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맥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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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윈저 맥케이는 1860년대 후반에서 187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난 미국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로, 만화와 초기 애니메이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만화의 칸과 원근법을 혁신적으로 활용하고, 수천 장의 그림을 직접 그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했다. 대표작으로는 만화 《꿈나라의 리틀 네모》와 애니메이션 《공룡 거티》가 있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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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맥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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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제나스 윈저 맥케이 |
출생 | 대략 1866년–1871년 |
출생지 | 스프링 레이크, 미시간주, 미국; 또는 캐나다 (논쟁 중) |
사망 | 1934년 7월 26일 (63–68세) |
사망지 | 뉴욕시, 미국 |
묻힌 곳 | 에버그린 공동묘지, 브루클린, 뉴욕 |
직업 | 애니메이터 만화가 |
배우자 | 모드 레오노르 뒤푸르 (1891년 결혼) |
자녀 | 2명 (밥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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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 |
작품 | 공룡 거티 리틀 니모 |
2. 생애
사생활에서는 수줍고 내성적인 맥케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쇼맨이자 자기 홍보가였으며, 여러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맥케이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술을 마셨으며, 술을 사랑하기보다는 친목을 위해 술을 마셨다. 아내를 화나게도 맥케이는 시가와 담배를 피웠다. 그는 피아노를 독학했으며, 시, 연극,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는 W. B. 예이츠를 존경했고, 퍼시 비시 셸리와 존 키츠의 작품을 알고 있었으며,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할 수 있었다.
맥케이는 키가 152cm가 채 안 되었으며, 자신보다 키가 거의 같은 아내에게 억눌린다고 느꼈다. 맥케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마차 화가인 존 뒤푸르의 세 딸 중 막내인 모드 레오노르 뒤푸르와 결혼했다. 부부의 나이 차는 약 10년이었다. 모드는 그들이 결혼했을 때 14살이었다. 전기 작가 캐너메이커는 맥케이가 십 대 소녀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어리다고 주장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맥케이 본인조차 맥케이의 출생 연도가 불분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추측한다. 모드 또한 나이에 민감했다. 그녀는 손주들이 "할머니" 대신 "낸"이라고 부르기를 원했고, 나이가 들면서 머리를 염색했다. 맥케이 부부는 당시 기혼 부부의 전통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윈저는 생계를 책임지고 모드는 주부였다. 두 배우자 모두 상대방의 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했다.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다. 로버트 윈저는 1896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마리온 엘리자베스는 1897년 8월 22일에 태어났다. 맥케이는 아이들에게 너그러웠고, 훈육은 엄격한 어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마리온은 어머니에게 억눌린다고 느꼈고, 오빠가 어머니의 편애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더 가까웠고 종종 아버지와 함께 대중 앞에 나타났다. 로버트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스스로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리틀 니모의 모델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맥케이 부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맥케이는 운전을 싫어해서 경호원 역할을 겸하는 운전 기사를 뒀는데, 이는 맥케이가 허스트에 그린 사설 만화가 때때로 위협적인 편지를 받게 했기 때문이다. 모드는 다른 부유한 부인들과 함께 고급 브루클린 다운타운에서 쇼핑하기 위해 매일 리무진을 타고 다녔다. 모드는 종종 남편에게 불평했지만, 그는 그녀와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다.
맥케이의 정치적 성향은 불분명하며, 그의 사설 만화에 나타난 견해에 그가 공감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불가지론자였고 환생을 믿었다.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시카고에 살 때부터 이 단체에 가입했을 수도 있다. 그의 아버지도 프리메이슨이었으며, 1915년에 우드스톡, 온타리오와 미시간주 에드모어에 있는 그의 메이슨 로지에서 주관한 장례식에서 정식 메이슨 의례를 치르고 묻혔다. 그의 어머니는 브루클린에서 그를 자주 방문했고, ''리틀 니모''#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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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필라델피아 초연에 참석했다. 그녀는 1927년 미시간주 에드모어에서 사망했다.
맥케이의 형제 아서(Arthur)는 1898년 3월 7일 미시간주 트래버스 시티에 있는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고, 1946년 6월 15일 기관지폐렴과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가족의 방문을 전혀 받지 못했다. 맥케이는 자녀들에게 형제에 대해 알리지 않았고, 1910년에 사망한 누이 매(Mae)의 존재도 알리지 않았다.
맥케이는 미시간주스프링레이크에서 아버지 로버트 맥케이와 어머니 자넷 머레이 맥케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맥케이의 출생 연도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맥케이 본인은 자신이 1871년에 미시간주 스프링레이크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맥케이의 묘비에는 그의 출생 연도로 1869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인구 조사에서는 맥케이가 1867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맥케이가 출세할 당시 본명은 '''제너스 윈저 맥케이'''('''Zenas Winsor McKay''', 아버지 로버트의 고용주였던 제너스 G. 윈저를 따서 지음)였지만, 후에 맥케이는 제너스를 뺀 "윈저 맥케이"로 개명했다.
