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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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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토수는 에도 시대부터 사용된 일본의 전통적인 소화 도구이다. 지붕에 물을 뿌려 연소를 방지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120년 이상 사용되었다. 용토수는 심하게 흔들리고 물이 새는 등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현재도 가동 가능한 용토수가 남아있어 소방서 행사 등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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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토수
개요
명칭용토수 (龍吐水)
다른 이름운룡수 (雲龍水), 용두수 (龍頭水)
로마자 표기Yongtosu
일본어 표기竜吐水 (りゅうどすい)
정의
정의화재 진압을 위해 사용된 수동식 펌프
형태 및 구조
형태긴 나무 상자 형태
작동 방식인력으로 상자 안의 물을 밀어 올려 방수
지렛대 원리 이용
역사
기원일본 에도 시대
한국 도입조선 시대 후기
용도
주요 용도화재 진압
추가 용도세척
살수
참고 문헌
참고 문헌가코가와시 소방본부: 운룡수란??

2. 역사

용토수는 에도 시대에 사용된 펌프식 방수 도구로, 화재 발생 시 지붕에 물을 뿌려 연소 확산을 막는 정도의 제한적인 소화 능력을 가졌다.[2] 이후 쇼와 시대에 사용된 다른 형태의 수동 방수 도구를 용토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1. 에도 시대

18세기 중반 메이와 원년(1764년)에 에도 막부가 각 마을에 지급한 펌프식 방수 도구이다.[2] 화재 발생 시 지붕에 물을 뿌려 연소를 방지하는 정도의 제한적인 소화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드워드 S. 모스의 그림 일기에도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용토수는 자신반야(自身番屋)에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2]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외관은 상자 형태이고 가마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에도 시대의 소화기로 볼 수 있다. 에도 도쿄 박물관에는 메이지 15년(1882년)에 제작된 용토수가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세일럼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이 소장한 모스 컬렉션에도 용토수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 유물의 수조 부분 높이는 53.3cm이다.

한편, 쇼와 시대에 사용된 원통형의 수동 방수 도구를 용토수라고 칭하는 박물관도 있다.

2. 2. 메이지 시대

모스(Morse)의 일기에는 1877년(메이지 10년) 7월 15일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용토수가 사용되는 모습을 목격한 기록이 남아있다. 모스는 일본 문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용토수를 이용한 소방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용토수를 "가장 어리석고 유치한 도구"라고 평가하며, 그 이유로 방수되는 물줄기가 연필 굵기 정도에 불과하고, 수동 펌프에 있는 공기통이 없어 물이 약하게 끊기며 나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햇볕에 노출되어 건조된 탓에 생긴 균열로 물이 새어 나가고, 여러 대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작동 시 심하게 흔들려 여러 사람이 붙잡아야 하는 점, 물이 새어 소방관이 흠뻑 젖는 문제점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모스는 소방관들의 용기는 높이 평가했지만, 장비의 성능에 대해서는 혹평을 남겼다.

한편, 다나카 히사시게는 용토수의 단점, 특히 급수가 자주 끊기는 문제와 통 끝부분(노즐)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 점을 개선하여 1847년(고카 4년)에 "'''운룡수'''"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화기를 개발했다.[3] 운룡수는 방수 거리가 최소 5간(약 9m) 이상으로 향상되어 당시 일본 내 소화기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영국에서 수입된 소방 펌프가 도입되기도 했으나, 성능 면에서는 운룡수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4]

3. 구조 및 성능

18세기 중반 메이와 원년(1764년)에 에도 막부가 각 마을에 지급한 펌프식 방수 도구이다. 주로 화재 발생 시 지붕에 물을 뿌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는 정도의 제한적인 소화 능력만 가지고 있었다.[2] 평상시에는 자신반야(自身番屋, 에도 시대의 자치 소방 조직 및 그 건물)에 보관되었다.[2]

