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 (수호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왕경은 소설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로, 동경 개봉부의 부호 왕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관료와 결탁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탈옥 후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초왕을 칭하지만, 양산박 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어 능지형에 처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왕경 (수호전) |
---|
2. 생애
왕경은 동경 개봉부의 부호 왕획(王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관청과 결탁해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워 재산을 축적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고, 게다가 외아들이었기에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될 무렵에는 왕화 부부조차 감당할 수 없는 방탕아로 성장해 버렸다. 부모의 간언도 들으려 하지 않고, 술 마시고 노름하고 여색을 탐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는 왕경 때문에, 부유했던 친가도 불과 6년 만에 완전히 몰락해 버렸고, 왕경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되어, 무예에 뛰어난 솜씨를 믿고 동경의 부배군으로 직책을 얻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의 임무를 마친 왕경은 놀러 간 옥진포에서 동관의 조카이자 채경의 손자(채경의 장남인 채유의 아들)의 약혼녀이기도 한 교수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해 버린다.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와 밀통을 거듭한 왕경이었지만, 뜻밖에도 귀인의 딸과 관계를 맺게 된 기쁨에 매일같이 술을 마시던 왕경은, 그 3개월 후 술에 취해 스스로 입을 잘못 놀려 정배군 장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고, 그와 교수의 관계는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 버린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교수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채씨 일족과의 혼인을 진행하려 했던 동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격노한 동관의 손에 모반의 누명을 쓴 왕경은, 섬주로의 유배를 선고받게 된다.
하지만, 그 오만불손한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고, 도중의 망동진에서는, 우연히 본 무예가(나중에 유배지 섬주의 전옥인 장세개의 의동생인 팽원이라고 밝혀진다)의 봉술을 비웃고, 분개하는 그 무예가에게 대결을 신청받자, 족쇄를 찬 상태로 압도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굥가촌의 굥단, 굥정 형제에게 무술 스승으로 맞아들여지자, 그들 형제와 도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대립하는 황달마저 때려눕힌다. 그 후, 굥 형제에게 창술의 오의를 전수하자, 복수에 불타는 황달이 이 일로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문을 듣고, 굥 형제의 곁을 떠나 유배지인 섬주로의 여정으로 돌아간다.
유배지 섬주에서는, 전옥 장세개 등에게 굥정으로부터 뇌물이 건네졌기 때문에, 족쇄를 푸는 것이 허락되었고, 살위봉이라고 불리는 입옥 시 행해지는 매질도 면제된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뿐이었고, 장세개는 망동진에서 왕경에게 망신을 당한 의동생, 팽원의 원한을 풀고자, 차츰 왕경에게 집요하고 음흉한 보복을 가하게 된다. 그 처사에 격앙된 왕경은 마침내 보복을 결심하고, 방에서 장세개와 팽원이 둘이서 왕경을 괴롭히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을 보자, 변소에 가려고 방을 나선 장세개를 살해하고, 이어서 팽원마저 살해하자, 그날 밤 안에 섬주의 감옥을 탈옥해 버린다.
