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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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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미야 사건은 1867년 11월 15일, 교토의 오미야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당한 사건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테라다야 사건 이후 오미야로 거처를 옮겼으며, 암살 소문이 돌았다. 사건 당일 밤, 료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을 맞이하려다 야마다 토키치가 습격당하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도 공격받아 료마는 사망하고 나카오카는 이틀 뒤 사망했다. 암살의 배후와 실행범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교토 미마와리구미, 신센구미, 사쓰마 번 등이 용의자로 거론된다. 이 사건은 도막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현재 사건 현장에는 기념 석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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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 사건
사건 개요
명칭오미야 사건 (近江屋事件)
발생일1867년 12월 10일 (음력 게이오 3년 11월 15일)
위치일본 교토
목표 인물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
공격 주체불명 (유력 용의자: 미마와리구미(見廻組))
결과사카모토 료마 사망, 나카오카 신타로 중상 후 사망
배경
시대적 배경막부 말기
관련 세력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가이엔타이(海援隊)
미마와리구미(見廻組)
신센구미(新選組)
사건 상세
발생 장소오미야(近江屋)
사건 정황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오미야에서 만남
자객 침입 및 습격
료마 즉사, 신타로 중상 (후 사망)
용의자미마와리구미(見廻組) (유력)
신센구미(新選組) (가능성 제기)
관련 인물
주요 인물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
기타 관련 인물곤도 이사미(近藤勇)
이마이 노부오(今井信郎)
와타나베 아쓰시(渡邊篤)
위치 정보

2. 암살 배경

사카모토 료마에도 막부의 주목을 받아 테라다야 사건으로 급습당한 테라다야 대신, 산조가와라마치 근처 목재상 스야를 교토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게이오 3년(1867년) 10월경 게이몬의 변 이후 도사 번의 용무를 맡았던 간장 상인 오미야로 옮겼다. 그곳은 도사 번 지사들의 기지 역할을 했다.[2]

료마 암살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고료에이지의 이토 가시타로도도 헤이스케는 오미야를 방문, "신선조와 미마와리구미가 노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사쓰마의 요시이 코스케는 도사 번 저택이나 사쓰마 번 저택으로 피신을 권유했으나, 료마는 거절하고 오미야에 머물렀다.[3] 야마다 토키치를 종자로 고용한 것은 신변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오미야는 세간지로 도주하기 용이한 토장을 갖추고 있었다. 료마는 11월 12일경부터 감기에 걸려 11월 14일에 오미야 2층으로 옮겨갔다.[2]

2. 1. 정세

사쓰마 번의 단골 숙소였던 테라다야가 에도 막부에 의해 주목을 받아 급습을 당했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산조가와라마치 근처의 목재상 스야를 교토에서의 거점으로 삼았지만, 게이오 3년 10월경에 오미야로 옮겼다. 오미야는 간장 상인으로서 게이몬의 변 이후 도사 번의 용무를 맡고 있었으며, 그 저택은 도사 번 지사의 기지적인 존재였다[2].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된다"는 풍문은 당시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고료에이지의 이토 가시타로도도 헤이스케가 오미야를 방문하여[2] 국사를 2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이토는 "신선조와 미마와리구미가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쓰마의 요시이 코스케는 "시조 폰토초에 있어서는, 조심성이 부족하다"며 도사 번 저택에 들어갈 수 없다면 사쓰마 번 저택에 들어가도록 권했지만, 료마는 "(사쓰마 번 저택에 틀어박히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라고 대답하고[3], 오미야에 머물렀다. 또한 야마다 토키치를 종자로 고용한 것도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오미야는 세간지로의 도주도 용이한 토장을 갖추고 있었고, 료마는 그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11월 12일경부터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11월 14일에는 오미야의 2층으로 옮겨갔다[2].

