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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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관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송나라 시대의 환관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지녔다. 그는 탕구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요나라에 사절로 파견되는 등 휘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진족과의 동맹을 통해 요나라 멸망에 기여하려 했다. 그러나 방랍의 반란 진압 실패, 요나라 공격 실패, 금나라의 침략 등으로 인해 몰락하여 결국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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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4년 출생 - 숙종 (고려)
숙종은 고려 제15대 왕으로, 왕권 강화, 남경 건설, 화폐 유통 등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여진족에 대비하여 별무반을 창설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 송나라의 절도사 - 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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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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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자 (간체) | 童贯 |
한자 (번체) | 童貫 |
병음 | Tóng Guàn |
자 | 도부 (道夫) |
출생지 | 개봉부 |
사망지 | 해남도 부근 |
사망년도 | 1126년 |
직위 및 관직 | |
관직 | 태위, 영추밀원 |
주요 인물 | |
섬긴 군주 | 휘종, 흠종 |
특기 사항 | |
특기 사항 | 수호전 등장 인물 |
2. 생애
동관(童貫)은 북송 말기의 환관이자 군인으로, 휘종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환관임에도 군사적 재능을 보여 서하와의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고 약 20년간 군권을 장악했으며,[1] 1111년에는 태위·영추밀원사(領樞密院事)에 올라 삼공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다.[1] 그는 서화와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 예술을 애호했던 휘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재상 채경과 결탁하여 권세를 더욱 공고히 했다.
1118년, 동관은 여진족이 세운 금과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공격하고 연운십육주를 회복할 것을 휘종에게 건의했다.[2] 이 제안은 받아들여져 1120년 해상의 맹이 체결되었고, 동관은 송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벌을 시작하려던 차에 강남에서 방랍의 난이 발생하자, 동관은 북벌군 주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을 진압했다.[1]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백성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으며, 반란 진압 후 북벌을 재개했으나 1122년 연경 공략에 실패하고 금나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연경을 차지했다.[1]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연경 수복이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왕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금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동관은 금나라의 침공 위협 앞에서 1125년 태원의 수비를 포기하고 수도 개봉으로 도주하는 실책을 저질렀다.[1][3] 이는 정강의 변으로 이어져 북송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휘종의 사치를 부추기고 화석강 운반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여 채경, 주억(朱勔), 이방언(李邦彦), 왕부, 양사성(梁師成)과 함께 '육적(六賊)'으로 불리며 민중의 원성을 샀다. 군자금을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비판도 받는다.
흠종 즉위 후, 태학생 진동(陳東) 등의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해의 섬으로 유배되었다.[1] 유배지로 가던 도중 조정의 명을 받은 어사(御史) 장정(張澂)에 의해 참수되었고, 그의 목은 개봉 저잣거리에 내걸렸다.[1] 후대의 소설 수호전에서도 고구, 채경 등과 함께 대표적인 간신으로 등장한다.
2. 1. 초기 경력
동관(童貫)은 환관이었으나 1080년대에 유력한 환관 장군의 휘하에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송나라 역사상 몇 안 되는 환관 출신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1]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록에 따르면 동관은 강인한 성품과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으며, 환관에게는 드물게 긴 수염을 가졌다고 전해진다.[1] 그는 유연경(劉延慶)·양가세(楊可世)·마확(馬拡) 등의 장교를 감독하며 서하와 싸우는 등 약 20년 동안 군사적 권한을 행사했다.1104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휘종 황제는 그에게 직접 쓴 독특한 "수금체"(瘦金體) 글씨를 하사하며 신임을 보였다.[1] 동관은 서북 지역에서 탕구트족을 상대로 벌인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쌓았고, 휘종 황제의 깊은 총애를 받는 장군이자 고문으로 자리매김했다.[1]
1111년에는 태위(太尉)와 영추밀원사(領樞密院事)에 임명되어 그 지위가 삼공(三公)에 버금갔으며, 같은 해 북동쪽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1] 이후 그의 경력은 꾸준히 상승하여, 이듬해인 1112년에는 최고 군 지휘부의 정점에 올랐다. 마침내 1116년에는 송나라 역사상 최초의 환관 출신으로서 중앙 행정부 최고위직에 올라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1]
동관은 당시 엘리트들의 사교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휘종 황제가 주최한 여러 연회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1] 또한 그는 궁궐 환관 중 화가로서의 전기가 편찬된 10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1]
2. 2. 요나라와의 관계 및 금나라와의 동맹