그 후, 방주에서 죄인을 감시하는 노역인을 맡고 있는 사촌 형 범전과 만나, 그의 손으로 죄인의 증표인 문신을 지우고, 이름도 이덕으로 고쳐 방주에서 잠복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이윽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세도 누그러지고, 관헌의 추궁도 헐거워지자, 역시 타고난 성격 탓인지, 토지의 실력자인 단대공을 주군으로 하는 단가장에서 도박의 승패를 둘러싸고 단가의 단이, 단오 형제와 불화를 일으킨다. 이 때, 왕경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단이, 단오의 여동생인 단삼랑에게 도전받아 권투로 처절한 싸움을 벌이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단삼낭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자, 점쟁이 이조의 중매로 단삼낭과 부부가 되어, 단가의 사위로 맞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혼례의 밤, 완전히 상처를 회복한 굥가촌의 황달이, 복수심을 노골적으로 왕경의 그 후의 행적을 조사해 내고, 왕경뿐만 아니라 그를 숨긴 범전과 단 일족까지도 관청에 고발했기 때문에, 관병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일동은 이조의 권유로, 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요립이라는 강도가 수령을 맡고 있는 방산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요립은 왕경의 역량이 비범함을 간파하고, 게다가 그 배후에 단 일족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산채의 실권을 그들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입산을 거부한다. 이 방산이 요립 혼자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왕경은, 즉시 요립을 살해하고, 방산의 세력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 기세로, 얼마 안 가 쳐들어온 방주의 관군을 격퇴하고,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보내진 토벌군을 격퇴한다. 그 사이에 방산의 요새에는 날이 갈수록 부하가 늘어나, 차츰 관군의 세력을 압도해 간다. 마침내 역습에 나선 왕경은, 방주의 주지사 장고행 등을 살해하고, 주 전체를 점령해 버린다. 부패한 관군은 왕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적이 아니었고, 그 후에도 멈출 줄 모르고 왕경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한다. 남풍, 형남, 산남, 운안, 안덕, 동천, 완주, 서경의 8주와 그 관하 86현을 점령하기에 이르자, 문무백관을 스스로 임명, 국호를 초로 정하고, 조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는 초왕을 참칭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조정의 칙명을 받은 송강을 수령으로 하는 양산박 군이 관군으로서 습격해 오자, 일전하여 열세에 놓이게 되고, 유민이 지키는 완주, 단이가 지키는 산남, 굥단이 지키는 서경이 잇따라 함락된다. 형남을 지키는 조카 이회로부터 급보를 얻은 이조로부터, 양산박 군의 진격을 전해 듣고 격앙된 왕경은, 송군을 맞이하기 위해 부하들을 몇 차례나 보냈지만, 그 모두가 격퇴당하고, 마침내 본거지인 남풍까지 송군이 쳐들어온다. 여기서 왕경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송군에게 결전을 신청하지만, 양산박의 자랑인 영웅들이 정연하게 늘어선 구궁팔괘의 진 앞에서 대패를 겪게 된다. 패주하는 중에, 따르던 부하들도 서서히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얼마 안 되는 수행원을 데리고 청강의 강가로 쫓겨났지만, 도하하여 도망치려 타고 간 어선에서, 어부로 위장하고 있던 양산박의 이준의 손에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체포된 왕경은 동경으로 압송되어, 본보기로 능지형에 처해져, 이 세상을 떠난다.
2. 1. 출생과 방탕한 시절
왕경은 동경 개봉부의 부호 왕획(王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관공서와 결탁해 선량한 백성을 모함하여 부호가 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외동아들이라 응석받이로 자라 성인이 될 무렵에는 왕획 부부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방탕아로 자랐다. 부모의 충고도 듣지 않고 술, 노름, 여색을 탐닉하며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여, 부유했던 집안도 6년 만에 가세가 기울었다. 왕경은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동경개봉부의 부배군(副排軍) 자리를 얻게 된다.어느 날, 왕경은 옥진포(玉津圃)에서 동관의 동생인 동세(童貰)의 딸이자 채경의 손자(채경의 장남인 채유의 아들)의 약혼녀인 교수(嬌秀)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교수와 밀통을 하게 된 왕경은 3개월 후 술에 취해 정배군(正排軍) 장빈(張斌)에게 모든 것을 말해 버렸고, 이 소문은 동관의 귀에 들어가 왕경은 모반의 누명을 쓰고 섬주(陝州)로 유배형을 받게 된다.
유배 도중 망동진(邙東鎭)에서 왕경은 방원(유배지 섬주의 전옥인 장세개의 처남)의 봉술에 코웃음을 치고, 방원과 대결하여 목에 칼을 찬 상태에서 압도한다. 이 광경을 본 공가촌의 공단(龔端), 공정(龔正) 형제의 무술 스승이 되는데, 노름판에서 싸웠던 황달(黄達)이 찾아오자 때려눕힌다. 이후 공씨 형제에게 창봉 쓰는 법을 가르쳐주다가 황달이 관공서에 고소했다는 소문을 듣고 공가촌을 떠나 유배지인 섬주로 떠난다.
