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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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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원대는 막부 말기 일본의 토사 번사들이 결성한 정치 조직이다. 삿토 동맹과 토사 번의 입장을 조율하고, 나카오카 신타로와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을 통해 결성되었다. 다나카 미쓰아키, 카가와 케이조, 이와무라 타카토시, 카타오카 겐마, 오오하시 신조, 오오에 스구루, 하시모토 카이조, 나카지마 노부유키 등이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육원대의 활동은 해체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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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원대
개요
명칭육원대 (陸援隊)
로마자 표기Rikuentai
창설 배경막부 타도
결성 시기게이오 3년 (1867년)
해산 시기메이지 원년 (1868년)
주요 활동 지역기나이 (오늘날의 교토부, 오사카부, 효고현, 나라현, 미에현 지역)
지휘관나카오카 신타로
관련 인물사카모토 료마, 도사번
상세 내용
목적도사번 출신의 나카오카 신타로사카모토 료마해원대와 함께 존왕양이를 목표로 막부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했다.
조직대장: 나카오카 신타로
참모: 후지 요시노스케, 가마야 효에, 야마자키 야스타로, 미우라 규자부로
대원: 도사번 낭인 등
주요 활동오미야 사건 관련 (실제 관여 여부는 불명확함)
보신 전쟁 참전
해산나카오카 신타로 사후, 보신 전쟁 종결과 함께 해산되었다.

2. 결성 배경

1867년(게이오 3년) 7월, 사카모토 료마의 카메야마 샤츄가 토사 번 소속 해원대로 개편된 것에 발맞춰, 나카오카 신타로 역시 조슈 번의 기병대를 모델로 삼아 육원대를 결성했다. 이는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른 토사 번의 유격 부대 창설의 일환이었다. 당시 토사 번은 공무합체에서 막부 타도로 점차 입장을 선회하고 있었으며, 번의 실력자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탈번했던 나카오카 등을 다시 번의 통제 하에 두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2] 나카오카가 탈번의 죄를 사면받고 대장이 되었으며, 교토의 토사 번 저택을 거점으로 삼았다.

2. 1. 삿토 동맹과 토사 번의 입장

1867년(게이오 3년) 7월, 나카오카 신페이의 동지인 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카메야마 샤츄'''가 해원대로서 토사 번에 부속된 외곽 기관이 되었다. 이에 나카오카 역시 조슈에서 보았던 기병대를 모델로 삼아,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라 토사 번에 소속된 유격 부대로서 육원대를 결성했다. 당시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측근이었던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공무합체 노선에서 도막으로 움직이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 이를 위해 탈번하여 근왕 활동을 하던 나카오카와 사카모토 등을 다시 토사 번의 영향력 아래 두고, 해원대와 육원대를 통합하여 '''쇼텐대'''(상천대, 翔天隊)를 만들고자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2]

탈번의 죄를 용서받은 나카오카가 육원대의 대장을 맡았으며, 교토 시라카와에 위치한 토사 번의 저택을 본거지로 삼았다.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토사 번 및 미토 번 출신의 탈번 낭사들이 부대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총 대원 수는 77명이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서양식 군사학 전문가인 스즈키 부고로가 파견되었고, 지원 부대인 도쓰카와 고시 등 50명과 함께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식사는 카와라마치의 토사 번 저택에서 제공되었다. 육원대 내부에는 신센구미와 같은 막부 측의 첩자가 잠입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카와라마치에서 대장 나카오카가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당하는 오미야 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동지였던 다나카 미쓰아키다니 다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일부 대원들은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에 있는 여관 텐마야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교전을 벌였다(텐마야 사건).

다음 날인 1월 8일(음력 12월 14일), 육원대는 이와쿠라 도모미의 비밀 지령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고야산으로 향했다. 1월 12일(음력 12월 18일),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고야산 거병을 일으켜 왕정복고를 선언한 조정을 대신하여 기슈 번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벌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동안에도 육원대는 고야산에 머물며 기이야마토 지역의 막부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육원대는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에 편입되었다.

2. 2. 나카오카 신타로와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

1867년 7월, 나카오카 신타로의 동지인 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카메야마 샤츄'''는 토사 번에 소속된 외곽 기관인 해원대가 되었다. 이에 발맞춰 나카오카 역시 조슈 번에서 보았던 기병대를 모델 삼아, 삿토 밀약에 따라 토사 번에 속한 유격 부대로서 육원대를 결성했다. 당시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측근이었던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공무합체론에서 막부 타도론으로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감지하고, 번을 이탈하여 근왕 활동을 하던 나카오카와 사카모토 등을 다시 토사 번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그의 구상은 해원대와 육원대를 통합하여 '''쇼텐대'''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2].

