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사벨 1세 (예루살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사벨 1세는 1172년 이전에 태어난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으로, 네 번의 결혼을 통해 왕국 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녀는 토론의 험프리 4세, 몬페라토의 콘라트, 샹파뉴의 앙리 2세, 키프로스의 아모리 등과 결혼했으며, 몬페라토의 마리아, 샹파뉴의 앨리스, 샹파뉴의 필리파, 루시냥의 시빌라, 루시냥의 멜리센데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사벨 1세는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정치적 선택을 거듭하며 왕국을 통치했고, 1205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여러 소설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십자군 국가 여자 - 이사벨 2세 (예루살렘)
    1212년 안드리아에서 태어나 며칠 만에 예루살렘 여왕이 된 이사벨 2세는 여왕 마리아 몬페라토와 브리엔의 장의 외동딸로, 프리드리히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십자군 참전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다 아들 콘라트 4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십자군 국가 여자 - 욜랑드 드 에노
    욜랑드 드 에노는 나뮈르 후작위를 물려받았고, 남편이 라틴 제국 황제가 되기 전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하며, 외교적 노력을 통해 라틴 제국의 안정을 위해 기여했다.
  • 예루살렘 여왕 - 이사벨 2세 (예루살렘)
    1212년 안드리아에서 태어나 며칠 만에 예루살렘 여왕이 된 이사벨 2세는 여왕 마리아 몬페라토와 브리엔의 장의 외동딸로, 프리드리히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십자군 참전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다 아들 콘라트 4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예루살렘 여왕 - 멜리장드 (예루살렘)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으로, 아버지 보두앵 2세 사후 왕위를 계승하여 십자군 국가를 통치하며 예술과 문학을 장려하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으나, 아들과의 갈등으로 왕국을 분할 통치 후 은퇴했다.
  • 1172년 출생 - 보두앵 6세 드 에노
    보두앵 6세 드 에노는 에노 백작이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9세로, 제4차 십자군 원정 후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사망 후 가짜 보두앵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1172년 출생 - 쇼타 루스타벨리
    쇼타 루스타벨리는 조지아의 중세 시인으로, 타마르 여왕 치하에서 재무 장관을 지냈으며, 대표작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는 조지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사벨 1세 (예루살렘)
기본 정보
이사벨 1세와 몬페라트의 콘라트의 결혼
칭호예루살렘 여왕
통치 기간1190년/1192년 – 1205년 4월 5일
대관식1198년 1월, 아크레
이전 통치자시빌라와
후계자마리아
공동 통치자 (1190년–1192년)
섭정콘라트 1세 (1190년–1192년)
앙리 1세 (1192년–1197년)
에메리 (1198년–1205년)
혼인과 자녀
배우자옹프루아 4세 (1183년 결혼, 1190년 이혼)
콘라트 (1190년 결혼, 1192년 사망)
앙리 2세 (1192년 결혼, 1197년 사망)
에메리 (1198년 결혼, 1205년 사망)
자녀마리아, 예루살렘 여왕
알리스, 키프로스 여왕
필리파, 라메뤼프 영주 부인
시빌, 아르메니아 여왕
멜리장드, 안티오키아 공녀
가문
왕가앙주 가문
아버지아모리 1세
어머니마리아 콤니니
출생과 사망
출생1172년, 나블루스, 예루살렘 왕국
사망1205년 4월 5일 (32–33세), 아크레, 예루살렘 왕국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

2. 생애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고 있어 후계자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4], 1183년에 이복 누이 시빌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5]。 이자벨은 같은 해 르노 드 샤티용의 의붓아들인 옹프로아 4세 드 토롱과 결혼했다. 이때 살라딘은 결혼식이 열리고 있던 카락 성을 습격했다. 1186년, 보두앵 4세 사후 즉위한 보두앵 5세가 1년 만에 사망하자, 시빌과 그녀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6]

1190년 가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7] 이복 여동생 이자벨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1세는 바리앙 디블랑과 재혼한 이자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의 협력을 받아 이자벨과 옹프로아의 결혼 무효를 인정받고[7], 1190년 11월[8]에 이자벨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다만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1192년, 콘라트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 직전 암살교단에 의해 티르에서 암살되었다[10]。 이자벨은 임신 중이었지만, 리처드 1세의 제안에 따라 그의 조카인 샹파뉴 백작앙리 2세와 결혼했다[9]。 이자벨은 앙리 2세와 결혼 후, 훗날 예루살렘 여왕이 되는 마리아를 낳았다.