2. 2. 료마의 행적

사쓰마 번의 단골 숙소였던 테라다야가 에도 막부에 의해 주목을 받아 급습(테라다야 사건)을 당했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산조가와라마치 근처의 목재상 스야를 교토에서의 거점으로 삼았지만, 게이오 3년 10월경에 오미야로 옮겼다. 오미야는 간장 상인으로서 게이몬의 변 이후 도사 번의 용무를 맡고 있었으며, 그 저택은 도사 번 지사의 기지적인 존재였다.[2]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된다"는 풍문은 당시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고료에이지의 이토 가시타로도도 헤이스케는 오미야를 방문하여[2] 국사를 2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신선조와 미마와리구미가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쓰마의 요시이 코스케는 "시조 폰토초에 있어서는, 조심성이 부족하다"며 도사 번 저택에 들어갈 수 없다면 사쓰마 번 저택에 들어가도록 권했지만, 료마는 "(사쓰마 번 저택에 틀어박히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라고 대답하고[3] 오미야에 머물렀다. 또한 야마다 토키치를 종자로 고용한 것도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오미야는 세간지로의 도주도 용이한 토장을 갖추고 있었고, 료마는 그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11월 12일경부터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11월 14일에는 오미야의 2층으로 옮겨갔다.[2]

3. 암살 경위

사카모토 료마에도 막부에 데라다야가 숙소로 사용되던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가 노리고 있으니 도사 번 저택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료마는 오미야에 머물렀다.

11월 15일 저녁 무렵, 나가오카 신타로가 오미야를 방문하여 산조 제찰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되어 손님이 오미야를 방문, 토쓰카와 고시(十津川鄕士)라고 신분을 말하고 료마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씨름꾼이었던 야마다 도키치(山田藤吉)는 손님을 료마에게 안내하려다 뒤에서 베여 하루 뒤 사망하였다.

이때, “으악!! (ぎゃあ!!)”하고 큰소리를 낸 야마다에게 료마는 “'''호타에나!'''”(ほたえな|호타에나일본어)라고 말해, 자객에게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게 된다. 자객은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장지문을 열어 방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료마는 이마를 베였다. 료마는 몽롱한 의식 중, 나카오카 신타로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하여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가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료마는 흉부 등 수 군데를 베여 결국 사망하였다. 나카오카 신타로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2일 후에 구토가 일어난 뒤 사망하였다.

3. 1. 습격 전 상황

료마는 그동안 숙소로 사용하던 데라다야가 막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가 찾아와 신센구미가 노리고 있으니 도사 번 저택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지만, 료마는 오미야에 머물렀다.

11월 15일(그레고리력 12월 10일) 오후 5시경, 나카오카는 서점이었던 기쿠야를 방문했다. 나카오카는 주인의 아들인 가노 미네키치에게 편지를 건네고, 니시키코지의 사쓰마야에 가져가서 답장은 오미야로 가져오라고 말했다.[1] 나카오카는 도중에 도사 번사 다니 간조의 하숙집을 방문했지만,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오미야로 향했다.[2]

오후 7시경, 사쓰마야로부터의 답장을 가지고 미네키치가 오미야에 도착했다.[3] 그 무렵 료마와 나카오카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미네키치가 나카오카에게 답장을 건넨 후, 오카모토 겐자부로가 들어왔다.[4]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료마가 "배가 고프다"고 말하며, 미네키치에게 투계를 사러 가게 했고, 볼일이 있었던 오카모토도 미네키치와 동행했다.[5] 미네키치는 시조코지의 도리신으로 향해, 투계 고기를 구입하고 오미야로 돌아온 것은 오후 9시경이었다.[6]

3. 2. 습격

사카모토 료마에도 막부에게 데라다야가 숙소로 사용되던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가 노리고 있으니 도사 번 저택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료마는 오미야에 머물렀다.

