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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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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가원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국문학자, 한문학자이다. 경성 명륜전문학교, 서울 국학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단국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국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주요 저서로는 《연암소설연구》, 《금오신화역주》, 《중국문학사조사》, 《한국한문학사》 등이 있으며, 세계 최대 한자사전인 《한한대사전》 편찬을 주도했다. 1987년 성곡학술문화상, 1997년 용재학술상과 춘강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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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9년경 이가원
1959년경
한글 이름이가원
한자 이름李家源
로마자 표기I Ga-won
본명이참연(李慙淵)
아호가원(家源), 연민(淵民), 설관(雪館)
출생1917년 6월 1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
사망2000년 11월 9일 (향년 83세)
사망지대한민국 충청남도 천안시
국적대한민국
종교유교(성리학)
학력
학력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경력
직업국문학자, 한문학자, 대학교수, 서예가
소속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활동 기간1954년 ~ 2000년
가족 관계
친척이치억(재종손)
기타 정보
관련 인물/단체대한민국학술원
링크 정보이가원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관련 링크[부음]국학계 원로 이가원 학술원회원 별세

2. 학력

2. 1. 명예 박사 학위

1970년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생애 및 활동

이가원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현 안동시)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23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1938년 경성으로 올라와 1940년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하였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해 성균관대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김창숙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여 파면당했다.

이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실학 관련 자료를 찾아 〈실학연구지자〉를 만들었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3년간 재직하며 국학 연구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9년 문교부 국어심의회 위원, 1960년 한국교수협회 간사, 1962년 한국어문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 이사를 지냈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에서 〈연암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74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1978년 퇴계학연구원 이사 등을 지냈다.

1969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4]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손보기, 임창순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였다.[5]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가원은 박지원 소설의 사회배경과 문학관을 10여 년 동안 고찰·분석하여 4년간 집필한 끝에 〈연암소설 연구〉를 펴냈다. 도산서원장, 퇴계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3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대 교수가 되었고, 학술원 정회원 겸 단국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편찬을 주도하는 등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밖에 〈금오신화역주〉(1953), 〈중국문학사조사〉(1959), 〈한국한문학사〉(1961) 등 10여 권의 저서를 펴냈고, 1986년 정음사에서 〈이가원전집〉 23권을 펴냈다. 현재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에는 그가 기증한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다.[6][7]

3. 1. 유년 시절과 한학 공부

이가원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23세까지 한학만을 배웠다. 이때 배운 한학은 훗날 그가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38년경 경성으로 올라와 1940년 명륜전문(明倫專門, 성균관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시절 '사서연구회'를 만들어 이후 〈삼국유사 신역(新譯)〉(1946)을 펴내기도 했다. 1943년 경성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6]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한학에 관심을 가지고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7]

3. 2.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

이가원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23세까지 한학만을 배웠다. 이때 배운 한학은 훗날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38년경 경성으로 와 1940년 명륜전문(明倫專門, 성균관대 전신)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시절 '사서연구회'를 만들어 〈삼국유사 신역(新譯)〉(1946)을 펴냈고, 1943년 경성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54년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해 동 대학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총장이었던 김창숙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여 파면당했다.[4]

이후 국립도서관에서 실학 관련 자료를 찾아 〈실학연구지자〉를 만들었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3년간 재직하며 국학 연구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9년 문교부 국어심의회 위원, 1960년 한국교수협회 간사, 1962년 한국어문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 이사를 지냈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에서 〈연암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74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1978년 퇴계학연구원 이사 등을 지냈다.[4]

1969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4]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위원이던 손보기, 임창순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의 직인으로 인증하였다.[5]

이가원은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박사학위 논문인 「연암소설연구」는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산서원장, 퇴계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3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대 교수가 되었고, 학술원 정회원 겸 단국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세계 최대 한자사전인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편찬을 주도하는 등 국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4]

대표 저서인 〈연암소설 연구〉는 박지원 소설의 사회배경과 문학관을 10여 년 동안 고찰·분석하여 4년 동안 집필한 책이다. 그밖에 〈금오신화역주〉(1953), 〈중국문학사조사〉(1959), 〈한국한문학사〉(1961) 등 1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1986년 정음사에서 〈이가원전집〉 23권을 펴냈다. 현재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에는 그가 평소에 모아 기증한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다.[6][7]

3. 3. 사회 활동

이가원은 195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해 성균관대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총장이었던 김창숙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여 파면당했다.[4] 이후 국립도서관에 매일 나가 실학에 관한 자료를 찾아 자료집 〈실학연구지자〉를 만들었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23년 동안 재직하며 국학 연구 및 후진 양성에 헌신했다.

1959년 문교부 국어심의회 위원, 1960년 한국교수협회 간사, 1962년 한국어문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 이사를 지냈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에서 〈연암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74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1978년 퇴계학연구원 이사 등을 지냈다.

1969년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성한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4]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이었던 손보기, 임창순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의 직인으로 인증하였다.[5]

특히 이가원은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박사학위 논문인 「연암소설연구」는 당시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도산서원장, 퇴계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3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대 교수가 되었고, 학술원 정회원 겸 단국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세계 최대 한자사전인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편찬을 주도하는 등 국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3. 4. 『한한대사전』 편찬 주도

이가원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한자사전인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편찬을 주도하여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6] 2000년 11월 9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다. 그의 장서와 서화는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3. 5. 학문적 업적: 연암소설 연구

이가원은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1966년 성균관대학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인 「연암소설 연구」는 당시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6] 박지원 소설의 사회배경과 문학관을 10여 년 동안 고찰·분석하여 4년 동안 집필한 끝에 펴낸 책이다.[7]

3. 6. 말년과 사망

2000년 11월 9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83세로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다. 평소 소장하고 있던 장서와 서화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6][7]

4. 저서 및 논문


  • 이가원전집(23권)[8]
  • 연암소설연구(정음사, 1986)
  • 금오신화역주(정음사, 1986)
  • 중국문학사(정음사, 1986)
  • 한국한문학(정음사, 1986)
  • 조선호랑이 이야기(편)(학민사, 1993)
  • 조선문학사(태학사, 1995)

5. 상훈

연도수여 기관상 이름
1987년성곡학술문화재단제2회 성곡학술문화상
1997년연세대학교 용재연구기금제3회 용재학술상
1997년춘강장학재단제11회 춘강상 (교육부문)


참조

[1] 웹사이트 [부음]국학계 원로 이가원 학술원회원 별세 https://n.news.naver[...] 2024-03-19
[2] 웹사이트 이가원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www.grandcult[...] 2024-03-19
[3] 웹사이트 이가원 -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www.grandcult[...] 2024-03-19
[4] 간행물 古書委員會구성 동아일보 1969-12-04
[5] 간행물 한배달 1989
[6] 뉴스 국학계 원로 이가원 학술원회원 별세 https://news.naver.c[...] 2000-11-10
[7] 뉴스 원로 국학자 이가원씨 타계 https://www.mk.co.kr[...] 2020-10-27
[8] 기사 1987년 2월 10일 동아일보 8면 생활/문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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