맥케이는 이스트 미시간 대학교)을 졸업했다. 17세 때 서커스단의 순회 공연에 참가하여 포스터와 간판을 그리는 일을 했다. 1899년에는 오하이오주신시내티로 갔다. 신시내티에서는 처음에는 구경거리 쇼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구경거리 쇼에서의 활동은 후에 판타지 세계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윽고 맥케이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신시내티 타임스 스타"지의 스태프 화가로 고용되었다. 이 신문에서는 뉴스 일러스트를 그렸고, 일요판에서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1903년에 뉴욕으로 간 이후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활약했다.
2. 1. 가족 및 초기 생애 (1866?~1889)
윈저 맥케이는 미시간주스프링레이크에서 아버지 로버트 맥케이와 어머니 재닛 머레이 맥케이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계 및 외조부모는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였다. 아버지 로버트는 짐꾼, 식료품점 운영, 부동산 사업 등을 했으며, 공증인으로도 활동했다.맥케이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불분명하다.[1] 1869년이라는 설[1], 1871년이라는 설[1], 1867년이라는 설[1] 등이 있다. 맥케이는 본래 제너스 윈저 맥케이(Zenas Winsor McKay)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후에 '제너스'를 뺀 '윈저 맥케이'로 개명했다.
맥케이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과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이를 "기억 스케치"라고 불렀다. 맥케이는 클리어리 비즈니스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업보다는 그림에 더 몰두했다. 이 시기에 디트로이트의 다임 박물관에서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기도 했다.
미시간 주립 노멀 스쿨의 존 구디슨 교수로부터 원근법 등 미술 기법을 배우며 그림 실력을 더욱 향상시켰다. 구디슨은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자 출신으로, 맥케이의 색채 사용에 영향을 주었다. 17세 때 서커스단의 순회 공연에 참가하여 포스터와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2. 2. 초기 경력 (1889~1903)
1889년경, 맥케이는 친구 모트 투버스와 함께 시카고로 가서 국립 인쇄 및 조각 회사에서 포스터와 팸플릿을 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하숙집에서 만난 화가 줄스 게린과 미술 기법을 교환했다.
1891년, 맥케이는 신시내티로 이주하여 다임 박물관에서 포스터 및 광고 제작 일을 했다. 9년 동안 콜 & 미들턴 다임 박물관과 헥 & 에이버리 가족 극장(1896), 에이버리의 뉴 다임 박물관(1898), 윌 S. 헥의 원더 월드 앤 시어터(1899)의 포스터와 기타 광고를 제작했다. 1896년 박물관에서는 토머스 에디슨의 비타스코프 시연이 있었는데, 이는 맥케이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빠르고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콜 & 미들턴에서 일하던 중 맥케이는 그림을 그리던 중 다임 박물관에 들어온 14세의 모드 레오노르 뒤푸르를 보고 반하여 가출하여 켄터키주 코빙턴에서 결혼했다.
맥케이는 ''신시내티 커머셜 트리뷴''에서 삽화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라이프''에서도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1900년에는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신시내티 인콰이어러''로 이직하여 미술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그림에서 그는 깊이를 나타내기 위해 선의 두께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아르 누보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두꺼운 선으로 캐릭터를 둘러싸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2. 3. 만화 연재 (1903~1911)
1903년 1월부터 11월까지, 맥케이는 조지 랜돌프 체스터가 쓴 시를 바탕으로 한 초기 코믹 스트립인 ''정글 임프의 이야기, 펠릭스 피들''을 ''Enquirer''에 연재했다. 마지막 두 편이 인쇄되기 전, 맥케이는 제임스 고든 베넷 주니어의 ''뉴욕 헤럴드''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고, 처음에는 삽화와 사설 만화를 그렸다. 그는 코믹 스트립 개척자 리처드 F. 아웃콜트와 함께 일했는데, 아웃콜트는 ''버스터 브라운'' 스트립을 ''Herald''에서 연재하고 있었다. 두 만화가 사이에 경쟁이 붙었고, 그 결과 아웃콜트는 ''Herald''를 떠나 이전 고용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있는 ''뉴욕 저널''로 돌아갔다.맥케이가 처음으로 계속 연재한 코믹 스트립인 ''Mr. Goodenough''는 1904년 1월 21일 ''New York Evening Telegram''에 데뷔했다. 맥케이의 첫 번째 어린이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트립인 ''Sister's Little Sister's Beau''는 그해 4월에 한 편만 연재되었고, 그의 첫 번째 컬러 스트립인 ''Phurious Phinish of Phoolish Philipe's Phunny Phrolics''는 그해 5월 ''Herald''의 일요 부록에 게재되었다.