섬주에서는 전옥 장세개(張世開)에게 미리 뇌물을 주었기 때문에 목의 칼을 푸는 것이 허용되었고, '살위봉(殺威棒)'도 면제된다. 그러나 장세개는 방원의 앙갚음을 하려고 왕경에게 보복을 한다. 분노한 왕경은 장세개와 방원을 살해하고, 섬주의 감옥에서 탈출한다.
도망치던 왕경은 방주(房州)에서 옥리(獄吏)로 근무하는 사촌 형 범전(范全)과 만나고, 범전은 안도전에게 배운 방법으로 죄인의 문신을 지워주고, '이덕(李德)'이라는 이름을 쓰게 해 방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한다. 왕경은 단가장(段家莊)에서 노름을 하다가 단이(段二), 단오(段五)와 시비가 붙고, 단삼랑(段三娘)과 대결하여 싸우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단삼랑과 부부가 되고 단가장의 사위가 된다.
2. 2. 유배와 탈옥
왕경은 동경 개봉부의 부호 왕획(王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왕획은 관공서와 결탁해 선량한 백성을 모함하여 부를 쌓았으며, 왕경 역시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동경개봉부의 부배군(副排軍) 자리를 얻게 된다.어느 날 왕경은 옥진포(玉津圃)에서 동관의 동생 동세(童貰)의 딸이자 채경의 손자(채경의 장남인 채정의 아들)의 약혼녀인 교수(嬌秀)를 만나 밀통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동관은 왕경에게 모반 누명을 씌워 섬주(陝州)로 유배형을 받게 한다.
유배 도중 왕경은 망동진(邙東鎭)에서 방원(方원)의 봉술을 비웃다가 대결을 벌여 이기고, 공가촌(龔家村)의 공단(龔端), 공정(龔正) 형제의 무술 스승이 된다. 황달(黄達)을 때려눕힌 후, 황달의 고소로 공가촌을 떠나 유배지인 섬주로 간다.
섬주에서 전옥 장세개(張世開)에게 뇌물을 주어 편하게 지내지만, 장세개는 처남 방원의 복수를 위해 왕경을 괴롭힌다. 분노한 왕경은 장세개와 방원을 살해하고 탈옥한다.
탈옥 후, 왕경은 방주(房州)에서 사촌 형 범전(范全)을 만나 죄인의 문신을 지우고 '이덕(李德)'이라는 이름으로 은둔 생활을 한다. 단가장(段家莊)에서 단삼랑(段三娘)과 싸워 인연을 맺고, 점쟁이 이조(李助)의 주선으로 단삼랑과 부부가 된다.
혼례날 밤, 황달의 고발로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 왕경 일행은 이조의 지인 요립(廖立)이 있는 방산(房山)으로 도망친다. 요립이 입산을 거부하자 왕경은 요립을 살해하고 방산을 장악한다.
2. 3. 반란과 몰락
왕경은 동경 개봉부의 부호 왕획(王砉)의 외아들로, 관청과 결탁해 백성을 모함하여 부를 쌓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더구나 외동아들로 응석받이로 자라 성인이 될 무렵에는 부모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방탕자가 되었다. 부모의 충고도 듣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 탓에 6년 만에 가세가 기울었고,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동경개봉부의 부배군(副排軍) 자리를 얻게 된다.어느 날, 왕경은 옥진포(玉津圃)에서 동관의 동생인 동세(童貰)의 딸이자 채경의 손자(채경의 장남인 채정의 아들)의 약혼녀인 교수(嬌秀)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교수와 밀통을 하던 왕경은 3개월 후 술에 취해 정배군(正排軍) 장빈(張斌)에게 모든 것을 말해 버리고, 이 소문은 동관의 귀에 들어가 왕경은 모반의 누명을 쓰고 섬주(陝州)로 유배형을 받게 된다.
