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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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모토 료마는 1836년 일본 시코쿠 도사 번에서 태어난 사무라이로, 막부 말기 혼란한 시대를 살며 메이지 유신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검술을 연마하고 에도에서 유학하며 서양 문물을 접했고, 탈번 후에는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어 해군 훈련소 설립에 기여했다. 료마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을 중재하여 삿초 동맹을 성사시키고, 가이엔타이를 설립하여 상업 활동과 함께 메이지 유신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대정봉환을 위한 선중팔책을 제시하며,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의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기여했으나, 1867년 교토에서 암살당했다. 료마는 동시대 인물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사후에도 그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사카모토 료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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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 1860년대
본명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or 坂本竜馬)
이명사이타니 우메타로 (才谷梅太郎), 나오카게 (直陰), 나오나리 (直柔)
출생일1836년 1월 3일
출생지고치, 도사국, 에도 막부
사망일1867년 12월 10일
사망 원인암살
사망지교토, 야마시로국, 에도 막부
직업무사, 정치가
배우자나라사키 료
부모하치헤이 (나오타리), 사치
일본어 표기
로마자 표기Sakamoto Ryōma
가나さかもと りょうま
신자체坂本 竜馬
구자체坂本 龍馬
한글사카모토 료마
활동
활동존황양이, 공의정체
소속해원대
소속 번도사 번 (고치현)
수상 및 묘소
수상증정사위
묘소교토 료젠 호국신사 (료젠 묘지), 야스쿠니 신사
기타
시대막말
별명사이타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郞), 지넨도(自然堂)
막부에도 막부
씨족사카모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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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가와다 쇼료
가와다 쇼료

1854년 6월 23일, 료마는 고향으로 돌아와 히네노 벤지에게서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12개조와 25개조》를 받았다. 이는 료마가 에도에서 수련하여 실력이 늘었다고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해 겨울, 료마는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에게서 서양에 대해 배웠고, 외국 배를 구입하여 동지들과 운송업을 하며 항해 기술을 배우라는 조언을 들었다. 이는 훗날 료마가 해운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1855년 12월 4일, 아버지 나오타리가 사망하고, 1856년 2월 2일 형 곤페이가 가문을 이었다.

2.1. 유년 시절

료마의 탄생지
료마의 탄생지

료마는 덴포 6년(1835년) 11월 15일 도사번(오늘날의 고치현 고치) 하급 무사인 고시(鄕士) 계급의 사카모토 가문에서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와 어머니 사카모토 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과 3명의 누나가 있었다.

사카모토 가문은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영위하는 호상 사이다니야(才谷屋)의 분가로, 고조부 나오마스(直益)의 장남 나오미(直海)가 번으로부터 고시 어용인(御用人)으로 등용되어 사카모토 가문을 일으켰다. 도사번의 무사 계급은 상사(上士)와 하사(下士)로 나뉘어 양자 간에는 차별이 존재하여, 하사는 오랫동안 여러 면에서 억압되어 왔다. 상인 출신의 사카모토 가문은 하사였지만, 분가 사이타니야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여받아 매우 유복하였다.

료마가 열두 살이 되는 해인 1846년, 어머니 고가 향년 49세에 병사했다. 당시 쉰 살이었던 아버지 나오타리는 후처인 이요를 맞이한다. 료마는 그 뒤 새어머니 이요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요는 료마의 교육에 매우 엄격했다. 사카모토 가를 방문한 사람의 목격담에 따르면 "예절이 밝지 못하다는 이유로 료마에게 반성을 요구하며 객실에 무릎을 꿇어 앉혀놓은 채 끼니도 굶길 정도로 엄격했다"라고 한다. 이렇게 교육은 엄격했지만 료마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료마는 14살 때부터 히네노 벤지가 가르치는 히네노 도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19살이었던 1853년 3월, 료마는 히네노에게서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小栗流和兵法事目録)을 하사받았다.

유년 시절에는 울보에 겁이 많은 허약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열 살 때 어머니 사치를 병으로 잃었고, 이후 누나 오토메가 어머니 대신 료마를 교육했다. 료마는 열두 살까지 야뇨증이 있었지만, 오토메가 밤중에 화장실로 데려가서 극복하게 했다고 한다. 오토메는 키 176cm, 체중 110kg을 넘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검술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료마의 검술 사범을 맡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료마는 생애에 걸쳐 오토메에 대한 감사와 연모를 잃지 않았고, 현존하는 료마 친필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는 16통 남아있다고 한다.

2.2. 에도 유학

1853년 료마는 검술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에도로 유학을 떠났다. 료마는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존왕양이론자들과 교류했다. 그해 말에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 공부했다.

흑선 내항
흑선 내항

같은 해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내항하자, 무사 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료마도 시나가와의 토사번 하야시키 수비 임무에 참여했으며,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쟁이 되면 이국인의 목을 베어 돌아가겠다"라고 썼다.

같은 해 12월, 료마는 사쿠마 조잔의 사숙에 입학하여 포술, 한학, 란학 등의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조잔은 요시다 쇼인의 미국 군함 밀항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료마가 조잔에게 배운 기간은 매우 짧았다.

1854년 6월 23일 료마는 15개월간의 에도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56년 료마는 다시 에도로 가 지바 도장에서 2년간 수련을 했다. 1858년 1월, 료마는 지바 사다키치에게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 1권을 받고, 그해 9월 검술 수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2.3. 도사 근왕당

1861년 9월, 사카모토 료마는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한 도사 근왕당에 가입했다. 다케치 즈이잔이 작성한 《도사 근왕당 혈맹자 성명 사본》에 아홉 번째로 서명했다. 료마는 다케치와 친분이 있었지만, 다케치가 주장한 일번근왕(一藩勤王)은 따르지 않고,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주장했다.

1861년 10월 1일, 료마는 히네노 벤지로부터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3개조 목록》(小栗流和兵法三箇條)을 받았다. 이는 오구리 류의 면허 개전(皆傳)으로, 오구리 류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료마는 검술 수행을 위해 마루가메 번 도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여행 허가를 얻었다. 료마는 하기에서 존왕양이파를 대표했던 구사카 겐즈이를 만나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호소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2.4. 탈번

1862년 2월 말, 료마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도사 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를 암살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하지만 료마는 암살에 가담하지 않고 3월 24일 같은 도사 근왕당 소속인 사와무라 소노조와 함께 탈번하여 낭인이 되었다.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

료마가 탈번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도사 근왕당의 과격한 정세를 싫어한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는 요시무라 도라타로의 설득 때문이었다. 요시무라와 함께 탈번한 소노조는 요시무라와 상의한 끝에 이미 탈번한 상황에서 시모노세키에서 고치로 되돌아가 료마를 데리고 다시 번을 빠져나왔다. 소노조는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다케치 한페이타가 허락하지 않아 료마만 데리고 나왔다.