맥케이의 첫 번째 인기 코믹 스트립은 리틀 새미 스니즈(1904~1906)였다. 이 스트립은 재채기를 하면 폭발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맥케이의 가장 장기간 연재된 스트립인 래빗 피드의 꿈은 1904년 9월 ''The Evening Telegram''에 처음 등장했다.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으며, 고정 등장인물은 없었다. 스트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환상적이고 때로는 끔찍한 꿈을 꾸다가 마지막 패널에서 깨어나 전날 밤에 먹었던 웰시 래빗을 저주하며, 꿈을 꾸게 된 원인으로 웰시 래빗을 탓했다. ''래빗 피드''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1905년에 출판사 프레데릭 A. 스토크스에서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에드윈 스탠턴 포터에 의해 영화로 각색되었으며, 무대를 위한 "코믹 오페라 또는 뮤지컬 엑스트라바간자" 계획이 세워졌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맥케이는 ''Evening Telegram'' 작업에 자신의 본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계약 조건에 따라 ''래빗 피드'' 스트립에 "사일러스"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맥케이는 매일 삽화와 사설 만화를 계속 그리면서 1905년에 세 개의 코믹 스트립을 더 시작했다. 1월에는 어린 주인공이 매주 눈에 띄게 나이를 먹는 ''배고픈 헨리에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스터 버니언의 순례자의 여정''은 ''The Evening Telegram''을 위한 또 다른 "사일러스" 스트립으로, 1905년 6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연재되었다
맥케이는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래빗 피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1905년 10월에 전면 일요 스트립인 ''슬럼버랜드의 리틀 네모''가 ''Herald''에 데뷔했다. 맥케이가 남긴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어린 주인공이 환상적인 꿈을 꾸고, 매주 마지막 패널에서 깨어나는 내용이다. 네모의 외모는 맥케이의 아들 로버트를 모델로 했다. 맥케이는 만화 페이지의 형식적인 측면을 실험했다. 그는 타이밍과 속도 조절, 패널의 크기와 모양, 원근법, 건축 및 기타 세부 사항을 창의적으로 사용했다. ''Herald''는 당시 최고의 품질의 컬러 인쇄를 자랑하는 신문으로 여겨졌으며, 인쇄 직원은 벤데이 공정을 사용하여 색상을 표현했고, 맥케이는 인쇄업자를 위해 ''네모'' 페이지에 정확한 색상 배합을 주석으로 달았다.

1905년 초부터 ''리틀 네모''를 무대 버전으로 제작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했다. 마커스 클라우와 A. L. 에를랑거는 빅터 허버트의 악보와 해리 B. 스미스의 가사로 ''리틀 네모'' 쇼를 올렸다. 네모 역에는 난쟁이 가브리엘 바이겔, Dr. 필 역에는 조셉 코손, 플립 역에는 빌리 B. 반이 출연했다. 평가는 긍정적이었고, 뉴욕에서 매진 행렬을 이어갔으며 2시즌 동안 투어했다.

맥케이는 ''Herald''를 위해 만든 마지막 스트립인 ''가엾은 제이크''에서 자신의 사회 의식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스톨 대령과 부인이 착취하는, 고맙게도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였다. 이 스트립은 1909년부터 1911년 봄까지 연재되었다.
2. 4. 보드빌 공연과 애니메이션 (1906~1921)
윈저 맥케이는 애니메이션 작품에 큰 자부심을 느꼈으며, 1911년부터 1921년까지 10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완성했다. 플립 북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자신의 만화 캐릭터를 활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1911년,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 ''리틀 네모''를 바탕으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 ''리틀 네모''를 제작했다. 4천 개의 그림을 쌀 종이에 그려 제작되었으며, 비타그래프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실사 시퀀스가 추가되었는데, 만화가 조지 맥매너스와 배우 존 버니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은 영화관에서 상영된 후 맥케이의 보드빌 공연에도 사용되었으며, 관객들의 호평에 힘입어 흑백이었던 각 프레임을 손으로 채색했다.

1912년에는 ''모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발표했다. 1909년 6월 5일자 ''래빗 피스트의 꿈''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모기가 피를 빨아들이는 과정을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묘사하여 호평을 받았다.
1914년에는 ''거티 더 다이노소어''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맥케이가 무대 위에서 거티와 상호작용하는 연기를 펼치는 혁신적인 형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맥케이는 "포획된 유일한 공룡"으로 거티를 소개하고 채찍으로 조종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거티는 맥케이의 지시에 따르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며, 관객에게 절을 하거나 나무와 바위를 먹는 등의 행동을 했다. 맥케이는 종이 사과 소품을 사용하여 거티에게 사과를 던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맥케이가 무대에서 걸어 나가 애니메이션 형태로 영화에 다시 나타나 거티가 그를 데려가도록 했다. 윌리엄 폭스는 ''거티''의 배급권을 얻어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있도록 수정된 버전을 배급했다. 이 버전은 실사 시퀀스가 앞에 붙고, 인터랙티브 부분은 인터타이틀로 대체되었다.
''거티''는 맥케이가 배경을 자세히 그린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그는 "맥케이 분할 시스템"을 개척하여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주요 포즈를 먼저 그린 후 그 사이의 프레임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 시간을 단축하고 액션 타이밍을 개선했다. 맥케이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를 거부했으나, 애니메이터 존 랜돌프 브레이와의 소송에서 승리하여 로열티를 받게 되었다.