유배지로 가던 중 왕경은 망동진(邙東鎭)에서 방원(方原)의 봉술을 비웃다가 그와 대결하여 목에 칼을 찬 상태에서도 압도한다. 이 광경을 본 공가촌의 공단(龔端), 공정(龔正) 형제의 무술 스승이 되는데, 그들과 싸웠던 황달(黄達)마저 때려눕힌다. 이후 황달이 관공서에 고소했다는 소문을 듣고 공가촌을 떠나 유배지인 섬주로 간다.
섬주에서는 전옥(典獄) 장세개(張世開)에게 뇌물을 준 덕에 칼을 풀고 몽둥이도 면제받았으나, 두 달 뒤 장세개는 처남 방원의 앙갚음을 하려고 왕경에게 보복한다. 분노한 왕경은 장세개와 방원을 살해하고 섬주 감옥에서 탈출한다.
도망치던 왕경은 방주(房州)에서 옥리(獄吏)로 근무하는 사촌 형 범전(范全)을 만나 문신을 지우고 '이덕(李德)'이라는 이름으로 은둔 생활을 한다. 이후 단가장(段家莊)에서 단이(段二), 단오(段五)와 시비가 붙고, 그들의 여동생 단삼랑(段三娘)과 대결하다가 서로 반하게 된다. 점쟁이 이조(李助)의 주선으로 단삼랑과 부부가 되어 단가장의 사위가 된다.
혼례날 밤, 황달의 고발로 관병의 추격을 받게 된 왕경 등은 이조의 지인 요립(廖立)이 있는 방산(房山)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요립은 왕경의 무예 실력과 배후 세력을 경계하여 입산을 거부하고, 왕경은 요립을 살해하고 방산을 지배한다.
왕경은 방주의 관군을 격퇴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방주 지사 장고행(張顧行)을 살해하고 방주 전체를 점령한다. 남풍, 형남, 산남, 운안, 안덕, 동천, 완주, 서경 8군주와 86현을 점령하고 국호를 초(楚)로 정한 뒤 스스로 초왕(楚王)을 참칭하며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송강을 수령으로 하는 양산박군이 쳐들어오자 열세를 면치 못하고, 여러 성이 함락된다. 왕경은 남풍에서 양산박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구궁팔괘진에 대패하고, 도망치다 어부로 위장한 양산박의 이준과 동위에게 사로잡힌다. 포박당한 왕경은 동경 개봉부로 보내져 능지형(凌遲刑)에 처해진다.
3. 왕경의 난
왕경은 송나라 제국의 수도인 동경(東京, 현재의 카이펑, 허난성)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도박, 매춘, 음주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군 장교가 되었다. 체포에 저항하고 정부 군인을 죽인 후 방주(房州, 현재의 팡현, 후베이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방주의 금고와 곡창을 약탈하고, 방주 근처 여러 곳에서 돈과 곡물을 나누어 가졌다. 짧은 시간 안에 왕경은 인근 마을과 도시를 습격하여 자신의 군사력을 구축했다.
고문인 이주(李助)의 도움으로 왕경은 경남(荊南, 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초왕(楚王)"이라 선언했다. 왕경의 반란을 알게 된 후, 후베이 지역의 다른 많은 산적과 무법자들이 그를 지지하며 그의 초나라 왕국에 합류했다. 3~4년 안에 왕경은 송나라 제국의 6개 주를 장악했다. 그는 남풍(南豐, 현재의 단장커우, 후베이성 인근)에 궁전을 지었다. 왕경의 초나라 왕국은 나중에 8개 주로 확장되어 현재의 후베이, 충칭 및 쓰촨성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양산박의 무법자들이 휘종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북쪽의 요 제국 침략자를 물리치고 송나라 영토 내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여 송나라 제국에 봉사했다. 요나라 침략자와 진나라(전호)에 의해 세워진 왕국을 격파한 후, 양산박의 영웅들은 초나라 왕국에 주목하여 결국 승리했다. 왕경은 양산박의 이준에게 포로로 잡히고, 송나라 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결국 ''능지처참''을 당했다.