11월 15일 저녁 무렵, 나가오카가 오미야를 방문하여 산조 제찰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되어 손님이 오미야를 방문, 토쓰카와 고시(十津川鄕士)라고 신분을 말하고 료마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씨름꾼이었던 야마다 도키치(山田藤吉)는 손님을 료마에게 만나게 하려 하였지만 뒤에서 베이고 만다. (하루 뒤 사망)

이때, “으악!! (ぎゃあ!!)”하고 큰소리를 낸 야마다에게 료마는 “'''호타에나!'''[4]”(도사 사투리로 ‘떠들지 말라’라는 의미)라고 말해, 자객에게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게 된다. 자객은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장지문을 열어 방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료마는 이마를 베였다. 료마는 몽롱한 의식 중, 나카오카 신타로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하여 나카오카를 “이시카와[5], 칼은 없는가.”라고 가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료마는 흉부 등 수 군데를 베여 결국 사망. 나카오카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2일 후에 구토가 일어난 뒤 사망하였다.

습격 당시의 상황은 증언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밤이 되자 손님이 오미야(近江屋)를 방문했다.

다니 간조가 나카오카 신타로에게 들은 증언에 따르면, 손님은 도쓰카와 향사를 자칭하며 "료마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응대에 나선 야마다 토키치는 명함을 료마에게 가져갔다. 토키치는 돌아가던 중에 살해당했다.

이마이 노부오는 형부성의 구상서에서 다섯 시 반경에 "마쓰시로 번 무사를 자칭하며 응접을 요구했고, 네 명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지키가 쓰러지고 큰 소리가 나자, 료마는 "'''호타에나!'''[4]"라고 외쳤다. 이후 두 명의 자객이 안쪽의 8조 방으로 난입, 그중 한 명인 이마이 노부오는 료마의 앞머리를 옆으로 베었고, 한 명은 나카오카 신타로의 뒤통수를 베었다. 료마는 안쪽의 다다미방에 있던 칼을 잡으려고 뒤돌아보았을 때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까지 베였다. 료마는 칼을 잡고 일어섰지만, 칼을 뽑지는 못했고, 칼집째로 칼을 막았다. 그러나 자객의 칼은 칼집째로 칼을 깎아내고, 료마의 앞머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료마는 "이시카와[5], 칼은 없는가,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신타로는 칼을 병풍 뒤에 두어 칼을 뽑지도 못한 채 칼집째로 방어했다. 그러나 처음 입은 상처가 깊어 양손과 양발을 베였고, 특히 오른손은 거의 절단될 정도였다. 또한 엉덩이가 뼈에 닿을 정도로 베였지만, 신타로는 죽은 척을 했다. 자객은 "이제 됐다, 이제 됐다"라고 외치며 물러갔다.

3. 3. 습격 후 상황

료마는 그동안 숙소로 사용하던 데라다야가 막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가 찾아와 신센구미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도사 번 저택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지만, 료마는 오미야에 남았다.[1]

11월 15일 저녁 무렵, 나가오카가 오미야를 방문하여 산조 제찰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되어 손님이 오미야를 방문, 도쓰카와 고시(十津川鄕士)라고 신분을 밝히고 료마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스모 선수였던 야마다 도키치(山田藤吉)는 손님을 료마에게 안내하려다 뒤에서 칼에 베여 (하루 뒤 사망) 쓰러졌다.[1]

이때, "으악!!"하고 크게 소리 지른 야마다에게 료마는 "ほたえな|호타에나일본어(도사 사투리로 '떠들지 마라'는 뜻)"라고 말해, 자객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켰다. 자객은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가 장지문을 열고 방에 침입했다. 그리고 료마는 이마를 베였다. 료마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나카오카의 정체가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가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료마는 흉부 등 여러 군데를 베여 결국 사망했다. 나카오카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틀 후 구토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료마는 칼을 등불에 비추며 "안타깝군, 안타까워"라고 말했고, "신타, 신타, 손은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신타로가 "손은 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료마는 여섯 첩 방으로 가서 "신스케 의사를 불러오게"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희미한 목소리로 "신타, 나는 뇌를 다쳤어, 이제 안 돼"라고 말하고는 기절했다. 신타로는 고통을 참으며 뒤쪽 빨래 건조대에 나가 가족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고, 지붕을 타고 북쪽 이웃의 도구 가게 이즈츠야 카헤이의 집 지붕에서 사람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