성능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1877년(메이지 10년)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을 목격한 모스는 그의 일기에서 용토수를 "가장 어리석고 유치한 도구"라고 평가했다. 그는 방수되는 물줄기의 굵기가 연필 정도에 불과하고, 공기통이 없어 물이 조금씩 끊어져 나온다고 지적했다. 또한 나무 재질의 특성상 건조하면 쉽게 갈라져 틈새로 물이 새어 나왔으며, 여러 대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작동 시 심하게 흔들려 여러 사람이 붙잡아야 했고, 물이 새어 소방관들이 흠뻑 젖는 등 여러 결함을 지적하며 혹평했다. 다만, 소방관들의 용감함은 높이 평가했다.[2] 재질상 건조에 약하고 저수성이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다나카 히사시게는 "급수가 자주 끊기는 결함"과 "통의 끝부분(선단)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고, 1847년(고카 4년)에 이를 개량한 신형 소화기인 '''운룡수'''(雲龍水)를 개발했다.[3] 운룡수는 방수 거리가 최소 5간(약 9m) 이상으로 향상되어 당시 일본 내 소화기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메이지 4년(1871년)에 영국에서 수입된 소화 펌프와 비교해도 성능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4]

용토수는 당시로서는 고가의 장비로, 1대당 가격이 약 10에 달했다고 한다. 에도 시대의 화폐 가치는 변동이 심해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가치로 약 250만 정도로 추정되기도 한다.[5]

용토수의 모습은 우타가와 쿠니요시가 1833년(덴포 4년)에 그린 「나리타 산에마」에도 묘사되어 있으며[6], 펠리체 베아토가 막말 시대에 촬영한 요코하마 소방관 사진에도 등장한다.[7] 베아토의 사진을 통해 추정해 보면, 방수통의 높이는 3m에 미치지 못하며, 2층 이상 건물 화재 진압에는 효용성이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스의 기록처럼 작동 시 흔들림이 심했다면 높은 곳에 설치하여 사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범죄자 체포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모스가 지적한 연필 굵기의 물줄기, 3m 미만의 방수 거리, 낮은 저수량 등을 고려할 때 사람의 움직임을 제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용토수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120년 이상 사용된 소화 도구이다. 현재도 수는 적지만 가동 가능한 용토수와 운룡수가 각지에 남아 있으며, 소방서 행사 등에서 작동 시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1][5] 에도 도쿄 박물관에는 1882년(메이지 15년)에 제작된 용토수가 소장되어 있다.

3. 1. 구조

용토수는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 펌프가 설치된 구조로, 물을 담는 수조(방수통)를 갖추고 있다.[2] 에도 시대가마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소화 도구였다. 미국 세일럼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소장된 모스 컬렉션의 용토수의 경우, 수조 부분의 높이는 53.3cm이다.

쇼와 시대에 사용된 원통형의 수동 방수 도구를 용토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4. 운용

용토수는 에도 시대에 사용된 펌프식 방수 도구로, 주로 화재 발생 시 지붕 등에 물을 뿌려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사용되었다.[2] 각 마을의 자신반야(番屋)에 비치되어 운용되었으나, 본격적인 소화 능력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에드워드 S. 모스와 같은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물줄기가 가늘고 연속적이지 못했으며, 나무통의 누수나 작동 시의 불안정성 등 운용상의 어려움과 성능의 한계가 지적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부 용토수가 남아 있어 소방서 행사 등에서 작동 시연을 볼 수 있다.[1][5]

4. 1. 소방 활동

18세기 중반 메이와 원년(1764년)에 에도 막부가 각 마을에 지급한 펌프식 방수 도구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주로 지붕에 물을 뿌려 불이 더 번지는 것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본격적인 소화 능력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에드워드 S. 모스의 그림 일기에도 묘사되어 있다. 용토수는 각 마을의 자신반야(番屋)에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2] 나무로 만들어졌고 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마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에도 시대소화기로 볼 수 있다.

