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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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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신복은 발해 문왕 때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다. 762년 23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여 천황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당나라의 정세를 보고했다.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3위의 지위를 받고 연회에 참석했으며, 귀국 시에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 당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달했고, 이 정보는 일본 조정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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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신복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왕신복
원어 이름王新福
성별남성
국적발해
직함 정보
직책자수대부행정당성좌윤개국남
군주발해 문왕

2. 생애

발해 문왕 때 발해사에 대사로서 파견되어 762년, 23명의 사신단을 데리고 일본으로 향했다.

천황에게 선물을 주고 당나라의 정세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천황으로부터 정3위에 봉해졌으며, 연회에 참관했다.

귀국할 때는 일본 태사로부터 향응을 받고, 일본 천황으로부터도 잡색의 겹옷 30궤(櫃)를 선물로 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762년) 10월에 정육위상 · 이기익마로를 수행하여, 발해 사신의 대사로서 총 23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먼저 에치젠국 가카군에 안치되어 필수품을 공급받았다.[1] 윤 12월에 헤이조쿄에 들어갔다.[2]

이듬해 763년 정월 1일에 다른 문관들과 함께 의식에 따라 다이고쿠덴에서 천황에게 배알했다.[3] 3일에는 발해국의 산물을 일본의 조정에 헌납했다.[4] 같은 해 7일에는 대사인 왕신복은 정삼위, 부사인 이능본은 정사위상, 판관 양회진은 정오위상, 품관착비의 달능신은 종오위하의 서위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 일행은 일본의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5] 같은 달 17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는데, 그 때 안사의 난에 따른 의 동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가 (당 왕조의 성)의 현종과 숙종 두 황제는 붕어했고 광평왕(대종)이 정치를 맡고 있으나, 곡물은 열매를 맺지 않고 인민은 서로 잡아먹는 상태이다. 사가인 사조의는 성무황제라 칭하고 있으나, 인정이 많고 배려심이 있으며 많은 인민이 아군으로 따르고 있다. 그 군세는 매우 강력하여 당할 자가 없다. 등주샹양은 이미 사가에 속해 있으며, 이씨는 쑤저우만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발해에서 당으로의 조공 왕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6]

이 정보를 받고 준닌 천황은 다자이후에 대해 견당사를 당에서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내일했던 심유악 등을 귀국시키지 않고 다자이후에 계속 안치하도록 칙령을 내렸다.[6]

같은 해 2월에 신복 등은 귀국하게 되었지만, 배가 썩어 낡아졌기 때문에 송사판관 · 헤구리노무시마로 등은 도해가 불가능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 머물 것을 조정에 신청했다. 이에 따라 사생 이상은 전원 도해를 중지하고, 배를 수리한 뒤 좌병위 · 이타후리노카마타바(板振鎌束)를 선사(船頭, 선장)로 하여 신복 등을 동반하여 출발시켰다. 10월이 되어서 이타후리노카마타바는 유학생을 동반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신복은 무사히 발해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7]

2. 1. 발해 사신 파견

762년 10월에 정육위상 이기익마로를 수행하여, 총 23명의 발해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치젠국 가카군에 안치되어 필수품을 공급받았으며[1], 윤 12월에 헤이조쿄에 들어갔다[2]。발해 문왕 때 발해사에 대사로서 파견되었다.

763년 정월 1일, 다른 문관들과 함께 의식에 따라 다이고쿠덴에서 천황에게 배알했고[3], 3일에는 발해국의 산물을 일본 조정에 헌납했다[4]。같은 해 7일에는 대사인 왕신복은 정삼위, 부사인 이능본은 정사위상, 판관 양회진은 정오위상, 품관착비의 달능신은 종오위하의 서위를 받았다. 더 나아가 일행은 일본의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5]。같은 달 17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는데, 그 때 안사의 난에 따른 의 동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가 (당 왕조의 성)의 현종과 숙종 두 황제는 붕어했고 광평왕(대종)이 정치를 맡고 있으나, 곡물은 열매를 맺지 않고 인민은 서로 잡아먹는 상태라고 전했다. 사가인 사조의는 성무황제라 칭하고 있으나, 인정이 많고 배려심이 있으며 많은 인민이 아군으로 따르고 있고, 그 군세는 매우 강력하여 당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등주샹양은 이미 사가에 속해 있으며, 이씨는 쑤저우만을 지키고 있어, 발해에서 당으로의 조공 왕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했다.[6]

이 정보를 받고 준닌 천황은 다자이후에 대해 견당사를 당에서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내일했던 심유악 등을 귀국시키지 않고 다자이후에 계속 안치하도록 칙령을 내렸다[6]

같은 해 2월에 신복 등은 귀국하게 되었지만, 배가 썩어 낡아졌기 때문에 송사판관 · 헤구리노무시마로 등은 도해가 불가능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 머물 것을 조정에 신청했다. 이에 따라 사생 이상은 전원 도해를 중지하고, 배를 수리한 뒤 좌병위 · 이타후리노카마타바(板振鎌束)를 선사(船頭, 선장)로 하여 신복 등을 동반하여 출발시켰다. 10월이 되어서 이타후리노카마타바는 유학생을 동반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신복은 무사히 발해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7]