4. 암살 실행범 논란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의 실행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신센구미 설: 암살 당시 자객이 "이런 니미(こなくそ)!"라고 이요 사투리를 사용한 점과 현장에 남겨진 칼집 등을 근거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오이시 구와지로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9] 그러나 신센구미는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으며, 현재는 신센구미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 미마와리구미: 다이쇼 시대에 전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와 와타나베 아쓰시가 사사키 다다사부로 등이 실행범이라고 증언하면서 이 설이 통설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에는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여러 이설이 제기되고 있다.
  • 사쓰마 번 음모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무력 도막파가 대정봉환을 추진하던 료마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당시 료마의 정치적 입장, 나카오카 신타로 역시 무력 도막파였다는 점 등에서 모순이 발견되어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 기타 설: 이로하마루 사건에 대한 원한으로 기슈 번이 암살을 주도했다는 설, 영국 상인이 무기 판매를 위해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당시 료마의 지명도는 지금처럼 높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의 주된 대상이었고 료마는 우연히 휘말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4. 1.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

다이쇼 시대에 전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 와타나베 아쓰시가 사사키 다다사부로 등이 실행범이라고 증언하였다.[26]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라고 추측하였다. 이 미마와리구미설이 통설이 되었으며, 여기에 의문을 나타내는 역사학자는 없다. 하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에 어긋나는 부분(자객의 인원 구성, 현장에 두고 간 칼집의 소유자 등)이 있어서, 주로 작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설이 나오는 상황이다.[26]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다니 다테키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마이 노부오는 처음에는 망보기 역할이었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자식들에게 말하며 당시 사용했다는 무기(칼, 창)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와타나베 아쓰시는 젊었을 적 이름이 이치로였다고도 하고, 실제 료마를 암살한 미마와리구미의 와타나베 이치로와는 다른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는 거의 죽기 직전에 자신이 료마 암살의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평소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던 노인이 가족들을 불러서 한 얘기였기에 당시 신문에 기사로까지 나오며 유명해졌다. 그러나 고령으로 인한 것인지 그의 증언은 군데군데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사건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이 없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한다.

당시는 료마 암살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사건의 진상 또한 어느 정도는 밝혀졌기 때문에 일반인이 전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유일한 증언자인 이마이 노부오 등도 죽어 더 이상 사건에 대해 진술할만한 미마와리구미 대원도 없었다. 와타나베 아쓰시는 실제 실행범이 아니며 단지 '료마를 죽인 자'라는 자신의 이름을 팔기 위해 연극을 했다는 설도 있다.

견회조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는 1869년(메이지 2년) 하코다테 전쟁에서 항복하여 병부성과 형부성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사카모토 암살 사건에 대해 구 신선조 대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어느 쪽도 신선조의 관여를 부정했다. 오이시 쿠와지로가 "견회조가 실행범이다"라고 자백했기 때문에, 이마이도 조사를 받아 자백하게 되었다. 『가쓰 가이슈 일기』 메이지 2년 4월 15일 조에는, 마쓰다이라 노부토시에게 들은 이야기로 "이마이가 '사사키 유이 사부로(사사키 타다사부로)의 목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는 기술이 있다. 가쓰 가이슈는 "지시한 자는 사사키보다 윗사람, 혹은 에노모토 쓰시마인지 알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1870년(메이지 3년) 9월 2일, 이마이는 금고형을 선고받고 시즈오카 번으로 인계되었다.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료마 암살에 관여하고, 탈주하여 관군에 저항한 것이 죄목이었다. 이마이의 구술서에는 "사사키 타다사부로의 지시에 의해, 사사키, 이마이, 와타나베 키치타로, 다카하시 야스지로, 카츠라 하야(하야)노스케, 도이 나카조, 사쿠라이 다이 사부로 7명이 오미야로 향해, 사사키, 와타나베, 다카하시, 카츠라 4명이 실행범이 되어 료마 등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살해 명령이 있었던 이유는 "테라다야 사건 당시 료마가 동심 2명을 사살한 것"을 들고 있다.[10] 이마이는 "교토 견회역오가사와라 나가토오에게 명령받았다"고 했지만, 오가사와라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이지 9년(1867년), 니시무라 겐분은 저서 『문명사략』에서 료마 등이 "막부의 신하 이마이 모(某)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지 33년(1900년), 이마이는 유키 레이이치로의 취재에 응해, 그 증언록이 신문에 게재되었지만, 유키가 내용을 미화하고 과장한 형태로 게재하였다.[11] 이 증언에서는 이마이가 실행범으로 되어 있다. 이전 증언과 다른 점에 대해 키쿠치 아키라는 "이마이가 처음에 지목한 실행자는 이마이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이마이에게는 와타나베 아쓰시나 세라 도시로 등 생존자를 감싸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한다. 타니 간조는 나카오카의 증언과 다르다는 점 등에서 이마이의 증언을 "가짜"라고 하고, "매명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여러 번 발언하였다. 당시에는 이마이의 증언이 "유력한 것이다"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1] 이마이는 메이지 42년에 오사카 신보의 기자 와다 텐카의 취재에 대해, "암살이 아니라 막부의 명령에 의한 직무였다", "범인은 신선조가 아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다이쇼 원년(1912년), 이마이의 구술서에 따른 사건 개요가 『유신 토사근왕사』에 수록되었다.[12] 다이쇼 15년(1926년)에 간행된 『사카모토 료마 관계 문서』에 이마이의 구술서가 수록되었다. 편자 이와사키 히데시게는 "이것으로 만사는 해결되었다"라고 평하였다.