1862년, 다케치는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라는 손노 죠이 구호를 내세우며 도사 친왕당(도사 근왕당)을 조직했다. 도사 번의 다이묘 야마우치 토요시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도사 친왕당은 요시다 도요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료마는 이 음모에 참여했지만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도사 친왕당이 일본 전체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다케치는 도사 번만을 위한 혁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료마는 다케치와 결별하고 무단으로 도사를 떠났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단 탈번은 사형에 해당하는 엄격한 처벌 대상이었다. 료마는 쇼군에 대항하여 활동하면서 "사이타니 우메타로"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분큐 원년(1861년) 3월, 토사에서 이구치무라 린쇼지 사건(井口村刃傷事件)이 발생하여 하급 무사와 상급 무사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같은 해 4월, 다케치 류잔은 에도에서 미토, 장주번, 사쓰마 등 여러 번의 번사들과 교류했다. 다케치 류잔은 토사 번의 킨노 운동이 다른 번에 뒤처져 있음을 인지하고 구사카 겐스이, 가바야마 산엔과 함께 각 번에서 동지를 모아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고 막부에 대항하는 것을 맹약했다. 같은 해 8월, 다케치 류잔은 에도에서 “토사 킨노토(도사 근왕당)”를 결성하고 맹약을 정했다.

다케치 류잔은 토사로 돌아와 192명의 동지를 모았고, 료마는 9번째로 가입했다. 다케치 류잔은 킨노토를 통해 번주 야마우치 요도에게 영향을 주고 존왕양이를 이루려 했다. 그러나 요시다 도요를 비롯한 당시 번 정부는 공무합체를 지지하여 킨노토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거번을 지향하는 무시 겐지로는 여러 藩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도사 킨노토 동지들을 파견했는데, 료마도 그중 한 명이었다. 1861년 10월, 료마는 히네노 벤지로부터 오구리류 전수 목록을 받은 후, 마루가메 번으로 검술 수행을 떠났다. 1862년 1월 장주 하기에서 구사카 겐스이와 면회하고 서간을 받았다.

료마는 1862년 2월에 귀환했지만, 사쓰마 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의 상경 소식이 전해졌다. 도사 킨노토 동지들은 탈번하여 사쓰마 번의 킨노 의거에 참가하려 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정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존양파 지사들은 막부 타도 거병으로 오해했다. 요시무라 코타로, 사와무라 소노죠 등이 탈번했고, 료마도 탈번을 결심했다. 탈번은 번적에서 벗어나 주종 관계를 끊는 것으로, 죄인이 되고 가족들도 연좌죄에 처해졌다. 무시 겐지로는 탈번에 찬동하지 않았다.

료마의 탈번은 1862년 3월 24일(구력)에 이루어졌다. 사와무라 소노죠와 나스 신고의 도움을 받아 도사를 빠져나갔다. 료마가 탈번을 결심하자, 형 곤페이는 료마의 칼을 빼앗았다. 하지만 누이 사카모토 오토메가 곤페이를 속여 료마에게 칼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탈번 후 료마와 사와무라는 요시무라 코타로가 있는 시모노세키로 갔지만, 요시무라는 이미 교토로 떠난 뒤였다. 시마즈 히사미쓰공무합체를 추구했고, 1862년 4월 23일(구력) 테라다야 사건이 일어나 존양파는 숙청되었다. 요시무라는 체포되어 도사로 송환되었다. 료마는 사와무라와 헤어져 규슈로 향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동정은 불분명하다.

도사에서는 요시다 도요1862년 4월 8일(구력)에 암살당하고, 무시 겐지로가 번론 전환에 성공하여 번주의 상락을 촉구했다. 료마는 7월 무렵 오사카에 잠복해 있었다. 모치즈키 세이헤이와 연락하며 자신이 요시다 도요 암살 용의자임을 알게 되었다.

2.5. 가쓰 가이슈와 고베 해군 훈련소

1862년 료마는 탈번한 후, 개화파이자 군함 부교 나미(軍艦奉行並)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를 만났다. 료마는 그의 견식에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고,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우며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료마는 번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863년 2월 25일, 가쓰는 도사 번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만나 료마의 탈번 죄를 사면받았다. 같은 해, 료마는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에 힘썼다. 4월 21일 오사카에 도착한 쇼군 이에모치는 효고 방면을 안내받은 뒤 고베에 해군 훈련소를 설치하고 싶다는 가쓰의 직접 담판을 허가하였다. 해군훈련소는 막부의 정식 기관으로서 막부로부터 필요한 경비를 제공받았고, 가쓰는 고베에 사설학교를 세워도 된다는 허가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는 사비로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자금이 부족했다. 막부의 지원만으로는 자금이 부족했기에 료마는 해군 훈련소 설립 자금 조달을 위해 가쓰의 사신으로서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찾아가 천냥을 빌렸다.

1863년 10월, 료마는 고베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무렵, 야마우치의 도사 근왕당 탄압이 심해지자 료마 등 도사 번 출신들에게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료마는 해군 훈련소 업무 수행에 힘쓰고 있어서, 12월 경 가쓰는 탄원서를 써 료마의 귀국 명령을 취소해 달라고 탄원했다. 그런데도 가쓰의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료마는 다시 탈번하는 신세가 되었다.

1864년 5월 4일, 오사카 수군이 폐지되어 고베 해군 훈련소에 들어가고 5월 14일 고베 해군 훈련소가 발족되었다. 료마가 평생의 동반자 나라사키 료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발족과 동시에 가쓰는 군함 부교 나미에서 군함 부교로 승진하여 해군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가쓰는 로주 아베 마사토와의 대립으로 11월 10일 군함 부교직을 파면당했다. 이로 인해 가쓰는 더 이상 해군 훈련소를 이끌어 나갈 수 없게 되어 얼마 뒤 문을 닫게 되었고, 료마 일행은 사쓰마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2.6. 가메야마사츄

사쓰마번의 지원으로 설립된 가메야마사츄는 상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의 기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1864년 고잔지 거병으로 존왕양이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한 후, 가메야마사츄는 상업 활동 외에도 당시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화해를 도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훗날 삿초 동맹 성립에 기여하게 된다.

나카오카 신타로와 히지가타 히사모토는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사쓰마 번과 조슈 번과 같은 강력한 번들의 동맹을 추진했다. 료마는 오무라번와타나베 노보루에게 삿초 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와타나베는 기도 다카요시와 료마의 만남을 주선했다. 1865년 5월, 료마와 히지가타는 다카요시를 설득하여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회담을 승낙받았고, 나카오카는 사이고에게 회담을 승낙하도록 설득했다. 5월 21일 료마와 다카요시는 시모노세키에서 사이고를 기다렸으나, 사이고는 조슈 정벌을 막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료마와 나카오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 번의 화해를 추진했다.

