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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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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울산 지역에 축조한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이 성을 도산왜성으로 불렀으며, 조선 후기에는 학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유재란 당시 두 차례의 울산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후 일본군 철수 시 불태워졌다.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부 석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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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울산왜성
한국어 명칭 (한글)울산왜성
한국어 명칭 (한자)蔚山倭城
로마자 표기Ulsan Waeseong
별칭甑城 (증성), 島山城 (도산성)
울산왜성
울산왜성 (학성)
위치
위치 (한국)대한민국 울산
좌표35°33′17.9″N 129°20′19.8″E
역사
축조 시기1597년
축조자가토 기요마사
사용 기간1593년-1598년
주요 전투울산성 전투
과거 지휘관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구조
종류일본식 성곽 (왜성)
높이6m
재료돌, 나무, 회반죽 벽
특징연결 복합식 (비현존)
잔존물석벽, 천수대, 호구, 오르막 석벽
관리 및 보존
관리 주체국 (산림청)

문화재 지정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1997년 10월 30일 지정)
과거 문화재 지정사적 제9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997년 10월 30일 해제)
기타 정보
면적59,678m2

2. 명칭

임진왜란 때 울산 지역에 일본군이 축성한 성이기 때문에, 울산왜성이라 불린다.[5] 축성 당시 조선명나라의 연합군은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5] 조선 후기에는 모습이 시루와 같다고 하여 '''학성'''(鶴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으며, 이에 따라 주변 마을도 학성리라고 불렸다.[5]

조선 정조 때에 저술을 시작하여 고종 때에 간행된 《울산읍지》에 이 성은 신학성(神鶴城)이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으며[6], 이를 통해 이 성을 학성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조선 후기 때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도 이 성의 정식명칭을 울산학성으로 정하였고, 이곳에 공원이 조성될 때에도 학성공원이라는 이름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성과는 별개로 고려 때에 축성된 학성이 따로 존재하였다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여, 학성이라는 명칭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7] 이러한 견해에 따라 1997년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때에는 정식명칭을 울산왜성으로 정하였다.

3. 역사



임진왜란 당시 조선명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충청도에서 진로가 막힌 일본군은 1597년 9월 16일 한반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방어에 나섰다.[10] 이때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며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다수의 성곽을 건조하였는데,[11] 울산왜성은 이 중 하나로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1597년 11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가 터를 잡고 모리 히데모토, 아사노 요키나가 등에 의해 축성이 시작되었다.[12] 밤낮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40일 만에 완공 직전에 이르렀다. 성벽 자재는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하였다.[12] 같은 해 12월 4일, 서생포왜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이 되었다.[13]

같은 해 12월 22일,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6만에 가까운 군사로 성을 포위했다. 수성장 아사노 요키나가와 구원 온 가토 기요마사 등은 미완공 상태에서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식량 부족으로 위기에 빠졌지만, 10일 후 모리 히데모토, 쿠로다 나가마사 등이 원군으로 도착하여 연합군을 크게 무찔렀다. 1598년 9월에도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울산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최전선이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울산성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울산왜성을 거점으로 농성한 가토 기요마사는 두 전투에서 모두 연합군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성에 불을 질러 기능을 잃었다.[14]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되었으며, 1624년부터 30년간 군함 생산 기지인 전선창(戰船廠)이 위치하기도 하였다.[14]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3년 1월 21일 울산학성(蔚山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 1일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른 등급 조정으로 다른 왜성들과 함께 사적에서 해제되었다.[15] 이후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도 울산왜성으로 고쳤다.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정비되어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4. 구조

울산왜성은 산 정상부를 3겹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일본식 성곽 형태를 띤다. 산 정상과 강가의 해발 45m 지점에는 동서로 100m, 남북으로 60m 정도의 본마루가 있고, 1차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본마루 북쪽의 해발 35m 지점에는 동서로 100m, 남북으로 40m 정도의 니노마루가 2차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3차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산노마루는 본마루 북서쪽 해발 25m 지점에 위치하며, 동서 40m, 남북 100m 정도의 크기였다. 성벽의 높이는 10~15m였으며,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300m 정도였다.[16]

성벽은 산의 경사에 의지하여 외부를 큰 돌로 쌓고 내부를 적심석(積心石)으로 채우는 산탁(山托)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벽은 일본의 성벽과 같이 비스듬한 각도를 유지하며, 다듬어진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반듯하게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의 적심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 잡석을 이용하였다. 이때 성벽에 가까운 적심석은 등석원(登石垣)의 길이대로 열을 맞추어 계단 형태로 쌓았기 때문에, 외벽이 무너져도 내부 적심석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17][18] 이는 조선 전기의 평지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축성방식으로, 왜성 건조에 일본뿐 아니라 조선의 축성기술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성에는 망루 역할을 하는 12개의 성로(城櫓)가 있었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의 성벽 아래에는 흙벽을 쌓고 목책을 둘렀으며, 여기에 총구를 설치하여 방어선으로 삼았다.