왕경은 동경의 부호 왕화의 외아들로, 아버지처럼 관청과 결탁하여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워 재산을 축적하였다. 외아들이었기에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될 무렵에는 왕화 부부조차 감당할 수 없는 방탕아로 성장해 버렸다. 부모의 간언도 듣지 않고, 술 마시고 노름하고 여색을 탐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여, 불과 6년 만에 친가는 완전히 몰락해 버렸고, 왕경은 무예에 뛰어난 솜씨를 믿고 동경의 부배군으로 직책을 얻게 된다.
어느 날, 왕경은 옥진포에서 동관의 조카이자 채경의 손자인 교수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해 버린다. 교수의 도움으로 밀통을 거듭했지만, 3개월 후 술에 취해 정배군 장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고, 교수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채씨 일족과의 혼인을 진행하려 했던 동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격노한 동관의 손에 모반의 누명을 쓴 왕경은 섬주로 유배를 선고받게 된다.
유배 도중 망동진에서, 왕경은 무예가의 봉술을 비웃고 대결을 신청받아 족쇄를 찬 상태로 압도한다. 굥가촌의 굥단, 굥정 형제에게 무술 스승으로 맞아들여지자, 그들 형제와 도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대립하는 황달마저 때려눕힌다. 굥 형제에게 창술의 오의를 전수한 후, 복수에 불타는 황달이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문을 듣고 굥 형제의 곁을 떠난다.
유배지 섬주에서는, 전옥 장세개 등에게 굥정으로부터 뇌물이 건네졌기 때문에, 족쇄를 푸는 것이 허락되었고, 살위봉이라고 불리는 입옥 시 행해지는 매질도 면제된다. 그러나 장세개는 망동진에서 왕경에게 망신을 당한 의동생 팽원의 원한을 풀고자, 왕경에게 집요하고 음흉한 보복을 가하게 된다. 격앙된 왕경은 장세개와 팽원을 살해하고 섬주의 감옥을 탈옥한다.
이후 방주에서 죄인을 감시하는 노역인을 맡고 있는 사촌 형 범전과 만나, 그의 손으로 죄인의 문신을 지우고, 이름도 이덕으로 고쳐 방주에서 잠복 생활을 한다. 단가장에서 도박으로 단이, 단오 형제와 불화를 일으키지만, 단이, 단오의 여동생인 단삼낭에게 도전받아 권투로 싸우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단삼낭과 부부가 되어, 단가의 사위로 맞아들여졌다.
혼례의 밤, 황달이 왕경의 행적을 관청에 고발하여, 관병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조의 권유로 방산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방산의 수령 요립은 왕경의 역량을 두려워하여 입산을 거부한다. 왕경은 요립을 살해하고 방산의 세력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왕경은 방주의 관군을 격퇴하고 주 전체를 점령한다. 부패한 관군은 왕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적이 아니었고, 왕경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여 8주와 그 관하 86현을 점령하기에 이르자, 문무백관을 스스로 임명, 국호를 초로 정하고, 조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는 초왕을 참칭했다.
그러나 송강을 수령으로 하는 양산박 군이 관군으로서 습격해 오자, 열세에 놓이게 되고, 유민, 단이, 굥단이 지키는 성들이 잇따라 함락된다. 왕경은 양산박 군의 진격을 전해 듣고 격앙되어 부하들을 보냈지만, 모두 격퇴당하고, 본거지인 남풍까지 쳐들어온다. 왕경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결전을 신청하지만, 양산박의 영웅들이 정연하게 늘어선 구궁팔괘의 진 앞에서 대패를 겪게 된다. 패주 중에 청강의 강가로 쫓겨났지만, 양산박의 이준의 손에 체포되고, 동경으로 압송되어 능지형에 처해져, 이 세상을 떠난다.
3. 1. 배경
3. 2. 전개
왕경은 송 제국의 수도인 동경(東京, 현재의 카이펑, 허난성)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키가 7척(七尺, 단위)이며 근육질의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봉황의 눈, 굵은 눈썹, 넓은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 도박, 매춘, 음주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후 동경에서 군 장교가 되었다.왕경은 동경의 부호 왕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관청과 결탁하여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워 재산을 축적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고, 게다가 외아들이었기에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자랐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왕화 부부조차 감당할 수 없는 방탕아로 성장해 버렸고, 부모의 간언도 듣지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왕경은 옥진포에서 동관의 조카이자 채경의 손자(채경의 장남인 채유의 아들)의 약혼녀이기도 한 교수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해 버린다.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와 밀통을 거듭했지만, 3개월 후 술에 취해 정배군 장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고, 그와 교수의 관계는 세상에 퍼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교수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채씨 일족과의 혼인을 진행하려 했던 동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격노한 동관의 손에 모반의 누명을 쓴 왕경은 섬주로 유배를 선고받게 된다.