1918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을 다룬 애니메이션 ''루시타니아호 침몰''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25,000개의 그림을 그려야 했고, 맥케이가 처음으로 셀을 사용한 영화였다. 인디아 잉크로 셀룰로스 아세테이트 시트(또는 "셀")에 영화를 그리는 데 여가 시간을 보냈다. 얼 허드가 특허를 받은 기술인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 효율성을 높였다.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화되었고 실사 영화에서는 불가능했을 극적인 카메라 각도를 사용했다. 주얼 프로덕션은 1918년 7월 20일에 이 영화를 개봉했다.

1921년에는 ''켄타우로스'', ''플립의 서커스'', ''거티 온 투어'' 등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같은 해, ''래빗 피스트의 꿈''을 바탕으로 한 세 편의 영화(''벌레 보드빌'', ''애완동물'', ''날아다니는 집'')를 발표했다.
2. 5. 후기 경력 (1921~1934)
1921년 이후, 맥케이는 허스트가 그가 신문 삽화보다 애니메이션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애니메이션을 포기해야 했다. 맥케이가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위해 실행하지 못한 아이디어에는 ''정글 임프스''의 작가 조지 랜돌프 체스터와의 협업, ''The Barnyard Band''라는 뮤지컬 영화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룬 영화가 포함되었다.
맥케이의 아들 로버트는 1921년 4월 9일 테레사 "테다" 문차우젠과 결혼했다. 맥케이는 결혼 선물로 근처에 집을 사주었다. 부부는 맥케이에게 두 명의 손주를 더 안겨주었다. 1922년에는 자넷(맥케이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을, 1928년에는 로버트를 낳았다. 로버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신경쇠약을 겪었고, 전쟁 후 그림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맥케이는 아들에게 만화 작업을 찾아주어 아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려 했고, 맥케이의 사설 만화 중 일부는 "로버트 윈저 맥케이 주니어"라는 서명을 받았다.
1924년, 맥케이는 약속된 보너스를 받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허스트를 떠나 ''Herald Tribune''으로 돌아갔고, 그해 8월부터 다시 ''리틀 니모''를 연재했다. 새로운 연재는 옛 기법의 기교를 보여주었지만, 패널은 변함없는 격자형으로 배치되었다. 니모는 이야기에서 더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고, 연속성은 없었다. 이 연재는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1926년 12월에 종료되었다. 1920년대 니모의 성공이 없었기 때문에 ''Herald Tribune''은 연재의 모든 저작권을 1달러에 맥케이에게 양도했다.
1927년, 맥케이는 뉴욕에서 열린 그를 기리는 만찬에 참석했다. 상당한 양의 술을 마신 후, 맥케이는 애니메이터 맥스 플라이셔의 소개를 받았다. 맥케이는 모인 애니메이터 그룹에게 기술적인 조언을 해 주었지만, 청중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끼자 청중을 질책하며 "애니메이션은 예술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애니메이션으로 한 일을 보니, 그것을 예술이 아닌 상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불운입니다!"라고 말했다.
1932년, 맥케이는 허스트의 아들 "영 빌"이 그를 시속 137 km로 린드버그 아기 유괴 사건 현장으로 데려갔을 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거친 경험"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범죄가 경찰에 처음 보고된 지 두 시간 후에 현장에 도착했고,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전에 모여 있던 경찰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맥케이는 현장, 직원, 유괴범이 사용한 사다리를 스케치했고, 그는 그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맥케이는 평생 동안 건강한 삶을 누렸다. 1934년 7월 26일, 그는 아내에게 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그는 경악스럽게도 그림을 그리는 오른팔이 마비된 것을 발견했다. 의식을 잃었고, 그날 오후 늦게 아내, 자녀, 사위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는 뇌색전증으로 사망했으며, 가족 묘역에 브루클린의 Cemetery of the Evergreens에 묻혔다. 그는 신문 동료, 허스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삽화가 협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자택에서 프리메이슨 장례식을 치렀다.
3.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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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케이는 만화의 칸(panel) 크기와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원근법을 활용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등 만화 매체의 혁신을 가져왔다. 1905년 10월 22일 '꿈나라의 리틀 니모' 에피소드에서는 자라나는 버섯 숲을 표현하기 위해 칸이 확장되는 실험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조지 헤리먼과 같은 동시대 작가도 과감한 시도를 했지만, 프랭크 킹, 할 포스터, 로이 크레인과 같은 작가들은 한 세대가 지나서야 맥케이와 유사한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맥케이는 정교한 해칭과 원근법을 통해 환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으며, 이는 '리틀 니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카니발,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등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장식과 건축물이 자주 등장한다. 맥케이는 알브레히트 뒤러와 구스타브 도레와 비견될 만큼 "절대적인 선의 정밀함"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Higgins 검은 드로잉 잉크, 길로트 펜, 미술용 고무 지우개, T자, 각도기, 비너스 연필 등을 사용했다.
