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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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후락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 출신으로, 육군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군 복무를 시작하여 소령, 대령으로 진급했다. 한국 전쟁 중 정보 업무에 종사했으며, 미국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주미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 이후 국방부 79부대장,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 대사,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72년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으며,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이후락은 197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부정 축재 혐의로 지목되었다. 2009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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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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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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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후락 |
한자 표기 | 李厚洛 |
로마자 표기 | I Hu-rak |
출생일 | 1924년 2월 23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경상남도 울산군 |
사망일 | 2009년 10월 31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
본관 | 학성 |
아호 | 우석(又石) |
별명 | 제갈조조(諸葛曹操), 약칭 HR |
종교 | 불교 |
배우자 | 정윤희 |
자녀 | 슬하 6남 1녀 장남 이동진 차남 이동훈 장녀 이명신 그 외 아들들 이동규, 이동익, 이진영, 이동욱 |
부모 | 아버지 이석승, 어머니 서내안 |
형제 | 4남 3녀 중 차남 이거락(남동생) |
친인척 | 이윤락(사촌 형) 이주락(사촌 남동생) 이겸락(육촌 남동생) 이동휘(조카) 김영혜(차자부) |
학력 |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졸업 |
국적 | 대한민국 |
정당 | 민주공화당 |
군사 경력 | |
군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일본 제국 육군: 1943년~1944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1961년 |
계급 | 일본 제국 육군: 오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 |
근무 | 대한민국 국방부 |
지휘 | 대한민국 국방부 정보담당관 |
참전 | 한국 전쟁 |
서훈 | 금성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1등수교훈장 미국 동성무공훈장 미국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 |
정치 경력 | |
직책 | 국회의원 (제10기, 울산울주) |
선거구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취임일 | 1979년 3월 12일 |
퇴임일 | 1980년 10월 27일 |
정보 기관 경력 | |
직책 | 제6대 중앙정보부장 |
대통령 | 박정희 |
총리 | 백두진 김종필 |
취임일 | 1970년 12월 21일 |
퇴임일 | 1973년 12월 3일 |
전임 | 김계원 |
후임 | 신직수 |
외교 경력 | |
직책 | 제3대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 |
대통령 | 박정희 |
취임일 | 1970년 1월 |
퇴임일 | 1970년 12월 |
대통령 비서실 경력 | |
직책 | 제3대 대통령 비서실장 |
대통령 | 박정희 |
2. 어린 시절 및 군 복무
이후락은 1924년 2월 23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 회야강변에 위치한 생가에서 태어났다. 1943년에 일본의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하여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일본 육군에서 복무하였으며, 1944년 12월에 육군 오장(하사)으로 전역하고 귀국하였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23일에 졸업하며 대위로 임관하였다. 김정렬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락은 자신이 일본군 대위 출신이라고 주장했고, 미군 측은 사실이 아님을 알고도 그를 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시켰다.
1947년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육군에 참여, 만 23세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8년 만 24세의 나이로 육군본부에 보임되었고, 1949년에는 박정희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으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지낸 김종평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락은 주로 HID 업무를 총괄했다. 이후 미국으로 가서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2월 주 미국 대사관 부무관으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히기도 했다.[13]1957년 10월 2일에 귀국하였으나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어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국방부 79부대장이 되며 군에 복귀하였다.