유배 도중 망동진에서는, 봉술을 비웃고 대결을 신청받자 족쇄를 찬 상태로 압도한다. 굥가촌의 굥단, 굥정 형제에게 무술 스승으로 맞아들여지자, 그들 형제와 도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대립하는 황달마저 때려눕힌다. 굥 형제에게 창술의 오의를 전수하자, 복수에 불타는 황달이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문을 듣고, 굥 형제의 곁을 떠나 유배지인 섬주로 간다.
유배지 섬주에서는, 전옥 장세개 등에게 굥정으로부터 뇌물이 건네졌기 때문에, 족쇄를 푸는 것이 허락되었고, 살위봉이라고 불리는 입옥 시 행해지는 매질도 면제된다. 그러나 장세개는 망동진에서 왕경에게 망신을 당한 의동생, 팽원의 원한을 풀고자 왕경에게 집요하고 음흉한 보복을 가하게 된다. 격앙된 왕경은 장세개와 팽원을 살해하고 섬주의 감옥을 탈옥한다.
그 후, 방주에서 죄인을 감시하는 노역인을 맡고 있는 사촌 형 범전과 만나, 그의 손으로 죄인의 증표인 문신을 지우고, 이름도 이덕으로 고쳐 방주에서 잠복 생활을 한다. 토지의 실력자인 단대공을 주군으로 하는 단가장에서 도박의 승패를 둘러싸고 단가의 단이, 단오 형제와 불화를 일으킨다. 왕경은 단이, 단오의 여동생인 단삼낭에게 도전받아 권투로 싸우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단삼낭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자, 점쟁이 이조의 중매로 단삼낭과 부부가 되어, 단가의 사위로 맞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혼례의 밤, 황달이 왕경뿐만 아니라 그를 숨긴 범전과 단 일족까지도 관청에 고발했기 때문에, 관병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일동은 이조의 권유로, 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요립이라는 강도가 수령을 맡고 있는 방산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요립은 왕경의 역량이 비범함을 간파하고, 게다가 그 배후에 단 일족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산채의 실권을 그들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입산을 거부한다. 왕경은 요립을 살해하고, 방산의 세력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왕경은 체포에 저항하고 정부 군인을 죽인 후 방주(房州, 현재의 팡현, 후베이성)에서 반란을 시작했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방주의 금고와 곡창을 약탈하고, 방주 근처 여러 곳에서 돈과 곡물을 나누어 가졌다. 짧은 시간 안에 왕경은 인근 마을과 도시를 습격하여 자신의 군사력을 구축했다.
쳐들어온 방주의 관군을 격퇴하고,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보내진 토벌군을 격퇴한다. 방산의 요새에는 날이 갈수록 부하가 늘어나, 차츰 관군의 세력을 압도해 간다. 마침내 역습에 나선 왕경은, 방주의 주지사 장고행 등을 살해하고, 주 전체를 점령한다.
고문인 이주(李助)의 도움으로 왕경은 경남(荊南, 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초왕(楚王)"(楚王중국어)이라고 선언했다. 왕경의 반란을 알게 된 후, 후베이 지역의 다른 많은 산적과 무법자들이 그를 지지하며 그의 초나라 왕국에 합류했다. 3~4년 안에 왕경은 송나라 제국의 6개 주를 장악했다. 그는 남풍(南豐, 현재의 단장커우, 후베이성 인근)에 궁전을 지었다. 왕경의 초나라 왕국은 나중에 8개 주로 확장되어 현재의 후베이, 충칭 및 쓰촨성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양산박의 무법자들이 휘종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북쪽의 요 제국 침략자를 물리치고 송나라 영토 내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여 송나라 제국에 봉사했다. 요나라 침략자와 진나라(전호)에 의해 세워진 왕국을 격파한 후, 양산박의 영웅들은 초나라 왕국에 주목하여 결국 승리했다. 왕경은 양산박의 이준에게 포로로 잡히고, 송나라 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결국 ''능지처참''을 당했다.
