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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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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두당(Roundhead)은 1640년대 잉글랜드 내전 당시 왕당파에 대항한 의회파를 조롱하며 부르던 명칭이다. 1641년 말 잉글랜드 의회에서 1640년 성직자 법령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짧은 머리를 한 의회 지지자들을 가리켰다. 원두당은 찰스 1세의 절대 군주제에 반대하여 입헌 군주제를 추구했으나, 올리버 크롬웰 등의 공화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잉글랜드 연방이 수립되기도 했다. 이 용어는 1678년에서 1681년까지의 제외 위기까지 공화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후 휘그당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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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당
개요
둥근머리파의 이미지
둥근머리파의 이미지
지지 세력잉글랜드 의회, 스코틀랜드 언약도, 일부 잉글랜드 귀족 및 신사, 상인, 퓨리턴
반대 세력잉글랜드 왕당파
주요 전투에지힐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주요 인물올리버 크롬웰, 토머스 페어팩스, 존 핌, 존 햄든
별칭의회파, 둥근머리
활동 시기1642년-1651년
정치 성향의회주의, 퓨리터니즘
명칭 및 어원
유래1641년 말에서 1642년 초, 왕당파 군인들이 의회파를 조롱하기 위해 짧은 머리 스타일을 지칭하며 사용한 것에서 유래함.
머리 모양퓨리턴 남성들은 당시 유행했던 길고 화려한 머리 모양을 거부하고 짧고 단정한 머리를 선호했음.
당시 풍자왕당파는 둥근머리파의 짧은 머리를 비웃고 경멸하는 풍자 그림을 만들었음.
반대 명칭왕당파는 긴 머리를 한 사람들을 "캐벌리어"라고 불렀음.
종교적 의미짧은 머리는 퓨리턴의 절제된 신앙 생활을 상징했음.
주요 특징 및 사상
정치적 입장의회의 권한 강화와 왕권 제한을 주장함.
종교적 입장퓨리턴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 개혁을 지지함.
사회적 기반주로 상인, 소지주, 도시 거주민들로 구성되었음.
군사적 특징뉴모델 군대를 통해 효율적인 군사력을 보유함.
지도자올리버 크롬웰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지휘를 받음.
의회파의 사회적 특징
구성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 특히 런던 시민, 제조업자, 숙련공 및 소규모 상인이 주축.
지지 기반런던 및 항구 도시들과 같은 경제적 중심지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음.
사회적 지위일부 젠트리 계층도 둥근머리파를 지지하였음.
여성의 역할여성들은 전쟁 지원과 정치적 논쟁에 적극 참여함.
추가 정보
영향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 수립에 기여함.
관련 사건찰스 1세 처형에 중요한 역할을 함.
역사적 평가의회 민주주의 발전과 종교적 자유 확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됨.

2. 용어의 기원 및 배경

'라운드헤드'라는 용어는 1641년 말, 1640년 성직자 법령에 대한 의회 논쟁이 격화되면서 웨스트민스터에서 벌어진 폭동을 계기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의 기록에 따르면, 시위대는 머리카락을 귀보다 짧게 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라운드헤드"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6] 이 시위에는 머리를 짧게 깎도록 규정된 런던의 견습공들도 참여했는데, 이들에게 '라운드헤드'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

존 러시워스는 1641년 12월 27일, 해산된 장교 데이비드 하이드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하이드는 폭동 중에 칼을 뽑아 "주교들에 대해 고함치는 그 둥근 머리의 개들의 목을 베겠다"고 말했다고 한다.[6] 반면, 리처드 벡스터는 토마스 벤트워스, 스트래포드 백작 1세의 재판에서 찰스 1세의 부인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가 존 핌을 가리켜 "둥근 머리의 남자"가 누구냐고 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6] 찰스 2세의 고문이었던 에드워드 하이드, 클래런던 백작 1세는 '라운드헤드'와 '캐벌리어'라는 두 용어가 대립하는 양측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으며, 왕당파는 '캐벌리어', 의회파는 '라운드헤드'로 불리며 경멸적인 의미를 담게 되었다고 언급했다.[7]

