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일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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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바일로의 난은 1277년부터 1280년까지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지도자 이바일로가 황제로 옹립되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 사후 쇠퇴하던 불가리아 제국은 몽골의 침입과 봉건화로 농민들의 삶이 악화되면서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농민 출신 이바일로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몽골군을 격파하고 콘스탄틴 티흐 황제를 살해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수도 터르노보에 입성,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 몽골의 개입으로 이바일로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고, 결국 지지 세력의 감소와 귀족들의 배신으로 몽골에 망명했다가 살해당했다. 비록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바일로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된 유일한 사례로, 불가리아 민중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사로 기억되며, 현대 불가리아에서도 존경받고 있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가 사망한 이후, 한때 강력했던 불가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국가는 약화되었고, 주변의 니케아 제국과 헝가리에게 각각 남부와 북서부의 중요 영토를 상실했다. 1240년대 이후 지속된 몽골의 침입은 국가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몽골의 압력으로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특히 북동부 지역은 반복적인 약탈로 경제가 마비되고 행정력이 붕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67]
1277년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받던 불가리아 북동부에서 농민 출신 이바일로가 봉기를 일으켰다.[22][71] 그는 몽골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명성을 얻었고,[23][24] 1277년 말에는 당시 황제 콘스탄틴 티흐를 직접 살해하기에 이르렀다.[72][25][26]
2. 배경
1256년부터 이어진 내전을 거쳐 콘스탄틴 티흐가 황제가 되었으나, 그의 20년 가까운 통치 기간 동안에도 불가리아는 정치적 불안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황제 본인의 부상과 비잔티움 제국 출신 황후들의 정치 개입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외침 속에서 13세기 후반 불가리아 사회는 봉건화가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농민들은 중앙 정부, 귀족, 교회로부터 과도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점차 개인적인 자유마저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66]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행정력 공백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67][68]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북동부 불가리아의 농민 출신인 이바일로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귀족들에 맞서 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69], 억압받는 농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중들은 이바일로를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평등을 가져다 줄 이상적인 통치자, 즉 '좋은 차르'로 여기며[70] 그의 주장에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는 곧 대규모 민중 봉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1. 불가리아의 정치적 상황
1241년 이반 아센 2세 사후, 한때 강력했던 불가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고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국가는 내부적으로 약화되었다. 외부적으로는 이웃 나라들에게 영토를 상당 부분 빼앗겼다. 남쪽으로는 니케아 제국에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중요 지역을 잃었고,[3] 북서쪽으로는 헝가리 왕국에게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세베린 바나트를 포함한 영토를 넘겨주어야 했다.[4]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40년대 이후 몽골의 지속적인 침략은 불가리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242년에는 대규모 침공을 겪었으며,[1] 이후에도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약탈이 자행되어 경제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8][67] 칼리만 아센 1세(재위 1241–1246)의 섭정 시기에는 막대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 몽골에 매년 조공을 바치는 상황에 처했다.[1] 몽골의 침략은 불가리아의 오랜 동맹이었던 쿠만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적대적인 킵차크 칸국을 등장시켜 불가리아의 전략적 입지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
