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자키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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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자키 지로는 홋카이도 출신의 경제학자로,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규슈 대학과 호세이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특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주의 연구 및 번역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내 마르크스주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말년에는 '죽음의 여행'을 떠났으며, 1984년 9월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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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자키 지로 | |
---|---|
기본 정보 | |
이름 | 岡崎 次郎 (오카자키 지로) |
출생일 | 1904년 6월 29일 |
출생지 | 일본, 홋카이도, 에사시 |
사망일 | 불명 |
사망지 | 불명 |
다른 이름 | 岡崎 太郎 (오카자키 타로) |
학력 |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
경력 | |
직장 | 규슈 대학 호세이 대학 |
활동 기간 | 불명 |
연구 분야 | |
주요 관심사 | 경제학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불명 |
자녀 | 불명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초기 생애와 학업
홋카이도 에사시에서 태어났다.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 대학에 진학했다. 1927년에는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929년에는 같은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2. 2. 학문적 경력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29년에는 같은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전후인 1950년부터 규슈 대학 교양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후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68년 호세이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후에는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2. 3. 만년과 죽음의 여행
1983년(쇼와 58년) 아오토샤에서 자서전 『마르크스에 기대어 육십 년 자조생애기』를 출판하며 무코사카 이츠로를 비판했다. 이 책은 친구와 지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오카자키는 조용히 이별 모임을 가진 뒤 "이제부터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그의 오랜 지인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80세가 되기 직전인 1984년(쇼와 59년) 6월 6일, 오카자키는 부인 쿠니와 함께 '죽음의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전부터 "인생은 스스로 결말을 짓는다"고 말해왔으며, 자서전에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느냐이다", "적어도 마지막 정리는 자율적으로 하고 싶다"고 적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도쿄 혼고의 자택 맨션을 비우고 가재도구를 거의 처분했으며, 가까운 친척 및 지인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졌다.
부부의 여정은 시나가와의 호텔에서 시작하여, 신용카드 사용 기록을 통해 이즈의 다이니 온천, 하마마츠, 교토, 오카야마, 하기, 히로시마 등을 거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주로 택시를 이용했으며, 각 지역의 좋은 호텔에 며칠씩 머물렀다.
1984년 9월 30일 오사카의 호텔(홀리데이 인 난카이)에 숙박한 것을 마지막으로 부부의 행적은 끊겼으며,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카자키는 생전에 우에하라 센로쿠나 쓰시마 타다유키와 같이 조용히 생을 마감한 인물들의 사례를 언급하며, 특히 투신자살 후 시신이 발견된 쓰시마에 대해 "쓰시마 씨처럼 시체가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어, 의도적으로 행방을 감춘 것으로 여겨진다.
3. 주요 업적 및 연구 내용
오카자키 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보급, 특히 《자본론》 번역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여러 연구자와 협력하여 마르크스주의 관련 저작들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며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저서 《마르크스를 따라 육십 년 - 자조 생애기》(청토사)에 기록되어 있다.
3. 1. 이와나미 문고판 『자본론』 번역 관련 논란
전후 마르크스 경제학계의 거두였던 향사카 이치로 명의로 출판된 이와나미 문고판 『자본론』의 번역은 실질적으로 오카자키 지로가 담당했다. 오카자키 본인에 따르면 이는 '하청 번역'이었으며, 처음에는 공역으로 제안받았다고 한다. 명의자인 향사카는 번역 과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향사카 이치로 사후, 부인 유키는 향사카가 이와나미 서점에 오카자키와의 공역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으며, 대신 인세를 절반씩 나누기로 합의했다고 증언했다.[1]이후 오카자키 지로는 번역을 개정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오쓰키 서점에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일부로, 그리고 국민 문고판 『자본론』(전 9권)을 출간했다. 이 과정에서 향사카 이치로와의 갈등이 불거졌다. 오카자키가 다른 출판사에서 『자본론』을 번역 출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향사카는 1966년 여름, 이를 "중대한 배신 행위"라며 분노했고, 이와나미 서점에 오카자키에 대한 인세 지급 중단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오카자키는 인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향사카는 이와나미 측에 보낸 서면 통지에서 "조만간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보내 엄중하게 규명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향사카는 자신의 제자들이 오카자키의 국민 문고판 『자본론』 번역 작업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상업적 경쟁자가 되는 것"이라며 제자들에게 오카자키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압박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카자키는 해당 제자들을 번역 작업에서 제외했다.
결국 오카자키는 향사카와 직접 협상에 나섰다. 1967년 3월, 신바시의 한 레스토랑에서 부인을 동반한 향사카와 만난 오카자키는 향사카로부터 "당신의 마음도 잘 알았다. 여러 가지로 돈 들어갈 일도 많으니 하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 며칠 후 오카자키는 그 해 10월 말까지 이와나미 문고판 『자본론』의 인세를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향사카는 "그것으로 괜찮다"고 답했다.
같은 해 10월, 이와나미 서점에서 "마르크스 『자본론』 100년 기념, 향사카 이치로 역 『자본론』 전 4권"이라는 신문 광고가 대대적으로 실린 것을 본 오카자키는 향사카의 행동에 실망감을 느끼고 그동안 간직해 온 경애심을 잃었다고 술회했다.