맥케이는 작품에서 자기 참조성과 같은 메타픽션 기법을 사용했다. 등장인물들이 만화 자체를 인식하거나, 재채기로 패널 경계를 파괴하는 '새미 스니즈' 에피소드가 그 예시이다. 맥케이의 말풍선 속 대화는 거칠고 판독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그의 재능이 언어보다는 시각에 있음을 보여준다.
맥케이는 당시 시대에 흔했던 인종적 고정관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리틀 니모'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인 캐릭터 리틀 임프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여성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피상적이고 논쟁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맥케이의 대표작 『꿈나라의 리틀 니모』(1905-1911)는 꿈의 세계를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체로 묘사하여 만화 표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애니메이션 ==
윈저 맥케이는 초기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수천 장의 그림을 직접 손으로 그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정교한 그림체와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캐릭터의 개성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1930년대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필적할 만한 정밀한 디테일을 갖춘 맥케이의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공룡 거티』(1914)의 주인공 거티는, 영화 연구가 및 애니메이션 연구가로부터 독특하고 현실적인 개성을 갖춘 최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평가받고 있다.
맥케이는 극장에서의 보드빌 공연에 자신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이용했다. 그는 강연 후에 그림을 그려 보이고, 그 후에 애니메이션 영화를 상영하며, 자신의 손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태어나는 모습을 선보였다. <공룡 거티>에서 맥케이는 거티와 상호작용하는 혁신적인 연출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문제를 일으킨 거티는 맥케이에게 꾸짖음을 듣고 울부짖으며, 마지막에는 맥케이 자신을 등에 태우고 애니메이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 『치즈 토스트의 악몽』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연작 외에도,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원양선 루시타니아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루시타니아호 침몰』(1918)을 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고무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맥케이의 작품은 초기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독창적인 그림체와 실험적인 연출 기법을 통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다.[4] 특히, 꿈나라의 리틀 네모와 공룡 거티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 '''만화'''
R. C. 하비는 맥케이를 "만화 매체의 최초의 독창적인 천재"이자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5] 맥케이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혁신을 이어갈 기술이 부족하여 미래 세대가 재발견하고 구축하도록 남겨졌다고 말했다.[5] 칼 바크스에서 아트 슈피겔만까지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 로버트 크럼은 맥케이를 "천재"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아트 슈피겔만의 1974년 "진짜 꿈" 연재는 부분적으로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영감을 받았다. 2004년의 그의 노 타워 그림자에서는 맥케이의 이미지를 일부 차용했으며 부록에 ''리틀 네모'' 페이지를 포함했다.[7] 모리스 센닥의 아동 도서 밤의 부엌에서 (1970)는 맥케이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였다.[8]
-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이자 맥케이 전기 작가인 존 캐니메이커는 1974년에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조수 존 피츠시몬스가 내레이션을 맡은 ''윈저 맥케이 회고''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캐니메이커는 1975년 뉴욕에서 열린 제3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맥케이 영화의 첫 번째 회고전을 공동 기획했으며, 이로 인해 1975-76년 겨울에 휘트니 미국 미술관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애니메이션 학자 폴 웰스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대한 맥케이의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말했다. 월트 디즈니는 맥케이의 모범에 대한 그의 빚을 인정했다. 1955년 ''디즈니랜드'' 에피소드에서 맥케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로버트는 에피소드의 컨설턴트로 디즈니 스튜디오에 초대되었고, 디즈니는 그에게 "밥, 이 모든 것은 너희 아버지의 것이어야 해"라고 말했다. 윈저 맥케이 상은 1972년에 애니메이션 분야의 평생 또는 경력 기여를 인정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애니상의 일부로 수여된다.
>마치 원시 점액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고, 두 번째가 아메바인 것과 같다.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 알아내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은 윈저 맥케이와 월트 디즈니인데, 누구를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니메이터 척 존스
- '''기타'''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 페데리코 펠리니는 어린이 잡지 ''일 코리에레 데이 피콜리''에서 ''리틀 네모''를 읽었고, 이 연재는 펠리니 전기 작가 피터 본다넬라에 따르면 영화 제작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1899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므로 맥케이의 주요 꿈 연재 작품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맥케이의 영향이, 적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프로이트에게 미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헝가리 예술가 난도르 혼티는 1903년부터 1907년경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본 맥케이의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큰 영감을 받아 "A Francia Bonne Álma"("프랑스 보모의 꿈", 종종 "프랑스 간호사의 꿈"이라고 불림, 1911)이라는 만화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헝가리 정신 분석학자 산도르 페렌치에 의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전달되었다.[3] 프로이트는 이 만화를 1914년판 그의 책에 포함시켰다. 혼티의 만화는 주제, 페이싱, 아르 누보 스타일, 꿈을 꾸는 사람이 침대에서 깨어나는 마지막 패널에서 맥케이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 비판적 평가 ===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예: 리틀 네모의 임프)는 인종차별적인 고정관념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비판도 있다.
