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 (치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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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현(劉賢)은 전한 문제 시기에 무성후에 봉해졌으며, 제나라가 분할된 후 치천나라의 초대 왕이 되었다. 그는 오초칠국의 난에 연루되어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자결했고, 치천나라는 형인 유지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 문제가 형제들과 함께 유현을 열후로 봉하여 무성후(武成侯, 武城侯[1])가 되었다.[2][3][4][7] 기원전 164년, 전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새로 세워진 치천나라 왕이 되었다.[4][7] 서울은 극(劇)에 두었고, 치천왕은 단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다.[5]
2. 생애
전한 경제 시대에 조조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제후왕의 영지를 줄이는 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오왕 유비가 교서왕 유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유앙은 성양나라를 제외한 일곱 제나라에 사람을 보내 거사에 함께하도록 권했다. 치천왕도 이에 동참해, 가담 의사를 철회한 제효왕을 교서왕, 제남왕과 함께 제나라의 서울 임치에서 포위했다. 그러나 조정의 진압군과 맞서 싸운 초나라와 오나라가 패망하고 난포와 조양이 이끄는 구원군이 제나라를 구원하자 각기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교서왕이 조정의 명령으로 자결하자 자신도 자결했다.[6][4][5][7] 치천나라는 형 제북왕 유지에게 넘어갔다.[6][4][5][7]
2. 1. 초기 생애 및 무성후 시절
기원전 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 문제가 형제들과 함께 유현을 열후로 봉하여 무성후(武成侯)가 되었다.[1][2][3][4][7]
2. 2. 치천왕 즉위
기원전 164년, 전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새로 세워진 치천나라 왕이 되었다.[4][7] 서울은 극(劇)에 두었다.[5] 치천왕은 단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다.[5]
2. 3. 오초칠국의 난과 죽음
전한 경제 시대에 조조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제후왕의 영지를 줄이는 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오왕 유비가 교서왕 유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유앙은 성양나라를 제외한 일곱 제나라에 사람을 보내 거사에 함께하도록 권했다. 치천왕도 이에 동참해, 가담 의사를 철회한 제효왕을 교서왕, 제남왕과 함께 제나라의 서울 임치에서 포위했다.[6][4][5][7] 그러나 조정의 진압군과 맞서 싸운 초나라와 오나라가 패망하고 난포와 조양이 이끄는 구원군이 제나라를 구원하자 각기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교서왕이 조정의 명령으로 자결하자 자신도 자결했다.[6][4][5][7] 치천나라는 형 제북왕 유지에게 넘어갔다.[6][4][5][7]
참조
[1]
문서
한서 제후왕표의 표기
[2]
서적
사기 (역사서)
[3]
서적
한서
[4]
서적
한서
[5]
서적
사기
[6]
서적
한서
[7]
서적
한서
[8]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9]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10]
문서
한서에서는 씨병(氏兵), 사기에서는 과구(瓜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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