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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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일번관은 1860년 요코하마에 건설된 자딘 매터슨 상회의 길드 사무소를 가리킨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요코하마가 개항하며 건설되었으며, 1859년 자딘 매터슨 상회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설립되었다. 1860년 팔작집 지붕의 목조 2층 건물로 완공되었으나, 1866년 화재로 소실된 후 1868년에 재건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932년 자딘 매터슨 상회는 고베로 이전했다. 현재는 요코하마 실크 센터 부지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 요코하마시 등록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일번관은 1863년 조슈오걸의 영국 유학을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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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번관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영일번관 |
구 명칭 | 해당 없음 |
용도 | 저딘 매시슨 상회 요코하마 지점 상관 |
옛 용도 | 해당 없음 |
건축주 | 저딘 매시슨 상회 |
사업 주체 | 해당 없음 |
관리 운영 | 해당 없음 |
구조 형식 | 해당 없음 |
부지 면적 | 해당 없음 |
건축 면적 | 해당 없음 |
연면적 | 해당 없음 |
층수 | 목조 2층 |
높이 | 해당 없음 |
엘리베이터 수 | 해당 없음 |
호수 | 해당 없음 |
주차 대수 | 해당 없음 |
착공 | 해당 없음 |
준공 | 1860년 (만엔 원년) |
개관/개소 | 해당 없음 |
개축 | 1869년 (메이지 2년) 2월 |
해체 | 1923년 (다이쇼 12년) 소실 |
우편 번호 | 231-0023 |
소재지 | 요코하마시 나카구 야마시타초 1번지 |
문화재 지정 | 요코하마시 지역 사적 |
지정일 | 1995년 (헤이세이 7년) 11월 1일 |
비고 | 해당 없음 |
이미지 | |
![]() | |
건축 정보 | |
설계자 | 해당 없음 |
구조 설계자 | 해당 없음 |
시공 | 카지마 건설 |
2. 연혁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개항을 강요당한 에도 막부는 작은 어촌이었던 요코하마에 무역항을 만들었다. 이후 요코하마는 영사관, 길드 사무소, 양옥 주택이 늘어선 항구 도시로 성장해 갔다.
1859년 자딘 매터슨 상회 요코하마 지점이 설립되었다. 186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다시 전소되었다. 1932년에는 고베로 본사를 이전했다.
2. 1. 설립 초기 (1859년 ~ 1866년)
1859년(안세이 6년), 자딘 매터슨 상회 상하이 지점에 있던 영국인 윌리엄 케직(창업자 윌리엄 자딘의 누나 아들)은 ‘자딘 매터슨 상회 요코하마 지점’을 설립했다. 이것은 일본에 진출한 최초의 외국계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자딘 매터슨 상회는 길드사무소 건설을 가시마 건설의 창업자인 가시마 이와키치에게 의뢰했다. 건설은 홍콩 본사에서 데려온 중국인 부하에게 영어로 지시하고, 중국인 부하가 한자를 사용한 필담으로 일본인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건설은 고생이 많아 “에이이치반칸의 대건축 공사는 꽤 고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4]라고 했고, 결국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이익도 많다. 이것으로 한 치의 기틀이 잡힌 모양이었다.”라고 한다.[5] 1860년(만엔 원년) 팔작집 지붕의 목조 2층 길드 사무소가 완성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영일번관'''’으로 불렀다. 외관은 ‘매우 빈약’했던 것 같았지만[5], 내부는 큰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길드 사무소로 발전했다.
1866년(게이오 2년) 대화재로 요코하마 거류지의 4분의 1이 불에 탔고, 영일번관도 소실되었다.
2. 2. 재건과 발전 (1868년 ~ 1923년)
1866년(게이오 2년) 대화재로 요코하마 거류지의 4분의 1이 불에 타, 영일번관도 소실되었다.[4] 1868년(게이오 4년) 5월, 20m 사방에 1층에 3실, 2층에 2개의 침실을 갖춘 백색 건물을 재건하고, 1869년(메이지 2년) 2월에 준공했다. 우키요에와 사진으로 보이는 영일번관은 이 두 번째로 지어진 것이다. 가시마 건설이 건설했는지는 불분명하다.1868년(메이지 원년), 요시다 겐조(요시다 시게루의 양부)가 요코하마 지점장으로 취임했다. 메이지 신정부를 상대로 군함, 무기, 생사 매매로 눈부신 업적을 올렸다. 요시다는 1871년에 퇴사하고 독립했다.
1923년(다이쇼 12년), 관동대지진으로 다시 전소되었다.[1]
2. 3. 고베 이전과 유적 (1932년 ~ 현재)
1932년 자딘 매터슨 상회는 요코하마를 떠나 고베로 본사를 이전했다. 요코하마의 옛 부지에는 실크 센터(국제 무역 관광 회관)가 건립되었으며, 입구에는 1954년에 설치된 기념비와 명판이 있다. 1995년에는 요코하마시의 문화재 "지역 사적"으로 등록되었다.[3]

3. 조슈오걸 지원
1863년 윌리엄 케직은 조슈오걸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 유학을 지원했다.[1] 이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는 등 일본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3. 1. 조슈오걸 명단
1863년 윌리엄 케직은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마사루(노무라 야키치), 이토 히로부미로 일컫는 조슈오걸의 영국 유학을 지원했다.[1]4. 유적
현재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카구 야마시타초 1번지(옛 야마시타초 거류지 제일관)에는 실크 센터(국제 무역 관광 회관)가 들어서 있다. 입구에는 1954년에 설치된 기념비와 명판이 있다.
1995년에는 요코하마시의 문화재 "지역 사적"으로 등록되었다.[3]
참조
[1]
서적
わが鹿島組
1938
[2]
서적
鹿島組五十年小史
鹿島組編輯部
1929
[3]
웹사이트
指定・登録文化財目録
https://www.city.yok[...]
横浜市教育委員会
2018-11-05
[4]
서적
わが鹿島組
1938
[5]
서적
鹿島組五十年小史
鹿島組編輯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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