『아사노가 문헌』에 수록된 "울산의 성 축성 내역"에 따르면, 본마루·니노마루·산노마루의 석축 총 길이는 약 1.4km, 누각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 12개, 담장은 약 632m, 총구 담장은 약 2.6km에 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성의 동쪽, 현재의 울산중앙여고 부근을 지나 동천(東川)까지 약 500m에 이르는 평지에 길게 토성(土城)을 쌓은 흔적이 있다. 토성은 기단부가 8m 정도의 넓이에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주변의 논과 인가의 흙을 퍼올려 급히 건축되었다. 토성 위에는 150 cm 간격으로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19] 그러나 이 주변은 택지개발이 이루어져 현재 규모나 특징은 거의 파악할 수 없다.

5. 입지



== 지리적 입지 ==

울산왜성은 평야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해발 50m의 낮은 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낮으며, 동쪽은 경사가 급하고 높다. 축성 당시에는 태화강의 하구가 성의 남쪽에 맞닿아 있었으며, 만조 때에는 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를 이용하여 강가에는 보급과 연락을 위한 정박지가 있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선입지(船立址) 석표의 유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오랜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하구가 훨씬 동쪽으로 이동하여 있고, 성 아래를 흐르던 강줄기도 간척되어 주택가가 되어 있다.

== 전략적 입지 ==

울산왜성이 위치한 산은 다른 산줄기와 고립되어 있어 사면 어디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울산성 전투 초반, 돌격전을 감행한 조·명 연합군은 큰 피해를 보고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반면, 산이 고립되어 있어 공격측이 충분한 병력을 갖추면 성을 포위해 보급로를 차단하기 쉬웠다. 또 성 안에 우물이 없어 식수 수급이 매우 곤란한 약점이 있었다. 실제로 울산성 전투에서 연합군에 포위된 일본군은 군량 보급과 식수 수급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5. 1. 지리적 입지

울산왜성은 평야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해발 50m의 낮은 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낮으며, 동쪽은 경사가 급하고 높다. 축성 당시에는 태화강의 하구가 성의 남쪽에 맞닿아 있었으며, 만조 때에는 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를 이용하여 강가에는 보급과 연락을 위한 정박지가 있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선입지(船立址) 석표의 유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오랜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하구가 훨씬 동쪽으로 이동하여 있고, 성 아래를 흐르던 강줄기도 간척되어 주택가가 되어 있다.

5. 2. 전략적 입지

울산왜성이 위치한 산은 다른 산줄기와 고립되어 있어 사면 어디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울산성 전투 초반, 돌격전을 감행한 조·명 연합군은 큰 피해를 보고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반면, 산이 고립되어 있어 공격측이 충분한 병력을 갖추면 성을 포위해 보급로를 차단하기 쉬웠다. 또 성 안에 우물이 없어 식수 수급이 매우 곤란한 약점이 있었다. 실제로 울산성 전투에서 연합군에 포위된 일본군은 군량 보급과 식수 수급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6. 후대에의 영향

울산왜성은 포위공격에 의한 보급과 식수 수급 차단에 취약하였고,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한 일본군은 이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았다. 이 전투에서의 피해는 가토에게 전투에서 군량과 식수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울산왜성의 취약점은 가토가 자신의 영지에 쌓은 구마모토성 건조에 참고되었다. 구마모토 성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확보가 용이하도록, 성내에 120여개의 우물을 확보하고 실내의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만드는 등의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7. 학성공원



'''학성공원'''(鶴城公園)은 옛 울산왜성 터에 조성된 울산광역시의 공원이다. 1913년, 울산의 유지인 추전 김홍조가 주변 7천여 평의 땅을 사들여 조성하였다.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어 조성된 공원은, 1928년 울산면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울산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으로 이어져오고 있다.[20]

공원부지 내에는 봄편지 노래비, 박상진 의사 충모비, 충혼비, 놀이터와 운동기구 및 각종 편의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녹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산허리에 조성된 산책로는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또한 공원 내에 보물 제441호인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이 전시되어 있다.