막부의 무기 거래 금지로 근대 무기 도입이 어려웠던 조슈 번과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사쓰마 번의 상황을 이용하여, 료마는 사쓰마 번 명의로 무기를 조달해 조슈 번에 비밀리에 판매하고, 그 대가로 조슈 번으로부터 쌀을 공급받는 방안을 제안했다. 가메야마사츄는 이 거래를 실행하고 화물 운송을 담당하여 양 번의 긴박한 문제를 해결했다.

가메야마사츄는 나가사키에서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가 운영하던 '글로버 상회'로부터 미니에 총 4,300정과 게벨 총 3,000정을 사쓰마 번 명의로 구입하여 조슈 번에 매각을 알선했다. 또한, 곤도 조지로의 활동으로 영국제 증기 군함 유니온 호를 사쓰마 번 명의로 구입하여 조슈 번에 제공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화해에 기여했다.

9월에는 조슈 재정벌에 대해 사쓰마 번이 따르지 않겠다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서한을 조슈 번의 히로사와 사네오미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료마가 맡았다.

2.7. 삿초동맹

데라다야 사건이 일어났던 데라다야 여관
데라다야 사건이 일어났던 데라다야 여관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사쓰마 번(가고시마현)과 조슈 번(야마구치현)의 동맹을 중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래 사쓰마 번은 조정과 협력하여 막부를 개혁하려는 온건한 입장이었고, 조슈 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원하려는 급진적인 입장이어서 두 번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료마는 이러한 두 번의 입장을 조율하여 1866년 삿초 동맹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삿초 동맹이 체결된 바로 다음 날, 료마와 동지들이 머물던 데라다야 여관에서 암살 미수 사건(데라다야 사건)이 발생했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삿초 동맹에 위협을 느낀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사건에서 료마는 나라사키 료(오료)의 도움과 스미스 앤 웨슨 리볼버를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2.8. 가이엔타이

1867년 4월, 료마는 두 번째 탈번 죄를 용서받고 가메야마 조합의 대장이 된다. 그리고 도사 번 부속 외곽기관으로서 가메야마 조합의 이름을 가이엔타이(海援隊)로 바꾼다. 가이엔타이 창립 후, 료마는 이로하마루(以呂波丸일본어) 호를 직접 이끌고 항해에 나선다. 하지만 기슈번(紀州藩)의 메이코마루(明光丸) 호와 충돌하여 이로하마루 호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로하마루 사건)

이 사건의 배상 교섭에 나선 료마와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는 기슈 번 대표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낸다. 이를 담보로 큰 함선을 구입하여 무역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료마는 고토의 의견에 따라 도사 번의 배로 고토와 함께 상경하여 대정봉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2.9. 선중팔책과 대정봉환

1867년 교토 시로 가는 배에서 료마는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 이 선중팔책은 훗날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이라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된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료마가 속했던 도사번의 번주인 야마우치 도요시게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봉건시대를 종식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11월 상순에는 선중팔책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정부강령팔책을 기초하여 신정부의 중심 인물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 스스로 맹주가 되어」라고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료마가 누구를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2.10.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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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1월 15일(양력 12월 10일), 사카모토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오미야 여관에서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오미야 사건으로 불린다. 료마는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즉사에 가까운 형태로 사망했고, 나카오카 신타로는 중상을 입었으나 3일간 생존하여 사건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료마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 [[미마와리구미]] 설: 메이지 3년(1870년), 하코다테 전쟁에서 항복한 전 미마와리구미 대원 이마이 신로는 사사키 타다사부로와 그 부하 6명이 료마를 암살했다고 증언했다. 현재는 미마와리구미 범인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신센구미]] 설: 사건 직후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우리는 프로다.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 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료마 암살 혐의를 부인했다. 료마가 속했던 도사 번 지사들은 신센구미 설을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었지만, 현재는 신센구미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 [[사쓰마 번]] 음모설: 대정봉환 이후 료마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포함한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 설립에 힘쓰자, 무력 도막을 지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료마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 설은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 노선의 대립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사건 당일 오후 8시경, 도쓰카와 향사를 자칭하는 남자 수 명이 오미야 신스케 저택 2층에 있던 료마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요구했고, 종복 후지키치가 안내했다. 방문객들은 2층으로 올라가 후지키치를 베고 료마 등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료마는 칼을 차지 않고 있었고, 이마를 깊이 베여 즉사했다.

사건 초기에는 신센구미의 개입이 강하게 의심되었다. 덴만야사건이후 체포된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타니 간죠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타니 자신은 콘도가 "유지의 무리"를 살해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료마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고, 참수의 이유로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신선조에 소속되어 있던 오오이시 쿠와지로는 료마 살해 혐의를 자백했지만, 나중에 취소했다.

료마의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 구의 교토 료잔 고쿠진자의 료잔묘지 중턱에 있다.

2.10.1. 교토 미마와리구미설

다이쇼 시대에 전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와 와타나베 아쓰시는 사사키 다다사부로 등이 료마 암살의 실행범이라고 증언했다.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를 암살 배후로 추측했다. 이러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미마와리구미 설이 통설로 자리 잡았으며, 역사학계에서도 이 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마이와 와타나베의 증언에는 자객의 인원 구성, 현장에 남겨진 칼집의 소유자 등에서 불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주로 작가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다른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다니 다테키는 현장에 달려가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했는데, 그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마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망보기 역할만 했다고 증언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말하며 당시 사용했다는 무기(칼, 창)를 보여주며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와타나베는 젊었을 적 이름이 이치로였다고도 하며, 실제 료마를 암살한 미마와리구미의 와타나베 이치로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가족들을 불러 자신이 료마 암살의 진범이라고 증언했는데, 이는 당시 신문에 기사로 보도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고령으로 인한 기억력 문제인지, 사건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세부 내용이 부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낮다고 평가받는다.

사건 당시에는 이미 료마 암살의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였고, 유일한 증언자인 이마이 등이 사망하여 더 이상 진술할 미마와리구미 대원이 없었다. 따라서 와타나베는 실제 실행범이 아니라 단지 '료마를 죽인 자'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연극을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2.10.2. 신센구미설

신센구미설은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의 배후로 신센구미를 지목하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사건 발생 7일 전(또는 3일 전), 전 신센구미 참모이자 고료에지(御陵衛士)였던 이토 가시타로가 료마에게 "신센구미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사건 현장에서는 칼집과 나막신이 발견되었는데, 이토 가시타로는 "이 칼집은 10번대 하라다 대장의 것인 듯하다"라고 증언했고, 나막신 역시 신센구미가 자주 드나들던 후쿠베 정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암살을 하러 가는 자객이 소리가 나고 움직이기 불편한 나막신을 신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료마 암살은 당시 자랑할 만한 일이었으므로 신센구미 측이 극구 부인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신센구미 대원이었던 곤도 이사미는 료마 암살을 극구 부인했다.