탈번의 죄를 용서받은 나카오카 신타로가 육원대의 대장을 맡았고, 교토 시라카와에 있는 토사 번 저택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육원대는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토사 번과 미토 번 출신의 탈번 무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대원 수는 77명이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서양식 군사학 전문가인 스즈키 부고로를 파견하여 지원했으며, 도쓰카와 고시 50여 명과 함께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식사는 카와라마치의 토사 번 저택에서 제공되었다. 육원대 내부에는 신센구미 등 막부 측의 정보원이 잠입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카와라마치의 오미야에서 대장인 나카오카 신타로가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당하는 오미야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육원대는 타나카 미쓰아키, 타니 타테키 등 동지들이 이끌게 되었다.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육원대 일부 대원들은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의 여관 텐마야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교전했다(텐마야 사건). 다음 날인 8일, 이와쿠라 토모미의 밀명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옹립하여 고야산으로 향했고, 12일에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거병하여 왕정복고한 조정에 기슈 번을 항복시켰다(고야산 거병). 이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때에도 고야산에 머물며 기이, 야마토 지역의 세력을 견제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이 되었다.

3. 조직 구성 및 활동

나카오카 신타로사카모토 료마해원대에 이어 조슈의 기병대를 모델로 삼아 결성한 토사 번 소속의 유격 부대이다. 이는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른 것으로,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탈번 낭사들이 주축이 되었다.[2] 육원대는 교토 시라카와(白川)의 토사 번 저택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사쓰마 번에서 파견된 스즈키 부고로의 지도로 서양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초대 대장 나카오카 신타로오미야 사건으로 암살된 후에는 동지인 타나카 미쓰아키, 타니 타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었다. 육원대는 텐마야 사건에 가담하여 신센구미와 교전했으며, 이후 이와쿠라 토모미의 밀명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옹립하고 고야산에서 거병하여 왕정복고를 선언한 조정을 지원하고 기슈 번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막부 타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야산 거병).

도바·후시미 전투 시기에는 고야산에 주둔하며 기이, 야마토 지역의 막부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에 편입되어 신정부의 군사력 기반 형성에 기여했다.

3. 1. 조직 구성

1867년(게이오 3년) 7월, 나카오카 신페이의 동지인 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카메야마 샤츄'''가 해원대로서 토사 번에 부속된 외곽 기관이 된 것에 이어, 나카오카도 조슈에서 견문했던 기병대를 참고하여 육원대를 결성했다. 이는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라 토사 번에 부속된 유격 부대로 만들어졌다. 당시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측근이었던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공무합체에서 막부 타도로 움직이는 시대 흐름에 맞춰, 탈번하여 근왕 활동을 하던 나카오카와 사카모토 등을 다시 토사 번의 영향 아래 두려 했다. 이를 위해 해원대와 육원대를 합쳐 '''쇼텐대'''(상천대, 翔天隊)로 만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2]

탈번의 죄를 사면받은 나카오카가 초대 대장을 맡았으며, 교토 시라카와(白川)에 있는 토사 번 저택을 본거지로 삼았다. 부대원은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토사 번과 미토 번의 탈번 낭사들이 중심이 되었고, 총 인원은 77명이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서양식 군사학자 스즈키 부고로가 파견되었고, 지원 부대인 도쓰카와 고시 등 50명과 함께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식사는 카와라마치에 있는 토사 번 저택에서 제공되었다. 육원대 내부에는 신센구미 등 막부 측의 밀정이 잠입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카와라마치에서 대장 나카오카가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되자(오미야 사건), 동지인 타나카 미쓰아키, 타니 타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었다.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일부 대원은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의 여관 텐마야(天満屋)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교전했다(텐마야 사건).

다음 날인 8일에는 이와쿠라 토모미의 밀명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고야산으로 향했다. 12일에는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거병하여, 왕정복고를 선언한 조정을 도와 기슈 번을 항복시켰다. 이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때에도 고야산에 머무르며 기이(紀伊)와 야마토(大和) 지역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고야산 거병).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육원대는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에 편입되었다.

3. 2. 주요 활동

1867년(게이오 3년) 7월, 나카오카 신타로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카메야마 샤츄'''가 해원대로서 토사 번의 외곽 기관이 된 것에 이어, 조슈 번에서 본 기병대를 참고하여 육원대를 결성했다. 이는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라 토사 번에 소속된 유격 부대였다. 당시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측근인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공무합체에서 막부 타도(도막)로 움직이는 시대 흐름에 맞춰, 번을 탈주하여 근왕 활동을 하던 나카오카와 사카모토 등을 토사 번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그는 해원대와 육원대를 합쳐 '''쇼텐대'''로 만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2] 탈번의 죄를 용서받은 나카오카가 대장이 되었고, 교토 시라카와에 있는 토사 번 저택을 본거지로 삼았다. 부대원은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토사 번과 미토 번 출신의 탈번 무사들이 중심이었으며, 총 77명으로 구성되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서양식 군사학자인 스즈키 부고로가 파견되어 지원했고, 도쓰카와 고시 50명과 함께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식사는 카와라마치의 토사 번 저택에서 지급되었다. 육원대 내부에는 신센구미 등 막부 측의 정보원이 잠입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카와라마치에서 대장인 나카오카가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되자(오미야 사건), 동지인 타나카 미쓰아키와 타니 타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었다.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일부 대원들은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의 여관 텐마야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전투를 벌였다(텐마야 사건).