1256년에는 이반 아센 2세의 친척인 미초 아센(재위 1256–1257)과 스코페의 보야르(귀족)였던 콘스탄틴 티흐(재위 1257–1277)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이 혼란 속에서 비딘 지역에서는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5][6] 1261년 콘스탄틴 티흐가 내전에서 최종 승리했지만, 그의 20년 통치 기간 동안에도 불가리아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콘스탄틴 티흐 시대의 불가리아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비딘 지역은 여전히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고,[7] 북동부 지역은 앞서 언급했듯 몽골군의 끊임없는 약탈에 시달렸다.[8] 게다가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키면서, 불가리아는 남쪽 국경에서 강력한 경쟁자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260년대에 콘스탄틴 티흐 황제는 사냥 중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9] 이로 인해 국정 운영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그는 비잔티움 제국 출신의 황후들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두 번째 황후 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는 비잔티움 궁정과 연계된 복잡한 음모에 연루되었으며, 그녀 사후 실권을 잡은 세 번째 황후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나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펼치면서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9][10][11]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외침 속에서 13세기 후반 불가리아 사회는 봉건화가 심화되었다. 농민들은 중앙 정부, 지방 귀족, 교회의 과중한 부담에 시달렸으며, 점차 개인적인 자유마저 상실하는 등 생활고가 심화되었다.[66] 특히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도브루자와 같은 지역의 행정 시스템이 붕괴하면서[67] 사회적 불안은 더욱 커졌고, 이는 결국 대규모 민중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68]
2. 2. 사회·경제적 배경과 이바일로의 등장
1241년 이반 아센 2세가 사망한 후, 한때 강력했던 불가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제국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고, 니케아 제국에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을, 헝가리에게는 베오그라드와 바나트를 포함한 북서부 영토를 빼앗겼다. 1240년대 이후로는 몽골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칼리만 아센 1세의 섭정 시기에는 몽골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256년부터 1257년까지 이어진 내전에서는 스코페의 귀족(볼야르)이었던 콘스탄틴 티흐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의 20년 치세 동안에도 불가리아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그가 사냥 중 다리를 다친 후, 비잔티움 제국 출신의 황후 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가 실권을 잡고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 공작에 개입하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레네 황후가 사망한 후에는 역시 비잔티움 출신의 세 번째 황후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나가 국정을 맡았다.
이 시기 동안 골든 호드의 노가이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불가리아 북동부를 지속적으로 침략하여 마을을 약탈하고 경제를 마비시켰다.[9] 이러한 끊임없는 몽골의 침입은 특히 도브루자 지역의 행정 체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고,[67][13] 이는 훗날 반란이 일어나고 빠르게 확산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68][13]
이와 더불어 13세기 후반 불가리아 사회 내부에서는 봉건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농민들은 중앙 정부와 귀족, 교회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개인적인 자유마저 잃어갔다.[66][13][14] 농민들의 소득과 기회가 줄어들면서 생활은 더욱 악화된 반면, 토지를 소유한 봉건 귀족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일부 유력 귀족들은 타르노보의 중앙 정부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하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는데,[12] 이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국가 전체의 대응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북동부 불가리아(아마도 현대 프로바디아 근처 지역) 출신의 농민 이바일로가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반란을 촉구하기 시작했다.[15] 그는 신으로부터 귀족들에 맞서 싸우라는 계시를 받았으며, 하늘 및 성인들과 직접 소통한다고 주장했다.[9]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바르도크바'(불가리아어로 상추) 또는 '라하나스'(그리스어로 채소)라는 별명으로 기록했으며, 그의 본명은 스바를리 복음서에 첨부된 짧은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13][16][17][18]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기 파키메레스는 이바일로가 돈을 받고 돼지를 치는 돼지치기였다고 기록했다.[19] 그러나 역사가 존 파인은 당시 돼지가 중요한 가축 생산물이었음을 지적하며, 만약 이바일로가 대규모 돼지떼를 관리했다면 그가 단순히 가난한 농민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9] 이바일로는 당시 종교적 믿음이 강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비주의를 활용했으며,[15][20]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많은 불가리아 민중들은 그를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평등을 가져다 줄 이상적인 통치자, 즉 '좋은 차르'이자 신이 보낸 구원자로 여기게 되었고,[70][9]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추종자를 모아 강력한 반란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3. 전개
