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1세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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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벨 1세는 1172년 이전에 태어난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으로, 네 번의 결혼을 통해 왕국 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녀는 토론의 험프리 4세, 몬페라토의 콘라트, 샹파뉴의 앙리 2세, 키프로스의 아모리 등과 결혼했으며, 몬페라토의 마리아, 샹파뉴의 앨리스, 샹파뉴의 필리파, 루시냥의 시빌라, 루시냥의 멜리센데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사벨 1세는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정치적 선택을 거듭하며 왕국을 통치했고, 1205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여러 소설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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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예루살렘)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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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예루살렘 여왕 |
통치 기간 | 1190년/1192년 – 1205년 4월 5일 |
대관식 | 1198년 1월, 아크레 |
이전 통치자 | 시빌라와 기 |
후계자 | 마리아 |
공동 통치자 | 기 (1190년–1192년) |
섭정 | 콘라트 1세 (1190년–1192년) 앙리 1세 (1192년–1197년) 에메리 (1198년–1205년) |
혼인과 자녀 | |
배우자 | 옹프루아 4세 (1183년 결혼, 1190년 이혼) 콘라트 (1190년 결혼, 1192년 사망) 앙리 2세 (1192년 결혼, 1197년 사망) 에메리 (1198년 결혼, 1205년 사망) |
자녀 | 마리아, 예루살렘 여왕 알리스, 키프로스 여왕 필리파, 라메뤼프 영주 부인 시빌, 아르메니아 여왕 멜리장드, 안티오키아 공녀 |
가문 | |
왕가 | 앙주 가문 |
아버지 | 아모리 1세 |
어머니 | 마리아 콤니니 |
출생과 사망 | |
출생 | 1172년, 나블루스, 예루살렘 왕국 |
사망 | 1205년 4월 5일 (32–33세), 아크레, 예루살렘 왕국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2. 생애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고 있어 후계자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4], 1183년에 이복 누이 시빌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5]。 이자벨은 같은 해 르노 드 샤티용의 의붓아들인 옹프로아 4세 드 토롱과 결혼했다. 이때 살라딘은 결혼식이 열리고 있던 카락 성을 습격했다. 1186년, 보두앵 4세 사후 즉위한 보두앵 5세가 1년 만에 사망하자, 시빌과 그녀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6]。
1190년 가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7] 이복 여동생 이자벨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1세는 바리앙 디블랑과 재혼한 이자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의 협력을 받아 이자벨과 옹프로아의 결혼 무효를 인정받고[7], 1190년 11월[8]에 이자벨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다만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1192년, 콘라트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 직전 암살교단에 의해 티르에서 암살되었다[10]。 이자벨은 임신 중이었지만, 리처드 1세의 제안에 따라 그의 조카인 샹파뉴 백작앙리 2세와 결혼했다[9]。 이자벨은 앙리 2세와 결혼 후, 훗날 예루살렘 여왕이 되는 마리아를 낳았다.
1197년 9월, 앙리가 아콘에서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이자벨은 키프로스 왕국 왕 아모리 드 뤼지냥과 네 번째 결혼을 했다[11]。 아모리는 기 드 뤼지냥의 형이었고, 이 결혼으로 예루살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라고도 불린다)[11]。
1205년, 이자벨은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이사벨은 예루살렘의 아모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 콤네네 사이에서 1172년에 태어났다.[1] 아모리 왕은 1174년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보두앵 4세가 왕위를 이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3] 병든 왕의 왕위 계승을 위해 그의 누이 예루살렘의 시빌라 여왕은 1176년 몽페라토의 기욤 백작과 결혼했지만, 그는 7개월 만에 사망했다.[4]1180년 10월, 보두앵 4세는 이사벨을 샤티용의 레날드의 의붓아들인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켰다.[5] 이사벨은 험프리의 어머니인 밀리의 스테파니에게 교육받기 위해 케라크 성으로 보내졌고, 스테파니는 이사벨이 나블루스에서 어머니와 계부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5]
보두앵 4세는 뤼지냥의 기를 섭정에서 해임하고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여, 기의 의붓아들(시빌라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인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를 1183년 11월 20일에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6]
2. 2. 첫 번째 결혼

1183년, 이사벨은 르노 드 샤티용의 의붓아들인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정략결혼을 했다.[5] 결혼식은 케라크 성에서 열렸는데, 살라딘이 이 성을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5] 보두앵 4세는 험프리 4세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사벨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7] 이후 1190년 11월, 이사벨은 콘라트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8]
2. 3. 왕위 계승 분쟁
1185년 이복 오빠 보두앵 4세가 나병으로 후계자를 낳을 수 없게 되자[4], 1183년에 이복 누이 시빌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5]。 같은 해 이자벨은 옹프로아 4세 드 토롱과 결혼했으나, 살라딘이 결혼식이 열리던 카락 성을 습격하기도 했다. 1186년, 보두앵 5세가 즉위 1년 만에 사망하면서 이복 누이 시빌과 그 남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6]。 그러나 1190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7], 이복 여동생 이자벨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1세는 이자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와 바리앙 디블랑의 협력을 받아 이자벨과 옹프로아의 결혼 무효를 인정받고[7], 1190년 11월[8] 이자벨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2. 4. 두 번째 결혼