학성공원은 울산을 대표하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나, 울산왜성의 보존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도와 화단이 조성되고 편의시설과 상점이 들어서면서, 북서쪽 성벽과 니노마루 및 산노마루는 대부분 훼손되었다.

8. 현지 안내문 및 해설

울산광역시 학성동에 있는 이 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불리던 성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이라 불렀다.[8]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조선군과 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8]

이 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8]

198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사에서는 2지환으로 이어지는 등석원과 3개소의 곡륜, 2개소의 요곡륜, 그리고 문지로 예상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9] 동서문물연구원 조사에는 구릉의 정상부에 축조된 울산왜성 본환에서 서남쪽으로 이격된 평지(해발 약 4m 선상)에 축조된 성벽의 일부 구간으로, 50˚내외의 경사를 가진 외벽의 축조기법상 왜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8] 확인된 왜성의 성벽은 외벽의 경우 (소형할석+밤자갈) 30cm 내외의 할석을 약 2m 범위로 채워서 외벽석을 뒤채움하였지만, 내측은 판축상으로 성토하여 토축되어 있다. 성토된 성벽 내부는 기존의 왜성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분단시공과 관련된 석렬이 확인되었다.[8]

8. 1. 현지 안내문

울산광역시 학성동에 있는 이 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불리던 성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이라 불렀다.[8]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조선군과 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8]

이 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8]

8. 2. 동서문물연구원 해설

198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사에서는 2지환으로 이어지는 등석원과 3개소의 곡륜, 2개소의 요곡륜, 그리고 문지로 예상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9] 동서문물연구원 조사에는 구릉의 정상부에 축조된 울산왜성 본환에서 서남쪽으로 이격된 평지(해발 약 4m 선상)에 축조된 성벽의 일부 구간으로, 50˚내외의 경사를 가진 외벽의 축조기법상 왜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8] 확인된 왜성의 성벽은 외벽의 경우 (소형할석+밤자갈) 30cm 내외의 할석을 약 2m 범위로 채워서 외벽석을 뒤채움하였지만, 내측은 판축상으로 성토하여 토축되어 있다. 성토된 성벽 내부는 기존의 왜성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분단시공과 관련된 석렬이 확인되었다.[8]

참조

[1] 서적 大日本分県地図併地名総覧 昭和十二年 昭和礼文社 1989-12-00
[2] 서적 岩波 日本史辞典 岩波書店 1999-00-00
[3] 서적 大辞林
[4] 문서 島山
[5] 웹사이트 부산진왜성.PDF 일본 고시 내용 부산·마산·울산·부산진지성문 왜성 호칭 구포·안골왜성 유적 발굴문 Busanjin Waeseong Dwarf Castle.PDF Contents of Japanese Notice Busan, Masan, Ulsan, Busan Jinji Castle Gate https://drive.google[...]
[6] 서적 조선시대 사찬읍지 제17권 한국인문과학원 1989-00-00
[7] 저널 蔚山 鶴城의 再考察 - 원 위치 고증을 중심으로 2006-03-00
[8]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9]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10] 서적 고적조사보고서 제십이책 울산왜성·병영성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6-00-00
[11] 저널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08-02-10
[12] 서적 고적조사보고서 제십이책 울산왜성·병영성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6-00-00
[13] 저널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08-02-10
[14] 웹인용 울산학성 http://guide.ulsan.g[...] 울산광역시청 2008-02-10
[15] 웹인용 문화재정보 http://guide.ulsan.g[...] 문화재청 2008-02-10
[16] 서적 다같이 돌자 울산 한바퀴 도서출판 처용 1999-00-00
[17] 서적 韓國南海沿岸城址의 考古學的 硏究 학연문화사 1995-00-00
[18] 서적 고적조사보고서 제십이책 울산왜성·병영성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6-00-00
[19] 서적 고적조사보고서 제십이책 울산왜성·병영성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6-00-00
[20] 웹인용 울산 학성공원 임진왜란 때 울산엔 무슨 일이 있었나? http://www.pusanbank[...] 부산은행 200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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