이토 가시타로는 료마에게 경고한 지 3일 뒤인 11월 18일에 아부라코지에서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신센구미의 료마 암살설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지만, 여러 모순점들로 인해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10.3. 사쓰마번 음모설

사쓰마 번이 료마 암살의 배후라는 설은 료마가 대정봉환 이후 무력 도막파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료마 암살의 실행범으로 지목된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와 와타나베 아쓰시의 증언은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이마이 노부오는 처음에는 자신이 망보기 역할이었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주장하며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반면 와타나베 아쓰시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했으나, 고령으로 인해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를 의심했지만, 다니 다테키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게이오 3년 9월 2일 자 계소오고로가 료마에게 보낸 편지에는 료마가 독단으로 토사 번이 매입하도록 라이플총 1000정 이상을 구입하고, 번의 중역들에게 막부 타도에 대한 각오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같은 해 10월 17일 료마가 기토 다카요시에게 보낸 서간에는 "대정봉환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고토 쇼지로를 국으로 돌려보내고 이가키 다이스케를 내보낼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 노선이 반드시 대립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료마는 대정봉환을 추진하면서도 무력 도막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사쓰마 번 역시 료마의 이러한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3.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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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서기)
료마의 동향전국의 동향
덴포 6년(1835년)1(11월 15일) 료마 출생.
고카 3년(1846년)12(이 해) 어머니 사카모토 고 사망.
가에이 원년(1848년)14(이 해) 히네노 벤지의 도장에 입문해 오구리 류 검술을 배움.
가에이 6년(1853년)19(4월) 에도로 유학,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 입문.(6월 3일)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타고 우라가(浦賀) 해안에 내항.
안세이 원년(1854년)20(6월 23일) 검술 수행이 끝나 도사에 돌아옴.
안세이 2년(1855년)21(12월 4일)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 사망.(3월 31일) 미일 화친 조약 체결.
안세이 3년(1856년)22(이 해) 다시 지바 도장에서 유학.
안세이 5년(1858년)24(1월) 지바 도장에서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北辰一刀流長刀兵法目錄)》1권을 하사받음.
분큐 원년(1861년)27(9월) 도사 근왕당에 가입.
분큐 2년(1862년)28(1월 14일) 조슈 하기(萩)에서 구사카 겐즈이와 면담.
분큐 3년(1863년)29(2월 25일) 가쓰 가이슈의 중재로 탈번의 죄를 용서받음.(6월) 도사 번이 도사 근왕당 탄압을 시작.
(9월 21일) 다케치 즈이잔과 도사 근왕당 주요 당원 투옥.
겐지 원년(1864년)30(2월 14일) 요코이 쇼난을 방문.
게이오 원년(1865년)31(음력 5월 11일) 다케치 즈이잔 할복.
게이오 2년(1866년)32(1월 21일) 료마의 알선으로 삿초 동맹 체결.
게이오 3년(1867년)33(4월 초순) 가메야마 조합 대장이 되어 조합을 개편해 가이엔타이로 개칭함.(10월 14일)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대정봉환을 상주(上奏).

4. 료마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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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가계도
사카모토가의 문양
사카모토가의 문양

5. 관련 작품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기 있는 인물이다. 2010년 재팬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료마는 적어도 7개의 텔레비전 드라마, 6편의 소설, 7편의 만화, 5편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료마 역을 맡았을 때, 료마의 매력은 "누구든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치노 마사아키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진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연기했다. 2010년 애니메이션 시리즈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 13화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알려진 등장인물이 료마를 흉내낸다.

키류 카즈마의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사카모토 료마는 라이크 어 드래곤 게임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라이크 어 드래곤: 이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용과 같이 외전: 즉시!의 주요 조연으로, 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 스톤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 료마는 오구리 슌이 연기했다. 소라치 히데아키가 제작한 은혼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사카모토 타츠마 캐릭터는 료마에게서 영감과 기반을 얻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수라의 때 만화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1994년 출시된 게임 라이브 어 라이브(Live A Live)의 "잠입자"챕터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며, 페이트/그랜드 오더(Fate/Grand Order)에서도 플레이어 캐릭터로 등장한다.

다음은 료마를 소재로 하거나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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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작품명비고
영화오노에 마쓰노스케, 후지사와 아사지로, 아라시 리토쿠, 이라가와 하타야, 나카무라 센노스케, 아카시 로구로, 다카기 신페이, 하야마 쥰노스케, 반도 쓰마사부로, 이치가와 모모노스케, 쓰키가타 류노스케, 이치가와 우타에몬, 이시하라 유지로, 요료즈야 긴노스케, 하라다 요시오, 다케다 테쓰야, 네즈 진파치, 와타세 쓰네히코, 와타나베 켄, 토다스 마쓰모토 등이 료마 역을 맡았다.
드라마마이니치 방송, NHK, NTV, TV도쿄, TBS 등에서 제작, 방영되었다. 기타오지 킨야, 다케다 테쓰야, 요로즈야 긴노스케, 사나다 히로유키, 하마다 마사토시, 가미카와 다카야, 이치가와 소메고로, 후쿠야마 마사하루, 나카무라 아쓰오, 야마구치 다카시, 후지오카 히로시, 나쓰야키 이사오, 나카무라 마사토시, 세라 마사노리, 다케야키 무가, 사토 고이치, 나시모토 겐지로, 나카무라 토오루, 가케이 도시오, 에구치 요스케, 다마키 히로시, 우치노 마사아키, 이하라 츠요시 등이 료마 역을 맡았다.
뮤지컬사이조 히데키, 마야 미키, 다카시로 케이, 히라라 코이치 등이 료마 역을 맡았다.
연극가와하라 가즈히사, 가미가와 다카야, 오카다 다쓰야, 오우치 아쓰오, 마쓰시게 유타카 등이 료마 역을 맡았다.

5.1. 소설

* 사카자키 시란의 《한혈천리마》(汗血千里駒)
*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 야마오카 소하치의 《사카모토 료마》
* 쓰모토 요우의 《료마》
* 도요다 조우의 《사카모토 료마》
* 카지 마사카즈의 《조종당한 료마-메이지유신과 영국 첩보부, 그리고 프리메이슨》
* 로뮬레스 힐즈버로우의 《영어로 읽는 사카모토 료마》
* 다케다 데쓰야 원작, 고야마 유우 만화의 《어~이! 료마》
* 미나모토 타로의 《풍운아들》, 《운룡분마》
* 구로가네 히로시의 《사카모토 료마》
* 야마오카 소하치 원작, 요코야마 마사미치 만화의 《사카모토 료마》
* 가와하라 마사토시의 《육오원외전 수라의 각》
* 무라카미 모토카의 《JIN-仁-
* 구마 히로시의 《사무라이건》
* 무쓰 도시유키의 《료마에》
* 이시카와 마사유키의 《살인마 료마》
* 우메무라 신야 원작, 하시모토 에이지 만화의 《천상의 료마》
* 기타오지 류세이 원작, 가타야마 마코토 만화의 《료마 끓어오르다!》

5.2. 만화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기 있는 인물이다. 2010년 재팬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료마는 적어도 7개의 텔레비전 드라마, 6편의 소설, 7편의 만화, 5편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료마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만화로는 소라치 히데아키은혼이 있다. 이 만화에서 료마는 사카모토 타츠마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 또한 수라의 때(Shura no toki)라는 만화에도 료마가 등장한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진에서는 배우 우치노 세이요가 료마를 연기했다. 2010년 애니메이션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 13화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등장인물이 료마를 흉내 내기도 했다.