다음 날인 8일, 이와쿠라 토모미의 비밀 지령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지도자로 옹립하고 고야산으로 향했다. 12일에는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거병하여, 왕정복고를 선언한 새로운 조정에 기슈 번이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벌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때에도 고야산에 주둔하며 기이야마토 지역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야산 거병).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육원대는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이 되었다.

4. 주요 인물

(내용 없음)

4. 1. 나카오카 신타로

1867년(게이오 3년) 7월, 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카메야마 샤츄'''가 해원대토사 번에 부속되자, 나카오카 신타로 역시 조슈에서 본 기병대를 모델로 삼아 육원대를 결성했다. 이는 삿토 토바츠의 밀약에 따라 토사 번에 소속된 유격 부대였다. 당시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측근 후쿠오카 다카치카는 공무합체론에서 도막으로 기류가 바뀌자, 탈번하여 근왕 활동을 하던 나카오카와 사카모토 등을 토사 번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그는 해원대와 육원대를 통합하여 '''쇼텐대'''(상천대, 翔天隊)를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2]

탈번의 죄를 사면받은 나카오카 신타로는 육원대의 대장이 되었고, 교토 시라카와(白川)에 있는 토사 번 저택을 본거지로 삼았다. 부대는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토사 번과 미토 번 출신의 탈번 낭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대원 수는 77명이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서양식 군사학자인 스즈키 부고로(鈴木武五郎)가 파견되었고, 도쓰카와 고시(十津川郷士) 50명과 함께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식사는 카와라마치의 토사 번 저택에서 제공되었다. 육원대 내부에는 신센구미 등 막부 측의 밀정이 잠입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대장 나카오카 신타로는 교토 카와라마치의 오미야 여관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당했다(오미야 사건). 그의 사후, 동지인 다나카 미쓰아키, 다니 다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었다.

나카오카 사후 육원대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이어갔다.

  •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일부 대원이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의 여관 텐마야(天満屋)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전투를 벌였다(텐마야 사건).
  • 다음 날인 8일, 이와쿠라 도모미의 밀명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옹립하고 고야산으로 이동했다. 12일에는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고야산 거병을 일으켜, 왕정복고를 선언한 조정에 기슈 번을 항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 이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중에는 고야산에 머물며 기이, 야마토 지역의 세력을 견제했다(고야산 거병).
  •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육원대는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에 편입되었다.

4. 2. 다나카 미쓰아키

다나카 미쓰아키

4. 3. 가가와 게이조

카가와 케이조

4. 4. 이와무라 다카토시

이와무라 타카토시는 육원대의 구성원 중 한 명이다.

4. 5. 그 외 주요 대원


  • 다나카 미츠아키
  • 카가와 케이조
  • 이와무라 타카토시
  • 카타오카 겐마
  • 오오하시 신조
  • 오오에 스구루
  • 하시모토 카이조
  • 나카지마 노부유키

5. 해체 및 영향

1867년 12월 10일(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카와라마치에서 대장인 나카오카 신타로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암살되자(오미야 사건), 동지인 타나카 미쓰아키, 타니 타테키 등이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1868년 1월 1일(게이오 3년 12월 7일), 육원대 대원 일부는 해원대 대원들과 함께 교토 아부라코지의 여관인 텐마야를 습격하여,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공격하고 신센구미와 교전하였다(텐마야 사건).

다음 날인 8일, 이와쿠라 토모미의 비밀 지령을 받아 와시오 류슈를 지도자로 내세워 고야산으로 향했다. 12일에는 육원대가 중심이 되어 군사를 일으켜 왕정복고를 선언한 조정에 기슈 번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기여했다(고야산 거병). 이후 벌어진 도바·후시미 전투 때에도 육원대는 고야산에 머물며 기이(기슈 번)와 야마토 지역의 막부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한 후, 육원대는 교토로 돌아와 어친병으로 편입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岡慎太郎の銅像と海援隊と陸援隊 http://www.ryoma-kin[...] 高知県立坂本龍馬記念館 2013-08-15
[2] 서적 『幕末諸隊100』 三才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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