1197년 9월, 앙리가 아콘에서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이자벨은 키프로스 왕국 왕 아모리 드 뤼지냥과 네 번째 결혼을 했다[11]。 아모리는 기 드 뤼지냥의 형이었고, 이 결혼으로 예루살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라고도 불린다)[11]

1205년, 이자벨은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이사벨은 예루살렘의 아모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 콤네네 사이에서 1172년에 태어났다.[1] 아모리 왕은 1174년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보두앵 4세가 왕위를 이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3] 병든 왕의 왕위 계승을 위해 그의 누이 예루살렘의 시빌라 여왕은 1176년 몽페라토의 기욤 백작과 결혼했지만, 그는 7개월 만에 사망했다.[4]

1180년 10월, 보두앵 4세는 이사벨을 샤티용의 레날드의 의붓아들인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켰다.[5] 이사벨은 험프리의 어머니인 밀리의 스테파니에게 교육받기 위해 케라크 성으로 보내졌고, 스테파니는 이사벨이 나블루스에서 어머니와 계부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5]

보두앵 4세는 뤼지냥의 기를 섭정에서 해임하고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여, 기의 의붓아들(시빌라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인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를 1183년 11월 20일에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6]

2. 2. 첫 번째 결혼

긴 천을 두른 젊은 남자가 오른쪽에 여자, 왼쪽에 사제를 두고 있다
이사벨라와 첫 번째 남편 토론의 험프리 4세의 결혼


1183년, 이사벨은 르노 드 샤티용의 의붓아들인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정략결혼을 했다.[5] 결혼식은 케라크 성에서 열렸는데, 살라딘이 이 성을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5] 보두앵 4세는 험프리 4세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사벨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7] 이후 1190년 11월, 이사벨은 콘라트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8]

2. 3. 왕위 계승 분쟁

1185년 이복 오빠 보두앵 4세가 나병으로 후계자를 낳을 수 없게 되자[4], 1183년에 이복 누이 시빌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5]。 같은 해 이자벨은 옹프로아 4세 드 토롱과 결혼했으나, 살라딘이 결혼식이 열리던 카락 성을 습격하기도 했다. 1186년, 보두앵 5세가 즉위 1년 만에 사망하면서 이복 누이 시빌과 그 남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6]。 그러나 1190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7], 이복 여동생 이자벨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1세는 이자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와 바리앙 디블랑의 협력을 받아 이자벨과 옹프로아의 결혼 무효를 인정받고[7], 1190년 11월[8] 이자벨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2. 4. 두 번째 결혼

1190년 가을, 시빌과 기 사이의 두 딸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이사벨 1세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7] 이사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와 이벨린 가문의 바리앙은 몬페라토 후작콘라트 1세의 협력을 받아 이사벨과 옹프로아 4세 드 토롱의 결혼 무효를 주장했다.[7] 그들은 이사벨이 어릴 때 강제로 결혼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성공하여, 이사벨은 옹프로아와 이혼하고 1190년 11월[8] 몬페라토의 콘라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콘라트는 이 결혼을 통해 예루살렘 왕위를 주장했으나, 기 드 뤼지냥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2. 5. 콘라트의 암살과 세 번째 결혼

1192년 4월, 리처드 1세는 성직자와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콘라트를 지지하는 결정을 받아들였다. 리처드는 조카인 샹파뉴 백작 앙리 2세를 보내 콘라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10] 콘라트와 이사벨아크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192년 4월 28일, 콘라트는 암살단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10] 콘라트가 암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벨은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샹파뉴 백작 앙리 2세와 결혼했다.[9] 앙리 2세와의 결혼은 리처드 1세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사벨은 콘라트와 결혼생활 도중 임신한 상태였으며, 앙리 2세와 결혼 후 몬페라토의 마리아를 낳았다.[11] 앙리와 이사벨 사이에는 세 딸, 마가렛, 앨리스, 필리파가 태어났다. 앙리는 1197년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다.[11]

2. 6. 앙리 2세의 죽음과 네 번째 결혼

1197년 9월, 앙리 2세가 아콘에서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자,[11] 이사벨은 기 드 뤼지냥의 형제인 키프로스의 아모리와 네 번째 결혼을 했다.[11] 아모리는 1194년에 동생 기의 죽음으로 키프로스 왕국 왕이 되었고, 이 결혼으로 예루살렘 왕국 왕을 겸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라고도 불린다).[11]