이바일로의 세력이 커지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이반 아센 3세를 새로운 불가리아 황제로 내세워 개입하려 했다.[28][29] 그러나 수도 터르노보에 고립되어 있던 마리아 황후는 비잔티움 대신 이바일로와 손을 잡았고, 1278년 봄 이바일로는 터르노보에 입성하여 황제로 즉위했다.[33][34][35]
황제가 된 이바일로는 즉시 남쪽의 비잔티움 군대와 북쪽의 몽골군 양쪽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37][38] 그는 여러 차례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34][44][45] 노가이 칸이 이끄는 몽골 정예군에게 패배하여 드러스터르 요새에서 포위당했다.[37][40] 이바일로가 고전하는 사이, 터르노보의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를 황제로 추대했다.[74][34]
이바일로는 몽골의 포위를 뚫고 돌아와 다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지만,[42][43][44][45] 귀족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했다.[44] 지지 기반을 잃은 이바일로는 결국 1280년경 노가이 칸에게 망명했으나, 비잔티움의 입김이 작용한 노가이 칸에 의해 살해당하며 반란은 막을 내렸다.[34][45][49]
3. 1. 초기 성공
1277년 봄 또는 여름, 몽골의 침략으로 피해가 컸던 불가리아 북동부에서 이바일로가 이끄는 반란이 시작되었다.[22][71] 반란군은 먼저 이 지역을 약탈하던 몽골군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277년 여름, 이바일로는 몽골군 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으며, 곧이어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23][24] 비잔티움의 역사가 게오르기 파히메레스는 "라하나스(이바일로의 별칭)는 몽골 팔랑가와 교전하여 그가 이끄는 병력으로 공격하여 철저히 격파한 후, 또 다른 부대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며칠 만에 그는 영광으로 뒤덮였다."[21]라고 기록했다. 수십 년간 불가리아 정규군이 해내지 못한 성과를 거두자 그의 명성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1277년 가을에는 몽골군이 불가리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23][24] 이바일로는 백성들에게 황제로 추앙받았으며, 마리아 황후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까지 합류하면서 많은 지역이 그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9][23]
1277년 말, 콘스탄틴 티흐 황제는 마침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었으나, 이전에 입은 부상으로 인해 전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고 진군 속도는 느렸다.[72][25] 이바일로는 황제의 군대를 매복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황제의 측근 다수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바일로는 콘스탄틴 티흐 황제가 전투에서 명예를 지키지 못했다며 직접 그를 살해했다.[72][25][26] 이 승리 이후, 이바일로는 불가리아의 여러 요새화된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고, 도시들은 하나둘씩 항복하며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1278년 봄이 되자 수도 터르노보만이 마리아 황후의 통치 아래 남게 되었다.[27]
3. 2. 비잔티움 제국의 개입과 이바일로의 인정
한편, 비잔틴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불가리아의 혼란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비잔틴-불가리아 국경 근처의 아드리아노플로 이동하여 상황을 직접 살폈다.[25][27] 콘스탄틴 티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비잔틴 제국에게 충격과 동시에 기회로 다가왔다. 미하일 8세는 처음에 자신의 딸을 이바일로와 결혼시켜 상황을 통제하려 했으나, 곧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는 인물을 황제로 내세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20]
미하일 8세는 비잔티움에 망명 중이던 옛 불가리아 황제 미초 아센의 아들, 이반 아센 3세를 새로운 황제 후보로 선택했다. 이반 아센 3세는 소아시아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미하일 8세는 즉시 자신의 딸 이레네를 이반 아센 3세와 결혼시키고, 그를 불가리아 황제로 선포하며 충성 맹세를 받았다.[28][29]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 귀족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내 이반 아센 3세를 지지하도록 회유했으며, 타르노보에는 사절을 보내 황후 마리아의 항복과 이반 아센 3세의 즉위를 설득하려 했다.[27] 이와 동시에 이반 아센 3세는 비잔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이바일로가 포위하고 있던 타르노보를 압박했다.[29]