1958년 1월 14일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14] 그해 8월 30일에는 연합참모부 사령관 유재흥을 수행하여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2. 1. 어린 시절
2. 2. 군 복무
이후락은 1924년 2월 23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의 항공기정비학교에서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일본 육군에서 복무하였으며, 1944년 12월에 육군 오장(하사)으로 전역하고 귀국하였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23일에 졸업하며 대위로 임관하였다. 김정렬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락은 자신이 일본군 대위 출신이라고 주장했고, 미군 측은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를 대위로 임관시켰다고 한다.1947년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육군에 참여하였고 만 23세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8년 만 24세의 나이로 육군본부에 보임되었고, 1949년에는 박정희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으며, 주로 HID 업무를 총괄했다. 이후 미국으로 가서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2월 주 미국 대사관 부무관으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혔다.[13] 1957년 10월 2일에 귀국하였으나,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없어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국방부 79부대장이 되며 군에 복귀하였다. 1958년 1월 14일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14] 그해 8월 30일에는 유재흥을 수행하여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3. 정보 기관 조직
3. 1. 79 부대 창설
1958년 이후락은 국방부 내에 제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15] 79호실, 혹은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린 이 특수부대는 미국 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15]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15]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은 1958년 복구된 CIA 대한민국 지부장으로 대한민국에 왔던 것이었다.[15] 그는 김정렬 국방부 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15]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미국 CIA 한국지부장의 요청으로 3군의 정보요원을 차출해 가칭 중앙정보부라는 통합 부대를 창설하였다.[15] 김정렬은 이 부대의 부대장으로 이후락을 앉혔고 이후락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15] 김정렬 장관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를 이승만에게 보고했다.[15]
이승만은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15] 김정렬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이승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 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15]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결정된다.[15]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15]
그는 이 기관을 79호실 혹은 제79부대라고 하자고 했으며 79는 그의 군번 10079에서 따온 것이다.[15]
3. 2. 라오스 밀파 활동
국방부 79호실장 시절 이후락은 이승만의 밀명을 받아 라오스에 잠입했다.[15] 당시 한국 정부는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 지원 방안을 검토하다가 이후락을 라오스 현지로 밀파했다. 이후락은 당시 주 베트남 대사 최덕신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서울로 돌아온 이후락을 대동하고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그는 이후락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이후락은 '노, 노, 노사반 장군이…' 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이후락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병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 합동참모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 측의 반대로 라오스 파병은 결국 백지화되었다.[15]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이후락은 매주 두 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 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 과도 내각 때도 계속되었고 1961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3. 3. 중앙정보위원회 조직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자 국방부 정보담당관의 직위로 활동하였다.[16] 1960년 11월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조직되자 연구실장이 되었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국무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13] 미국 CIA는 1961년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이 기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밀었다.[13] 결국 이후락은 미국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육군 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연구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다.[13]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치되자 그가 만들어놓은 제79부대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에 편입되었다.이후락이 중앙정보연구위원회의 정보실장과 연구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CIA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장면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는데, 이한림은 "맨날 힘센 쪽에 붙어다니는 형편 없는 군인"이라고 평했다. 이에 장면은 1961년 3월 28일 이기호(李岐鎬)를 행정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하게 한다. 당시 국방부 정보비서관인 육군 대령 이기호는 특명으로 육군 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 후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이후락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에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1961년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의 실버 참사관이 마셜 그린 대사 대리에게 한 보고 중에 "그에 관해서는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후락 준장의 얘기로는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그는 반란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전향하여 형의 집행을 면한 적이 있습니다.[17]"라는 보고가 있다.
4. 정치 활동
경상남도(慶尚南道)·울산군(蔚山郡)(현재의 울산광역시) 출신이다. 1942년 울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43년 규슈(九州)의 다토세이 육군비행학교(大刀洗陸軍飛行学校)에 입대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귀국하였다. 1946년 3월 23일자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10079번). 제5연대 B중대(중대장: 이치업(李致業) 소위) 소대장을 역임했다. 1949년 육군참모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3월 일본에 건너가 제25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으나,[4]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였다. 1951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6일 육군본부 정보국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9월 병과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5] 1952년 미국 육군병참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1일 육군본부 병참감에 임명되었다.[6] 같은 해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4년 교육총본부 참모장을 역임하였고, 1957년 주미대사관 무관, 1959년 제79기관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1월 예편하였다.
박정희(朴正熙)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홍보실장으로 임명된 것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제3공화국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7]를 역임하였고, 제4공화국 초기에는 한국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진영의 총지휘를 맡았다.
1972년 5월 2일,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金日成)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한국에 돌아온 후 7월 4일, 서울에서 한국측 당사자로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73년,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3] 특히 김대중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당선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 그러나 박정희가 암살되고, 신군부 등장 후 1980년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였고,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다.[3] 이후 정계를 떠나 은둔 생활에 들어갔으며, 2009년 10월 31일, 뇌종양과 노인성 질환으로 서울시내 병원에서 사망하였다.[8]
본인과 가족이 국내외에 보유한 부동산 등 재산이 수백억에서 천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상당한 부자였다.[9]
4. 1. 5.16 군사 정변 전후
1960년 11월 이후락은 국무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의 건의로 1961년 1월 예편과 동시에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이 되어 1961년 3월까지 재직했다. 동시에 국무총리 안보 담당 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1960년 12월부터 해외 언론 번역기관인 대한공론사 이사장의 제의로 대한공론사의 필진으로도 참여했다.1961년 5·16 군사 정변이 벌어지자 이후락은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이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 겸 대한공론사 이사장 직을 겸임하며 《Korea Republic》지를 개편 발행하여 재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 정부의 홍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5·16 직후 우리 모두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라고 정치인 박준규는 회상하였다.