2. 7. 죽음

1205년, 이사벨은 사망했고, 딸 마리아가 예루살렘 여왕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이사벨 1세는 네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배우자자녀
토론의 험프리 4세없음[1]
몽페라의 콘라드마리아 (1192–1212, 예루살렘 여왕)
샹파뉴의 앙리 2세
키프로스의 아모리



앨리스와 필리파는 티보 4세에 대항하여 샹파뉴 백작위를 주장하며 경쟁했다.[2]

3. 1. 첫 번째 남편: 토론의 험프리 4세

이사벨 1세는 1183년 옹프로아 4세 드 트롱과 결혼했지만, 이후 해소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

3. 2. 두 번째 남편: 몬페라토의 콘라트

콘라트와의 두 번째 결혼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

  • 마리아 (1192–1212) -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의 뒤를 이음)[1]

3. 3. 세 번째 남편: 샹파뉴의 앙리 2세

콘라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샹파뉴 백작앙리 2세는 아크레로 돌아와 있다가 티레로 급히 돌아왔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조카인 앙리는 바론들과 티레 시민들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3] 이사벨은 임신 중이었고 아들을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앙리는 망설였다고 한다.[4] 앙리와 이사벨의 약혼은 콘라트의 죽음 이틀 후에 발표되었다.[5] 결혼식은 1192년 5월 10일 아크레에서 거행되었다.[6]

이사벨과 콘라트의 아이인 몬페라토의 마리아는 1192년에 태어났다. 그 후 앙리와 이사벨은 세 딸을 낳았다.

  • 마리 (요절)
  • 앨리스 (1195/96년 - 1246년) - 키프로스 왕 위그 1세,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5세, 라울 드 소아송과 결혼
  • 필리파 (1197년경 - 1250년) - 에라르 드 브리엔-라메뤼와 결혼


앨리스와 필리파 자매는 모두 출생과 함께 샹파뉴 백작위를 계승한 어린 사촌 티보 4세에 대항하여 샹파뉴 백작위를 청구하며 다퉜다.

3. 4. 네 번째 남편: 아모리 2세

이사벨라는 기 드 루시냥의 형제인 키프로스의 아모리와 네 번째 결혼을 했다.[1] 1198년 1월 아크레에서 예루살렘의 왕과 여왕으로 함께 대관식을 올렸다.[1]

이 부부는 슬하에 시빌라(1198년 출생), 멜리센데(1200년 출생), 아들 아모리(1201년 출생)를 두었다.[1]

  • 시빌라 (1198년 10월–11월 – c. 1230 또는 1252):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와 결혼했다.
  • 멜리센데 (c. 1200 – 1249년 이후): 1218년 1월 1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와 결혼했다.
  • 아모리 (1201 – 1205년 2월 2일, 아크레):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아모리 왕은 1205년 아내보다 4일 먼저, 아들이 죽은 직후 흰 숭어에 의한 식중독으로 사망했다.[1]

4. 대중문화 속의 이사벨 1세

이사벨은 소설에 몇 번 등장하지 않지만, 그레이엄 셸비의 소설 《어둠의 명성을 지닌 기사들》(1969)과 그 속편 《헛된 의도의 왕들》(1970)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셸비는 험프리와의 결혼을 이상화하여 그들을 낭만적인 젊은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어 이사벨이 콘라드에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는 가학적인 학대 관계를 묘사하는데, 이 자극적인 묘사는 어떠한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셸비는 이사벨이 그의 학대에 대한 복수로 콘라드의 살해를 계획했으며, 그녀를 정신적으로 마비되고 헨리에 대해 무관심한 인물로 묘사한다.[1]

앨런 고든의 미스터리 소설 《예루살렘의 과부》(2003)에서 이사벨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콘라드와의 결혼을 좀 더 동정적으로 그린다. 그녀는 버릇없고 허영심 많은 젊은 여성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성장한다. 너무 늦어서야 그녀는 남편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살해와 이후 헨리의 죽음은 영웅인 바보 테오필로스(페스테)에 의해 조사된다.[1]

샤론 케이 펜먼의 《바다 건너 땅》에서 이사벨은 아이와 젊은 여성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1]

참조

[1] 서적 The Crusader World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 문서 Lignages d'Outremer, Le Vaticanus Latinus 7806, El parentado del conte de Campagna 7
[3]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4]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5]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6]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7]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8]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9]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10]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11] 문서 A.ジョティンシュキ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