1111년, 동관은 요나라 9대 황제 천조제 야율연희의 생일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때 요나라 관료 출신 마식(馬植)으로부터 여진과 동맹하여 요나라를 공격하고 연운 16주를 되찾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계획은 1118년 동관이 휘종 황제에게 건의하여[2]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120년 마침내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와 해상의 맹이라 불리는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금나라는 고북구(古北口) 이북 지역을, 송나라는 요나라의 남경(南京)인 연경을 점령하고, 연운 16주 전체를 송나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했다.그러나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를 공격하려던 시점에 강남 지역에서 방랍의 난이 발생했다. 동관은 북벌을 위해 편성했던 군대 중 15만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강남 주민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반란은 1121년 4월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었으나, 이로 인해 북벌 군대의 전력이 크게 소모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란 진압 후 동관은 북상하여 연경 공격에 나섰으나 노구교에서 첫 패배를 겪었다. 이후 요나라 장수 고봉(高鳳)과 곽약사(郭葯師)가 탁주(涿州)와 역주(易州)를 바치고 항복하자, 동관은 사기가 올라 다시 20만 대군을 동원해 연경을 공격했다. 하지만 1122년 야율대석 등이 지키는 연경의 요나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송군은 백구하(白溝河) 전투 등에서 연이어 참패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
결국 동관은 자력으로 연경을 공략하는 것을 포기하고 금나라의 아골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금군은 손쉽게 연경을 함락시킨 뒤 도시를 약탈하고 나서야 송나라에 넘겨주었다. 대신 금나라는 연운 16주 중 태행산 동쪽 7주만을 송나라에 할양하고, 연경에서 걷는 세금과 매년 막대한 세폐(돈과 비단)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1] 또한 양국은 반란자나 항복자를 서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약속했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결과였으나, 송나라 조정에는 연경 수복 사실만 크게 알려져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관은 왕(王)의 작위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송나라는 맹약을 어기고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투항한 장각(張珏)을 받아들였다. 금나라가 맹약 위반을 지적하며 강하게 항의하자, 송나라는 결국 장각을 처형하고 그의 목과 두 아들을 금나라로 보내야 했다. 또한 하동로 선무사(河東路宣撫使) 담진(譚稹)이 금나라에 약속한 군량 제공을 거부하여 문제를 일으키자, 휘종은 동관을 보내 이를 수습하게 했다. 결정적으로 송나라는 금나라에 쫓기던 요나라의 천조제를 몰래 맞아들이려 시도했다. 이 사실이 금나라에 발각되자 동관은 사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의 머리를 대신 보내려 했으나, 불안을 느낀 천조제가 도망치다 1125년 금나라군에 붙잡히면서 송나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송나라의 거듭된 맹약 위반은 금나라에게 침공의 명분을 주었다. 금나라는 천조제 생포 사실을 알리며 태원에 주둔하고 있던 동관에게 운중(雲中)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다. 동관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여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홀로 수도 개봉으로 도주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나라 군대가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금송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결국 북송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3] 북쪽 국경 방어를 위해 오랫동안 조성했던 방어용 숲을 동관이 제거하여 북중국 평원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것도 금나라의 침공을 용이하게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3]
2. 3. 방랍의 난 진압
1120년, 동관은 금과 해상의 맹을 맺고 요나라를 협공하여 연운십육주를 탈환하려 했다. 당시 송군 총사령관이었던 동관은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북벌을 준비했다.그러나 군사 행동을 시작하려던 때, 강남에서 방랍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인 방랍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 이에 동관은 북벌을 위해 편성했던 군대에서 15만 명을 급히 차출하여 남쪽으로 보내 반란 진압을 명했다. 왕연(王淵), 한세충, 신흥종 등의 장수들이 이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1]
반란군의 저항은 격렬했고 진압은 장기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관의 군대는 강남 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다. 1121년 4월, 마침내 왕연 휘하의 장수였던 한세충의 활약으로 방랍을 사로잡아 처형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1]
하지만 이 반란 진압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격전을 치르면서 송나라 군대는 심각하게 소모되었으며, 이는 이후 북방에서 금나라 및 북요와의 전투에서 송군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
2. 4. 연운 16주 공격 실패