다이쇼 시대에는 전 견회조 대사인 와타나베 아쓰시가 남긴 증언이 발표되었다. 이 기록은 이마이의 고백이 게재되기 이전부터 작성된 것을 토대로, 메이지 41년에 친족에게 남기는 기록으로 작성된 것이다. 와타나베는 "자신과 사사키, 이마이 등 5, 6명으로 살해를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13] 키쿠치 아키라는 "이마이가 생존자를 배려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다이쇼 12년(1923년), 사사키의 형인 테다이키 카츠토(나오에몬)의 양자가 『테다이키 나오에몬 전』을 사가판으로 간행했다. 이 책에서는 테다이키 카츠토가 사망하기 며칠 전, "사카모토를 죽인 것은 실동생 타다사부로이다"라고 말하고, 료마가 사초 동맹과 "토사의 번론을 뒤집어 도막에 일치하게 한 것으로, 깊이 막부의 혐오를 샀다"고 하여, "어느 제후의 명"에 의해 타다사부로가 3명으로 타코야쿠시에서 료마를 살해했다고 한다. "어느 제후"는 교토 소사다이로 요시무네의 친동생이기도 했던 구와나 번 주 마쓰다이라 사다타카였다고 한다. 이소다 미치후미는 마쓰다이라 요시무네를 가리킨다고 한다.[14] 다만 당시 토사 번이 도막으로 일치했다는 사실은 없고, 이마이의 증언과도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쇼와 13년(1938년), 사사키 타다사부로의 자손 의뢰로 다카하시 카즈오가 『사사키 타다사부로 전』을 사가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는 "료마가 대정봉환을 주도했기 때문에 막신에게 원한을 사, 사사키가 와타나베 키치타로, 다카하시 야스지로, 카츠라 하야노스케, 도이 나카조, 사쿠라이 다이조, 이마이와 함께 료마를 살해하고, 테다이키 카츠토가 남긴 어느 제후는 아이즈 번 주 요시무네였다"고 한다.

교토 료젠 호국 신사에 있는 료젠 역사관에는 이 설에 따른 전시 코너가 있으며, 료마를 벤 것으로 여겨지는 칼이 전시되어 있다.

4. 2. 신센구미 설

당초, 자객이 "이런 니미(こなくそ)!"라고 이요 사투리(에히메현에서 사용되는 일본어의 방언)로 이야기한 점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오이시 구와지로의 짓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오이시는 료마 암살죄로 살해당했다.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신센구미가 했던 일이나 이케다야 사건등도 있어, 보신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신정부군은 신센구미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시행했다.