1961년 5월 18일 미국 CIA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 전쟁 때 복직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했고 곧 이후락이 박정희 감시 역할을 맡게 된다.
5·16 군사 정변 초기에 이후락은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1961년 7월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되고 군사 정부 대변인을 겸직하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대한공론사 이사장직을 맡은 뒤 처음에는 정변 주체 세력의 장교들에게 깍듯이 '님'자를 붙이며 존대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민정 이양과 동시에 다시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김종필 등과 함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4. 2.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1963년 12월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18] 비서실장 재임 시절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같이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받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았다. 3선 개헌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3일 후인 1969년 10월 20일 비서실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때 김형욱도 같이 해임되었다.[18] 해임은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의 전제조건으로 월권과 지나친 의정 활동 간섭을 일삼았던 이후락과 김형욱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이를 박정희가 수용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19]6년간 박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을 당한 것에 대해 김형욱은 강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봉자답게 정반대로 처신하였다.[20][21] 그 때문인지 김형욱이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낸 반면에 이후락은 곧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았다.[22]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불러들여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였고,[23]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자 이후락은 2인자로 발돋움했다.
4. 3. 주일대사 및 중앙정보부장
1963년 12월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비서실장 재임 시절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같이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받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았다.[18] 3선 개헌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3일 후인 1969년 10월 20일 비서실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때 김형욱도 같이 해임되었다.[18] 해임은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의 전제조건으로 월권과 지나친 의정 활동 간섭을 일삼았던 이후락과 김형욱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이를 박정희가 수용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19]6년간 박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을 당한 것에 대해 김형욱은 강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봉자답게 정반대로 처신하였다.[20][21] 그 때문인지 김형욱이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낸 반면에 이후락은 곧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았다.[22]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불러들여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였고,[23]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자 이후락은 2인자로 발돋움했다.
4. 4. 김일성과 비밀회담
1970년대 초부터 박정희의 지시로 북한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된 후,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로 1972년 5월 2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 5월 4일 새벽에 김일성과 사상 초유의 남북 비밀회담을 가졌다.[24] 이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강대국에 대한 공통적인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 간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루자고 협의했다.[24] 5월 29일에는 북한 측의 답방이 있었고,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25] 이후락은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 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했다.이후락은 방북 당시 청산가리를 양복 호주머니와 임플란트에 숨긴 채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26][27] 그는 급박한 상황이 펼쳐질 경우를 대비해 자살용으로 사용하려고 청산가리를 준비했다고 알려진다.[26]