3. 2. 오쓰키 서점판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번역
오카자키 지로는 이와나미 문고판 『자본론』을 향사카 이치로 명의로 번역했지만, 향사카는 거의 관여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오카자키의 번역이었다. 향사카 이치로 사후, 부인 유키는 이와나미 서점이 오카자키와의 공역 제안을 거부하여 향사카 단독 명의로 하되 인세는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고 밝혔다[1].이후 오카자키는 해당 번역을 개정하여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오쓰키 서점에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간행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8년, 오쓰키 서점의 코바야시 나오에로부터 독일 디츠사에서 간행 중인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소련 ML 연구소 편집 제2판의 독일어판)의 일본어 번역 프로젝트를 주도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감수자로는 코바야시가 추천한 오오우치 효우에이와 호소카와 가로쿠 중, 오카자키가 스기모토 토시로와 함께 직접 찾아가 설득한 오오우치 효우에이가 맡기로 했다. 각 권의 서문 번역은 소련 연구소의 서문(러시아어 원문 번역)을 무라타 요이치가, 독일 연구소의 서문을 오카자키가 전담했다.
전집 간행은 1959년 10월에 시작되어 1968년 10월까지 제20권이 출간되었고, 중간에 3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75년 가을에 전 39권으로 완간되었다. 이 전집에는 『자본론』 신역, 『잉여가치학설사』 신역, 『마르크스-엥겔스 서한집』 신역 등 중요한 저작들이 포함되었다.
『잉여가치학설사』의 경우, 초기에 국민 문고에서 오시마 키요시와 토키나가 스쿠시가 번역을 맡았으나 작업이 지연되자, 코바야시 나오에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이후 오카자키 지로와 토키나가 스쿠시가 번역을 완료했는데, 토키나가가 기존 번역 부분을 재번역하고 오카자키가 교열했으며, 나머지 부분은 오카자키가 새로 번역했다. 전집판 『잉여가치학설사』에서는 오카자키가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기존 번역이 상당 부분 활용되어 번역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2].
『마르크스-엥겔스 서한집』 신역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전에 주고받은 모든 현존 서한을 망라한 중요한 작업이었다. 오카자키는 이미 1950년대에 구 전집 자료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엥겔스 왕복 서한』(전 3권)을 이와나미 문고에서 공동 번역한 경험을 살려, 신 전집의 서한집 번역도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담당했다.
전집 간행을 위한 『자본론』 신역 작업에도 오카자키가 참여했다. 이전에 향사카 이치로의 소개로 진행했던 번역을 재검토하며 1958년부터 국민 문고판 『자본론』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오역이나 모호한 표현을 바로잡고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쉬운 번역을 목표로, 당시 도쿄 대학 대학원생이었던 닛타 슌조(후에 도요 대학 교수), 쓰카모토 켄(후에 도쿄 대학 교수), 가마쿠라 다카오(후에 사이타마 대학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국민 문고판 『자본론』(전 11권)은 1961년 5월부터 1964년 9월까지 완성되었다. 이후 전집판 번역에서는 이 국민 문고판을 바탕으로 메오 타카코라는 학생의 도움을 받아 원고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1965년 9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전집 제23-25권(총 5분책)으로 『자본론』 신역을 간행했다.
3. 3. 기타 번역 및 편집 작업
오카자키 지로는 전후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보급, 특히 《자본론》 관련 번역 및 편집 작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학계에 크게 기여했다. 아래 내용은 그의 저서 《마르크스를 따라 육십 년 - 자조 생애기》(청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자본론 사전』 (아오키 서점, 1961)1955년(쇼와 30년) 오카자키 지로의 주도로 처음 기획되었다. 그는 전체 구성, 항목 선정, 초안 작성을 담당했으며, 그 결과물로 같은 해 12월 테스트판 성격의 『자본론 소사전』이 카와이데 신서를 통해 출판되었다. 이후 항목을 추가하고 내용을 보강하여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쿠루마 사메조, 우노 코조, 오카자키 지로, 오시마 키요시, 스기모토 토시로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초 출판 예정이었던 카와이데 서방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아오키 서점으로 출판사가 변경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이 사전은 편집위원 외에도 100명이 넘는 연구자가 집필에 참여한 대규모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전』 (사회 사상사, 1980)『자본론』에 국한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전반을 다루는 포괄적인 사전을 만들고자 기획되었다. 오카자키는 주요 집필진으로 고자이 요시시게, 이시도 키요토, 와타나베 사헤이, 닛타 슌조, 사토 츠네아키, 야마우치 카즈오, 사카모토 토쿠마츠, 신타니 케이자부로, 코바세 타쿠조, 야마자키 하치로, 시오타 쇼헤이, 아오키 무네야, 이와나가 히로시, 스즈키 코이치로, 후지타 이사무, 오다기리 히데오, 코야마 히로타케 등을 섭외했다. 오카자키 본인도 직접 집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집필자의 사정으로 공백이 생긴 항목까지 맡아 집필하는 등 사전 편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 평가 및 영향
오카자키 지로는 전후 일본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보급에 있어 여러 차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다른 연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저작 번역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이는 일본 마르크스 경제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오카자키 본인의 저서 《마르크스에 의지하여 육십 년 - 자조 생애기》(청토사)에서 그의 활동과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5. 참고 문헌
- 오카자키 지로, 『마르크스에 기대어 육십 년 자조생애기』, 아오토샤, 1983년.
참조
[1]
서적
向坂逸郎評伝
社会評論社
2018
[2]
웹사이트
『マルクスに凭れて六十年――自嘲生涯記』増補改訂新版
http://www.koshisha.[...]
航思社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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