게임 라이크 어 드래곤: 이신!에서는 료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키류 카즈마의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용과 같이 외전: 즉시!와 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 스톤에서도 료마가 등장한다.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는 오구리 슌이 료마를 연기했다.

5.3. 영화

2010년 4월 재팬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료마는 적어도 7개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6편의 소설, 7편의 만화, 5편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료마 역을 맡았을 때, 료마의 매력은 "누구든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치노 마사아키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진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연기했다. 2010년 애니메이션 시리즈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 13화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알려진 등장인물이 료마를 흉내낸다.

키류 카즈마의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사카모토 료마는 라이크 어 드래곤 게임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라이크 어 드래곤: 이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용과 같이 외전: 즉시!의 주요 조연으로, 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 스톤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 료마는 오구리 슌이 연기했다. 소라치 히데아키가 제작한 은혼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사카모토 타츠마 캐릭터는 료마에게서 영감과 기반을 얻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수라의 때 만화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5.4. 드라마

2010년 4월 재팬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료마는 적어도 7개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6편의 소설, 7편의 만화, 5편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료마 역을 맡았을 때, 료마의 매력은 "누구든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치노 마사아키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진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연기했다.

2010년 애니메이션 시리즈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 13화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알려진 등장인물이 료마를 흉내낸다.

사카모토 료마는 라이크 어 드래곤 게임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라이크 어 드래곤: 이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키류 카즈마의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용과 같이 외전: 즉시!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 스톤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 료마는 오구리 슌이 연기했다.

소라치 히데아키은혼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사카모토 타츠마는 료마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사카모토 료마는 "수라의 때(Shura no toki)" 만화의 등장인물이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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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미국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봉건제계급 제도가 없는 독립적인 일본을 꿈꿨다. 민주주의 원칙을 존경했으며, 특히 미국 의회영국 의회를 일본의 통치 모델로 삼아 민주적 통치를 연구했다. 1867년 나가사키 외곽의 도사 선박에서 고토 쇼지로와 일본 정부의 미래 모델에 대해 논의하면서 "선중팔책"을 작성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양원제 입법부, 헌법 작성, 국가 육군과 해군 창설, 환율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서구 세계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이 산업 및 기술적으로 발전된 외부 세계와 경쟁하려면 일본 국민이 근대화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의 제안은 사후 일본에서 시행된 의회 제도의 기초를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카모토 료마는 서구식 신발을 선호하면서도 사무라이 복장을 하는 등, 전통과 현대의 흥미로운 혼합으로 여겨져 왔다. 일본 대중문화에서 많이 등장하고 미화되기도 한다.

도사번(土佐藩) 향사(郷士) 집안에서 태어나 탈번(脱藩)한 후에는 낭사(志士)로 활동하며, 무역회사이자 정치조직을 겸한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후의 해원대(海援隊))를 결성했다. 사쓰마-조슈 동맹 성립에 협력하는 등, 막부 타도 운동 및 메이지 유신에 관여했다. 대정봉환 이후인 1867년 12월 10일 교토 가와라마치도리의 오미야(近江屋)에서 암살당했다. 실행범에 대해서는 이마이 노부오의 자백을 통해 교토 미마와리구미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다른 설도 있다(“오미야 사건” 참조). 정4위(正四位)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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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는 1863년 5월 편지처럼 "가쓰 가이슈의 문하생이 된 것"을 "에헨에헨(기침이 아니라 "대단하지 않느냐"는 뜻)"이라고 자랑하는 등, 따뜻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오토메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자세하게 보고하는 습관이 있었다. "에헨의 편지"라고 불리는 1863년 5월 편지는 료마가 죽은 후, 전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의 손에 들어가, 1928년 쇼와 천황 즉위식에 헌상되었고, 천황 서거 후 국가에 기증되었다. 1993년 11월 개관한 미노마루 쇼조칸에서 1998년 일반 공개된 적이 있다.