4. 5.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1973년 4월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경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므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내부 고발로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면서 파문이 일어났다.[28]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되어 조급해진 이후락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하며 과잉 충성을 하였다.[29] 이 사건은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진영의 총지휘를 맡았던 이후락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김대중을 제거하려 했던 시도였다. 이런 사실은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29] 2007년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조사에서도 최소한 박정희의 묵시적 승인 하에 그가 지시한 일로 밝혀졌다.[28][29]4. 6. 경질과 외유
이후락은 1973년 12월 3일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되었다.[30][31] 이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지만, 윤필용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시각도 있다.[32]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3선을 성공시키고, 극비리에 방북하여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는 등 유신체제 안착에 기여했지만, 결국 3년 만에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후임으로는 법무부 장관이었던 신직수가 내정되었다.경질 직후인 12월 18일, 이후락은 극비리에 출국하였다.[33] 이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으로 망명한 지 8개월 만의 일이라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크게 당황했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의 소재 파악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대만과 홍콩을 거쳐 런던으로 이동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락은 출국 중 대만의 공항에서 우연히 옛 부하 직원이었던 이종찬과 마주쳤으나[34] 입단속을 시킨 후 홍콩으로 함께 이동하여 4일간 머무르다가 이종찬을 따돌렸다.[35]
이후 미국에 있던 사위와 의논한 후 런던을 경유하여 바하마로 이동한 뒤에 잠적했다. 바하마에 은거하던 중 박정희 정권과 '귀국 후 신변 보장'에 대한 협상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잠적 70일 만인 1974년 2월 말에 귀국하였다.[36][37] 이후락은 출국 전에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일체 주변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잠적 기간 동안 국민들 사이에서는 망명설 등 여러 가지 루머가 떠돌았다.[36] 이 때문에 외무부가 심장병 치료 차 영국에 머물고 있다는 거짓 해명을 내놓기도 하였다.[36]
5. 생애 후반
1978년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당선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3] 그러나 박정희가 암살되고, 신군부 등장 후 1980년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였고,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다.[3] 이후 정계를 떠나 은둔 생활에 들어갔으며,[8] 2009년 10월 31일, 뇌종양과 노인성 질환으로 서울시내 병원에서 사망하였다.[8]
본인과 가족이 국내외에 보유한 부동산 등 재산이 수백억에서 천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상당한 부자였다.[9]
5. 1. 유신 붕괴 이후
귀국 후에는 주로 자택에서 칩거하거나 불교도로서의 신앙생활,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만들기 등을 하면서 외부인과 접촉을 끊고 지냈다.[38] 4년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울산,울주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38] 무소속 원내교섭단체인 민정회 회장으로 재임하다가 공화당에 입당하였으나 의정 활동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38]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가 등장한 뒤, 이후락은 1979년 12월 10일 방콕에서 열린 세계 불교 대회에 참석 차 출국했다가 다시 한 번 종적을 감췄다.[39] 출국 후 국내에서는 12·12 사태가 있었고 공화당에서는 정풍(整風)운동이 벌어졌다. 정풍운동을 주도한 박찬종 등 소장파 의원들은 이후락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하여 공격하였다.[40] 이후락의 잠적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종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출국 95일 만인 1980년 3월 14일에 귀국했다.
귀국 당일 자택에서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아세우는 공화당 내 분위기를 의식한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 며 반박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동안 '떡고물론'이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45][41] 1980년 6월 당시 계엄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이후락 자신의 진술에 의한 집계액만으로도 194억 원을 치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42] 정풍운동의 여파, 그리고 김종필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이후락은 끝내 공화당에서 제명당했다.[43] 신군부 등장 후 1980년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였고,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다.[3] 이후 정계를 떠나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8]
5. 2. 은거와 사망