두 명의 적, 즉 수도를 포위한 이바일로와 남쪽에서 진격해오는 비잔틴 군대 사이에 놓인 마리아 황후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기 위해 미하일 8세와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는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요구했다.[27] 결국 마리아는 놀랍게도 이바일로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녀는 아들 미하일 아센을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이바일로에게 자신의 손과 불가리아 황제의 왕관을 제안했다.[30] 동시대 역사가 게오르기 파키메레스는 마리아가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를 저버렸다"고 비판했지만,[31] 그녀의 결정은 이단으로 여겼던 삼촌 미하일 8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강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30]
처음에 이바일로는 마리아가 자신이 무력으로 얻으려던 것을 제안한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30] 결국 "평화를 이루고 내전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의 제안을 수락했다.[32]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비를 베푸는 입장이지 받는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33]
1278년 봄, 이바일로는 마침내 승리자로 타르노보에 입성했다. 그는 마리아 황후와 결혼하고 불가리아의 황제로 공식 선포되었다.[33][34][35] 그러나 농민 출신이었던 이바일로는 국정 운영 경험이 부족하여 수도의 귀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며 종종 마리아 황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33][36] 설상가상으로 이바일로는 즉위 직후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비잔틴 제국은 미하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이반 아센 3세를 계속 지원했고, 북쪽에서는 몽골족의 침입을 부추겨 양면전쟁을 유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바일로는 강력하게 군대를 정비하여 외세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2]
3. 3. 비잔티움 제국 및 몽골과의 전쟁
1278년 여름, 이바일로는 수도 터르노보에 입성하여 황제의 휘장을 받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바일로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미카일 8세는 미카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바일로의 군대에 두 차례 패배했다. 이에 미카일 8세는 몽골에게 불가리아 침공을 요청했다. 수도 내부 상황도 이바일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황후 마리아와도 잦은 갈등을 겪었다.
이바일로는 전쟁 초기, 북쪽에서 침입한 몽골군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37][38] 그러나 남쪽의 비잔티움 제국 군대는 더 큰 위협이었다. 비잔티움 군은 쉬프카 고개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발칸 산맥(스타라 플라니나)을 따라 넓은 전선에서 공격해왔다. 이바일로의 부하들인 밈칠, 쿠만, 담얀, 칸초, 스탄 등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여러 요새에서 비잔티움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74][37][38] 비잔티움군은 막대한 병력과 노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1278년 여름과 가을 내내 큰 손실만 입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4] 크테니아 요새는 여러 차례의 공격 끝에 함락되었고, 크란과 마글리시 성은 비잔티움군에게 큰 피해를 주며 함락되었다.[38] 보루이 방어전에서는 불가리아 사령관 스타가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37][38] 이바일로가 직접 지휘한 스투데나와 피르기차 전투 등은 모두 승리로 끝났고, 1278년 가을까지 불가리아군은 우위를 점하여 비잔티움군은 결국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37][38] 비잔티움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는 이바일로가 포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기에 비잔티움군의 사기가 매우 낮았다고 기록하며, "라카나스[이바일로]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썼다.[39]
남부 전선을 안정시킨 이바일로는 다시 북쪽의 몽골군과 맞서야 했다. 이번에는 노가이 칸이 이끄는 몽골 정예군과의 전투였다. 이전과 달리 몽골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바일로는 드러스터르(현재의 실리스트라) 요새로 후퇴하여 3개월간 포위당했다.[37][40] 이바일로가 북쪽에서 고전하는 동안, 그의 패배 소식과 함께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터르노보에 퍼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터르노보의 귀족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결탁하여 미카일 8세가 내세운 이반 아센 3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황후 마리아는 폐위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당했다.[74][34][35][37] 1279년 초, 미카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는 바르나 근처에 상륙하여 카심 베그가 지휘하는 몽골 부대의 지원을 받아 수도로 향했다.[36] 이반 아센 3세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동생 키라 마리아를 당시 가장 강력한 봉건 영주 중 한 명인 게오르기 테르테르와 결혼시켰다.[41]
