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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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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여의는 전한 고제의 아들이자 척부인의 아들이다. 그는 황태자 자리를 두고 이복 형인 전한 혜제와 경쟁했으나, 여태후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후 대왕과 조왕에 봉해졌으나, 여태후의 미움을 받아 결국 독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혜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혜제는 정무를 멀리하며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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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의
기본 정보
이름류여의
칭호조왕
다른 이름조은왕 (趙隱王)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Zhao Yinwang
다른 이름 (한자)趙隱王
다른 이름 (뜻)조나라의 불운한 왕
생애
출생일기원전 208년
사망일기원전 194년 1월 (추정)
가족 관계
아버지한 고조
어머니척부인
왕조
가문한나라
가문 유형왕조

2. 생애

유방의 셋째 아들로, 척부인에게서 태어났다. 기원전 195년 아버지 유방이 죽은 후, 유여의와 척부인은 여후에게 황태자 쟁탈전으로 원한을 샀다. 여후는 여러 차례 유여의를 장안으로 불러 암살하려 했으나, 주창의 노력으로 실패했다.

기원전 194년 겨울, 여후는 주창을 장안으로 불러들이고 유여의를 장안으로 불렀다. 이복 형인 혜제(유영)는 어머니가 유여의를 암살할 것을 예측하고, 유여의가 장안에 오자 자신의 곁에 두어 보호했다. 그러나 혜제가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여후가 유여의를 독살했다. 혜제는 이를 알고 매우 슬퍼했다.

생모인 척부인도 곧 "인시(人彘, 사람 돼지)"라 불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혜제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정무를 멀리하고 주색에 빠져 23세에 사망했다. 주창은 유여의 사후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2. 1. 출생과 성장

유방이 패공 시절에 항량을 따라 정도 (현재의 산둥성 허쩌시 딩타오구)에서 현지 출신인 척부인을 만났다. 유방은 척부인의 미모에 반하여 자신의 측실로 삼았다. 척부인은 유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유여의는 서자였지만 유방을 닮아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유여의는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서 이복 형인 혜제와 그 지위를 다투게 된다.

그러나 여후와 중신들의 반대로 유영은 황태자 자리를 지켰다. 기원전 198년, 10세[4]가 된 유여의는 대왕에 봉해졌고, 후에 조왕으로 전봉되었다. 그 당시 암살을 두려워한 유방은 자신을 과거에 꾸짖은 적이 있는 주창 (유방에게 충성을 다하고 항우에게 살해된 주가의 종제)을 신임하여 조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5]

2. 2. 황태자 경쟁

고제항량에게 종군하였을 때 황태자 유영과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였다. 기원전 200년, 대왕 유희가 흉노에게 패하여 봉국을 버리고 달아나자 여의는 대왕에 봉해졌다. 기원전 198년, 조왕 장오가 조나라 재상 관고의 황제 암살 모의에 연루되어 선평후로 강등되자, 여의는 열 살의 나이에[5] 조왕에 봉해졌고 대나라 땅도 아울러 받았다.[4] 고조는 암살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과거에 꾸짖었던 주창을 조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재상 진희가 반란을 일으켜 대나라 왕을 칭하고 고조에 맞서 조나라 서울 한단까지 수비하였다. 진희가 패망한 후, 옛 대나라 땅은 동생 유항에게 분할됐다.

2. 3. 대왕, 조왕 책봉

기원전 200년, 대왕 유희가 흉노와 싸우다 봉국을 버리고 달아나 대왕 자리가 비자, 여의는 대왕에 봉해졌다.[2] 기원전 198년, 조왕 장오가 조나라 재상 관고의 황제 암살 모의에 연루돼 선평후로 강등되자, 여의는 열 살의 나이에[4] 조왕에 봉해졌고 대나라 땅도 아울러 받았다.[5] 그때, 암살을 두려워한 고조는 자신을 과거에 꾸짖었던 주창을 신용하여 조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의의 또 다른 재상인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고 대나라 왕을 칭하면서 고조에 맞서 조나라 서울 한단까지 수비하기에 이르렀다. 진희가 패망한 후, 옛 대나라 땅은 동생 유항에게 분할됐다.

2. 4. 여태후의 원한과 죽음

여태후는 유방이 죽은 후, 유여의와 그의 생모 척부인이 황태자 자리를 노렸던 것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여태후는 여러 차례 유여의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암살하려 했으나, 조나라 재상 주창의 노력으로 번번이 실패했다.[5]

기원전 195년 겨울, 여태후는 주창을 장안으로 불러들인 후, 유여의를 장안으로 몰래 불렀다. 이복형 혜제는 유여의를 아껴 여태후가 그를 죽일 것을 염려하여, 유여의가 입조하자 항상 자신의 곁에 두어 보호했다.

하지만 어느 날 혜제가 사냥을 나간 사이, 여태후는 유여의를 독살하였고, 생모인 척부인 또한 잔혹하게 죽였다.[3]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195 BCE-12-31 ~ 194 BCE-01-28
[2] 서적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2011-06-09
[3] 서적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2011-06-09
[4] 서적 史記
[5] 서적 사기
[6]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이 봉해진 진류군과는 연관이 없다.
[7]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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