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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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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량은 초나라의 장수 항연의 아들이자 항우의 숙부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한 인물이다. 초나라 멸망 후 진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살다가,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회계 태수를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의제를 옹립하여 초나라 부흥을 꾀하고,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했으나, 정도에서 장한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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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항량
한어 병음Xiàng Liáng
로마자 표기Xiang Liang
기본 정보
출생지쑤첸 시, 장쑤 성
사망일기원전 208년
사망지딩타오 현, 허쩌 시, 산둥 성
아버지항연
친척항초 (형제)
항백 (형제)
항우 (조카)
항장 (조카)
직업반란 지도자

2. 초기 생애

전국시대 초나라의 장수 항연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나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에 사로잡혔으나 사마흔의 도움으로 풀려났다.[1]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9월에 회계 태수 은통을 살해하고 오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조카 항우를 부장으로 삼았다. 기원전 208년 진승이 장함에게 패배하자, 진승의 부장 소평이 항량에게 합류하여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진영, 영포 등과 합세하여 군대를 크게 불렸고, 진가가 경구를 초왕으로 세우자 진가를 공격해 죽였다.[5][6][7]

이후 설현을 점령하고, 항우를 보내 양성을 점령했다. 전영, 용저와 함께 동아에서 진군을 격파했으며, 항우와 유방을 보내 성양을 공격해 점령하도록 했다. 복양에서도 진군을 격파했다.[9][8]

3. 진나라에 대한 봉기

기원전 209년, 진 이세 통치 기간 동안 진나라를 전복하기 위한 농민 반란이 중국 전역에서 발발하여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 당시 수도가 오현에 있던 회계군의 행정관 은통은 항량을 불러 진나라에 반역할 계획을 논의했다.[1] 그러나 항량과 항우는 대신 은통을 죽이고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 약 8,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군의 새로운 행정관을 선언하고 항우에게 군대를 맡겼다.

항량은 이후 추종자들을 이끌고 양쯔강을 건너 하비(; 현재의 장쑤성, 피저우)에 근거지를 세웠다. 당시 다른 반란군들도 항량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그의 반란군 세력은 60,000명에서 70,000명 사이로 증가했다. 기원전 208년, 범증의 조언에 따라 항량은 부하들을 보내 전 초나라 회왕의 손자인 웅심을 찾아 왕위에 앉히고 회왕 2세로 옹립했다. 항량의 목적은 회왕 2세를 허수아비로 이용하여 전 초나라 영토 사람들의 지지를 모아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고 초나라를 부활시키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4. 진나라와의 전투 및 최후

기원전 209년, 진승 등이 봉기하여 진나라의 지배 체제가 흔들리자, 회계군 군수 은통은 항량을 불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항량은 조카 항우와 함께 은통을 살해하고 스스로 회계군수가 되어 거병했다.[5]

기원전 208년 정월, 항량은 소평의 요청으로 8,000명의 정병을 이끌고 출병했다. 이후 진영, 영포 등의 군대를 합쳐 세력을 키웠고, 초나라 왕족 경구와 그 측근 진가를 격파하고 군사를 흡수했다.[7]

항량은 유방에게 군사를 지원하고, 항우와 함께 각지를 공격하며 진나라 군대와 맞섰다. 같은 해 6월,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열고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을 새로운 회왕(후의 의제)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무신군이라 칭했다.[9]

7월, 제나라 전영에게 원군을 보내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나, 전영과의 불화로 추가적인 군사 협력은 얻지 못했다. 항우와 유방은 함께 성양, 부양, 정도, 옹구 등을 공격하며 진군을 격파하고 이유를 죽이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항량은 진나라 군대를 과소평가하여 자만하게 되었다. 송의가 이를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208년 9월, 정도에서 야습해 온 장한의 진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항량의 죽음으로 항우와 유방은 후퇴했고, 장한은 초나라를 얕보고 조나라를 공격했다.

5. 평가 및 영향

항량은 진나라 말기에 진나라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자만심으로 인해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그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를 찾아 왕으로 옹립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지만, 결국 자만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송의가 그의 자만을 경계했지만, 항량은 이를 듣지 않았다.[9] 항량의 죽음은 항우유방 등 다른 반진 세력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 문서 史記
[3] 문서 史記項羽本紀
[4] 문서 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
[5] 문서
[6] 문서
[7] 문서 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
[8] 문서 史記高祖本紀
[9] 문서 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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