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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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가거는 당나라 말기 노룡 절도사였으며, 회골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이모훈이 반란을 일으킨 후 절도사가 되었고, 876년 아버지의 추천으로 임시 절도사가 된 후 정식 절도사가 되었다. 이극용과의 초기 갈등에서 이극용을 격파하고 시중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왕처존을 공격하다가 부하의 반란으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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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이가거 |
| 한자 | 李可舉 |
| 생몰년 | 885년경 사망 |
| 가계 | |
| 아버지 | 이국창 |
| 형제자매 | 이극용 |
| 경력 | |
| 직위 | 대동절도사 |
| 봉호 | 농서군왕 |
2. 배경
이가거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이모훈은 회골 아부스(阿布思) 부족 출신이었다.[1] 875년, 당시 노룡 절도사(軍節度使)의 장교였던 이모훈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지휘관)였던 장공소를 축출하고 절도사를 장악했으며, 이후 당 희종 황제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1] 876년, 이모훈은 은퇴를 요청하고 이가거를 후임으로 추천했으며, 희종 황제는 이를 허락하여 이가거를 임시 절도사로 임명했고, 그해 말에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1]
885년, 황소를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극용은 하동 절도사([河東], 현대 타이위안에 위치)가 되어 인근 절도사들을 통제했다. 그는 왕처존의 의무 절도사(義武, 현대 바오딩 시에 위치)와 동맹 관계였다. 이극거와 왕용(성덕 절도사(成德, 현대 스자좡 시에 위치))은 이극용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의무 절도사를 정복하고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또한 흘리련다를 설득하여 이극용을 공격해 왕처존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
3. 절도사 시절
3. 1. 이극용과의 초기 갈등
878년, 사타 추장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은 당나라가 임명한 진무 절도사([振武], 현대 후허하오터,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동 절도사([大同], 현대 다퉁, 산시 성에 위치)를 점령했고, 이후 이국창도 반란에 가담했다. 이에 황제 당 희종은 이국창과 이극용에 대항하기 위해 조의 절도사([昭義], 현대 창즈, 산시 성에 위치) 이균(李均), 토욕혼 추장 흘리련다와 백의성(白義誠), 그리고 [사갈] 추장 미해만(米海萬)과 함께 이극거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이극거가 이극용을 공격하자, 이극용은 웅무진(雄武軍, 현대 청더, 허베이 성에 위치)에 주둔하여 이극거에 대비하고, 부하 고문집(高文集)을 삭주(朔州, 현대 숴저우, 산시 성에 위치)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당시 대동의 새로운 당나라 임명 절도사 이탁(李涿)은 고문집을 설득하여 삭주를 자신에게 항복하게 했다. 이극용이 삭주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을 때, 이극거는 부하 한현소(韓玄紹)를 시켜 이극용을 가로막아 격파하고 약 7,000명의 병사를 죽였다. 그 후 웅무진에서 다시 이극용을 격파했다. 이국창이 이탁과 흘리련다에게 패배하자, 이국창과 이극용은 대동 절도사를 포기하고 다다(達靼) 부족으로 도망갔다. 이극거는 공헌으로 명예 재상 칭호인 시중(侍中)을 받았다.
882년, 이극용은 대동 절도사로 돌아오려 했고, 이 시점에서 절도사가 된 흘리련다와 이극거를 모두 공격하여 격파했지만, 하동 절도사([河東], 현대 타이위안, 산시 성에 위치) 정종당에게 격퇴당해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1]
3. 2. 이극용과의 재대결
878년, 사타 추장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은 당나라가 임명한 진무 절도사([振武], 현대 후허하오터,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동 절도사([大同], 현대 다퉁, 산시 성에 위치)를 점령했고, 이후 이국창도 반란에 가담했다. 이에 황제 당 희종은 이국창과 이극용에 대항하기 위해 조의 절도사([昭義], 현대 창즈, 산시 성에 위치) 이균(李均), 토욕혼 추장 흘리련다와 백의성(白義誠), [사갈] 추장 미해만(米海萬)과 함께 이극거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이극거가 이극용을 공격하자, 이극용은 웅무진(雄武軍, 현대 청더, 허베이 성에 위치)에 주둔하여 대비하고, 부하 고문집(高文集)을 삭주(朔州, 현대 숴저우, 산시 성에 위치)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당시 대동의 새로운 당나라 임명 절도사 이탁(李涿)은 고문집을 설득하여 삭주를 자신에게 항복하게 했다. 이극용이 삭주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을 때, 이극거는 부하 한현소(韓玄紹)를 시켜 이극용을 가로막아 군대를 격파하고 약 7,000명의 병사를 죽였다. 그 후 웅무진에서 다시 이극용을 격파했다. 이국창이 이탁과 흘리련다에게 패배하자, 이국창과 이극용은 대동 절도사를 포기하고 다다(達靼) 부족으로 도망갔다. 이극거는 공헌으로 명예 재상 칭호인 시중(侍中)을 받았다.
882년, 이극용은 대동 절도사로 돌아오려 했고, 이 시점에서 절도사가 된 흘리련다와 이극거를 모두 공격하여 격파했지만, 하동 절도사([河東], 현대 타이위안, 산시 성에 위치) 정종당에게 격퇴당해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3. 3. 왕처존 공격과 최후
885년, 이극용은 하동 절도사가 되어 인근 여러 절도사를 통제했다. 그는 왕처존의 이의무 절도사(義武, 현대 바오딩 시 허베이성에 위치)와 동맹 관계였다. 이극거와 왕용은 성덕 절도사(成德, 현대 스자좡 시 허베이성에 위치)였는데, 이극용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이의무를 정복하고 그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또한 홀련을 설득하여 이극용을 공격해 왕처존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 885년 봄, 이극거와 왕용은 공격을 시작했고, 이극거는 휘하 장수 이전충에게 6만 명의 군사를 보내 이의무의 역주(易州, 현대 바오딩에 위치)를 공격하게 했고, 왕용은 무극(無極, 현대 스자좡에 위치)을 공격했다.[5]
초기에 이극거의 공격은 성공적이었는데, 이전충의 부하 유인공이 터널을 파서 역주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련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극용은 직접 이의무를 지원하여 성덕의 공격을 무극과 신성(新城, 현대 스자좡에 위치)에서 격퇴하여 성덕군을 철수시켰다. 한편, 이극거 군은 역주를 점령한 후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졌다. 왕처존은 밤에 양 가죽을 쓰고 양으로 위장한 3,000명의 군사를 보내 역주에 접근했다. 이극거 군인들은 그들을 양이라고 믿고 성문을 열어 그들을 잡으려 했다. 왕처존은 공격하여 이전충을 격파하고 역주를 탈환했다.[5]
이전충은 이극거가 이 패배에 대해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믿고 이극거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유주(幽州|유주중국어)를 공격했다. 이극거는 이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망루에 올라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후 이전충은 절도사를 임시로 맡아 통치했다.[5]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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