세키 요시오미는 "사카모토 류마를 'りうま'라고 읽는 경우가 있지만, 'りうまで'가 아니면 안 된다. 'りう'는 간토 사투리이고, 간사이에서는 모두 'れう'라고 한다. 'りう'라고 하면 간사이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사카모토 자신도 'れうま'라고 말했다. 사쓰마의 문서 중에는 사카모토 요우마라고 쓴 것이 있는 것을 보아도 'れう'라고 읽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아리마 후우타는 "선생님(사이고 다카모리)은 류마(りょうま)를 류메(りうめ)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6.1. 동시대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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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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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도 다카요시 || "형님(료마)께서는 마음씨가 공명정대하고 도량이 너그러우시어, 어떤 일에도 싫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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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쿠라 토모미 || "나카오카료마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오하시의 은혜다. 우정을 조코(정이대장군)에게 전하고, 사카모토, 키도, 히로자와, 구로다, 시나가와 다섯 사람과 교류하게 된 것도 나카오카료마 두 사람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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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다이라 하루아케 ||
* "료마 씨는 도사번(土佐藩)의 번사(藩士)로서, 국사를 위해 밤낮으로 분주히 노력한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 "료마토사번 출신이다. 매우 근왕가(勤王家)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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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시 한페이타 ||
* "토사 일국에는 어리석은 놈" (료마 탈번 후)
* "간담이 원래부터 장대하고, 기회가 저절로 생겨나며, 비행잠수 누가 알겠는가, 오로지 용명에 부끄럽지 않다" (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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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시 후미코 || "(료마가 마당에서 볼일을 보는 것에 대해) 료마 씨는 항상 이래서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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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이 슈지로 || "원래 료마는 인물이지만, 서적을 읽지 않아서, 때때로 실수한 일도 있었습니다." (료마 탈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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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오카 신타로 || "료마 씨는 역시 재자(才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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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타가키 타이스케 ||
* "호방하고 磊落하여, 도저히 관리가 될 수 없다. 료마가 만약 불혹의 나이를 얻었다면, 아마도 사쓰마고다이 사이스케, 토사이와사키 야타로가 되었을 것이다."
* "일개 무사로서, 하이난의 소족에서 일어나, 능히 천하에 주선하고 왕정복고의 대업을 보좌하고, 마침내 암살자의 화를 입어 죽은 료마 씨와 같은 이는, 그 렬렬함이 천년에 걸쳐 썩지 않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 현창비』의 비문에서)
*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온전히 사카모토 선생님, 나카오카 선생님의 은혜입니다." (위의 『사카모토 료마 현창비』 건립에 대한 사례로 사카모토 가를 대표하여 시시도 시게루가 도쿄의 이타가키를 방문했을 때, 이타가키가 시게루에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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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토 쇼지로 ||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총리대신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그 녀석은 정치가가 아니야. 상인이지. 미쓰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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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나카 미츠아키 ||
* "(료마의 사진을 보고) 저것은 너무 잘 만들었다. 사실은 피부색이 검고. 키는 크고 5척 7촌 정도. 그런 미남은 아니었다."
* "료마는 시를 짓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 "사카모토라는 남자는 원래 그림 따위를 그린 적이 없는데 그가 죽은 후에 사카모토가 그렸다는 가짜 서화가 성행했다. (중략) 나는 사카모토는 인장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었는데, 시모노세키본진이토 큐조 집에 있는 사카모토의 편지 속에 매화 꽃잎 다섯 개를 엮어 그 안에 '타로'라는 글자를 새긴 것이 있다. 즉, 사이야라는 것이다. 이것은 놀랍다. 역시 사카모토도 인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너무 큰소리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 "활달하고 磊落한 남자로, 장주에서는 고스기 신사쿠의 유형과 비슷하다."
* "(료마오료를 데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이것은 대단히 놀라웠다. 남녀 동행은 요즘에는 하는 것이지만, 료마는 혁명 전에 칼과 몽둥이의 시대에 평소 이런 광태를 연출했다. 그런 점은 고스기와 똑같다."
* "남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았지만, 옷을 벗으면 등은 완전히 검다. 거기에다 검은 털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은 드물다. 『료마의 유래를 알았나』 그는 그렇게 말했는데, 과연 이 등을 보면 료마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 "견회조·신센구미의 자들에게 자주 노려졌다. 『당신은 위험하니 토사번 저택에 들어가라』이토 고시타로가 권유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번 저택에 들어가면 통금 등 모든 것이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활달불패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번 저택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소 『왕정 혁신의 대업만 성취하면 이 몸은 물론 아까울 것이 없다, 더 이상 쓸모없는 몸이다』라고 말했다."
* "사카모토는 해영대를 조직하여 지휘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카오카육영대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해국일본의 개발을 품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료마의 헌신보국의 지성은 사후라고 할지라도 조국의 위를 지키고 있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건대 료마와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 "여러분들은 료마, 료마라고 대단한 남자처럼 말하지만, 우리 친구들의 눈에는 그 정도의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료마가 바보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은, 암살자에게 쫓기는 와중에 오료를 데리고, 요사코이를 흥얼거리면서 시조오 다리 근처를 걷는 모습은 정말 이 남자 바보가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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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시 야타로 || "료마는 허리띠 풀고 옷을 벗은 채로 방황하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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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니 간죠 || "용모는 키가 크고, 얼굴은 길며, 피부색은 검고, 얼굴에는 검은 점이 많았다. 정말 눈에 띄는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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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가타 히사모토 || "혁신의 영걸로서 나는 사이고, 고스기, 사카모토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세 사람 모두 그 언행이 매우 예상을 벗어나, 때로는 매우 어리석은 일을 했지만, 또 실로 비범한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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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 다카유키 ||
* "원래 사카모토라는 남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소위 막말하는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너무 온화한 사람을 만나면 매우 격렬한 말을 하고, 반대로 난폭한 장사 인물에게는 매우 온화한 말을 하는 것을 상례로 했다. 이러한 필법이기 때문에 사카모토에게는 모순이라는 말은 결코 들어맞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에 한 말이 전혀 다르다고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소위 사람에 따라 법을 설하는 이치라고 알아야 한다."
* "사카모토는 때때로 꽤 과격한 말을 했지만, 성격은 매우 상냥한 남자였다. 노인, 어린이, 여성 등에 대해서는 특히 온화했다. 나가사키에 있었을 때, 때때로 부하 장사들을 이끌고 주로(酒樓)에 올라갔는데, 여성들은 항상 『사카모토 씨, 사카모토 씨』라고 부르며 매우 사모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카모토의 친절에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카모토가 있으면 장사들은 감히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카모토가 오는 것은 그들이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사카모토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국사에 분주하여 막부의 눈에 띄는 처지이므로, 언제 어느 때에 잡힐지 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기생 따위와 함께 사진을 찍어, 그것으로 그 흔적을 찾게 된다면, 지사의 면목으로서 매우 부끄러운 짓이므로, 우리는 결코 이러한 비천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소탈하고 호방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사려가 깊은 것은 이와 같다."
* "사카모토는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을 연구했다. 나는 어느 날 밤 사카모토와 여러 가지 담화를 나누었는데, 이때 사카모토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예수교를 수입하여 막부를 괴롭혀 무너뜨리자』고. 내가 말했다. 『만약 막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해도, 해당 종교의 만연은 우리나라 체제상 큰 문제다』고. 양측이 논쟁한 지 오래, 결국 두 사람 모두 예수교가 무엇인지 몰랐다. 속된 말로 맹인의 싸움으로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심야에 이르러 이러한 연구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하고, 마침내 크게 웃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사카모토가 목표에 대해 그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 이와 같다."
* "사이야는 일견 여성과 같은 풍채이지만, 도량은 꽤 크다."
* "사이야는 꽤 계획적인 사람이다."
* "사이야는 실로 시세에 정통하고 있다."
* "사이야는 도량도 크지만, 그 처신은 모두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고, 그리고 상대의 기세를 꺾고 마는 것이다. 실로 책략은 달콤(상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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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지마 노부유키 || "사카모토 씨는 때때로 정말로 예상을 벗어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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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카마쓰 타로 ||
* "료마는 용모는 온화하고, 말씨는 조용하지만 기세가 뛰어난 영기(英氣)를 지녔다. 무예를 좋아했고, 좋아서 사서를 읽었다."
* "기질은 호탕하고, 사소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일찍이 독서를 좋아하여, 화한의 사서를 섭렵했다."
* "어릴 적부터 뛰어나고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자라면서 널리 화한의 사서를 섭렵했고, 무예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본주 사람 히네노 요시오키에게 배우고, 후에 동부에 머물면서 지바 슈사쿠에게 따라 그의 기술을 연마했다. 그래서 신체가 강건한 사람이었다."
* "나는 사다리를 타도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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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무라 사젠 ||
* "사카모토 료마라는 자는 작년에 국내에서 도망쳐 장주에 가서 장번의 낭인(浪士)들과 결탁하여 크게 인망을 얻은 자라고 한다. 사쓰마장주 두 번이 일시적으로 갈등을 일으켰을 때도, 매우 노력하여 화해를 도모했다고 한다."
* "낭사의 거두" (사쓰마토사 동맹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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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우치 시게토시 || "고치에서 온 번상이다. 인물이 매우 교활하다. 내가 이를 료마에게 알리자, 료마는 태연하게 『상인이 교활한 것은 당연하다. 교활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대답하여, 나를 말문이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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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타쿠 ||
* "(이로하마루 사건의 담판에 나카지마 사쿠타로가 선택된 것을 평하여) 사람도 사람인데 이 젊은이를 큰 임무에 맡긴 데 사카모토의 안목이 있다. 그러나 나카지마의 대공을 갚는데 불과 백량으로 한 것에 우리도 그 상이 너무 인색하다고 놀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젊은이에게 너무 많은 돈을 주는 것은 어떻게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원대한 구상에서 나온 노파심이었을 것이라고 더욱 감탄했다. 사카모토의 인물에 대해 이타가키가 이런 말을 했다. 『사카모토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실업가가 되어 고다이 도모아쓰보다 조금 더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이타가키에게는 이타가키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었을 것이다."