3. 1. 만화
맥케이는 만화의 칸(panel) 크기와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원근법을 활용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등 만화 매체의 혁신을 가져왔다. 1905년 10월 22일 '꿈나라의 리틀 니모' 에피소드에서는 자라나는 버섯 숲을 표현하기 위해 칸이 확장되는 실험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조지 헤리먼과 같은 동시대 작가도 과감한 시도를 했지만, 프랭크 킹, 할 포스터, 로이 크레인과 같은 작가들은 한 세대가 지나서야 맥케이와 유사한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였다.맥케이는 정교한 해칭과 원근법을 통해 환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으며, 이는 '리틀 니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카니발,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등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장식과 건축물이 자주 등장한다. 맥케이는 알브레히트 뒤러와 구스타브 도레와 비견될 만큼 "절대적인 선의 정밀함"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Higgins 검은 드로잉 잉크, 길로트 펜, 미술용 고무 지우개, T자, 각도기, 비너스 연필 등을 사용했다.
맥케이는 작품에서 자기 참조성과 같은 메타픽션 기법을 사용했다. 등장인물들이 만화 자체를 인식하거나, 재채기로 패널 경계를 파괴하는 '새미 스니즈' 에피소드가 그 예시이다. 맥케이의 말풍선 속 대화는 거칠고 판독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그의 재능이 언어보다는 시각에 있음을 보여준다.
맥케이는 당시 시대에 흔했던 인종적 고정관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리틀 니모'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인 캐릭터 리틀 임프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여성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피상적이고 논쟁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맥케이의 대표작 『꿈나라의 리틀 니모』(1905-1911)는 꿈의 세계를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체로 묘사하여 만화 표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불쌍한 제이크>(1909-1911)와 같은 작품도 발표했다.
3. 2. 애니메이션
윈저 맥케이는 초기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수천 장의 그림을 직접 손으로 그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정교한 그림체와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캐릭터의 개성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1930년대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필적할 만한 정밀한 디테일을 갖춘 맥케이의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공룡 거티』(1914)의 주인공 거티는, 영화 연구가 및 애니메이션 연구가로부터 독특하고 현실적인 개성을 갖춘 최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평가받고 있다.맥케이는 극장에서의 보드빌 공연에 자신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이용했다. 그는 강연 후에 그림을 그려 보이고, 그 후에 애니메이션 영화를 상영하며, 자신의 손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태어나는 모습을 선보였다. <공룡 거티>에서 맥케이는 거티와 상호작용하는 혁신적인 연출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문제를 일으킨 거티는 맥케이에게 꾸짖음을 듣고 울부짖으며, 마지막에는 맥케이 자신을 등에 태우고 애니메이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 『치즈 토스트의 악몽』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연작 외에도,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원양선 루시타니아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루시타니아호 침몰』(1918)을 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고무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3. 3. 평가
맥케이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뉴욕 헤럴드지에 연재된 만화 작품 『꿈나라의 리틀 니모』(원제: Little Nemo in Slumberland영어)와 1914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 『공룡 거티』(원제: Gertie the Dinosaur영어)이다.맥케이의 만화 작품 『꿈나라의 리틀 니모』와 『치즈 토스트의 악몽』은 모두 등장인물의 꿈의 세계를 무대로 하여, 꿈속의 광경이나 감각에 의한 환상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했다. 맥케이의 만화는 대규모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현력이 풍부한 화풍으로 인해 항상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신문 지면에서 맥케이는 페이지 전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넓은 공간을 할애받았다. 당시 만화의 판타지 표현 분야에서 맥케이와 견줄 수 있었던 것은 후에 만화가에서 예술가로 전향한 리오넬 파이닝거뿐이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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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케이는 수천 컷에 달하는 동영상을 맥케이 자신이 손으로 그린 많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도 제작하여, 극장에서의 보드빌(연예) 공연에 이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이용했다. 맥케이는 강연 후에 그림을 그려 보이고, 그 후에 애니메이션 영화를 상영하며, 자신의 손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태어나는 모습을 선보였다.
1930년대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필적할 만한 정밀한 디테일을 갖춘, 맥케이의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공룡 거티』의 주인공 거티는, 영화 연구가 및 애니메이션 연구가로부터 독특하고 현실적인 개성을 갖춘 최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문제를 일으킨 거티는 맥케이에게 꾸짖음을 듣고 울부짖으며, 마지막에는 맥케이 자신을 등에 태우고 애니메이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 『치즈 토스트의 악몽』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연작 외에도,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원양선 루시타니아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루시타니아호의 침몰』을 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고무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맥케이의 작품은 초기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독창적인 그림체와 실험적인 연출 기법을 통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다.[4] 특히, 꿈나라의 리틀 네모와 공룡 거티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 '''만화'''
R. C. 하비는 맥케이를 "만화 매체의 최초의 독창적인 천재"이자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5] 맥케이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혁신을 이어갈 기술이 부족하여 미래 세대가 재발견하고 구축하도록 남겨졌다고 말했다.[5] 칼 바크스에서 아트 슈피겔만까지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 로버트 크럼은 맥케이를 "천재"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아트 슈피겔만의 1974년 "진짜 꿈" 연재는 부분적으로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영감을 받았다. 2004년의 노 타워 그림자에서는 맥케이의 이미지를 일부 차용했으며 부록에 ''리틀 네모'' 페이지를 포함했다.[7] 모리스 센닥의 아동 도서 밤의 부엌에서 (1970)는 맥케이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였다.[8]
-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이자 맥케이 전기 작가인 존 캐니메이커는 1974년에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조수 존 피츠시몬스가 내레이션을 맡은 ''윈저 맥케이 회고''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캐니메이커는 1975년 뉴욕에서 열린 제3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맥케이 영화의 첫 번째 회고전을 공동 기획했으며, 이로 인해 1975-76년 겨울에 휘트니 미국 미술관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애니메이션 학자 폴 웰스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대한 맥케이의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말했다. 월트 디즈니는 맥케이의 모범에 대한 그의 빚을 인정했다. 1955년 ''디즈니랜드'' 에피소드에서 맥케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로버트는 에피소드의 컨설턴트로 디즈니 스튜디오에 초대되었고, 디즈니는 그에게 "밥, 이 모든 것은 너희 아버지의 것이어야 해"라고 말했다. 윈저 맥케이 상은 1972년에 애니메이션 분야의 평생 또는 경력 기여를 인정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애니상의 일부로 수여된다.
