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앙
1. 개요
유앙은 전한의 제후왕으로, 기원전 176년에 평창후에 봉해졌고, 기원전 164년에는 교서나라 왕이 되었다. 경제 시대에 삭번 정책으로 영토가 삭감되었고,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여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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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4년 사망 -
조조 (전한)
조조는 전한 시대에 활동하며 흉노 대책 마련, 중농억상 정책 주장, 삭번 정책 주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으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처형당한 관료였다. -
기원전 154년 사망 -
유비 (오왕)
유비는 전한 고조 유방의 형 유희의 아들이자 영포 진압에 공을 세워 오왕에 봉해진 황족 제후왕으로, 구리와 소금 생산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웠으나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켜 진압당하고 사망했다. -
강제로 자살한 중국 사람 -
태평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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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자살한 중국 사람 -
사마륜
사마륜은 서진의 황족으로, 조카인 진 혜제를 폐위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반란으로 체포되어 자결하며 서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전한의 종실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종실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2. 생애
유앙은 기원전 176년에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져 평창후(平昌侯)가 되었고, 기원전 164년에는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어 봉하면서 교서나라 왕이 되었다. 서울은 고완(高宛)에 두었다. 경제 시대에 조조의 삭번 정책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으나, 임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주아부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격파당했다. 이후 궁고후 한퇴당이 찾아와 처벌을 내리자, 사죄도 하고 조조를 내세워 변명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퇴당이 조서를 내어 자결을 권하자 자결했다. 교서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군으로 들어갔다.
2.1. 초기 생애와 즉위
기원전 176년, 문제에게서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져 평창후(平昌侯)가 되었다. 기원전 164년,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교서나라 왕이 되었다. 서울은 고완(高宛)에 두었다.
2.2. 오초칠국의 난 가담
경제 시대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조정에서 제후왕의 세력을 줄이고자 삭번 정책을 펼쳤다. 교서왕은 작위를 팔고 간음을 한 일 때문에 여섯 현을 삭감당했다.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는 오왕 유비는 모반을 일으키고자 동조자를 구하던 중에 교서왕이 용맹하고 호기롭고 군사를 좋아해 제후들의 두려움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중대부 응고(應高)를 교서왕에게 보냈다. 교서왕은 응고의 설득을 받아들여 함께 거사를 계획했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효왕의 제나라, 유현의 치천나라, 교동왕의 교동나라, 제남왕의 제남나라, 유지의 제북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사에 함께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다만 성양나라는 그 시조 경왕이 한 조정과 함께한 전력이 있다 하여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효왕은 마음을 바꾸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제북왕은 낭중령에게 겁박당해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교서왕은 교동왕·치천왕과 함께 제나라를 쳐 서울 임치를 포위했다. 제효왕은 포위가 급박해지자 교서왕 등과 함께하려고도 했으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정의 구원군 소식이 들어왔고, 교서·교동·치천 연합군은 석 달간 임치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오나라와 초나라가 한나라의 주아부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격파당하고 따로 파견한 난포와 조양이 임치를 구원하러 오자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물러났다. 교서왕은 태후에게 사죄했고, 태자 덕이 진압군의 방심을 노려 기습을 청했으나 병사들의 마음이 흩어졌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궁고후 한퇴당이 찾아와 처벌을 내리자, 사죄도 하고 조조를 내세워 변명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퇴당이 조서를 내어 자결을 권하자 자결했다. 교서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군으로 들어갔다.
2.3. 죽음
경제 시대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조정에서 제후왕의 세력을 줄이고자 삭번 정책을 펼쳤다. 교서왕은 작위를 팔고 간음을 한 일 때문에 여섯 현을 삭감당했다. 한 조정은 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는 오왕 유비에게서 두 군을 잘라내었고, 오왕은 마침내 모반을 일으키고자 하여 동조자를 구하던 중에 교서왕이 용맹하고 호기롭고 군사를 좋아해 제후들의 두려움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중대부 응고(應高)를 교서왕에게 보냈다. 교서왕은 응고의 설득을 받아들여 함께 거사를 계획했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효왕의 제나라, 유현의 치천나라, 유웅거의 교동나라, 유벽광의 제남나라, 유지의 제북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사에 함께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제효왕은 마음을 바꾸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제북왕은 낭중령에게 겁박당해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교서왕은 교동왕·치천왕과 함께 제나라를 쳐 서울 임치를 포위했다. 제효왕은 포위가 급박해지자 교서왕 등과 함께하려고도 했으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정의 구원군 소식이 들어왔고, 교서·교동·치천 연합군은 석 달간 임치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오나라와 초나라가 한나라의 주아부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격파당하고 따로 파견한 난포와 조양이 임치를 구원하러 오자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물러났다. 교서왕은 태후에게 사죄했고, 태자 덕이 진압군의 방심을 노려 기습을 청했으나 병사들의 마음이 흩어졌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궁고후 한퇴당이 찾아와 처벌을 내리자, 사죄도 하고 조조를 내세워 변명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퇴당이 조서를 내어 자결을 권하자 자결했다. 교서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