3. 3. 진압과 영향
왕경은 체포에 저항하고 정부 군인을 죽인 후 방주(房州, 현재의 팡현, 후베이성)에서 송나라 제국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방주의 금고와 곡창을 약탈하고, 방주 근처 여러 곳에서 돈과 곡물을 나누어 가졌다. 짧은 시간 안에 왕경은 인근 마을과 도시를 습격하여 자신의 군사력을 구축했다.고문인 이주(李助)의 도움으로 왕경은 경남(荊南, 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초왕(楚王)"(楚王중국어)이라고 선언했다. 왕경의 반란을 알게 된 후, 후베이 지역의 다른 많은 산적과 무법자들이 그를 지지하며 그의 초나라 왕국에 합류했다. 3~4년 안에 왕경은 송나라 제국의 6개 주를 장악했다. 그는 남풍(南豐, 현재의 단장커우, 후베이성 인근)에 궁전을 지었다. 왕경의 초나라 왕국은 나중에 8개 주로 확장되어 현재의 후베이, 충칭 및 쓰촨성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 기세로, 얼마 안 가 쳐들어온 방주의 관군을 격퇴하고,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보내진 토벌군을 격퇴한다. 그 사이에 방산의 요새에는 날이 갈수록 부하가 늘어나, 차츰 관군의 세력을 압도해 간다. 마침내 역습에 나선 왕경은, 방주의 주지사 장고행 등을 살해하고, 주 전체를 점령해 버린다. 부패한 관군은 왕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적이 아니었고, 그 후에도 멈출 줄 모르고 왕경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한다. 남풍, 형남, 산남, 운안, 안덕, 동천, 완주, 서경의 8주와 그 관하 86현을 점령하기에 이르자, 문무백관을 스스로 임명, 국호를 초로 정하고, 조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는 초왕을 참칭했다.
양산박의 무법자들이 휘종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그들은 북쪽의 요 제국 침략자를 물리치고 송나라 영토 내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여 송나라 제국에 봉사했다. 요나라 침략자와 진나라(전호)에 의해 세워진 왕국을 격파한 후, 양산박의 영웅들은 초나라 왕국에 주목하여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조정의 칙명을 받은 송강을 수령으로 하는 양산박 군이 관군으로서 습격해 오자, 일전하여 열세에 놓이게 되고, 유민이 지키는 완주, 단이가 지키는 산남, 굥단이 지키는 서경이 잇따라 함락된다. 형남을 지키는 조카 이회로부터 급보를 얻은 이조로부터, 양산박 군의 진격을 전해 듣고 격앙된 왕경은, 송군을 맞이하기 위해 부하들을 몇 차례나 보냈지만, 그 모두가 격퇴당하고, 마침내 본거지인 남풍까지 송군이 쳐들어온다. 여기서 왕경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송군에게 결전을 신청하지만, 양산박의 자랑인 영웅들이 정연하게 늘어선 구궁팔괘의 진 앞에서 대패를 겪게 된다. 패주하는 중에, 따르던 부하들도 서서히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얼마 안 되는 수행원을 데리고 청강의 강가로 쫓겨났지만, 도하하여 도망치려 타고 간 어선에서, 어부로 위장하고 있던 양산박의 이준의 손에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왕경은 양산박의 이준에게 포로로 잡히고, 송나라 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결국 ''능지처참''을 당했다. 체포된 왕경은 동경으로 압송되어, 본보기로 능지형에 처해져, 이 세상을 떠난다.
4. 평가
4. 1. 부정적 평가
4. 2. 긍정적 평가
5. 대중문화 속 왕경
5. 1. 수호전
5. 2. 기타 작품
6. 더 읽어보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