>마치 원시 점액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고, 두 번째가 아메바인 것과 같다.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 알아내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은 윈저 맥케이와 월트 디즈니인데, 누구를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니메이터 척 존스
- '''기타'''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 페데리코 펠리니는 어린이 잡지 ''일 코리에레 데이 피콜리''에서 ''리틀 네모''를 읽었고, 이 연재는 펠리니 전기 작가 피터 본다넬라에 따르면 영화 제작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1899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므로 맥케이의 주요 꿈 연재 작품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맥케이의 영향이, 적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프로이트에게 미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헝가리 예술가 난도르 혼티는 1903년부터 1907년경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본 맥케이의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큰 영감을 받아 "A Francia Bonne Álma"("프랑스 보모의 꿈", 종종 "프랑스 간호사의 꿈"이라고 불림, 1911)이라는 만화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헝가리 정신 분석학자 산도르 페렌치에 의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전달되었다.[3] 프로이트는 이 만화를 1914년판 그의 책에 포함시켰다. 혼티의 만화는 주제, 페이싱, 아르 누보 스타일, 꿈을 꾸는 사람이 침대에서 깨어나는 마지막 패널에서 맥케이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예: 리틀 네모의 임프)는 인종차별적인 고정관념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비판도 있다.
3. 3. 1. 긍정적 평가
맥케이의 작품은 초기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독창적인 그림체와 실험적인 연출 기법을 통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다.[4] 특히, 꿈나라의 리틀 네모와 공룡 거티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만화'''
R. C. 하비는 맥케이를 "만화 매체의 최초의 독창적인 천재"이자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5] 맥케이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혁신을 이어갈 기술이 부족하여 미래 세대가 재발견하고 구축하도록 남겨졌다고 말했다.[5] 칼 바크스에서 아트 슈피겔만까지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 로버트 크럼은 맥케이를 "천재"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아트 슈피겔만의 1974년 "진짜 꿈" 연재는 부분적으로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영감을 받았다. 2004년의 그의 노 타워 그림자에서는 맥케이의 이미지를 일부 차용했으며 부록에 ''리틀 네모'' 페이지를 포함했다.[7] 모리스 센닥의 아동 도서 밤의 부엌에서 (1970)는 맥케이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였다.[8]
-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이자 맥케이 전기 작가인 존 캐니메이커는 1974년에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조수 존 피츠시몬스가 내레이션을 맡은 ''윈저 맥케이 회고''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캐니메이커는 1975년 뉴욕에서 열린 제3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맥케이 영화의 첫 번째 회고전을 공동 기획했으며, 이로 인해 1975-76년 겨울에 휘트니 미국 미술관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애니메이션 학자 폴 웰스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대한 맥케이의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말했다. 월트 디즈니는 맥케이의 모범에 대한 그의 빚을 인정했다. 1955년 ''디즈니랜드'' 에피소드에서 맥케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로버트는 에피소드의 컨설턴트로 디즈니 스튜디오에 초대되었고, 디즈니는 그에게 "밥, 이 모든 것은 너희 아버지의 것이어야 해"라고 말했다. 윈저 맥케이 상은 1972년에 애니메이션 분야의 평생 또는 경력 기여를 인정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애니상의 일부로 수여된다.