4. 2. 문제점

에드워드 S. 모스는 그의 일기에서 1877년 7월 15일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용토수가 사용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모스는 일본 문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소방 장비인 용토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용토수를 "가장 어리석고 유치한 도구"라고 평가하며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선, 방수되는 물줄기의 굵기가 연필 정도로 가늘었고, 당시 서양의 수동 펌프와 달리 공기통이 없어 물이 연속적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금씩 끊어져 나왔다고 묘사했다. 또한, 햇볕에 노출되어 건조된 탓인지 나무통의 틈이 벌어져 물이 사방으로 새어 나갔으며, 여러 대의 용토수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한두 대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작동 시에는 기기가 심하게 흔들려 여러 사람이 붙잡고 있어야 했으며, 누수로 인해 소방관들이 물에 흠뻑 젖는 등 운용상의 어려움도 지적했다. 모스는 소방관들의 용감함은 인정하면서도, 용토수 자체의 성능과 효율성에 대해서는 혹평을 남겼다.

4. 3. 기타

용토수는 제작 당시 상당히 고가였으며, 1대당 약 10이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의 화폐 가치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어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0만 엔 정도에 해당한다는 평가가 있다.[5]

용토수가 체포 도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모스의 기록에 따르면 방수되는 물줄기의 굵기가 연필 정도에 불과하여 사람의 움직임을 제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한 사진이나 모스의 스케치를 보면 방수통의 높이는 3m에 미치지 못하며, 방수 거리도 2층 건물 지붕에 겨우 닿는 수준으로 추정되어 멀리 있는 사람에게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 세일럼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소장된 용토수의 수조 높이가 53.3cm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저수량이 적어[2] (현대의 펌프차는 보통 1ton 이상), 짧은 시간 안에 방수 능력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을 계속 보충하는 것도 비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에도 도쿄 박물관에는 메이지 15년(1882년)에 제작된 용토수가 소장되어 있다. 쇼와 시대에 사용된 원통형의 수동 방수 도구를 용토수라고 부르는 박물관도 있다.

우타가와 쿠니요시가 덴포 4년(1833년)에 그린 「나리타 산에마」에도 용토수가 등장한다. 화재 현장으로 향하는 사다리, 마토이, 토비구치, 높은 제등 등을 든 소방대의 행렬 뒤편에 용토수가 그려져 있으며, 그 뒤에는 용토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큰 통을 든 대원도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모스의 스케치보다 44년 앞선 것으로, 채색되어 있어 당시 용토수의 모습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6] 펠리체 베아토는 막말 시대 요코하마의 소방관과 함께 있는 용토수를 사진으로 남겼다.[7]

비록 수는 적지만, 현재도 가동 가능한 용토수와 운룡수(雲龍水, 용토수의 개량형)가 각지에 남아 있으며, 소방서의 행사 등에서 작동 시연을 볼 기회가 있다.[1][5]

5. 등장 작품


  • 도몬 후유지의 소설 『소설 다나카 히사시게 메이지 유신을 움직인 천재 기술자』(슈에이샤 인터내셔널, 2005년, ISBN 4-7976-7136-X, pp.201-204)에서 용토수가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용토수에 대해 "급수가 자주 끊기는 결함이 있다", "통의 끝부분(선단)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후 다나카 히사시게가 이를 개량하여 고카 4년(1847년)에 신형 소화기인 '운룡수'를 고안했다는 내용이 서술된다.[3] 운룡수는 방수 거리가 최소 5간(약 9m) 이상으로, 당시 일본 내 소화기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메이지 4년에 영국에서 수입된 소화 펌프와 비교해도 성능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4]

참조

[1] 웹사이트 雲龍水って?? https://www.city.kak[...] 加古川市 2019-12-23
[2] 서적 歴史道 vol2[完全保存版] 江戸の暮らしと仕事大図鑑 朝日新聞出版 2019
[3] 문서 『広辞苑』では、「雲竜水」は竜吐水の異称と記されているが、実質的には改良発展型という事になる。
[4] 웹사이트 雲龍水(龍吐水) https://lib.ouj.ac.j[...] 放送大学附属図書館
[5] 웹사이트 「文化財防火デー」に長谷川家住宅で地域防災を考えるワークショップ https://www.city.kyo[...] 京都市消防局 2020-06-17
[6] 서적 図説 大江戸の賑わい 河出書房新社 1987
[7] 서적 F・ベアト 写真集1 幕末日本の風景と人びと 明石書店 2006
[8] 서적 歴史道 vol2[完全保存版] 江戸の暮らしと仕事大図鑑 朝日新聞出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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