료마 암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칼집 등의 물증이나, 3일 후 암살된 이토 가시타로의 동지(고료에시) 등의 증언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졌지만, 베인 상처로 보면 왼손잡이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채용하면 왼손잡이이며 호쿠신잇토류의 달인인 료마를 살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인물인 사이토 하지메라는 설도 있다.

사건 후, 11월 26일에 막부에서 조사를 받은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진술에서 '우리는 프로다.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 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실제로 같이 참변을 당했던 나카오카 신타로는 이틀 정도 더 생존해 사건을 증언함)'라며 관여를 부정하였다. 곤도와 같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오이시 구와지로도 이 사건만큼은 부정했다. 그는 신센구미 내부에서도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하였다며 신센구미에서 손꼽는 검객이었다.

료마가 속해있던 도사번 지사들이 신센구미 설을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었던 당시에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이시에게 무수한 고문을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오이시가 억지로 인정을 한 적이 있지만 이내 부정하면서 '사건 이후 곤도 국장이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와타나베가 료마 씨를 해치운 것은 회자될 만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을 들었을 뿐' 이라며 일축했다. 곤도와 오이시 둘 다 료마 암살 혐의 때문에 참수되었지만 이는 도사번 지사들의 복수심에 가까운 맹렬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인 증거 없이 억지로 몰아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료마는 지금과 같은 인지도는 없었지만 이름난 지사였다. 따라서 막부 순찰대가 그를 해치운 것은 큰 공로이므로 자랑을 하면 했지 숨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센구미는 암살 당시부터 한결같이 혐의를 부정했다.

현재는, 신센구미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습격당한 나카오카 자신도 "이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많이 베고 다니는 신선조의 짓일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도사번의 중역 테라무라 사젠도 당일의 일기에 "아마 신선조 등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보고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도사번의 타니 간죠와 모리 쿄스케는 사쓰마번의 나카무라 한지로의 안내로, 현장에 남겨져 있던 칼집을 사쓰마번 저택으로 가져갔다. 이것을 본 고료 에지의 시노하라 야스노신, 우치우미 지로 등이 "하라다 사노스케의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한편 다나카 미츠켄은 칼집에 대해 "살해 소식을 듣고 현장에 온 이토 카시타로가 감정하여 신선조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타니는 나카오카의 증언에 있는 "목소리"를 근거로, 범인은 "중국에서 시코쿠에 걸쳐 있는 자일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료 에지의 아베 쥬로는 "그렇다면 이요의 마츠야마번이겠군요"라고 답하고,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요 출신의 신선조 대원 하라다 사노스케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메이지 시대 중기 이후에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도사번 중추부는 "범행은 신선조에 의한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막부에 대해 고발을 했다. 이를 받아 11월 26일 막부로부터 조사를 받은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는 관여를 부정했지만, 세상에서는 "신선조가 범인이다"라는 풍문이 강해졌고, 당시에는 이것이 유력한 설로 여겨졌다. 오쿠보 토시미치도 11월 19일 자 이와쿠라 구니토미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첫째, 곤도 이사미의 소행으로 추측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료마의 의제인 칸노 카쿠베도 나카오카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은 당시 아이즈에 속하는 신선조의 자에 분명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코다테 전쟁 이후, 항복자가 된 구 신선조 대원에게도 사카모토 암살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지만, 요코쿠라 젠고로는 "전혀 모른다"고 답했고, 소마 하지메는 "대내에서 회람이 돌았고, 암살을 한 것은 미마와리구미라고 쓰여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오이시 구와지로도, 전 고료 에지의 카노 와시오에게 체포되었을 때 "신선조의 범행이다"라고 증언했지만, 후에 "그것은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증한 것이고, 미마와리구미의 4명이 실행한 것을 곤도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마이의 구상서가 공표되기 전까지는 신선조 범행설이 널리 믿어졌다.

또한 오미야 신스케는 현장에 남겨진 나막신에 폰토초에 있는 "효테이"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효테이의 주인이 "신선조에게 빌려줬다"고 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조사에서는 현장에 남겨진 나막신은 효테이의 것이 아니었다.