>마치 원시 점액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고, 두 번째가 아메바인 것과 같다.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 알아내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은 윈저 맥케이와 월트 디즈니인데, 누구를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니메이터 척 존스
- '''기타'''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 페데리코 펠리니는 어린이 잡지 ''일 코리에레 데이 피콜리''에서 ''리틀 네모''를 읽었고, 이 연재는 펠리니 전기 작가 피터 본다넬라에 따르면 영화 제작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1899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므로 맥케이의 주요 꿈 연재 작품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맥케이의 영향이, 적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프로이트에게 미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헝가리 예술가 난도르 혼티는 1903년부터 1907년경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본 맥케이의 ''레어비트 피엔드''에서 큰 영감을 받아 "A Francia Bonne Álma"("프랑스 보모의 꿈", 종종 "프랑스 간호사의 꿈"이라고 불림, 1911)이라는 만화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헝가리 정신 분석학자 산도르 페렌치에 의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전달되었다.[3] 프로이트는 이 만화를 1914년판 그의 책에 포함시켰다. 혼티의 만화는 주제, 페이싱, 아르 누보 스타일, 꿈을 꾸는 사람이 침대에서 깨어나는 마지막 패널에서 맥케이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3. 3. 2. 비판적 평가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예: 리틀 네모의 임프)는 인종차별적인 고정관념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맥케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비판도 있다.4. 작품 목록
4. 1. 만화
윈저 맥케이는 다양한 만화를 제작했다. 1903년에는 조지 랜돌프 체스터(George Randolph Chester)의 시를 기반으로 한 ''정글 임프의 이야기, 펠릭스 피들(A Tale of the Jungle Imps by Felix Fiddle)''을 발표했다. 1904년에는 ''미스터 구디너프(Mr. Goodenough)'', ''시스터의 여동생의 보(Sister's Little Sister's Beau)'', ''풀리시 필립의 퍼니 프롤릭스의 격렬한 피니시(Phurious Phinish of Phoolish Philipe's Phunny Phrolics)''를 연재했다.1904년부터 1907년까지는 ''리틀 새미 스니즈(Little Sammy Sneeze)''를 연재했고,[8] 1904년부터 1913년까지는 ''래빗 피드의 꿈(Dream of the Rarebit Fiend)''을 연재했다. ''래빗 피드의 꿈(Dream of the Rarebit Fiend)''은 1913년에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에서 컬러 만화로 부활하기도 했다. 1905년에는 ''배고픈 헨리에타 이야기(The Story of Hungry Henrietta)''를 연재했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는 뉴욕 이브닝 텔레그램(New York Evening Telegram)에 ''미스터 버니언의 천로역정(A Pilgrim's Progress By Mister Bunion)''을 연재했다. 1905년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는 ''꿈나라의 리틀 네모(Little Nemo)''를 연재했다. ''꿈나라의 리틀 네모(Little Nemo)''는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원더풀 드림의 세계에서(In the Land of Wonderful Dreams)''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기도 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는 ''불쌍한 제이크(Poor Jake)''를 뉴욕 이브닝 텔레그램(New York Evening Telegram)에 연재했다. 1923년경부터 1925년경까지는 ''래빗 레버리(Rarebit Reveries)''를 연재했는데, 이는 ''래빗 피드의 꿈(Dream of the Rarebit Fiend)''의 부활로, "로버트 윈저 맥케이 주니어"(Robert Winsor McCay Jr.)로 서명되었지만 맥케이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4. 2. 애니메이션
윈저 맥케이는 초기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1911년 4월 11일, 자신의 연재만화 리틀 니모''를 바탕으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 ''리틀 니모''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맥케이가 직접 그린 수천 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었으며, 움직이는 만화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선보였다.1912년 1월에는 ''모기가 작동하는 방식''(How a Mosquito Operates)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14년에는 ''공룡 거티''(Gertie the Dinosaur)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맥케이와 거티가 상호작용하는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형태로,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초기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맥케이는 1914년 12월 28일에 박물관에서의 실사 도입과 대화 자막을 추가하여 무대 쇼 버전을 확장한 ''윈저 맥케이, 유명 만화가와 거티''(Winsor McCay, the Famous Cartoonist, and Gertie)를 공개하였다.
1918년 5월 18일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에 의해 침몰한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의 침몰''(The Sinking of the Lusitania)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비극적인 분위기로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1921년에는 ''버그 보드빌''(Bug Vaudeville), ''애완동물''(The Pet), ''플라잉 하우스''(The Flying House) 등 ''꿈의 래빗 피엔드'' 연작을 제작했다.
같은 해, ''켄타우로스''(The Centaurs), ''거티 온 투어''(Gertie on Tour), ''플립의 서커스''(Flip's Circus)를 제작했으나, 이 작품들은 현재 단편만이 남아있다.
맥케이는 애니메이션 외에도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참조
[1]
서적
The Complete Little Nemo 1905-1927
Taschen
2014
[2]
뉴스
Announcement of "Rabid Reveries
https://www.newspape[...]
1923-11-27
[3]
웹사이트
Nándor Honti
https://www.lambiek.[...]
2022-08-27
[4]
웹사이트
IAU Minor Planet Center
https://minorplanetc[...]
IAU Minor Planet Center
2018-09-15
[5]
블로그
Historical Marker!!!
http://springlakemcc[...]
2009-06-05
[6]
웹사이트
Winsor McCay's 'The Sinking of The Alpena'
https://cartoonresea[...]
2017-09-07
[7]
웹사이트
Winsor McCay Park Official Site
https://winsormccayp[...]
[8]
서적
The Complete Little Nemo 1905 - 1927
Tasche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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