉은 여단의 조건을 거부했고, 알도 모로는 1978년 5월 9일에 사망했다.[16]5. 3. 타협의 중단
1980년 기독교민주당(DC) 제14차 회의에서 온건파("민주적 이니셔티브", "도로테안", "새로운 세력" 파벌)가 반공산주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57.7%의 득표율로 승리하였다. 반면, DC의 보수파와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파벌 "봄"은 친타협 프로그램을 가지고 42.3%를 얻었다. 그 결과, 도로테안 출신 플라미니오 피콜리가 새로운 DC 서기로 선출되면서 역사적 타협은 중단되었다.[17] 이는 펜타파르티토로 알려진 기독교 민주주의와 다른 중도 좌파 정당과의 정치적 동맹으로 대체되었다.6. 타협의 종말과 이후
칠레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기독교 민주주의와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알도 모로가 납치되어 사망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이러한 "역사적 타협"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76년 선거 이후, PCI는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주의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PCI 내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정부를 보이콧했고, 붉은 여단 (Brigate Rosseit, BR)을 중심으로 극좌 테러리즘이 증가했다. PCI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억압적인 경찰 조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16]
1980년 기독교 민주주의당 전당대회에서 반공산주의 노선이 승리하며 역사적 타협은 중단되었고, 펜타파르티토라는 새로운 정치 동맹이 등장했다. PCI 역시 1979년 제15차 회의에서 역사적 타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17]
6. 1. 베를링구에르의 살레르노 선언
칠레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기독교 민주주의와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1970년대 후반 알도 모로 납치 사건 등을 겪으며 역사적 타협은 쇠퇴했다. 1980년 기독교 민주주의당 전당대회에서 반공산주의 노선이 승리하며 타협은 중단되었고, 펜타파르티토라는 새로운 정치 동맹이 등장했다.[17]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1980년 11월 28일 살레르노에서 역사적 타협 정책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17]
6. 2. 펜타파르티토
1976년 선거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 단일 정당 정부에 외부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 내 온건파가 승리하고 플라미니오 피콜리가 새 당 서기가 되면서 역사적 타협은 중단되었다. 이후 기독교민주당과 다른 중도 좌파 정당들 간의 새로운 정치 동맹인 펜타파르티토가 형성되었다.[17]참조
[1]
간행물
Imperialismo e coesistenza alla luce dei fatti cileni - Necessaria una riflessione attenta sul quadro mondiale
http://astratto.info[...]
197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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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Via democratica e violenza reazionaria - Riflessione sull'Italia dopo i fatti del Cile
http://astratto.info[...]
1973-10-05
[3]
간행물
Alleanze sociali e schieramenti politici - Riflessioni sull'Italia dopo i fatti del Cile
http://astratto.info[...]
1973-10-12
[4]
간행물
The PCI and the Historic Compromise
https://newleftrevie[...]
1987-06-01
[5]
서적
The Tailor of Ulm: A History of Communism
Verso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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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ore work! Less pay!' Rebellion and repression in Italy, 19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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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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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Intervista con la s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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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lor of Ulm: A History of 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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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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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uigi Lo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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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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