귀국할 때는 일본 태사로부터 향응을 받고, 일본 천황으로부터도 잡색의 겹옷 30궤(櫃)를 선물로 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2. 2. 일본에서의 활동

762년 10월에 정육위상 · 이기익마로를 수행하여, 발해 사신의 대사로서 총 23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먼저 에치젠국 가카군에 안치되어 필수품을 공급받았다.[1] 윤 12월에 헤이조쿄에 들어갔다.[2]

이듬해 763년 정월 1일에 다른 문관들과 함께 의식에 따라 다이고쿠덴에서 천황에게 배알했다.[3] 3일에는 발해국의 산물을 일본의 조정에 헌납했다.[4] 같은 해 7일에는 대사인 왕신복은 정삼위, 부사인 이능본은 정사위상, 판관 양회진은 정오위상, 품관착비의 달능신은 종오위하의 서위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 일행은 일본의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5] 같은 달 17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

귀국할 때는 일본 태사로부터 향응을 받고, 일본 천황으로부터도 잡색의 겹옷 30궤(櫃)를 선물로 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2. 2. 1. 일본 조정의 환대

762년 10월에 정육위상 · 이기익마로를 수행하여, 발해 사신의 대사로서 총 23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먼저 에치젠국 가카군에 안치되어 필수품을 공급받았다.[1] 윤 12월에 헤이조쿄에 들어갔다.[2]

이듬해 763년 정월 1일에 다른 문관들과 함께 의식에 따라 다이고쿠덴에서 천황에게 배알했다.[3] 3일에는 발해국의 산물을 일본의 조정에 헌납했다.[4] 같은 해 7일에는 대사인 왕신복은 정삼위, 부사인 이능본은 정사위상, 판관 양회진은 정오위상, 품관착비의 달능신은 종오위하의 서위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 일행은 일본의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5] 같은 달 17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

귀국할 때는 일본 태사로부터 향응을 받고, 일본 천황으로부터도 잡색의 겹옷 30궤(櫃)를 선물로 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2. 3. 귀국

762년 10월에 정육위상 · 이기익마로를 수행하여, 발해 사신의 대사로서 총 23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먼저 에치젠국 가카군에 안치되어 필수품을 공급받았다.[1] 윤 12월에 헤이조쿄에 들어갔다.[2]

이듬해 763년 정월 1일에 다른 문관들과 함께 의식에 따라 다이고쿠덴에서 천황에게 배알했다.[3] 3일에는 발해국의 산물을 일본의 조정에 헌납했다.[4] 같은 해 7일에는 대사인 왕신복은 정삼위, 부사인 이능본은 정사위상, 판관 양회진은 정오위상, 품관착비의 달능신은 종오위하의 서위를 받았다. 더 나아가 일행은 일본의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5] 같은 달 17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인들과 함께 준닌 천황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는데, 그 때 안사의 난에 따른 의 동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가 (당 왕조의 성)의 현종과 숙종 두 황제는 붕어했고 광평왕(대종)이 정치를 맡고 있으나, 곡물은 열매를 맺지 않고 인민은 서로 잡아먹는 상태이다. 사가인 사조의는 성무황제라 칭하고 있으나, 인정이 많고 배려심이 있으며 많은 인민이 아군으로 따르고 있다. 그 군세는 매우 강력하여 당할 자가 없다. 등주샹양은 이미 사가에 속해 있으며, 이씨는 쑤저우만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발해에서 당으로의 조공 왕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정보를 받고 준닌 천황은 다자이후에 대해 견당사를 당에서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내일했던 심유악 등을 귀국시키지 않고 다자이후에 계속 안치하도록 칙령을 내렸다.[6]

같은 해 2월에 신복 등은 귀국하게 되었지만, 배가 썩어 낡아졌기 때문에 송사판관 · 헤구리노무시마로 등은 도해가 불가능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 머물 것을 조정에 신청했다. 이에 따라 사생 이상은 전원 도해를 중지하고, 배를 수리한 뒤 좌병위 · 이타후리노카마타바(板振鎌束)를 선사(船頭, 선장)로 하여 신복 등을 동반하여 출발시켰다. 10월이 되어서 이타후리노카마타바는 유학생을 동반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신복은 무사히 발해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7]

3. 역사적 의의

3. 1. 현대적 관점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0762-11-03 #天平宝字6年10月1日 -> 762년 11월 3일 (일본 연호 -> 서기 변환)
[2] 서적 続日本紀 0763-02-07 #天平宝字6年閏12月19日 -> 763년 2월 7일
[3] 서적 続日本紀 0763-02-18 #天平宝字7年正月1日 -> 763년 2월 18일
[4] 서적 続日本紀 0763-02-20 #天平宝字7年正月3日 -> 763년 2월 20일
[5] 서적 続日本紀 0763-02-24 #天平宝字7年正月7日 -> 763년 2월 24일
[6] 서적 続日本紀 0763-03-06 #天平宝字7年正月17日 -> 763년 3월 6일
[7] 서적 続日本紀 0763-04-08 #天平宝字7年2月20日 -> 763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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