4. 3. 사쓰마번 음모설

사쓰마번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무력 도막파에 의한 음모라는 설이다.

마쓰다이라 슈가쿠는 사건 다음 날, 마쓰다이라 시게아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료마와 나카오카가 암살된 것에 대해 후쿠오카 다카치카와 이야기하던 중, 정치 정세로 인해 "토번(도사번)의 노력으로 고구마번(사쓰마번)의 간사한 책략은 이미 파탄된 형세다"라고 기록했다. 키무라 코히코는 이를 슈가쿠와 후쿠오카가 사쓰마번의 범행이라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또 『개정 히고번 국사사료』권 7에는 "사카모토를 해한 것도 사쓰마 사람일 것이다"라는 사쓰마번의 관여를 엿보게 하는 풍문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국제법학자인 니나가와 아라타는 쇼와 9년(1934년) 4월 『역사공론』에서 사쓰마번이 료마 암살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쇼와 27년(1952년)에 출판한 『유신정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유신사료 편찬계의 우에무라 스미사부로에게 들은 이야기로 "나카지마 노부유키가 오미야의 하녀에게 묻자, 암살범들의 말에 확실히 가고시마 사투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카지마는 이로하환 사건으로 나가사키에 있었고, 현장에 달려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우에무라의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쓰마번 설의 동기로 거론되는 것은 "마쓰다이라 슈가쿠나 가쓰 가이슈의 영향을 받은 료마는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의 설립을 설파하고 있었으며, 대정봉환을 받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그 안에 포함할 것을 상정했으므로, 무력 도막과 구 권력의 배제를 목표로 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신체제로의 온건한 이행을 설파했던 사카모토 사이에 요시노부의 처우를 둘러싼 의견 대립이 생겨, 대정봉환파인 료마가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무력 도막파의 암약"이라는 설에는, 사사키 다몬의 서한 등이 있다.

이 설은 실행범을 미마와리구미로 했을 경우에도, 사쓰마번이 정보를 제공하거나 지시했다는 선에서 주장된다. "이마이 노부오가 사이고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풍문이 당시 있었고, 또한 이마이 자신도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를 구원하려 했다"는 이마이의 아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나 료마 자신이 막부 오메츠케인 나가이 나오시와 담합하는 등 꺼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그것을 주변에 경고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설령 그러한 정보가 없더라도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료마의 소재를 어렵지 않게 알아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나카오카 신타로도 무력 도막파였고, 사쓰마번 가로인 고마쓰 기요카도도 대정봉환을 요시노부에게 강요하는 등 다양한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 노선의 대립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 역사학상에서는 대체로 통일된 견해가 되고 있다[17]

영화나 텔레비전, 소설 등에서는 이 설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18]。 특히,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1974년의 『가쓰 가이슈』에서 오쿠보 도시미치를 사카모토 암살의 배후로 그린 이후, 이 설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19]

4. 4. 기타 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남기고 있어, 이마이 노부오 설 외에도 사쓰마번 무사 개입설이나 아사다 지로의 소설 『칼에 지다』와 같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높은 지명도로 인해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주를 이루지만, 당시 료마의 지명도는 높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의 주된 대상이었고 료마는 우연히 휘말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기슈번 배후설: 무쓰 무네미쓰 등은 이로하마루 사건에 대한 원한으로 기슈번이 암살을 주도했다고 보았다. 다니 다테키는 미우라 큐타로와 신센구미의 공모설, 현장에 남겨진 칼집이 기슈 번사들이 사용하던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17] 이로 인해 덴마야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사쓰마번 배후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사쓰마번 내 무력 도막파의 음모라는 설이다. 마쓰다이라 슈가쿠는 사건 다음 날 마쓰다이라 시게아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후쿠오카 다카치카와 료마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쓰마번의 책략이 실패했다고 언급했다.[15] 니나가와 아라타는 나카지마 노부유키가 오미야의 하녀에게서 암살범들이 가고시마 사투리를 썼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16]
  • 영국 상인 배후설: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 해리 파크스, 어니스트 사토 등 영국 세력이 무력 도막을 통해 무기 판매를 늘리려 했다는 음모론이다.