그러나 몇 달 후, 이바일로는 드러스터르에서 몽골군의 포위를 뚫고 터르노보 외곽에 나타나 이반 아센 3세를 수도에 포위했다.[42][43] 이 소식에 놀란 미카일 8세는 사위인 이반 아센 3세를 구하기 위해 1279년 여름, 무린 장군이 이끄는 10,000명의 강력한 군대를 불가리아로 파병했다. 1279년 7월 17일, 이바일로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코텔 고개 근처 데비나 요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맞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많은 비잔티움 군인이 전사했고, 포로들 역시 이바일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34][44][45] 한 달 뒤인 8월 15일, 미카일 8세는 아프린 장군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를 다시 보냈지만, 이바일로는 스타라 플라니나 산맥 동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또다시 승리하고 아프린 장군을 직접 죽였다.[44][45] 이바일로는 이 두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46]
3. 4. 반란의 종결과 이바일로의 최후
비잔틴 제국이 패배하면서 이반 아센 3세의 권위는 흔들렸다. 그와 황후 이레네는 비밀리에 수도 터르노보를 탈출했는데, 이때 1190년 트랴브나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승리한 후 보관해 온 비잔틴 제국의 황실 표식까지 가져갔다.[47] 미하일 8세는 이들의 비겁한 행동에 격분하여 며칠 동안 만나주지 않았다.[45] 터르노보의 귀족들은 이바일로에게 성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고, 대신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인 체르벤의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44] 이는 반란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바일로는 여전히 몽골의 위협에 직면했고, 불가리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몽골과 비잔틴이라는 강력한 적들에 맞서 나라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 농민 출신 황제는 이제 불가리아 봉건 영주들의 조직적인 군대와 맞서야 했고, 그의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다. 끝없는 전쟁에 지친 민중들도 점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34][45] 지지 기반이 약화되자, 1280년 말 이바일로는 카심 베그를 포함한 몇몇 충성스러운 측근들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너 노가이 칸에게 망명하여 황제 자리를 되찾기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34][45][48]
처음에 이바일로는 노가이 칸에게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바일로의 행방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알려지자, 미하일 8세는 이반 아센 3세에게 풍성한 선물을 주어 몽골 궁정으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45][48][49] 노가이 칸은 황제를 자처하는 두 인물 사이에서 몇 달 동안 결정을 미루며 양쪽 모두에게 도움을 약속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비잔틴의 영향력이 우세해졌는데, 이는 노가이 칸이 미하일 8세의 사생아 딸인 에우프로시네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49]
어느 날 열린 연회에서 이바일로와 이반 아센 3세는 노가이 칸의 양쪽에 앉게 되었다. 이때 노가이 칸은 이바일로를 가리키며 "그는 나의 아버지인 황제 [미하일 8세]의 적이며, 살 가치가 없다"라고 말하고 그의 처형을 명령했다. 이바일로는 그의 충실한 부하 카심 베그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34][45][49] 반면, 이반 아센 3세는 노가이 칸의 아내인 에우프로시네의 변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이후 소아시아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1303년에 사망했다.[48][51]
4. 결과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바일로의 난은 중세 유럽의 다른 농민 반란과 달리 지도자를 황제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52]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지는 못했으나, 이바일로는 불가리아 민중들에게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로 기억되었다. 그의 명성은 불가리아 국경 너머까지 퍼져, 그의 사후 비잔티움 제국 등지에서 '가짜 이바일로'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53][54]
이바일로가 죽은 뒤 약 20년 동안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극심한 쇠퇴기를 맞았다.[54]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재위 1280–1292)와 그의 뒤를 이은 스밀레츠(재위 1292–1298)의 통치 시기에는 몽골의 끊임없는 내정 간섭과 함께 대귀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중앙 권력이 점차 약화되었다.[55]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발칸 산맥 이남의 트라키아 영토 대부분을 불가리아로부터 빼앗았고, 불가리아는 이 지역을 되찾을 여력이 없었다.[56]
1300년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의 아들인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재위 1300–1321)가 왕위에 오르면서 불가리아는 비로소 재흥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몽골로부터 베사라비아 남부 지역을 획득하고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북트라키아를 되찾아 불가리아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57]
5. 역사적 의의
이바일로의 난은 비잔틴 제국과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부 세력, 그리고 불가리아 내부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궁극적으로 실패했지만,[34][45] 중세 유럽 역사상 농민 반란의 지도자가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9] 이는 다른 모든 중세 후기 유럽의 민중 반란에서는 이루지 못한 성과였다.