1982년 울산장학회를 조직하고 장학 사업을 추진하였다.[44]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해제되었으나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계속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제6공화국 출범 후에도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고,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유신 시대에 대한 증언 및 진술 요구를 대부분 거절, 회피하였다.2009년 10월 31일, 뇌종양과 노인성 질환으로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에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8] 사망한 후 그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유족으로는 이동훈 전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 회장 등 슬하 6남 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3,000만~5,000만 달러에 이르는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44]
6. 학력
7. 상훈
- 금성충무무공훈장
- 청조근정훈장
- 1등 수교훈장
- 동성무공훈장
- 리전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영어 훈장
8. 가족 관계
- 아버지: 이석승(李錫丞, 1880년 8월 8일 ~ 1942년 7월 1일)
- 어머니: 서내안(徐內安, 1888년 3월 8일 ~ 1979년 8월 4일)
- 형제자매: 이거락(李居洛, 1925년 6월 29일 ~ 2013년, 남동생) 등 6명 (4남 3녀)
- 배우자: 정윤희(鄭允熙, 1928년 8월 22일 ~ 2002년 3월 26일)
- 친인척
- * 둘째 큰아버지: 이석병(李錫炳, 1875년 3월 11일 ~ 1936년 4월 4일)
- * 사촌 형: 이윤락(李允洛, 1923년 9월 29일 ~ 1992년 8월 23일) - 이석병의 사남
- * 사촌 남동생: 이주락(李周洛, 1931년 11월 20일 ~ ) - 이석병의 육남
- * 육촌 남동생: 이겸락
- * 조카: 이동휘 - 이거락의 아들, 이후락의 前 보좌관
이름 | 생일 | 기타 |
---|---|---|
이동진(李東鎭) | 1946년 11월 11일 | 서옥로(徐玉露, 1946년 ~ )와 결혼, 슬하 1남 2녀 |
이동훈(李東勳) | 1948년 4월 28일 | 김영혜(金英惠, 1948년 10월 16일 ~ )와 결혼, 슬하 4남 |
이명신 | 1949년 | 정화섭(1939년 ~ )과 결혼, 자녀 미상 |
이동규 | 미상 | 미상 |
이동익 | 미상 | 미상 |
이진영 | 미상 | 미상 |
이동욱(李東昱) | 1962년 8월 20일 | 최예정(崔藝瀞, 1962년 8월 25일 ~ )과 결혼, 슬하 1남 1녀 |
장남 이동진은 실업가이자 전 국회의원 서정귀의 딸과, 차남 이동훈은 한화그룹 김종희의 딸 김영혜와, 다섯째 아들은 SK그룹 최종현의 넷째 딸과 각각 결혼했다.[10][11] 또한, 제9대 국회의원 김원규도 인척이다.[12] 장남, 차남, 장녀는 생년월일과 태어난 순서가 알려졌지만 이동욱을 제외한 삼남 이하의 아들들은 자세한 정보가 없다. 이동욱이 삼남으로 알려졌지만 형제간의 나이 차이를 보면 삼남인지 확실하지 않다.
8. 1. 자녀
이름 | 생일 | 기타 |
---|---|---|
이동진(李東鎭) | 1946년 11월 11일 | 서옥로(徐玉露, 1946 ~ )와 결혼, 슬하 1남 2녀 |
이동훈(李東勳) | 1948년 4월 28일 | 김영혜(金英惠, 1948.10.16 ~ )와 결혼, 슬하 4남 |
이명신 | 1949년 | 정화섭(1939 ~ )과 결혼, 자녀 미상 |
이동규 | 미상 | 미상 |
이동익 | 미상 | 미상 |
이진영 | 미상 | 미상 |
이동욱(李東昱) | 1962년 8월 20일 | 최예정(崔藝瀞, 1962.08.25 ~ )과 결혼, 슬하 1남 1녀 |
장남 이동진은 실업가이자 전 국회의원 서정귀(徐廷貴)의 딸과, 차남 이동훈은 한화그룹(韓華集團) 김종희(金鍾喜)의 딸 김영혜(金英惠)와, 다섯째 아들은 SK그룹(SK集團) 최종현(崔鍾賢)의 넷째 딸과 각각 결혼했다.[10][11] 또한, 제9대 국회의원 김원규(金元圭)도 인척이다.[12] 장남, 차남, 장녀는 생년월일과 태어난 순서가 알려졌지만 이동욱을 제외한 삼남 이하의 아들들은 자세한 정보가 없다. 이동욱이 삼남으로 알려졌지만 형제간의 나이 차이를 보면 삼남인지 확실하지 않다.
9. 기타
1980년 3월 14일 이후락은 〈세계불교신도대회〉를 위해 태국으로 출국했다가, 미국에서 장기간 머물다가 94일 만에 귀국한 후 자택에서 "정치자금 만지다 보면 이런말 저런 말 들었지만, 떡고물을 안흘리고 떡을 만들 수 있나"라는 발언을 해서 《떡고물》이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45]
12.12 이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던 1980년 6월 신군부는 이후락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하고, 축재액 194억원을 발표했다. 한편 전두환 장군이 압수한 그의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상북면의 토지들은 그의 둘째 아들 이동훈이 다시 돈을 주고 매입하였다고 한다.
10. 이후락을 연기한 배우들
10. 1. TV 드라마
- 주현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
- 오지명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
- 정욱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 임채무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
- 정욱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
- 홍성훈 -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
- 박광남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
- 유광수, 박영록 - 2012년 MBN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
- 조우진 - 2022년 영화《킹메이커》
10. 2. 영화
11.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총선 (1978년) |
---|
국회의원 (경남 울산시·울주군) |
무소속, 97,393표 (48.32%), 1위, 당선 (초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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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科敎育(병과교육) 習得次(습득차) 李(이) 大領(대령) 引率下(인솔하), 國軍(국군) 將校團(장교단) 渡美(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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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것 안돼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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