성공회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1636년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짧은 머리를 하도록 지시하자, 많은 청교도들은 그의 권위에 반발하여 머리카락을 더 길게 길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해서 '라운드헤드'로 불렸다.[8] '라운드헤드'라는 용어는 1678년~1681년의 제외 위기까지 공화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휘그당'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마찬가지로, '캐벌리어'라는 용어는 '토리당'으로 대체되었다.[4]

2. 1. '라운드헤드'와 '캐벌리어'

'라운드헤드'는 왕당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캐벌리어'와 대조적인 용어였다. '캐벌리어'는 처음에는 경멸적인 용어로, 최초 사용자들은 왕당파 구성원을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학대한 스페인의 ''카바예로스''(Caballeros)와 비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라운드헤드와 달리 캐벌리어는 나중에 그 멸칭의 표적이 된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스스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2]

라운드헤드 심문관이 캐벌리어의 아들에게 묻습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습니까?"—윌리엄 프레더릭 예임즈 (1878)


'라운드헤드'는 1641년 말 1640년 성직자 법령에 대한 의회 논쟁이 웨스트민스터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 처음으로 조롱의 대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은 거기에 모인 군중에 대한 당시 권위자의 묘사를 인용하는데, "그들은 머리카락이 귀보다 긴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에서 평소에 외침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 '라운드헤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 시위대에는 런던 견습공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에게 라운드헤드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동의한 규정에는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

존 러시워스에 따르면, 이 단어는 1641년 12월 27일 해산된 장교 데이비드 하이드가 처음 사용했다. 폭동 중 하이드는 칼을 뽑아들고 "주교들에 대해 고함치는 그 둥근 머리의 개들의 목을 베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그러나 리처드 벡스터는 그 해 초 토마스 벤트워스, 스트래포드 백작 1세의 재판에서 찰스 1세의 부인인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이 한 발언에 그 용어의 기원을 돌린다. 그녀는 존 핌을 가리켜 둥근 머리의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6] 찰스 2세의 주요 고문인 에드워드 하이드, 클래런던 백작 1세는 이 문제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논쟁에서 '라운드헤드'와 '캐벌리어'라는 두 용어가 대화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왕의 신하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캐벌리어'라고 불리고, 다른 무리는 '라운드헤드'라는 이름으로 경멸받고 멸시받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7]

3. 신념

대부분의 라운드헤드는 찰스 1세가 추구했던 절대 군주제에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다.[2] 그러나 1649년 잉글랜드 내전이 끝날 무렵, 왕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매우 높아져 올리버 크롬웰과 같은 공화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들은 군주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토머스 페어팩스나 맨체스터 백작 에드워드 몽태규 등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모델군의 지원을 받고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통해 잉글랜드를 배신했다고 여겨진 찰스 1세의 행동을 이용한, 정치적으로 더 능숙한 크롬웰과 그의 급진파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3][4][5]

3. 1. 종교적 다양성

라운드헤드는 청교도와 장로교도가 주축이었지만, 독립파, 수평파, 평등파, 제5왕국주의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 분파도 포함되었다.[11] 이러한 다양성은 잉글랜드 내전 시기 의회파 내부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잉글랜드 내전 이후

1678년부터 1681년까지 왕위 계승권 박탈 법안을 둘러싼 정치적 위기 때까지 의회주의·공화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의회파"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왕위 계승권 박탈 위기 이후에는 "휘그"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한편, 왕당파를 가리키던 "기사당"이라는 용어는 같은 시기에 "토리"로 바뀌었다. 기사당과 의회파라는 말이 처음 사용될 때와 마찬가지로, 토리와 휘그라는 말도 서로를 모욕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0]

참조

[1] harvnb 2006
[2] 웹사이트 Monarchy versus Parliament: England in the 17th century https://rfb.bildung-[...]
[3] 웹사이트 Oliver Cromwell: a Scottish perspective http://www.olivercro[...] The Cromwell Association
[4] 웹사이트 The Engagement, 1647–48 http://bcw-project.o[...] 2008-11-01
[5] 웹사이트 Oliver Cromwell https://www.bbc.co.u[...] BBC 2011-02-01
[6] harvnb 1911
[7] harvnb 1911
[8] harvnb 2010
[9] harvnb 2006
[10] harvnb 1911
[11] harvnb 1911
[12] harvnb 2010
[13] harvnb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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