1190년 가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이사벨 1세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7] 이사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와 이벨린 가문의 바리앙은 몬페라토 후작콘라트 1세의 협력을 받아 이사벨과 옹프로아 4세 드 토롱의 결혼 무효를 주장했다.[7] 그들은 이사벨이 어릴 때 강제로 결혼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성공하여, 이사벨은 옹프로아와 이혼하고 1190년 11월[8] 몬페라토의 콘라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콘라트는 이 결혼을 통해 예루살렘 왕위를 주장했으나, 기 드 뤼지냥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다.2. 5. 콘라트의 암살과 세 번째 결혼
1192년 4월, 리처드 1세는 성직자와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콘라트를 지지하는 결정을 받아들였다. 리처드는 조카인 샹파뉴 백작 앙리 2세를 보내 콘라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10] 콘라트와 이사벨은 아크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합의했다.그러나 1192년 4월 28일, 콘라트는 암살단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10] 콘라트가 암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벨은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샹파뉴 백작 앙리 2세와 결혼했다.[9] 앙리 2세와의 결혼은 리처드 1세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사벨은 콘라트와 결혼생활 도중 임신한 상태였으며, 앙리 2세와 결혼 후 몬페라토의 마리아를 낳았다.[11] 앙리와 이사벨 사이에는 세 딸, 마가렛, 앨리스, 필리파가 태어났다. 앙리는 1197년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다.[11]
2. 6. 앙리 2세의 죽음과 네 번째 결혼
1197년 9월, 앙리 2세가 아콘에서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자,[11] 이사벨은 기 드 뤼지냥의 형제인 키프로스의 아모리와 네 번째 결혼을 했다.[11] 아모리는 1194년에 동생 기의 죽음으로 키프로스 왕국 왕이 되었고, 이 결혼으로 예루살렘 왕국 왕을 겸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라고도 불린다).[11]2. 7. 죽음
1205년, 이사벨은 사망했고, 딸 마리아가 예루살렘 여왕이 되었다.3. 가족 관계
이사벨 1세는 네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앨리스와 필리파는 티보 4세에 대항하여 샹파뉴 백작위를 주장하며 경쟁했다.[2]
3. 1. 첫 번째 남편: 토론의 험프리 4세
이사벨 1세는 1183년 옹프로아 4세 드 트롱과 결혼했지만, 이후 해소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3. 2. 두 번째 남편: 몬페라토의 콘라트
콘라트와의 두 번째 결혼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3. 3. 세 번째 남편: 샹파뉴의 앙리 2세
콘라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샹파뉴 백작앙리 2세는 아크레로 돌아와 있다가 티레로 급히 돌아왔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조카인 앙리는 바론들과 티레 시민들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3] 이사벨은 임신 중이었고 아들을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앙리는 망설였다고 한다.[4] 앙리와 이사벨의 약혼은 콘라트의 죽음 이틀 후에 발표되었다.[5] 결혼식은 1192년 5월 10일 아크레에서 거행되었다.[6]이사벨과 콘라트의 아이인 몬페라토의 마리아는 1192년에 태어났다. 그 후 앙리와 이사벨은 세 딸을 낳았다.
- 마리 (요절)
- 앨리스 (1195/96년 - 1246년) - 키프로스 왕 위그 1세,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5세, 라울 드 소아송과 결혼
- 필리파 (1197년경 - 1250년) - 에라르 드 브리엔-라메뤼와 결혼
앨리스와 필리파 자매는 모두 출생과 함께 샹파뉴 백작위를 계승한 어린 사촌 티보 4세에 대항하여 샹파뉴 백작위를 청구하며 다퉜다.
3. 4. 네 번째 남편: 아모리 2세
이사벨라는 기 드 루시냥의 형제인 키프로스의 아모리와 네 번째 결혼을 했다.[1] 1198년 1월 아크레에서 예루살렘의 왕과 여왕으로 함께 대관식을 올렸다.[1]이 부부는 슬하에 시빌라(1198년 출생), 멜리센데(1200년 출생), 아들 아모리(1201년 출생)를 두었다.[1]
- 시빌라 (1198년 10월–11월 – c. 1230 또는 1252):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와 결혼했다.
- 멜리센데 (c. 1200 – 1249년 이후): 1218년 1월 1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와 결혼했다.
- 아모리 (1201 – 1205년 2월 2일, 아크레):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아모리 왕은 1205년 아내보다 4일 먼저, 아들이 죽은 직후 흰 숭어에 의한 식중독으로 사망했다.[1]
4. 대중문화 속의 이사벨 1세
이사벨은 소설에 몇 번 등장하지 않지만, 그레이엄 셸비의 소설 《어둠의 명성을 지닌 기사들》(1969)과 그 속편 《헛된 의도의 왕들》(1970)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셸비는 험프리와의 결혼을 이상화하여 그들을 낭만적인 젊은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어 이사벨이 콘라드에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는 가학적인 학대 관계를 묘사하는데, 이 자극적인 묘사는 어떠한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셸비는 이사벨이 그의 학대에 대한 복수로 콘라드의 살해를 계획했으며, 그녀를 정신적으로 마비되고 헨리에 대해 무관심한 인물로 묘사한다.[1]
앨런 고든의 미스터리 소설 《예루살렘의 과부》(2003)에서 이사벨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콘라드와의 결혼을 좀 더 동정적으로 그린다. 그녀는 버릇없고 허영심 많은 젊은 여성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성장한다. 너무 늦어서야 그녀는 남편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살해와 이후 헨리의 죽음은 영웅인 바보 테오필로스(페스테)에 의해 조사된다.[1]
샤론 케이 펜먼의 《바다 건너 땅》에서 이사벨은 아이와 젊은 여성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1]
참조
[1]
서적
The Crusader World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
문서
Lignages d'Outremer, Le Vaticanus Latinus 7806, El parentado del conte de Campagna 7
[3]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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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5]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6]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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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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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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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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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ジョティンシュキ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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