* "사카모토는 광야의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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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에 초민 || "나는 당시 소년이었지만, 그를 보고 어쩐지 위대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평소 사람에게 굽히지 않는 나도, 그가 순수한 토사벤(土佐弁)으로 『나카에 형, 담배를 사다 줘』라고 명령하면, 기꺼이 심부름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의 눈은 가늘고, 이마는 매독 때문에 움푹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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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조 사나에 || "사카모토는 곤페이의 아우로 향사(鄕士)어용인, 본정에 산다. 일현금(一絃琴)을 즐겼다. 사이야는 피부가 검고 얼굴에 점이 많았다. 총발에 하부에 문붙하오리하카마(袴)(흰색 무늬의 오구라 袴), 배지 대소, 머리카락이 가늘고 온화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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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스마 || "소년 시절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사카모토 선생님을 따라 다네자키(種崎)에 복숭아를 보러 갔다. 휴식을 취했던 다방의 여인은 이전에 사카모토 선생님 집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는데, 사카모토 선생님이 검은 맹무늬의 하오리하카마(袴)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사카모토 씨, 엉뚱한 짓을 하시네요(토사 사투리로 엄청난 일을 한다는 뜻). 그런 옷을 입고』라고 말했는데, 사카모토 선생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사카모토 선생님은 『오늘은 게다가 3분이고, 칼이 2주다. 탕탕한 천하가 오로지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있다. 세상의 선각자는 솔선수범하여 300년의 나태를 깨뜨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자들의 이목을 끄는 줄무늬 옷은 입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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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이 쿠스고로 || "도장에 온 료마는 심기일전, 야뇨증도 울보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저녁에는 마지막까지 밥을 먹지 않아도 검도 연습에만 매달렸다. 즐겁고 즐겁고, 그런 기분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카모토, 이제 그만하자』라고 하면 『선생님, 한 번 더, 한 번 더』라고 계속해서 달려든다. (중략) 거기서 몸을 부딪히면, 몸은 크지만 젊기 때문에 쓰러진다.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려든다. 옷깃을 잡고 앞으로 넘어뜨리면 배를 대고 뻗는다. 그래도 바로 일어나서 다시 달려든다. 이 근성에는 완전히 감탄했다. 한 번 도장 내 시합에서 료마가 연승했다. 두세 살이나 나이 많은 사람을. 이때는 조부도 사범들도 깜짝 놀랐다.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료마 자신도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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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모토 토쿠지 || "료마 씨는 늘 시노하라 가도를 후나이리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 어깨를 움츠리고 바람을 가르는 듯 기세등등하게 걷는 사람이었지만, 길가에 아이가 있는 것을 보면 곁에 가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빨리 크거라』라고 말을 걸며 귀여워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료마 씨를 사모하여, 따랐다. 사이야 저택은 다카스, 신기키(新木)에 영지가 있었기 때문인지, 자루 등을 걸치고, 그 근처를 자주 돌아다녔다. 료마 씨는 그때 고다이산에 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당시 산일도 했기 때문에 고다이산에도 자주 갔지만 산속의 한 채 집에서 료마 씨는 혼자, 자주 독서를 했다. 나는 가는 길에 오는 길에 자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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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라 코토쿠 || "료마는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도 장난으로 그의 등에 뛰어올라 업히곤 했다. 그런데 료마는 타고나게 털이 많은 성격이어서, 가슴에도 등에도 긴 털이 나 있었다. 그것을 남에게 부끄러워하여 자신의 피부를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 자주 나를 꾸짖어, 너는 료마 씨와 장난을 친다 해도 결코 그의 옷깃을 들추거나 만지는 것을 삼가라고 타이르셨다. 료마는 오른쪽 어깨인가 왼쪽 어깨인가 한쪽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피부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고, 어깨 위에 큰 검은 점이 있었는데,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는 잊었다. 체격이 크고, 무시도 키가 큰 사람이었지만 사카모토는 조금 더 건장하고 크게 보였다. 어떤 물건에도 개의치 않는 사람으로 체면을 차리지 않고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면, 고개를 들고 단정한 모습은 아니고, 고사(古事)에 탐닉하면서 걷는 모습이었다. 때로는 주초(酒草)를 차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칼은 항상 장도(長刀)였으며, 격검(擊劍)이 성행하는 시대라서 연습할 때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종이실로 상투를 묶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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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지 히코자부로 || "해륙대장을 동시에 잃었다. 이후, 사이야 정도의 영걸은 토사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위아래가 눈물을 흘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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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카와 요헤이 || "고인(료마)을 한마디로 평하면 보기 드문 근왕가(勤王家)로서 매우 대담하고 도량이 많은 반면, 또한 매우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고, 마치 지금의 해군 해령부장 시마무라 하야오를 연상시키는 체격으로 풍모가 웅장한 데다 어딘가에 온화한 얼굴이었다고 기억한다. 고인이 나를 돌봐주었을 때 나는 여덟 살의 말썽꾸러기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 톤콜리라고 해서 매우 유행했던 안세이 시대콜레라에 어머니가 걸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바로 이웃이었던 료마 씨는 스무 살 전후의 건장한 검객이었는데, 매일 밤 방문해서 나의 옛 이름인 하루야를 부르며 친절하게 위로하고 돌봐주었다. 특히 내가 아홉 살 때 정월, 버선이 없어서 외출할 수 없어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를 도와 한쪽 버선을 억센 손가락으로 꿰매 준 후, 옷까지 입혀주며 『그걸로 놀러 가라』며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 준 적도 있다. 그 당시는 무예가 성행했기 때문에, 당시 히네노 벤지라는 도장에 다녔던 료마 씨는 부러진 죽도를 맞춰 훌륭한 아이용 죽도를 만들어, 무사의 아이는 검술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런 바람으로 번의 사람들로부터 매우 평판이 좋았지만, 그 대담함도 놀랄 만해서, 나의 계모의 친정인 이케다 토라노신이라는 자가 정의를 위해 싸움을 해서 상대를 죽여서 큰 소동을 일으킨 곳에 홀로 가서, 몰려드는 상대를 쫓아내고, 훌륭하게 목을 베어 준 일에는 사람들이 그 용맹함과 침착함에 감탄했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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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쓰 가이슈 ||
* "듣건대 사쓰마, 장주와 결탁했다고 한다. 또 듣건대 사카모토 료마장주에 가서 이러한 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옳다고 생각된다." (사쓰마장주 동맹 후, 가이슈의 일기)
* "사카모토 료마, 그는 나를 죽이러 온 놈이지만, 꽤 인물이야. 그때 나는 웃으면서 받았지만, 침착하고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는 좋은 남자였다." (혁신 후)
* "(토사대정봉환을 건의한 것은 대세를 통찰한 탁견인가, 단지 그 자리의 소책에 나선 때문인가 하는 질문에) 저것은 사카모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사는 항상 쓰쓰이 준케이와 같았고, 후시미 때도 완전히 기회주의였다."
* "토사에서는 (인물이라고 하면) 사카모토 료마이와사키 야타로 두 사람이었다."
* "(료마사이고를 큰 종에 비유하여 평한 것에 대해) 평하는 사람도 평하는 사람이고, 평가받는 사람도 평가받는 사람이다."
* "(료마사이고 평가에 대해) 나는 이 말에 깊이 감명받고 실로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사람을 보는 기준은 자신의 식견에 있다. 그가 사이고를 평가하는 말로 그가 인물을 아는 데 충분하다. 료마 씨가 일생의 사업과 같은 것은 이미 세상에 전승하는 바이고, 지금 감히 칭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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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쓰 이쓰코 || "소즈네에 있을 때 사카모토 료마가 『아가씨, 아가씨』하며 자주 안아 주었습니다. 료마는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고, 가슴털이 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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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쿠보 이치오 ||
* "이번에 사카모토 료마를 은밀히 만났는데, 그 사람은 진정한 대장부라고 생각합니다."
* "료마는 토사 제일의 영웅, 마치 큰 사이고의 빠짐없는 남자다."
* "(토사에 비범한 인물이 없느냐는 질문에) 있다, 있다, 대단히 있다. 사카모토 료마라는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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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나오시 || "고토(쇼지로)보다 더욱 위대하고, 말하는 곳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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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하시 데이슈 || "사카모토 료마토사번 세 사람 중 가장 인물이다』, 나카오카 신타로 『특별히 유지가 아니다』" (사카모토나카오카, 마사키 테츠마에 대한 인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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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 || "사카모토 료마가쓰 안보(가이슈)의 문하로, 장년 유지의 하나의 뛰어난 인물로서, 저쪽으로 설득하고, 이쪽으로 설득하여 어디를 가도 받아들여지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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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우에 가오루 || "사쓰마장주 연합의 주선의 근본은 사카모토 료마, 이시카와 세이노스케이다. 이 두 사람이 사쓰마장주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도저히 막부의 세력을 전복하고 대정을 조정에 돌려준다는 따위의 것은 할 수 없다는 논의로서, 자주 사쓰마장주의 사이를 왕래하며 점차 설득한 것이다. 그것이 사쓰마장주 연합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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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타 아리토모 || "도쿠가와씨의 말기에 사쓰마장주가 서로 의심했다. 토사 명사 사카모토 료마는, 이것은 국가의 이익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즉, 두 번 연합의 설을 세워 그것을 사쓰마번의 사이고 기요노스케에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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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치 신조 || "과격한 것은 조금도 없다. 또 목소리를 높여 일을 논하는 것도 없이, 매우 온화한 사람이다. 용모를 한눈에 보면 호기를 받는 것 같지만, 모든 일을 온화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다만 용기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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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큐조 || "얼굴에 칠양의 별이 내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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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무라 스타로 || "나의 여관에 료마가 와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사쓰마장주 화합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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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야마 이와오 || "제번 유지의 사가 동분서주, 왕사에 종사하는 가운데,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두 사람은 가장 대의를 밝히고 국세를 회복하려고 꾀했고, 우리 사쓰마 선배들과 교류가 특별히 얕지 않았다. 생각건대 대정혁신의 기초가 되는 곳에 그가 장주 제로와 우리 사쓰마 제로 선배들의 사이에서 주선을 다하여 그 의심을 녹이고 두 번이 협동하여 국사에 힘쓴 공적이 없었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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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우에 요시카오루 || "그 풍모라고 하면, 나는 사카모토후시미에서 피난했을 때, 피난 장소에서 교토의 사쓰마번 저택까지 사카모토를 호송했던 한 사람이었다. 내가 고치에 갔을 때는 사카모토와 같은 배였기 때문에 잘 기억하는데, 키가 크고, 조용하고 말이 많지 않았지만, 어딘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 같은 곳이 있고, 뭐랄까 조금 시마무라 하야오를 닮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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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라 케무타케 || "사카모토 씨와 같은 성충의 사는 항상 우리나라를 冥護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교토 동산의 증정사위(贈正四位), 사카모토 료마 균 충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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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이 고조 || "피스톨은 그 시대의 것으로서는 꽤 신식의 것 같았고, 그것에 대해 피스톨 쪽은 낚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능숙했다." (신혼여행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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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이 소쿠 || "사카모토 씨, 당신은 생각 하나만 달라도 난신적자 될 위험이 있다. 주의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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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코마사 || "(료마의 노래 소리는) 그 음조가 매우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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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 요시오미 ||
* "[[사카모