이바일로 사후에도 그의 명성은 이어져, 비잔틴 제국에서는 자신을 이바일로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나 민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53][54] 이는 당시 민중들이 이바일로를 외세에 맞서는 강력한 지도자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52]
반란 이후 불가리아 제2제국은 약 20년간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와 스밀레츠의 통치 아래 몽골의 간섭과 내부 분열로 쇠퇴기를 겪었으나,[54][55][56]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 시대에 이르러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57]
후대에 이바일로의 난은 다양한 시각에서 평가받는다. 사회주의 불가리아 시절에는 봉건 제도와 외세 침략에 맞선 사회 운동으로 강조되었고,[29] 현대 불가리아에서도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사로 존경받는다.[53] 불가리아 역사가들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점을 들어 이 봉기를 민족의 애국적 업적으로 평가한다.[34][49] 이바일로는 백성을 위하는 "선한 차르"의 이상을 구현한 영웅적인 통치자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58] 다만, 그와 추종자들이 구체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며,[29] 반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콘스탄틴 1세 티흐 황제의 무능한 통치가 지적되기도 한다.[29]
5. 1. 중세 유럽사적 의의
이바일로의 난은 비잔틴 제국과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부 세력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내부 귀족들의 상당수와도 맞서 싸워야 했기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34][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바일로의 봉기는 중세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바로 농민 반란의 지도자가 황제로 공식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라는 점이다. 이는 다른 모든 중세 후기 유럽의 민중 반란에서는 이루지 못한 목표였다.[29]후대의 평가에서, 사회주의 불가리아 시절에는 이 반란을 봉건 제도의 부당함과 외세의 침략에 맞선 민중의 사회 운동으로 강조하였다.[29] 현대 불가리아에서도 이바일로는 여전히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투사로서 존경받고 있다.[53] 불가리아 역사가들은 반란군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높이 평가하며, 이바일로가 당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 봉기를 불가리아 민족의 빛나는 애국적 업적으로 본다.[34][49] 이바일로는 백성을 생각하는 "선한 차르"의 이상을 구현한 영웅적인 통치자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58]
다만, 이바일로나 그의 추종자들이 구체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29] 반란이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바일로가 백성들에게 미움받던 마리아 칸타쿠제노스 황후와 결혼했다는 사실 등은 반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당시 황제였던 콘스탄틴 1세 티흐의 무능한 통치였음을 시사하기도 한다.[29]
5. 2. 불가리아 민족사적 의의
이바일로의 난은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중세 유럽의 다른 농민 반란들과 달리 지도자를 황제로 인정받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34][45] 민중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 질서 수립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바일로는 불가리아 민중들의 기억 속에 정의, 자유, 평등을 위해 싸운 투사로 깊이 각인되었다.[53] 현대 불가리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다.[53]이바일로의 명성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수년간 불가리아 국경 너머까지 이어졌으며,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최소 두 명의 "가짜 이바일로"가 등장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53] 1284년, 자신이 이바일로라고 주장하는 불가리아인이 콘스탄티노플에 나타나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에게 튀르크인과의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다.[54] 전 황후 마리아는 그가 사기꾼이라고 밝혔지만, 민중은 튀르크인들이 이바일로를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52]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기 파키메레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농민들은 그들의 땅과 농업 노동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병사가 되었고 [...], 라카나스(이바일로의 별칭)의 깃발 아래에 서서 그와 함께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52]라고 기록했다. 황제는 그에게 군대를 주어 튀르크인과 싸우게 했으나, 농민들로 구성된 그의 군대가 커지자 반란을 우려한 비잔틴 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투옥되었다.[54] 몇 년 후, 이반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불가리아인이 자신이 이바일로라고 주장하며 나타나 군대를 이끌고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체포되어 살해당했다.[54]