1111년 요나라 사절로 파견되었던 동관은 요나라 관료 출신 마식(馬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진족과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공격하고 연운 16주를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이는 휘종 황제의 지지를 얻어 1120년 금나라와의 해상의 맹 체결로 이어졌다.[2]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고북구(古北口)까지, 송나라는 요나라의 남경(南京, 현재의 연경)을 포함한 연운 16주를 차지하기로 합의했다.그러나 1120년 동관이 66세의 나이로 연경 공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시작하려던 참에, 강남 지역에서 방랍의 난이 대규모로 발생했다.[1] 동관은 북벌을 위해 준비했던 군대 중 15만 명을 차출하여 남쪽으로 이동, 반란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동관은 수십만 명에 달하는 강남 주민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으며, 1121년 4월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방랍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북벌 군대는 심각하게 소모되었고, 금나라와의 공동 작전 계획은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방랍의 난이 진압된 후인 1122년, 동관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재개했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으로 천조제가 도망치고, 야율대석 등이 연경에 북요를 세운 상태였다. 동관은 북요군이 송나라에 항복할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연경을 지키던 야율대석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양가세, 신흥종, 종사도가 이끈 송군은 백구하(白溝河) 전투에서 참패했으며, 특히 동관이 퇴로를 차단하는 실책을 저질러 종사도의 동로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북요 내부의 혼란을 틈타 여진족 출신 장수 곽약사가 송나라에 투항했다. 동관은 병력을 20만으로 증원하고 유연경에게 지휘를 맡겨 곽약사의 계책에 따라 연경 기습을 감행했다. 송군은 성벽을 넘어 시내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어진 시가전에서 북요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또다시 참패하고 군대는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1]
두 차례의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동관은 자력으로 연경을 점령하는 것을 포기하고 금나라의 아골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금나라는 손쉽게 연경을 점령한 뒤 도시의 사람과 물자를 약탈하고 나서야 송나라에 넘겨주었다. 그 대가로 송나라는 연운 16주 중 태행산 동쪽의 7개 주만을 돌려받았으며, 연경에서 걷는 세금과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돈과 비단)를 금나라에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1] 조정에는 연경을 되찾았다는 사실만 크게 알려져 동관은 왕의 작위까지 받았지만, 실제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은 실패한 원정이었다. 이 패배의 책임으로 동관은 지휘관직에서 물러나 은퇴해야 했다.[1] 이 실패는 송나라 군대의 약점을 드러냈고, 이후 금나라의 침공과 북송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2. 5. 금나라의 침략과 몰락
1123년 해상의 맹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나라는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투항해 온 장각(張珏)을 받아들였다. 이는 금나라와의 맹약을 어기는 행위였고, 금나라가 강력히 항의하자 송나라는 결국 장각을 처형하고 그의 목과 두 아들을 금나라로 보내야 했다.[1]또한 휘종은 금나라 몰래 도주 중이던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를 동관에게 비밀리에 맞아들이도록 지시했다.[1] 이 사실이 금나라에 알려지자, 금나라는 사신을 보내 천조제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동관은 이를 부인했다.[1] 금나라 사신의 계속된 압박에 동관은 부하 장수에게 색목인의 머리를 천조제의 것이라고 속여 바치게 했다.[1] 신변의 위협을 느낀 천조제는 동관의 진영을 몰래 빠져나와 도주했으나, 결국 1125년 금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다.[1] 송나라가 거듭 맹약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금나라는 송나라를 침공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1124년 동관은 북방 국경 임무를 맡아 송나라와 요나라 국경 사이에 오랫동안 방어선 역할을 했던 숲을 제거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화북 평원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더욱 취약해졌다.[3] 1125년 말, 금나라는 천조제를 사로잡았음을 송나라에 통보하는 동시에, 당시 태원에 주둔하고 있던 동관에게 운중(雲中)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다.[1] 갑작스러운 금나라의 침공 소식과 요구에 동관은 크게 당황하여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방어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긴 채 혼자 수도 개봉으로 도망치는 적전 도주를 감행했다.[1] 직후 금나라 군대는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정강의 변을 일으켰고, 이는 북송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
1126년 정월, 금나라 군대가 황하를 건너 수도 개봉을 위협하자,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동관 등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남경 응천부(南京應天府, 현재의 중국 허난성 상구)로 피신했다.[1] 그해 2월, 송나라가 영토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을 약속하며 금나라와 화의를 맺자 금나라 군대는 잠시 철수했다. 이 와중에 동관이 휘종의 복위를 꾀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1]
3월, 동관은 휘종과 함께 개봉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민심과 조정의 여론은 싸늘했다. 수도에서는 그와 채경 등을 포함한 이른바 '육적(六賊)'[1]을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특히 태학생 진동(陳東) 등은 상소를 올려 동관의 죄상을 강력히 규탄하며 책임을 물었다.[1] 결국 동관은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해의 섬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1] 유배지로 가던 도중, 조정의 명령을 받은 어사(御史) 장정(張澂)에 의해 참수되었다.[1] 그의 목은 개봉으로 보내져 저잣거리에 내걸렸다.[1] 권력을 남용하고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그의 행적은 후대에 큰 비판을 받았으며, 시내암의 소설 수호전에서도 간신으로 묘사되었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논문
FRONTIER, FORTIFICATION, AND FORESTATION: DEFENSIVE WOODLAND ON THE SONG–LIAO BORDER IN THE LONG ELEVENTH CENTURY
2018-07-00
[4]
서적
『宋史』
[5]
웹사이트
중국역대관직사전 - 쑤저우 응봉국
http://www.gg-art.co[...]
中華博物審編委員會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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