5. 암살의 영향

료마나카오카의 죽음은 토막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어떤 흉악한 놈이 감히 나의 양팔을 빼앗아 가는가"라고 탄식했고[1], 다자이후에 있던 산조 사네토미는 잠도 자지 못하고 식사도 잊을 정도로 통곡했으며, 12월 20일에는 두 사람을 위해 제단을 만들어 영혼을 모셨다[2]. 유리 고세이도 동료들과 함께 그들의 영혼을 모셨다[2].

6. 기념

현재,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조난의 땅"이라고 쓰인 석비가 세워진 곳[23]은 당시 오미야의 북쪽에 해당한다[24]。1927년(쇼와 2년) 건립 당시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지 못해 인접 부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25]。이후 가와라마치 상점가 진흥 조합에 의해 기증된 안내판이 함께 설치되었고, 현재는 료마 초상화 안내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2011년 1월의 석비와 안내판


2013년 7월의 석비와 안내판


2014년의 석비와 안내판, 초상화 패널

참조

[1] 서적 暗殺-明治維新の思想と行動- 徳間書店 1966
[2] 문서 新選組始末記
[3] 서신 望月清平宛書簡 1867-10-18
[4] 문서 土佐弁で「騒ぐな」の意。
[5] 문서 中岡の別名。
[6] 문서 川田瑞穂氏聴取書 鹿野安兵衛(菊屋峰吉)、井口新之助(新助の子)談話 大正5年
[7] 서신 清岡半四郎の手紙
[8] 서신 清岡半四郎の手紙
[9] 서적 新選組 岩波新書 2003
[10] 간행물 維新創世 坂本龍馬 学習研究社 2006
[11] 서적 旧幕新撰組の結城無二三 : お前達のおぢい様 https://dl.ndl.go.jp[...] 玄文社 1924
[12] 간행물 維新土佐勤王史 https://dl.ndl.go.jp[...]
[13] 문서 刺客の人数構成、供述による斬った箇所と実際の傷の箇所の相違、現場に置き忘れた鞘の持ち主(今井は「渡辺吉太郎のものである」と証言するが、渡辺は「[[世良敏郎]]のものである」としている)など。
[14] 서적 龍馬史 文藝春秋 2010
[15] 논문 龍馬遭難事件の新視角-海援隊士・佐々木多門書状の再検討- 第1回・第2回・最終回 2006
[16] 서적 近江屋 一八六七年 百五十年の真相 文芸社 2017
[17] 문서 幕末政治と倒幕運動 吉川弘文館 1995
[18] 영상 六人の暗殺者
[19] 드라마 新選組! 2004
[20] 소설 壬生義士伝
[21] 문서 中岡慎太郎と一緒にいた坂本龍馬は実は[[影武者]]で本物の坂本龍馬はすでに暗殺の危機を恐れて、[[木戸孝允]]の力添えで[[英国]]に逃亡したという説もある
[22] 문서 維新資料編纂会
[23] 문서 以前は旅行代理店([[京阪交通社]])、[[2009年]]夏からコンビニエンスストア([[サークルK]])があったが、のちに閉店。建物は改築され、2015年10月~2023年6月は、回転すし店[[かっぱ寿司]]京のとんぼ店が営業。
[24] 문서 当時の河原町通りは道幅約5mだったため、近江屋の建物は現在の車道東側までせり出しており、正確には当時の近江屋建物裏手の北隣にあたる。
[25] 서적 京都の江戸時代を歩く 文理閣 2008
[26] 간행물 신 역사군상 시리즈 (4) 유신창세(維新創世) 사카모토 료마 학습연구사 2006
[27] 문서 막말 정치와 도막운동 요시카와코 문고(吉川弘文館) 1995
[28] 드라마 신센구미!(新選組!)
[29] 논문 료마 조난사건의 새로운 시각 - 가이엔타이무사 사사키 다몬의 서한 재검토 - 제 1회, 제 2회, 최종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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