사회주의 불가리아 시절에는 이 반란을 봉건 제도의 불의와 외세 침략에 맞선 사회 운동으로 평가했다.[29] 그러나 이바일로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며[29], 일부 귀족의 지지를 받고 증오받던 황후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 등은 반란의 주요 원인이 콘스탄틴 티흐 황제의 무능한 통치였음을 시사한다는 분석도 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역사가들은 반란군들의 영웅심을 높이 평가한다. 이바일로가 비잔티움 제국과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 귀족들의 반대에 맞서 싸우며[34][45]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낸 점을 들어, 이 봉기를 불가리아 민족의 빛나는 애국적 업적으로 본다.[34][49] 이바일로는 "선한 차르"의 이상을 구현한 영웅적인 통치자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58]
이바일로의 난은 불가리아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 하나로,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작곡가 마린 골레미노프는 1959년 도브리 흐리스토프의 동명 서곡을 바탕으로 "시대의 혁명적 열정과 비극"을 담은 오페라 "이바일로"를 작곡했다.[59] 1964년에는 예브게니 콘스탄티노프의 소설 "불타는 잿더미"를 원작으로 한 니콜라 발체프 감독의 컬러 장편 영화 "이바일로"가 제작되었으며,[60]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인 이반 바조프 역시 1921년 드라마 "왕좌"에서 이 봉기를 다루었다.[61] 현대 불가리아 남부의 이바일로프그라드 마을과 파자르지크 시 근처의 이바일로 마을은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여러 도시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코텔 마을 남동쪽 5km 지점의 데비나 전투 승전지에는 "돌 경비병"이라 불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불가리아 10대 상징 기념물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62][63]
5. 3. 현대적 평가
사회주의 불가리아 시기에는 이바일로의 난을 봉건 제도의 불의와 외세 침략에 맞선 사회 운동으로 평가했다.[29] 현대 불가리아에서도 이바일로는 여전히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사로 존경받고 있다.[53]그러나 이바일로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29] 반란이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바일로가 백성들의 원성을 사던 황후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점은 반란의 주요 원인이 콘스탄틴 티흐 황제의 무능한 통치였음을 시사한다.[29]
불가리아 역사가들은 반란군들의 영웅심을 높이 평가하며, 이 봉기를 불가리아 국민의 빛나는 애국적 업적으로 여긴다.[34][49] 이는 이바일로가 당시 비잔틴 제국과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가리아 사회의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34][49] 이바일로는 "선한 차르"의 이상을 구현한 영웅적인 통치자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58]
비록 반란은 비잔틴 제국, 몽골, 그리고 불가리아 귀족 대부분이라는 압도적인 적들과 맞서 싸우다 결국 실패했지만,[34][45] 중세 후기 유럽의 민중 반란 역사상 유일하게 그 지도자가 황제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6. 연표
연도/시기 | 주요 사건 |
---|---|
1277년 여름 | 몽골군 격퇴 |
1277년 가을 | 몽골군, 불가리아에서 축출 |
1277년 말 | 콘스탄틴 티흐 황제의 군대 패배, 이바일로에게 황제 사망 |
1278년 봄 | 이바일로, 수도 터르노보 진입, 콘스탄틴 티흐의 아내 마리아와 결혼, 불가리아 황제로 즉위 |
1278년 여름과 가을 | 비잔틴 제국 및 몽골군과의 전쟁, 비잔틴 제국에 승리, 몽골군에게 패배, 이바일로, 드러스터르에서 포위됨 |
1279년 초 | 터르노보 귀족들, 비잔틴 제국이 지원하는 칭왕자 이반 아센 3세에게 성문 개방 |
1279년 봄 | 이바일로, 드러스터르에서 몽골군의 봉쇄를 돌파, 터르노보 포위, 이반 아센 3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 |
1279년 6월 17일 | 10,000명의 비잔틴 제국 군대, 데비나 전투에서 패배 |
1279년 8월 15일 | 5,000명의 비잔틴 제국 군대, 동부 발칸 산맥에서 패배 |
1280년 초 | 귀족들,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황제로 선출 |
1280년 | 이바일로, 노가이 칸에게 도주, 결국 살해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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