6.2. 사후

사카모토 료마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에 영감을 받아 봉건제계급 제도가 없는 독립적인 일본을 꿈꿨다. 그는 민주주의 원칙을 존경했으며, 특히 미국 의회영국 의회를 모델로 삼아 민주적 통치를 연구했다. 1867년, 나가사키 외곽의 도사 선박에서 고토 쇼지로와 함께 일본 정부의 미래 모델에 대해 논의하며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양원제 입법부, 헌법 작성, 국가 육군과 해군 창설, 그리고 환율 규제를 제안했다. 료마는 서구 세계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이 산업 및 기술적으로 발전된 외부 세계와 경쟁하려면 근대화가 필수적임을 깨달았다. 그의 제안은 사후 일본에서 시행된 의회 제도의 기초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료마는 서구식 신발을 선호하면서도 사무라이 복장을 고수하는 등, 전통과 현대의 흥미로운 조화를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고 미화되어 왔다.

료마는 여성 관계가 화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라이 카오, 치바 사나코, 나라사키 료 등이 그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여성들의 이름이 전해지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많은 여성들이 료마를 만나 목숨을 걸고 도왔다고 전해진다. 픽션에서는 료마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더 많은 여성들을 등장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평범한 무사였던 료마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라는 작가들의 추측이 더해진 결과이다. 료마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 덕분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여성 관계는 료마 인기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6.3. 이설

료마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여러 관점과 해석이 존재한다. 료마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논쟁과 재해석을 통해 그의 다층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